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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율령반포의 의미와 율령의 편찬

    관리자 2017-10-18 16:27 3050

    신라 율령반포의 의미와 율령의 편찬

     

    최경선

     

    ◎ 律令이란

    律令은 전근대 중국의 법률을 통칭하는 용어로 이해할 수 있다. 보통 律은 범죄행위에 대한 형벌을 규정한 형법에 해당하는 것으로, 令은 국가의 여러 가지 제도를 규정한 행정법규와 같은 것이라고 한다. 또 율령은 율과 영뿐만 아니라 格과 式이라는 법률체계를 포함하는 말이기도 하다. 格은 시대의 변화에 대응하여 율령을 전면적으로 개정하기 전까지의 황제의 각종 조칙을 한 데 모은 것이고, 式은 각 기관에서 일을 처리하는 세칙, 규격에 관계된 규정이다. 이 두 가지 법률형식은 율과 영을 보완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설명은 맞는 것이기도 하고, 틀린 것이기도 하다. 隋와 唐이라는 특정 왕조, 시대에 국한한다면 맞는 말이지만, 그 전후 중국의 법제사를 보자면, ‘율령격식’을 보편적인 제도로 보기 어려울 만큼 법제는 끊임없이 변화하였다.

    西周 대부터 성문법 성립 이전의 춘추기에는 판례법과 치도의 윤리적 규범, 고래의 간략한 전범을 그 근거로 삼아 법이 집행되었다.1) 전국 이후 秦, 漢代를 거치면서 매우 세밀하고 방대한 성문법 조항이 마련되었고, 기본적으로 성문법에 의거하면서 그 부족한 부분을 판례법으로 보완하는 방식으로 법 집행이 이루어졌다.

    秦의 상앙이 ‘法’을 ‘律’이라고 개칭하기 전까지 중국에서는 법률을 ‘律’이 아니라 ‘法’이라고 표현하였고, 진한대에 令도 존재했지만, 후대와 그 의미가 전혀 달랐다. 이전의 천자[前主]가 제정한 것이 ‘律’이고, 후대의 천자[後主]가 詔令을 내리면, 이를 가감하여 기존 律에 있지 않은 부분을 ‘令’이라고 하였다고 한다.2) 이때까지만 해도 律이 형법만을 의미하지 않고, 戶律이나 田律처럼 각종 문물제도에 관한 법규를 망라하는 것이었다. 서진대(265~316)에 이르러서야 律과 令이 분리되어 율은 형법을, 영은 행정법규를 의미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율령격식이라는 형식의 법률제도는 隋唐대에 이르러 비로소 마련되었지만, 이러한 법률체계는 당 말까지만 지속되었다. 중국의 법체계가 끊임없이 변화하였다는 점은 신라의 율령을 재구성할 때 참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법흥왕 7년(520) 봄 정월, 律令을 頒示하였다.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삼국사기󰡕에는 위와 같이 율령 반포에 관해 단편적인 기사만을 전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때의 율령이 어떠한 내용과 형식을 가지는지 알기 어렵다. 과연 법흥왕대에 반포된 율령은 어떤 것이었으며, 율령의 반포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 지금까지의 율령연구 - 律令體制

    앞에서 율령을 전근대 중국의 법률을 가리키는 용어라고 하였지만, 고대사 연구에서 율령은 보다 많은 함의를 지닌 학술용어로 사용되어 왔다. 고대사에서 ‘율령반포’는 ‘고대국가’3)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기준 내지 요소로 여겨졌는데, 이러한 인식은 일본에서의 일본고대사연구로부터 비롯되었다.

    일본 고대사 연구에서는 7세기 무렵 唐의 율령을 받아들여 중앙집권적 체제를 구축하면서 고대국가가 성립되었다고 보았기 때문에 율령이 고대국가를 이루는 중요한 요소로 인식되었다. 일본이 받아들인 당의 율령(율령격식)은 율령의 모범으로 인식되었으며, 일본이 단순히 율령이라는 법체계만이 아니라 율령에 규정된 당의 정치, 사회, 경제, 군사 제도 등 국가의 통치체제 전반을 받아들였다고 보았기 때문에 ‘율령체제’, ‘율령국가’라는 말을 사용한다.

