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만의 식민사학 - 법정으로 간 임나일본부논쟁 1
관리자 2015-11-17 22:12 1976
그들만의 식민사학 - 법정으로 간 임나일본부논쟁 1
가톨릭대학교 강사 장미애
법정으로 간 임나일본부논쟁
지난 9월 16일 서울고등법원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재판이 열렸다. 김현구(고려대학교 명예교수)가 이덕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을 상대로 한 명예 훼손과 관련해 항소심 공판이 열린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된 책이 『우리 안의 식민사관』(2014, 만권당)이다. 처음 『우리 안의 식민사관』이 나왔을 때부터 김현구는 자신이 임나일본부설을 일관되게 부정해왔음을 피력하며, 이에 대한 사과가 없을 시 출판 금지 및 명예 훼손 등에 대한 법적 조치도 불사하겠다는 뜻을 밝힌바가 있다.
학문적 논쟁이 법정으로 가는 사례는 드물다는 점에서 이번 재판은 매우 이례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덕일의 변호를 맡은 박찬종 변호사는 “이 재판은 헌법에 규정된 학문과 예술의 자유 한계를 어디까지 인정하느냐를 가르는 중요한 재판이며, … 이 사건은 우리 학계에 엄존하는 임나일본부설 식민사관을 논박한 것으로 피고인의 고의성을 인정할 수 없고, 따라서 이 사건은 ‘감히’ 사건이 안 된다”(「[주목! 이 사람] 식민사관 비판하다 법정에 선 역사학자 이덕일 “현 검찰은 조선총독부 검찰인가”」, 『주간경향』1147호, 2015.09.23.)는 말로 이덕일을 변론했다. 박찬종의 말과 같이 학문적 논쟁을 법적으로 재단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그것은 ‘학문적 논쟁’일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학문적 논쟁이 아닌 이덕일의 말과 같이 ‘이론이 다른 학자 죽이기’라고 한다면(이덕일이 『우리 안의 식민사관』(2014, 만권당)에서 김현구를 비판한 부분의 제목이 ‘이론이 다른 학자 죽이기’(327~354쪽)였다.) 그 문제는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역사학을 비롯한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어떤 쟁점을 둘러 싼 논쟁은 매우 보편적인 것이다. 이러한 논쟁은 해당 분야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면서 학문의 발전을 이끌 수 있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현상이기도 하다. 역사학에서 이러한 논쟁은 ‘사료와 이론’를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과연 이덕일이 행한 김현구에 대한 비판이 이러한 학문적 논쟁의 범주에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김현구와 이덕일 사이에 문제가 되었던 임나일본부설은 사료에 나타나는 임나일본부 혹은 일본부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둘러 싼 한·일 사학계의 오랜 논쟁 거리였다. 그리고 그 논쟁에서 임나일본부에 대한 비판을 적극적으로 개진한 사람 중 하나가 김현구였다. 그런 김현구의 논리를 뒤집은 이덕일의 논리는 무엇이었을까? 이제부터 이에 대해 살펴보고 문제가 없는지에 대해 논해보고자 한다.
이덕일의 김현구에 대한 비판이 본격화된 것은 2014년에 출간된 『우리 안의 식민사관』을 통해서이다. 이덕일은 이 책의 「4장 식민사관의 생존 비법」 중 ‘4. 이론이 다른 학자 죽이기’ 편에서 최재석의 일화를 소개하며 김현구를 비판하고 있다. 그는 여기에서 ‘임나일본부설이 사실이라는 김현구’라는 제목을 달고 김현구가 임나일본부설 지지자임을 기정사실화하고 비판한다. 그 비판의 중심 논리는 김현구가 3단 논법을 쓰고 있다는 것으로 시작한다.
