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비 역사학과 역사 파시즘 3
관리자 2015-11-17 19:48 2863
사이비 역사학과 역사 파시즘 3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강사 기경량
사이비 역사학은 왜 대두되었나
사이비 역사학의 특징은 우리 민족의 우월성에 대한 강조, 광대한 고대 영토에 대한 집착, 그리고 음모론이다. 자신들의 역사상을 뒷받침하는 문헌적․고고학적 증거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일본인들과 학계의 주류인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은폐되거나 제거되어 그런 것이라 주장한다. 반면 자신들의 주장을 부정하는 수많은 반증 자료들에 대해서는 일본인이나 ‘식민사학자’들이 날조해 낸 가짜라고 주장하거나 거론 자체를 거부한다. 이러한 사고 구조 하에서는 어떠한 대화나 학문적 검증도 불가능하다.
사이비 역사학을 믿는 이들이 생각하는 우리나라 상고사의 영역
사이비 역사학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위대한 민족의 일원으로서의 정체성 확인과 먼 상고사 속에서나마 강대국의 구성원이 되고픈 욕망이다. 민족의 우월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주변 제민족에 대한 비하와 적대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전문가 집단인 역사학계 전체를 ‘식민사학’으로 매도하며 대중 선동을 한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파시즘의 양상을 보인다. 이는 사이비 역사학의 대두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안호상의 그림자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안호상은 왜 하필이면 1974년부터 활동을 개시하였던 것일까.
이는 박정희 정권의 국사 교과서 국정화와 관련이 있다. 안호상은 국정화된 국사 교과서가 배포된 첫해부터 비판의 포문을 열었다. 하지만 비판의 초점은 ‘국정화’가 아니었다. 사실 그에게 교과서가 국정화된 것 자체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그가 문제 삼은 것은 국정화된 교과서의 ‘내용’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국사 교과서의 국정화 과정에서 ‘국적 있는 교육’을 강조하며, 민족을 강조한 교과서를 만들었다. 그러나 단군 신앙을 가지고 있던 독신자이자 파시스트적 면모를 가지고 있던 안호상에게 있어서는 이조차도 터무니없이 기준에 미달하였던 것이다.
더구나 국사 교과서의 국정화는 국가가 제시한 특정 역사 해석에 독점적이면서도 우월적인 권위를 부여하였다. 검인정 체제 하에서의 다양한 역사 해석의 병립이라는 구도가 깨어지고 국가가 인정한 단 하나의 ‘국사’가 역사 해석의 표준으로 공식화되었다. 이 같은 ‘국사’의 단일화는 남들과는 다른 독특한 역사상을 가지고 있던 안호상 등에게 큰 자극을 준 것으로 보인다.
안호상은 자신이 믿고 있던 역사상을 ‘국사화’ 하기를 욕망하였다. 그리고 이를 관철시키기 위해 전직 문교부 장관이었던 자신의 모든 사회적 자산과 역량을 동원하여 기존 역사학계를 공격하였다. 결국 사이비 역사학의 대두는 국사 교과서 국정화가 초래한 또 다른 형태의 반동이자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었던 셈이다.
사이비 역사학의 대중화와 파시즘의 도착적 수용
축구 국가 대표 서포터즈인 ‘붉은 악마’의 엠블럼인 ‘치우 천왕’. 위서인 《환단고기》의 내용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1970년대부터 시작된 사이비 역사학은 지속적인 선전․선동으로 인해 광범위한 대중화가 이루어졌다. 소설․만화․드라마와 같은 창작물은 물론이고, 천문학과 같은 과학계에서도 《환단고기》의 내용이 소개되기도 한다. 최근에는 모 신흥 종교 단체에서 교세 확장의 수단으로 활용하면서, 그들이 운영하는 케이블 방송을 통해 《환단고기》 관련 내용이 상시적으로 방영되고 있다. 심지어 현 박근혜 대통령조차 2013년 광복절 축사에서 《환단고기》의 내용을 인용한 적이 있고, 최근인 2015년 10월 13일 비공개 수석 비서관 회의에서도 동일한 내용을 재차 인용하여 실상을 아는 이들의 탄식을 자아내게 한 바 있다(《메트로》2015년 10월 24일, 〈박근혜 대통령, 5자회동서 민생 방점).