    즉, 양천제에 입각한 신분제, 선거에 의한 관인 등용, 균전제에 입각한 조용조 수취제도, 부병제의 군사제도 등을 받아들여 1인의 군주가 관인제를 통해 公地公民을 지배하는 것을 율령체제로 이해하고, ‘율령’이란 율령격식의 체제를 갖추면서 이러한 내용들을 모두 포괄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렇게 규정된 율령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중앙집권적인 고대국가가 성립했느냐 안 했느냐를 판단하였다.

    일본인 연구자들이 법흥왕대 율령반포에 대해서 부정적이었던 것은 율령반포 자체를 부정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때의 ‘율령’이 당의 율령과 같은 형식과 내용을 갖춘 ‘율령’이 아니며, 그 때문에 신라가 당과 같은 강력한 왕권 중심의 집권적인 고대국가를 이루지 못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한국의 연구자들은 일본 연구자들이 설정한 ‘율령’의 개념을 부분적으로만 수용하여 사용하였다. 율령을 대개 중국왕조로부터의 수입법이며, ‘율’과 ‘영’이라는 이름을 가진 법전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일본인 연구자들의 주장에 대해 반대하는 주장 – 삼국은 중국으로부터 율령을 수용하여 반포하고 중앙집권적인 고대국가를 성립시켰다 - 을 펼치다보니, 그 논점이 맞지 않았다.

    신라에서 반포된 율령은 기본적으로 중국왕조의 법체계를 수용한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율령 연구에서는 율령의 母法 즉 어느 나라(중국의 위진남북조시기의 왕조나 고구려)의 율령을 도입하였는지 그 계통을 밝히는 데 초점이 맞춰졌고, 더불어 율과 영에 속한 편목의 구성을 복원하는 것을 중요한 작업으로 삼았다. 이러한 연구는 일본의 율령 연구에 대한 제대로 된 반박이 될 수 없었다. 그리고 신라율령 자체의 성립과 체계화과정을 내부의 논리로 설명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최근에 들어서 외래법과 고유법이라는 틀을 벗어나 금석문 자료를 활용하여 율령 반포 전후한 시기에 신라사회에서 법이 수찬되는 과정, 법이 운용되는 방식, 법에 반영된 국가체제 등 그 내부를 살피기 시작하였다.

     

    ◎ 율령에 반영된 사회 – 중앙집권적인 국가체제의 성립?

    율령의 반포란 곧 왕권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인 국가체제의 성립을 의미하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 크게 두 가지 점을 중심으로 문제제기가 이루어졌다.

    중앙지배체제와 관련하여 관등제를 통해서, 그리고 지방지배체제와 관련하여 524년에 세워진 「울진봉평신라비」(이하 봉평비)에 보이는 ‘노인법’을 통해서 법흥왕대 반포된 율령의 성격에 대한 검토가 이루지고 있는 것이다.

    신라의 경위와 외위제는 보통 520년 율령 반포와 더불어 확립된 것으로 이해되며, 이 제도를 통하여 중앙의 지배층과 지방의 수장층이 왕권을 중심으로 일원적으로 편제되었다고 본다. 율령반포를 전후한 시기에 세워진 「영일냉수리비」(503년, 이하 냉수리비)와 「봉평비」를 비교하며 이 문제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두 비에는 共論을 통하여 敎를 내리는 교사집단이 등장한다. 매금왕(=마립간)과 갈문왕을 비롯하여 각 부의 대표자들이 교사집단을 구성하였다.

     

     

    소속 부

    인명

    지위(관등)

    a

    沙喙

    至都盧

    葛文王

    b

    斯德智

    子宿智

    尒夫智

    只心智

    阿干支(6)

    居伐干支(9)

    壹干支(2)

    居伐干支(9)

    c

    本彼

    斯彼

    頭服智

    暮斯智

    干支

    干支

     

     

     

     

     

    소속 부

    인명

    지위(관등)

    a

    喙部

    沙喙部

    牟卽智

    徙夫智

    寐錦王

    葛文王

    c

    本彼部

    岑喙部

    □夫智

    美昕智

    干支

    干支

    b

    沙喙部

    喙(部)

    沙喙部

    而粘智

    吉先智

    一毒夫智

    勿力智

    愼肉智

    一夫智

    一尒智

    牟心智

    十斯智

    悉尒智

    太阿干支(5)

    阿干支(6)

    一吉干支(7)

    一吉干支(7)

    居伐干支(9)

    太奈麻(10)

    太奈麻(10)

    奈麻(11)

    奈麻(11)

    奈麻(11)

     

     

    봉평비의 노인법함안 성산산성 목간의 노인

     먼저 「냉수리비」를 살펴보면, 관등보다는 소속 部가 우선해서 사훼-훼-본피-사피의 순으로 기재되어 있다. 경위가 정비되지 않은 상태는 아니나, 부의 서열이 더 우선시 되었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율령반포 이후에 세워진 「봉평비」에서는 소속 부보다는 경위를 기준으로 하여 교사집단이 기재되어 변화된 모습이 보인다. 분명 율령이 반포되면서 경위제가 제도로서 확립된 상황이 반영된 것이지만, 여전히 한계가 있었다.

