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만의 식민사학 - 법정으로 간 임나일본부논쟁 2
관리자 2015-11-17 22:20 2058
그들만의 식민사학 - 법정으로 간 임나일본부논쟁 2
가톨릭대학교 강사 장미애
식민사학자 만들기 - 왜곡과 비난
김현구의 임나일본부론에서 특징은 임나일본부의 주체를 왜가 아닌 백제로 보고 있는 점이다. 즉 일본서기에 전하는 임나일본부 관련 기사의 대부분은 백제가 주체로 서술되어 있는 만큼 임나일본부는 가야와 왜의 관계 속에서 파악할 것이 아니라 백제와 가야의 관계에서 파악해야 함을 강조한다. 그렇기 때문에 ‘임나일본부’라는 용어 자체에 문제가 있으며, 그 성격을 통해 본다면 ‘임나일본부’라기 보다는 ‘백제의 임나 경영’이 보다 알맞은 표현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논리를 바탕으로 김현구는 임나일본부를 백제가 가야 지역에 세운 백제군사령부로 이해하고 있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임나일본부에서 왜의 역할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이덕일의 김현구에 대한 비판은 김현구의 논리 자체를 뒤집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안의 식민사관』 339쪽에서 이덕일은 김현구가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을 완성한 스에마쯔의 임나일본부설을 비판하지 않고 있음을 근거로 김현구를 비판하고 있다.(이덕일, 2014, 『우리 안의 식민사관』, 만권당, 339~340쪽.) 그러나 이어지는 김현구의 논지를 보면 오히려 스에마쯔의 주장에 대해 강한 반론을 내세우며, 스에마쯔가 야마토정권이 한반도 남부를 200년간 지배했다는 논리를 만들어내기 위해 사용하였던 ‘임나일본부’라는 용어 자체도 사용하지 말아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 즉, 스에마쯔가 야마토정권의 한반도 남부경영을 전제로 ‘임나일본부’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하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결론지은 만큼 야마토 정권이 실제로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임나일본부’라는 기구의 존재는 부차적인 것으로 야마토 정권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는가에 대해 집중하지 않으면, 언제든 변형된 한반도 남부경영론이 등장할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김현구, 2010,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창비, 21~23쪽.) 이는 김현구가 스에마쯔의 논리를 부정한 것을 넘어 ‘임나일본부’라는 용어에 집착할 경우 생길 수 있는 또 다른 문제까지 제시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김현구의 임나일본부에 대한 인식에 대해서는 일본인 학자들도 일본이 아닌 백제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보고 있다. 대표적으로 스즈키 히데오(鈴木英夫)는 김현구가 그의 박사 논문인 『大和政權의 對外關係硏究』에서 ‘임나일본부’를 백제가 가야지역 통치를 위해 설치한 기관인데, 『일본서기』가 마치 왜 왕권의 기관인 양 개찬하였다고 본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스즈키 히데오(鈴木英夫), 김기섭 역, 1994, 「가야·백제와 倭 -‘임나일본부’론」『고대 한일관계사의 이해 - 倭』, 이론과 실천, 299쪽).)
한편 이덕일의 비판 논리 중 일관된 것 하나가 『일본서기』 인용 문제이다. 이덕일은 김현구가 역사서의 기초인 기년(紀年), 즉 연대부터 맞지 않는 역사서인 『일본서기』의 시각으로 한일 고대사를 본다고 비판하고 있다.(이덕일, 2014, 앞의 책, 341쪽.)
『일본서기』는 천무조(天武朝)에 편찬이 시작되어 720년 완성된 일본 최초의 관찬사서이다. 이 시기 일본은 대보율령(大寶律令; 701)과 양노율령(養老律令; 718)의 반포 이후 일본에서 율령천황제국가, 즉 천황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통치 국가가 완성되어 가던 시기였다. 이 과정에서 천황 통치의 정당성과 유구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편찬된 것이 『일본서기』였다. 『일본서기』는 대내적으로는 천황-신료 관계를 명확히 하는 것으로 천황 중심의 율령 국가에 조직·편성되어 있는 제 씨족이 천황에 대해 봉사하는 연원을 계보적으로 주장하기 위한 목적에서 편찬되었다. 대외적으로는 한반도 여러 나라 및 일본열도 내의 이적(夷狄)을 번국(藩國)·조공국(朝貢國)으로 위치지음으로써 천황(天皇)-번신(藩臣)의 관계를 형성하여 천황중심적 이념을 명확히 하기위하여 편찬된 것이다.(이상 『일본서기』의 사료적 성격에 대해서는 연민수, 1998, 『고대한일관계사』, 혜안, 20쪽 참고.)