『우리 안의 식민사관』 중 338~345쪽에 걸쳐 제시되고 있는 김현구의 임나일본부설지지 논리는 아주 단순하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
① 한반도 남부에는 실제로 임나일본부가 있었다. ② 그런데 임나일본부는 일본의 야마토 정권이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백제가 지배했다. ③ 백제를 지배한 것은 일본의 야마토 정권이다. |
결론은? 임나일본부를 지배한 것은 백제인데, 그 백제를 지배한 것은 야마토 정권이다. 따라서 야마토 조정이 백제를 통해 한반도 남부를 통치했다. (338~345쪽) |
이덕일에 따르면 김현구는 야마토국을 백제의 상국(上國)으로 여기고 있으며, 이 때문에 백제가 상국인 야마토국에 자주 사신을 보낸 것이 된다. 이러한 논리를 전개하는 데 『일본서기』를 주요 근거로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최재석의 책 『역경의 행운』을 인용하여 김현구가 『일본서기』만을 근거로 백제를 일본의 속국으로 보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최재석은 김현구가 백제 사신을 ‘조공사(朝貢使)’라고 표현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최재석, 2011, 『역경의 행운』, 다므기, 322쪽.) 이덕일은 이 논리를 바탕으로 김현구가 백제를 일본의 속국으로 보고 있다고 단정짓고 있다.
임나일본부를 둘러 싼 논쟁
임나일본부 문제는 6세기 가야와 왜, 백제, 신라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주제이다. 때문에 일찍부터 이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연구가 이루어졌다. 특히 20세기 들어 일제의 한반도 식민지배가 본격화되면서 임나일본부는 일제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논리로서 이용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식민지배 논리는 이후 스에마쯔 야스카즈(末松保和)에 의해 정리·체계화된다. 스에마쯔에 의하면 임나일본부는 4세기~6세기까지 가야지역에 존속한 것으로 왜의 야마토 조정이 이를 거점으로 한반도 남부의 가야지역을 지배함은 물론 백제와 신라에도 정치, 군사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는 소위 ‘출선기관설(出先機關說)’로써 한동안 일본 학자들에 의해 통설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임나일본부에 대한 이러한 일본 측의 해석에 대해 김석형은 도리어 일본 열도 내 삼한 삼국 ‘分國論’을 내세우며 임나일본부 논쟁에 불씨를 당겼다. 김석형은 임나일본부는 한반도 이주민이 일본 열도 내에 세운 ‘분국’으로써 일본서기의 임나 관계 기사는 야마토 조정과 한반도 이주민의 분국인 임나일본부와의 관계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다.(김석형, 1988, 『북한연구자료선2 고대한일관계사』, 한마당, 467~486쪽.) 김석형의 이러한 주장은 그 타당성 여부와 관계없이 당시 일본 및 한국 학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이를 계기로 임나일본부의 성격에 대한 논쟁이 본격화되었다.
이후 임나일본부의 성격에 대해서는 ‘외교 관계’적 시각에서 다루어지기 시작한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가야와 왜의 관계를 중심으로 볼 것인가? 백제와 가야의 관계로 볼 것인가를 둘러싸고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있다. 특히 후자는 김현구의 ‘백제군사령부’설이 가장 대표적이다.
현재 임나일본부에 대한 논쟁에서 스에마쯔에 의해 제기된 ‘출선기관설’은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70년대 이후 지속된 연구 성과와 더불어 가야지역에서 이루어진 지속적인 발굴 성과를 바탕으로 임나일본부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연구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최근에 와서는 임나일본부를 ‘외교사신’의 입장에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임나일본부 관련 기사가 주로 백제, 신라와의 외교 교섭 기사로 이루어졌고, 임나일본부의 ‘府’의 訓이 ‘미코토모치(ミコトモチ)’로 ‘使臣’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는 임나일본부가 가야와 왜의 외교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입장을 중심으로 한 것이다.
이상과 같이 임나일본부에 대한 논의는 20세기 초반 이후 한일 양국 사학계에서 가장 중요한 쟁점의 하나였다. 그리고 김석형 이후 임나일본부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대론자 중 한 사람이 김현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현구를 임나일본부 지지론자로 지목한 이덕일의 논리는 무엇이고 과연 그것이 타당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인가? 다음에서는 이에 대해 보다 집중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2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