    550년 무렵에 세워진 「단양적성비」에서는 왕이 단독으로 敎를 내린 것으로 나타나나 524년의 「봉평비」까지만 해도, 왕도 소속 부를 밝히며, 부의 대표자를 비롯한 신료들과 함께 공론을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교사집단의 구성을 살펴보면, 사훼부와 훼부 출신의 경위 소지자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지만, 동시에 干支라는 경위가 아닌 위호를 지닌 본피부나 사피부, 잠훼부의 대표자도 있었다. 이들은 경위제의 밖에 존재하는 자들이었다. 이들의 존재을 통해서 524년까지 경위제가 6부 전체에 적용되지 않고, 훼부, 사훼부에 한정되어 적용되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4)

    훼부, 사훼부를 제외한 4개 부의 干支보다 지위가 낮은 지배층들이 17관등으로 편제되지 않고, 이전부터 있어왔던 독자적인 위계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는지는 확신하기 어렵다. 어쨌든 520년 율령 반포로 확립된 경위제는 왕권 하에 신라 왕경의 지배층 전체를 일원적으로 서열화한 것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음으로 노인법이 기록되어 있는 「봉평비」는 경북 울진 지역에 세워진 비로 524년 무렵에 ‘奴人’과 관련하여 일어난 사태에 대한 신라 6부의 공론과 그 처리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이 비에 나오는 ‘奴人’은 6세기 초까지 고구려가 차지하였던 지역을 신라가 정복하면서 그 지역 주민을 집단적으로 예속민화한 것으로 이해한다. 노인은 신라의 율령에 의한 지배받는 민(公民)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노인만을 대상으로 하는 ‘노인법’에 의해 차별적인 지배를 받았던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런데 520년 율령반포를 계기로 점차 ‘公民’으로 전환되어 ‘노인’은 결국에는 소멸되는 것으로 추정되어 왔다.

    하지만 최근 연구에서 지적되었듯이5) 율령 반포 이후에도 노인법이 존재하였고, 문제를 일으킨 노인촌에 대하여 노인법에 따라 처리하라는(其餘事種種奴人法) 조치가 취해졌듯이 노인법은 여전히 법으로서 효력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노인법은 법흥왕대 반포된 율령에 포함된 법제로 보아야 할 것이다. 「봉평비」 이후 6세기 중반에 작성되었을 함안 성산산성 목간에도 그 의미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奴人’이라는 용어가 보인다는 점, 그리고 통일기 즈음에 ‘部曲’이 두어졌던 점을 고려하면,6) 지방민에 대한 지배방식이 다양하였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

    관등제의 경우에서 보자면, 결국에 신라 중앙의 지배층들이 경위제로 모두 편제되었다는 점에서 6세기 전반에 신라가 중앙집권화를 추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율령 반포 그 자체를 중앙집권체제와 일원적인 지배체제의 성립으로 보기는 어렵다. 율령이 반포될 시점에는 경위제의 밖에 존재했던 지배층이 존재하였고, 또 지방지배에 있어서는 균질적인 지배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520년에 반포된 율령은 당시 신라의 중앙과 지방의 지배체제를 그대로 반영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 법의 운용과 수찬

    6세기 초반에 세워진 「포항중성리비」(이하 중성리비),7) 「냉수리비」는 비가 세워진 지역과 관련된 분쟁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공론을 통해 판결을 내리고 선포한 ‘敎’의 내용을 담고 있다. 「중성리비」에서는 두 명의 阿湌 관등 소지자가 敎를 내리고 있고,8) 분쟁의 대상이 된 무언가를 돌려주는 조치가 취해지고, 이를 다시 문제 삼을 경우 중죄를 준다는 경고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냉수리비」에서는 지도로 갈문왕을 비롯한 7명의 중앙의 대표자들이 ‘前世二王’(실성마립간, 눌지마립간)의 敎를 증거로 삼아 분쟁을 해결하고 역시 분쟁을 다시 일으키지 말 것을 경고하고 있다.