이러한 사료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고대 한·일 관계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일본서기』는 매우 중요한 사료이다. 특히 6~7세기 한·일 관계는 『일본서기』의 기록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점에서 이를 무시하고는 연구가 이루어질 수는 없다. 때문에 대부분은 연구자들은 『일본서기』가 가지고 있는 한계를 분명히 인식하고 이를 객관적이고 엄격한 비판 과정을 통해 이용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이에 더하여 한일관계를 당시의 한반도 여러 나라와 왜의 관계에 국한하여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동아시아 전체의 역사적 흐름과 비교 분석하여 살피려는 노력을 지속해 왔다.
이덕일은 김현구가 야마토 정권의 시각으로 고구려·백제·임나를 본다고 비판하면서 야마토 정권이 신라·고구려에 사신을 전혀 파견하지 않은 반면, 신라·고구려·백제는 야마토 정권의 사자를 파견하였다고 한 부분을 문제 삼고 있다. 즉, 이 논리에 따르면 야마토 정권이 한반도 여러 나라로부터 조공을 받는 상국(上國)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백제의 경우 야마토 정권이 백제에 보낸 사신은 15회인 반면, 백제는 24회에 걸쳐 사신을 보냈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 내용은 전적으로 『일본서기』에만 의존한 것이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나오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비판하고 있다.(이덕일, 2014, 앞의 책, 342~343쪽.)
이러한 문제와 관련하여 살펴볼 수 있는 것이 ‘조공’ 문제이다. 조공 문제는 전근대 동아시아 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특징적인 외교 방식의 하나로써 책봉과 함께 다루어지고 있다. 한일관계에서 나타나는 조공관계 역시 이러한 외교 방식의 하나로 이해하고 있다. ‘조공(朝貢)’ 혹은 ‘조(調)’라는 것은 『일본서기』의 천황중심적인 사관에 의해 윤색(潤色)된 표현일 뿐 그것이 실제 양국 사이의 상하(上下) 관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이는 김현구도 마찬가지이며, 때문에 김현구는 백제와 야마토 조정 사이에서 이루어지고 있던 교류를 ‘조공(朝貢)’ 혹은 ‘조(調)’라는 표현대신 ‘인적·물적 교류’라고 표현으로 설명하고 있다.
고대 동아시아에서는 인적·물적 교류가 매우 빈번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대개의 인적·물적 교류는 중국→한반도→일본열도로 이어지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는 선진문물·문화의 전파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김현구 역시 이러한 시각에서 한반도 제국과 야마토 조정 사이에서 이루어진 인적·물적 교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고대국가로 발전하고 있던 야마또 정권은 한반도 3국이나 중국이 한반도에 설치했던 대방을 통해 선진문물을 도입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구려가 낙랑(313), 대방(314)을 잇따라 멸망시키자 왜는 대중국통로가 차단되어 선진문물의 도입을 전적으로 한반도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당시 동아시아의 문화중심은 중국 남조였다. 한반도 3국 중에서 가장 활발하게 남조와 교류하던 나라는 지정학적으로 가까웠던 백제였다. … 따라서 당시 왜는 한반도 3국 중에서 백제를 파트너로 삼아 백제로부터 선진문물을 도입할 수밖에 없었다. … 당시 두 나라의 관계를 보면 백제는 야마또 정권에 선진문물을 제공하고 야마또 정권은 백제에 군원을 제공하는 관계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무엇인가 댓가를 받고 보낸 원군을 넓은 의미에서 용병이라고 할 수 있다면 … 야마또 정권과 한반도 각국과의 관계는 일본 학계가 주장하는 것처럼 임나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된 것이 아니라 백제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백제와의 관계는 특수한 용병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김현구, 2010, 앞의 책, 141~148쪽.)
