「제9차 콜로키움: 한사군, 식민사학 프레임의 문제」 후기
관리자 2015-12-10 16:08 1757
「제9차 콜로키움: 한사군, 식민사학 프레임의 문제」 후기
나유정(한국외대 석사과정)
일시: 2015년 11월 25일(수) 오후 6시~8시
장소: 경희대학교 문과대학 309호
주최: 경희대학교 인문학연구원 부설 한국고대사·고고학연구소
주관: 부설 한국고대사·고고학연구소 웹진팀(젊은 역사학자 모임)
1주제: 한사군 재한반도설은 식민사학의 창작인가?
발표: 위가야(성균관대 사학과 박사수료)
2주제: 해방 이후의 낙랑군 연구와 민족주의
발표: 안정준(연세대 사학과 박사수료)
자유토론
1. 콜로키움 발족 배경
지난 역사학대회에서는 과거 역사교과서의 고대사서술에 관한 발표가 있었다. 고대사를 이상적으로 서술하려는 경향은 ‘일본의 황국사관’을 연상하게 한다. 이는 과거 유신정권이 민족주체성을 강조하였던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명치유신이후 “국체관념의 확립과 국민사상의 함양”을 강조했던 ‘일본의 황국사관’과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최근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다고 표기한 동북아역사지도가 ‘식민사관’이라는 ‘지적’을 받아 편찬에 난항을 겪고 있다. 한나라의 군치가 한반도에 있었다는 것은 식민지와 다를 바 없는 것이며 한반도가 아닌 요동에 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과연 고대사를 서술함에 있어 무엇이 ‘식민사관’인 것일까.
2. 콜로키움 진행순서
2015년 11월 25일, 경희대 인문학연구원 부설 한국 고대사-고고학연구소의 주최로 열린 이번 콜로키움은 <한사군, 식민사학 프레임의 문제>라는 타이틀로 진행되었다. 비가 오는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학부생들을 비롯하여 많은 선생님들이 참석해 자리를 빛내주셨다. 강의실에 빈자리가 거의 없어졌을 때 즈음 조인성 선생님께서 포문을 열어주셨다.
첫 번째 발표는 ‘한사군 재 한반도설은 식민사학의 창작인가?’ 라는 제목으로 위가야(성균관대 박사수료) 선생님께서 맡아주셨고 다음 발표는 ‘해방 이후의 낙랑군 연구와 민족주의’라는 명제로 안정준(연세대 박사수료) 선생님께서 진행해 주셨다.
1) ‘한사군 재 한반도설은 식민사학의 창작인가?’-위가야 (성균관대 박사수료)
위가야 선생님은 과연 한반도에 한사군이 있었다는 사실이 식민사학의 잔재인가? 하는 문제제기로 일제시기 이전의 연구는 어떻게 진행되었었는지를 살펴보았다. 시작으로 현재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진행되고 있던 역사지도편찬에 관한 이덕일의 견해를 제시했다. 이덕일은 현재 한국사학계가 중국역사를 그대로 차용해 역사를 기술하고 있을 뿐 아니라 과거 일제의 식민사학적 잔재이자 중국 동북공정의 뿌리인 한사군재한반도설을 주장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과연 한사군에 관한 연구는 일본에 의해 처음 시작된 식민사학의 창조물인 것일까.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다는 것을 처음 언급한 것은 일본도, 중국도 아니다. 이미『고려사』지리지‧『세종실록』‧『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낙랑군은 평양일대, 임둔군은 강릉일대로 비정하고 있었다. 이후 조선 중기 문신인 한백겸(韓百謙)에 의해 편찬된『동국지리지』에서 본격적으로 연구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일본인 하야시 다이스케(林泰輔)가 1892년 『조선사』를 통해 조선의 역사를 타율성론에 입각하여 기술하기 시작했고 비로소 1912년에 이르러 『조선통사』에서 ‘한의 무제가 땅을 식민’이라는 표현으로 한사군을 서술했다. 이후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를 찾기 위해 세키노 다다시(関野貞)와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총독부의 명으로 조선에서 고적조사를 실시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지 모르는 척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한사군 재 한반도설을 식민사학이라고 말하는 이는 기본 사료파악과 연구사 정리가 되지 않은 채 자신의 견해를 주장하고 있다. 단편적으로 담기양의 『중국역사지도집』에서 고구려와 현도군이라는 표기를 스스로 혼동하여 ‘고구려“군”’이라고 잘못 읽은 것을 보아도 사료를 대하는 수준을 짐작해 볼 수 있었다.