    이러한 두 비를 통해서 ‘敎’가 곧 법과 같은 효력을 가지고 있으며, 적어도 실성마립간대인 5세기 초반부터 그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敎가 일회적인 조치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이는 「냉수리비」에서 ‘전세이왕’의 교를 증거로 삼아 다시 교를 내리고 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신라육부의 지배층들이 공론을 통해 결정하여 내린 ‘교’는 문서화되어 축적되고, 판례처럼 활용되었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

    율령반포 이후에 세워진 「봉평비」에서 법을 운용하는 방식은 이전과 달랐다. ‘其餘事種種奴人法’이라고 하여 노인촌에 대한 처리를 ‘노인법’에 의거하여 할 것을 명시하고 있고, 동시에 노인촌의 대표자들에게는 杖刑 60대, 100대라는 형률을 적용하였다. 성문화된 법을 적용하면서, ‘노인법’으로 처리될 수 없는 사안에 대해서는 別敎를 내렸다. 「단양적성비」(550)에서도 ‘國法’과 ‘赤城佃舍法’을 운운하면서 더불어 교를 내리고 있는 것도 비슷하다. 율령이 반포된 이후 판례 기준에서 성문화된 법 조문 기준으로 변화하였다고 할 수 있는데, 성문법을 보완하는 차원에서 ‘교’를 통해서도 사안이 처리되는 방식은 지속되었다.

    최근 연구를 보면, 중국 율령을 전면 수용하여 신라의 전통적인 법체계를 대체하지 않고, 기존의 판례법에 기초하여 성문법으로 전환된다고 보는 데에는 크게 이견이 없다. 그러나 체계적인 구성을 갖춘 법전이 편찬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견해가 나뉜다.

    우선, 기존의 교령, 판례를 집성하는 데 그치지 않고, 중국식 율령의 형식을 빌려 사안 별로 분류하여 이를 한 수준 추상화, 일반화시켜 법률조항으로 만들었다고 보는 입장이 있다.9) 이 입장은 중앙의 부가 간여한 사건의 경우, 부의 공론을 통해 판결을 내리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보편성을 가진 법률조항이 제정될 필요가 있었다고 보며, ‘율령’이라는 표현이나 고구려나 중국과의 교류를 근거로 중국의 제도를 수용했을 가능성을 중시한 것이다.

    한편으로 법흥왕대 율령을 단행법10)이 집성, 정리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11) 「봉평비」에 나타난 법령 반행 양상이 「냉수리비」 단계와 별 차이 없이 여전히 공론에 의해 결정된 사안을 규정화하여 반행하는 형식을 유지하였던 점을 근거로 든다. 공론에 의한 사안 결정이 성문화되고, 성문화된 규정들이 해당 사안을 벗어나 일반화되면서 영구적인 효력을 지니는 법으로 기능하게 되고, 이어 이러한 단행법(노인법, 전사법)들이 법전으로 집성되는 과정을 거쳐 율령이 수찬되었다고 이해하였다.

    전자의 입장에서는 형법으로서의 율과 행정법규로서의 영의 구분이 이루어졌다고 보는 데 반해, 후자의 입장에서는 중국의 진한대의 율처럼 ‘법’이라는 형식으로 각종 사안과 문물제도에 관한 법규를 망라하던 상태였다고 본다.

    최치원은 893년에 찬술한 「봉암사 지증대사탑비」에서 법흥왕대 율령 반포에 대해 ‘剬律條’라고 표현하였다. 이 문구에서 주의해야 할 바는 ‘剬’이라는 글자이다. ‘剬’은 ‘가지런히 자르다. 가다듬다. 고치다’ 등의 뜻을 가진다. 이미 있어왔던 잡다한 조문들을 한데 모아서 정리하면서 당시 실정에 맞지 않는 것을 잘라내 버리고 체제를 정돈하여 일목요연하게 만들었던 것을 이렇게 표현한 것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 다만 그 결과 중국과 같은 체계적인 법전의 편찬이 이루어졌을지는 좀 더 검토가 필요할 것 같다.

     

    ◎ 그렇다면 율령반포의 의미는 무엇인가?

    율령의 내용적인 측면에서나 형식적인 측면에서나 중국 율령을 전혀 수용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율령은 종래에 축적되어온 판례법을 집성, 정리하면서 수찬되었고, 그 내용에 있어서 완전히 일원화되지 않은 지배체제를 담고 있었다. 이러한 율령의 반포가 6세기 신라사회에서 과연 대단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을까?

