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 바잉턴의 부여사 연구, 그 단상
관리자 2017-10-10 14:36 5362
이승호(동국대 강사)
부여의 역사는 아직까지도 많은 비밀을 감추고 있는, 미지의 역사라 할 수 있다. 부여인의 삶을 전하는 문헌기록은 절대적으로 부족한 형편이고, 이에 따라 학계의 연구 또한 큰 진척을 보지 못하고 있다. 물론 근래에 들어 옛 부여인들이 살던 곳에서는 수많은 고고학적 발견이 이루어지고 있어, 부여사 연구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고 있다. 그 덕분에 지금은 부여인들의 일상을 희미하게나마 더듬어볼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평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학계에서 부여사 분야는 현재도 연구자가 매우 부족할 뿐만 아니라, 발표되는 연구 성과도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도 14년 전 무렵인 2003년 봄, 이 부여사 분야에 겁 없이 뛰어들었던 푸른 눈의 연구자가 있었다. 바로 마크 바잉턴(Mark Edward Byington) 박사였다. 2003년 5월에 하버드 대학에서 발표된 그의 박사학위논문 「부여국과 그 사람들, 그 유산의 역사(A history of the Puyŏ State, its People, and its Legacy)」는 당시까지도 불모지와 같던 부여사 분야를 처음 체계적으로 정리한 탁월한 성과였다.
일단 이는 부여사를 전론으로 다룬 최초의 박사학위논문이었다. 부여의 역사는 한국도 중국도 아닌 머나먼 이국땅 미국에서 한 외국인 연구자에 의해 처음 체계적으로 정리되었다. 이어서 그 이듬해인 2004년에는 중국 길림대학교(吉林大學校)에서 한국인 학자 이종수(李鍾洙, 현 단국대학교 교수)에 의해 두 번째 부여사 박사학위논문이 발표되었고, 이 두 연구에 의해 부여사 연구는 새로운 지평을 맞이하게 된다.
한편 박사학위논문 발표 이후 바잉턴 박사는 「解決되지 않는 過去와 現代史의 딜레마: 중국 역사 속의 고구려」(고구려연구 18, 고구려발해학회 2004), 「Control or Conquer: Koguryo's Relation with States and Peoples in Manchuria」(Journal of Northeast Asian Histry 41, 2007), 「영어권의 고구려사 연구: 고구려에 대한 서구의 일반적 인식을 중심으로 -」(선사와 고대 28, 2008) 등 고구려사와 관련된 일련의 연구도 진행하였다. 그리고 바로 작년인 2016년에는 그의 박사학위논문이 약간의 수정을 거쳐 하버드 대학 아시아센터(Harvard University Asia Center)에서 동북아시아의 고대국가 부여(The Ancient State of Puyŏ in Northeast Asia - Archaeology and Historical Memory)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출간되기도 하였다.
위의 여러 연구들이 말해주듯 바잉턴 박사는 우리가 흔히 ‘만주’라고 부르는 지금의 중국 동북 3성 지역 고대국가에 대해 오랜 기간 관심을 두고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진행한 일련의 연구에서 가장 특징적인 점은 오늘날 중국 동북 3성 지역의 고대국가를 탐구하면서도, 이를 한국사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접근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고구려와 백제에 남겨진 부여사의 유산에 대한 집요한 추적은 그러한 연구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바잉턴 박사는 한국고대사 분야에 확장된 시각을 제공하는 한편, 결코 가볍지 않은 문제의식도 던지며 한국 학계의 연구 환경을 새롭게 환기시켜주는 연구들을 제시해 왔다. 그리고 그만큼 한국 학계 입장에서는 매우 소중한 연구자였다. 적어도 그가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던 ‘고대한국 프로젝트(Early Korea Project)’가 중단되는 2014년 전까지는 말이다.
우선 그의 박사학위논문 「부여국과 그 사람들, 그 유산의 역사(A history of the Puyŏ State, its People, and its Legacy)」의 목차 구성과 각 장의 내용을 간략히 제시해본다.