위의 글을 통해 김현구가 바라보고 있는 6세기 백제와 야마토 정권의 관계를 확실히 알 수 있다. 이덕일의 비판과 같이 사신을 파견하고 조공을 바치는 것은 상국-속국의 관계 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며, 이는 백제와 야마토 정권 사이에 있었던 인적·물적 교류 관계로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적·물적 교류는 백제와 야마토정권이 각자의 필요에 의해 형성된 관계였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상국-속국의 관계로 파악할 수는 없는 것이다. 백제와 야마토정권의 관계를 이렇게 본다면 ‘야마토 정권→백제→임나’로 이어지는 복속 관계는 성립할 수가 없다.
학문적 논쟁의 과정에서 상대의 논리를 반박하기 위해 상대의 글을 분해하여 분석하는 경우는 흔한 현상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본래 글의 논리를 유지하는 수준에서 이루어져야하는 것이다. 하지만 야마토 정권과 백제와의 관계를 상국과 속국의 관계로 설정한 경우는 김현구의 논리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이는 김현구의 글을 이덕일이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내린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김현구가 사용한 인적·물적 교류라는 말은 오히려 『일본서기』가 가지고 있는 번국관(藩國觀)을 배제하기 위해 사용한 것으로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학문적 논쟁과 일방적 비난의 경계에서
이상에서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김현구와 이덕일의 법정 다툼의 원인이 된 임나일본부설 논쟁에 대하여 검토해 보았다. 이 글을 시작하며 언급하였듯 사실 학문적 논쟁이 법정 다툼으로까지 가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가 법정까지 가게 된 데에는 이것이 학문적 논쟁이 아니라 일방적인 ‘식민사학자 만들기’의 결과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이덕일의 논리는 아주 단순하다. 자신은 식민사학을 극복하기 위해 싸우는 투사로 그 대척점에 서 있는 이들(대개의 경우 이들은 이른바 주류 사학자이다)은 식민사학자로 매도하고 있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식민사관의 문제는 매우 민감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으며, 때문에 이러한 ‘식민 대 반식민’의 구도는 대중이 쉽게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함께 분노하기도 한다. 이덕일이 김현구를 비판하기 위한 논리에서 『일본서기』와 스에마쯔의 글을 지속적으로 내세우고 있는 점 역시 그 진위여부에 상관없이 ‘식민사관’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고대사는 역사학 내에서도 연구를 위한 사료의 양이 절대적으로 적은 분야이다. (이 때문에 역사적 왜곡이 더욱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위험성도 있다.) 더욱이 當代의 실상을 알 수 있는 사료는 매우 적으며, 주요 사료로 다루어지고 있는 『삼국사기』 등은 그 편찬 연대가 통일 신라가 멸망한 시점부터만 하더라도 200여 년이 흐른 뒤의 것이라는 점에서 사료적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구당서』를 비롯한 중국의 사서들과 『일본서기』 등의 일본 사서들은 자국 중심의 역사관으로 기록되었다는 점에서 이에 대한 사료 비판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 이러한 사료적 한계는 동일한 시대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각 사료를 어떻게 읽어낼 것인가에 따라 다양한 관점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어냈다. ‘임나일본부론’ 역시 이로 인해 나타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나일본부론이 가지고 있는 허구성은 이미 우리 학계에서 상당 부분 비판이 되었으며, 그 실체가 무엇인가에 대해 다양한 관점에서 접근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덕일을 비롯한 사이비 역사학자들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은 ‘위대한 우리 민족의 역사 만들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이들의 입장에서는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을 믿지 않는 행위, 『일본서기』의 사료적 가치를 인정하는 행위, 대륙의 역사를 부정하는 행위 등은 모두 ‘식민사관’에 의한 것이라고 폄훼한다. 그 과정에서 지난 수십 년에 걸쳐 축적되어 온 한국사학계의 연구 성과는 대부분 ‘식민사관’에 의해 만들어진 ‘잘못된 역사’가 되어버리고 만다. 이러한 이들의 논리는 학문적 비판이 아닌 일방적인 비난에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이들의 이러한 일방적 비난에 대해 그동안 대다수의 역사학자들은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것을 꺼렸던 것도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지난 2009년 한겨레신문을 통해 진행된 이덕일과 오항녕의 ‘이이의 십만양병설 허구론’을 둘러싼 논쟁은 매우 이례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러나 어찌 보면 그동안 역사학계의 반응이 오히려 사이비 역사학의 논리가 사실인 것처럼 보이도록 만든 것은 아닌가라는 반문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