     

    고구려의 阿度가 우리 신라에 건너온 것은, 康僧會가 남으로 吳에 간 것과 같았다. 때는 곧 양나라의 보살제가 동태사에 간 지 한 해 만이고, 우리 법흥왕께서 율령을 마련하신 지 8년째였다.12)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893년)

     

    최치원은 불교의 전래와 관련하여 고구려의 아도화상이 신라에 온 시기를 말하면서 법흥왕대 율령반포를 언급하였다. 율령을 반포한 지 한참의 세월이 지났지만, 신라인들에게 법흥왕대 율령반포는 연대를 표시하는 하나의 기준으로 사용될 정도로 기념비적인 사건으로 기억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법흥왕대 율령반포가 중앙집권적인 고대국가의 성립과 같은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면, 율령 반포는 어떤 면에서 중요하게 인식될 수 있었던 것일까?

    율령반포의 의의에 대해서 신라가 중앙집권적인 국가체제를 수립하는 것을 국가정책의 최우선 목표로 설정하여 그것을 달성하기 위하여 매진하겠다는 것을 대내외에 선포하는 이정표로서의 성격을 지녔다고 평가하기도 한다.13) 하지만 과연 율령이 앞으로의 제도 개정의 계획을 담고 있었다고 볼 수 있을까는 의문이다. 한편으로 또 다른 연구자는 율령 반포를 계기로 신라의 전 영역에 동일한 법체계가 관철되기 시작한 데에서 의미를 찾는다.14) 지방지배와 관련하여 5세기 말 6세기 초 무렵에 지방에 지방관을 파견하기 시작하면서 간접지배에서 직접지배로 지방 지배방식을 전환해 나갔다. 그 전까지 신라가 간접지배하던 지역에 개별적인 법체계가 존재하였을지는 의문이나,15) 이러한 지배방식의 전환과 율령 반포는 관련이 있었으리라고 여겨진다. 앞으로 율령에 대해 더 진전된 논의가 나온다면, 율령의 내용, 체계, 의미에 대해 더 많은 이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1) 박건주, 2008 󰡔중국고대사회의 법률󰡕, 백산자료원 ; 장진번 주편, 한기종․김선주․․임대희․한상돈․윤진기 옮김, 2006 󰡔중국 법제사󰡕, 소나무 참조.

    2) 󰡔漢書󰡕 卷60, 杜周傳.

    3) ‘고대국가’라는 용어에 대한 비판, 하일식, 2005 「고대사 연구의 주요 쟁점과 과제」 󰡔한국사 연구 50년󰡕, 혜안, 98~99쪽. 중세의 고려와 조선의 정치조직이나 사회조직이 다르듯 고대라는 시간대 내의 국가의 지배조직도 변화와 발전이 없을 수 없다. 고대국가 = 중앙집권국가라는 도식은 잘못된 것이다.

    4) 전덕재, 홍승우.

    5) 홍승우.

    6) 󰡔신증동국여지승람󰡕 권7, 여주목 고적 登神莊條. “신라에서 州郡을 建置할 때, 그 田丁, 戶口가 현이 되지 못할 것은, 혹 鄕을 두거나 혹 部曲을 두어 소재한 읍에 속하게 하였다.”

    7) 「중성리비」의 건립시기에 대해서는 501년(지증왕 2)으로 보는 입장과 441년(눌지마립간 25)으로 보는 입장으로 나뉘어 있다.

    8) 보통 ‘敎’는 왕만이 내리는 것이라고 알고 있지만, 중국의 한~남북조시기에 ‘敎’는 제후와 郡의 태수가 관내의 지역주민을 대상으로 내리는 명령을 뜻하기도 하였다(김창석).

    9) 김창석.

    10) 특수한 상황에 관하여 특별히 제정되어 있는 법률. 민법․형법과 같이 광범한 내용을 가지는 포괄적인 법전의 형태를 취하지 않은 철도법․어음법 같은 법률.

    11) 홍승우.

    12) 句驪阿度度于我 如康會南行 時迺梁菩薩帝 反同泰一春, 我法興王 剬律條八載也

    13) 전덕재.

    14) 홍승우

    15) 5세기 시기에 신라의 간접지배 하에 있던 지역들이 소국이라고 불릴 만큼의 독자성을 지니던 상태는 아니기 때문에 개별적인 법체계가 있었다고 설정하는 것이 타당할지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