부여국과 그 사람들, 그 유산의 역사 (A history of the Puyŏ State, its People, and its Legacy)
Chapter 1 : 한국 역사의 시작(The Beginnings of Korean History) ㆍ부여의 요약된 역사 서술(A Brief Historical Description of Puyŏ) ㆍ역사와 역사서술 상의 부여(Puyŏ in History and Historiography) ㆍ국가, 사람, 그리고 유산(The State, the People, and the Legacy) ㆍ구성과 사료(Organization and Source Materials) Chapter 2 : 중국 동북지역과 한국의 고대 민족과 국가들(Ancient Peoples and States of Northeast China and Korea) ㆍ燕 나라 - 초기 역사(The State of Yan - Early History) ㆍ만주와 한반도를 향한 연의 팽창(Yan's Expansion into Manchuria and the Korean Peninsula) ㆍ전성기 燕의 고고학(The Archaeology of Greater Yan) ㆍ요약(Summary) Chapter 3 : 부여국 형성의 고고학적 범위(The Archaeological Dimension of Puyŏ State Formation) ㆍ요령의 청동기 문화(Bronze Cultures of Liaoning) ㆍ서단산 문화와 사회(Xituanshan Curture and Society) ㆍ포스트 서단산 사회 - 부여의 출현(Post-Xituanshan Society - Emergence of the Puyŏ) ㆍ요약(Summary) Chapter 4 : 부여국의 역사(History of the Puyŏ State) ㆍ漢 변경 외교 속의 부여(Puyŏ in Han Frontier Diplomacy) ㆍ고구려 역사 속의 부여(Puyŏ in Koguryŏ History) ㆍ요약(Summary) Chapter 5 : 부여의 사회와 영역(Society and Territory of the Puyŏ) ㆍ부여 건국 신화(The Puyŏ Foundation Myth) ㆍ부여 사회와 문화 - 魏의 연대기(Puyŏ Society and Culture - The Wei Chronicle) ㆍ부여국과 관련된 성벽 지역(Walted Sites Associated with the Puyŏ State) ㆍ요약(Summary) Chapter 6 : 정복 이후 부여의 생존자들(Post-conquest Puyŏ Survivals) ㆍ주민의 분산(The Dispersal of Populations) ㆍ부여 영토를 위한 투쟁(The Struggle for Puyŏ Territory) ㆍ부여 계승국으로서의 백제(Paekche as Puyŏ Successor State) ㆍ요약(Summary) Chapter 7 : 역사 지리학 연구에서의 부여(Puyŏ in Studies of Historical Geography) ㆍ부여국의 수도(The Capital of the Puyŏ State) ㆍ고구려의 부여성(Koguryo's Puyŏ-sŏng) ㆍ발해의 황룡부(Parhae's Puyŏ-bu) ㆍ요약(Summary) Chapter 8 : 국가 형성의 두 단계(Two Phases of State Formation) ㆍ2차적 국가 형성(Secondary State Formation) ㆍ건국신화 - 이민을 대체한 이야기(Foundation Myth - An Alternative to Migration) 결론(Conclusion) |
위에서 보듯이 바잉턴의 박사학위논문은 총 8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부여국 성립 이전 동북아시아 역사로부터 부여국의 성립, 역사의 전개, 멸망 이후의 역사에 이르기까지 부여 역사 전반에 대한 체계적인 정리를 시도하고 있다. 1장부터 6장까지는 시간 흐름에 따라 부여사 전반을 검토하고자 하였던 것 같으며, 그 뒤에 이어지는 7장과 8장은 앞에서 다 언급하지 못한 세부적인 논의와 저자의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이와 같은 논문 구성만 보아도 근래의 고고학적 성과를 반영하면서도 부여사의 연대기적 흐름을 놓치지 않고 따라가고자 하는, 또 그와 함께 고대 부여국이 남긴 역사적 유산을 추적해가고자 했던 저자의 고민을 읽을 수 있다.