사이비 역사학이 대중들에게 수용되는 양상을 보면 특이한 지점이 확인된다. 명백하게 파시즘을 기반으로 한 주의․주장임에도 불구하고 보수 우파뿐 아니라 진보를 자칭하는 사람들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이는 사이비 역사학이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것이 ‘민족주의’와 ‘반식민사학’이라는 점에 기인한다. 역사학계의 주류를 친일파로 매도하며 그 대척점에 스스로를 위치시키는 선동 기법이 친일파 청산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이들의 공감대를 자극하여 끌어들이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진보를 자칭하는 사람들조차 파시즘적 주장에 쉽게 동조할 만큼 사고 구조가 쇼비니즘에 취약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이비 역사학의 주장을 담고 있는 이덕일의 저서들
최근 사이비 역사학을 퍼뜨리는 첨병 역할을 하는 이는 유명한 대중 역사 저술가인 이덕일이다. 그는 2006년《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위즈덤하우스), 2014년 《우리 안의 식민사관》(만권당), 2015년 《매국의 역사학, 어디까지 왔나》(만권당) 등을 연이어 출간하고, 활발히 강연을 다니며 사이비 역사학의 내용을 대중들에게 전파하고 있다. 그 내용은 대개 1970년대 이래 안호상 등이 했던 주장을 거의 그대로 답습한 데 불과하여 딱히 새로울 것이 없다. 그러나 그가 가진 대중 역사계의 지분이 적지 않은 만큼 파급 효과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이덕일은 최근 국가 기관인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진행한 동북아역사지도 제작 사업에 대해서도 문제제기를 하였다. 독도 표기 문제 등 여러 가지를 지적하였지만 결국 핵심은 고조선 중심지가 한반도인 평양에 그려져 있는 것에 대한 불만이었다. 이와 관련해 2015년 4월 17일 국회 동북아역사왜곡대책특위에서는 동북아역사지도 연구 책임자인 임기환(서울교대 역사교육)과 이덕일을 출석케 하여 토론을 진행하였는데, 그 분위기는 1981년 국회 문공위원회가 주최한 공청회의 재판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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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동북아역사왜곡대책특위에서의 문답 모습. 국회의원들은 1981년과 마찬가지로 사이비 역사학에 우호적인 모습을 보였다.
국회의원들은 여야를 막론하고 사이비 역사학을 대변하는 이덕일 측에 호의적인 태도를 견지하였고, 신문과 방송 등 각종 언론은 동북아역사지도가 중국과 일본의 왜곡 주장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이덕일 측의 자극적인 주장을 그대로 보도하였다. 그 결과 수십 명의 역사학자들이 참여하고 8년간의 연구 기간과 47억 원의 세금이 투입된 동북아역사지도 편찬 사업은 사업 자체의 무산, 혹은 사이비 역사학계의 터무니없는 주장이 반영된 왜곡된 결과물을 도출해야 하는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만약 이러한 일이 실제로 발생한다면 한국 역사학은 국제적인 웃음거리가 되고, 학문적 평판에도 큰 손상을 입고 말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국정 한국사 교과서, 국수적 상고사와 탈민족적 식민지 근대화론의 공존 가능성
최근 국정화를 추진하는 정부 여당은 역사학계의 90%가 좌파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이들과 밀착되어 있는 뉴라이트 계열의 인사들은 현 역사학계가 지나치게 민족주의․국수주의에 경도되어 있다고 비판한 바 있다. 반면 이덕일 등 사이비 역사학자들은 역사학계를 ‘매국적 친일 식민사학’이라고 매도하고 있다. 이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우리나라 역사학계는 ‘친일파이면서 민족주의자이면서 좌파’이기까지 한 기상천외한 집단이 되는 셈이다.
이들의 주장이 터무니없는 중상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보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편향된 역사상을 ‘국사’에 관철시키기 위해 역사학계 전체를 좌파 집단, 혹은 친일 식민사학자로 매도하며 공격을 가하는 극단성과 비합리성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일각에서는 정부가 추진하는 국정 한국사 교과서의 근현대사 서술이 ‘친일과 독재’에 대한 변명이나 찬양으로 흐를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정부에서는 이러한 비판을 희석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국정 교과서의 고대사 서술에 있어서는 오히려 국수적인 시각을 강화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새 국정 교과서에 고대사 및 고구려사의 서술 분량을 늘릴 것이라는 방침이 이미 보도된 바 있다.
다수의 역사학자들이 국정 교과서 참여를 거부한 상황에서 다양한 전공과 계층의 인사들을 집필자로 초빙하겠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상황이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사이비 역사학에 우호적인 국회의원들이나 고위 관료들이 이덕일과 같은 사이비 학자들을 교과서 편찬 과정에 포함시키거나 그들의 주장을 교과서 내용에 반영하려는 움직임을 보일 가능성이 높다. 이는 ‘친일’과 ‘민족’이라는 대립 전선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형태로 재구축하려는 전략적 시도이기도 하다. 만약 이러한 시도가 실현될 경우 국정 한국사 교과서는 고대사와 근현대사 분야에서 전혀 다른 형태의 파시즘이 공존하는 키메라 같은 모습을 띠게 될 것이다.
현재 한국 역사학은 두 방향에서의 역사 파시즘의 공세를 받으며 위기에 놓여 있다. 그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고 파고를 헤쳐 나갈지는 역사학자들 앞에 놓인 무거운 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