2) ‘해방 이후의 낙랑군 연구와 민족주의’-안정준 (연세대 박사수료)
안정준 선생님은 현재 낙랑군 연구에서 식민사관을 강조하는 견해들이 사실은 학계 연구 성과에 대한 이해의 부족으로 인해 정확한 파악 대신 왜곡을 하고 있다는 문제를 제기하며, 실제 연구가 해방이후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었는지를 살펴보았다. 현재까지 연구가 진행되어온 시점에서 낙랑군의 위치비정 논의는 얼마만큼의 가치를 갖는 것일까.
앞선 발표에서 살펴본 것처럼 일제강점기 이전에 한사군의 위치는 어느 정도 가닥이 잡힌 상태였다. 이후 1910년 이래로 조선총독부 주도의 고고학 조사를 통해 물질적인 증거가 이를 뒷받침했다. 특히 대동강 유역에서 발견된 낙랑토성의 존재는 괄목할만한 것이었고 이 낙랑치소를 중심으로 낙랑고분들이 발견되었다. 일제시기에만 발굴된 낙랑고분은 70기이며 90년대까지 북한이 발굴한 낙랑고분은 3000여기에 이른다. 더욱이 90년대 북한에서 발견된 ‘낙랑 호구부 목간(BC4)’의 존재가 최근 한국에 알려진 것은 획기적인 것이었다. 위와 같은 물질자료의 확보를 통해, 해방이후 낙랑군 연구는 조선시대 전후 낙랑군의 위치를 비정하는 기초적인 연구에서 한 발짝 나아갈 수 있었다. 즉 위치 비정에서 나아가 낙랑군의 지배구조와 군현지배의 성격 문제로 심화되었다.
낙랑군의 지배층이 한인이었는지, 고조선계 토착민이었는지에 관한 연구가 그 중심이다. 정백동 2호분은 낙랑군 부조현 현장을 지냈던 고상현의 무덤인데 이를 통해 고조선 토착세력이 낙랑군의 지배세력임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이는 지배층이 한인이라고 보는 일본의 견해에 반대된 것으로 본질적인 의미의 식민사학을 반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연구는 중원왕조와 낙랑국의 관계는 어떠했는지, 교류에 있어 낙랑국의 역할은 어떠했는지 (한반도의 여러 정치체들이 중국문화를 수용하는 창구로서의 기능을 하였는지)에 관하여 논하는 방향으로도 연구가 진행되었다.
3)종합토론
종합토론에서는 전체적 내용의 동의하에 개선했으면 좋을 점이 제시되었다. 그리고 윤용구(인천도시공사) 선생님에게서 호구부목간에 관한 북한자료를 처음 발견했을 당시의 여담을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다.
3. 향후 방향과 소감
두 발표는 한사군‧낙랑군에 관한 연구가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지를 설명해주었다. 이를 통해 연구사적 흐름에서 ‘식민사학’이라는 ‘지적’이 과연 논의할 만한 가치를 갖는 것 인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과연 우리는 광복을 맞이한 지 70년이 지금까지도 일본의 식민지 마케팅에 종속되어 있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마케팅의 여파인가.’에 관한 답도 스스로 내려 볼 수 있었다. 한국고대사학회에서는 향후에 시민강좌를 통해 한국고대사에 관한 합리적인 이해를 도와줄 계획이 있다고 한다. 이번 콜로키움 역시 고대사가 대중에게 다가가는데 있어 초석을 다지는 작업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다만 과거의 영토와 낙랑군의 위치에만 집착하는 것이 실제로 전근대적이며 일제 식민사관‧중국 동북공정과 다르지 않은 것임을, 모두가 공감할 수 있도록 알리는 효과적 방식에 대해서 숙려해볼 필요가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