다만 논문의 1장에서 6장까지 이어지는 논의 흐름과 뒤의 7장 및 8장의 내용이 언뜻 보기에도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데, 이러한 약점은 근래에 출간된 동북아시아의 고대국가 부여(The Ancient State of Puyŏ in Northeast Asia - Archaeology and Historical Memory)(2013)에서 대폭 수정ㆍ보완되었다. ― 2016년에 출간된 단행본에서는 7장 ‘역사 지리학 연구에서의 부여’의 서술 부분이 책 뒷부분에 부록으로 들어가는 한편, 8장 ‘국가 형성의 두 단계’의 논의 전체를 저서의 결론 형식으로 편성하여 한결 짜임새 있는 구성을 하고 있다.
“엄밀하게 볼 때 그 직접적인 통치 영역이 한반도에 미치진 못했지만, 한국사 최초의 국가 수준 정치 조직은 부여”
논문의 내용에 대해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면, 1장에서는 부여사의 전반적인 흐름을 간략히 제시한 다음 한국에서 부여에 대한 기억의 변천을 시대의 흐름에 따라 되짚어 간다. 부여에 대한 기억이 희미했던 고려ㆍ조선시대를 지나 근대에 이르러 부여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한 점을 지적하고, 근대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한ㆍ중ㆍ일 학계에서 진행된 연구사도 간략히 정리하고 있다. 그리고 다시 근대로 돌아와 ‘민족(nation)'이라는 화두 속에서 부여사를 서술하기 시작하였던 근대 한국과 중국의 시선을 신채호와 김육불(金毓黻)의 논저를 통해 비교하는 한편, 위서(僞書) 환단고기에서 묘사된 부여상에 대해서도 간략히 언급하고 있다. 끝으로 저자가 사용하는 “국가(state)” 및 “부여국(Puyŏ state)”의 개념과 거기에 담긴 문제의식을 정리한 다음 본 논문의 구성과 연구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연나라를 통해 전래된 철기문화를 비롯한 중원문화 요소는 요동지역 주민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 기원전 2세기말 이곳 주민들은 부여라는 국가를 형성하였다.”
다음으로 2장에서는 부여국의 성립 이전 중국 동북 지역과 한반도의 고대사 흐름을 개관하고 있는데, 특히 기원전 시기부터 요동 지역에 영향을 미치고 있던 연(燕)의 역사를 문헌과 고고학 발굴 성과를 바탕으로 정리하고 있다. 그리고 중국 동북 지역, 즉 만주 일대로 세력을 뻗어나갔던 연의 문화가 요동 지역에 미친 영향을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부여의 건국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B.C. 3세기경에 시작되는 심각한 외부 영향에 대한 반응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그 동인으로는 燕의 遼東 점유와 이후 漢과 흉노 제국의 확장까지 포함한다.”
3장에서는 부여국 형성 전후 요령 지역과 길림 일대의 역사적 흐름을 고고학적 성과 위에서 검토하고 있다. 먼저 요령 지역의 청동기 문화를 개관한 다음 서단산 문화(西團山文化)를 중심으로 부여국 형성 이전 길림 일대의 역사적 흔적을 더듬어 가는데, 요동 지역의 여타 청동기 문화와 서단산 문화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면밀하게 비교해나간 것이 특징적이다. 이후 저자가 “포스트 서단산 사회(Post-Xituanshan Society)”라고 명명한 포자연 문화(泡子沿文化)에 대한 고고학 발굴 성과를 검토하면서 부여국 형성의 실마리를 찾아간다. 학고동산(學古東山) 유적ㆍ대해맹(大海猛) 유적ㆍ포자연전산(泡子沿前山) 유적ㆍ유수 노하심(楡樹 老河深) 유적ㆍ모아산(帽兒山) 유적 등 기원전후 시기 부여와 관련된 대부분의 유적 현황을 제시하고, 이를 통해 ‘포스트 서단산 문화’의 특징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서단산 문화에서 포자연 문화(포스트 서단산 문화)로 이행하는 과정 속에서 부여국이 출현하였는데, 이러한 급속한 변화의 배경에는 기원전 3세기 경부터 요동 일대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던 燕과의 관계로부터 시작된 중국과의 교류, 서쪽 초원지대의 변동 등의 국제정세가 자리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멸망할 즈음 부여라는 이름에는 이렇듯, 부상하는 국가들의 지도자들이 그들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열망한, 상당한 권위와 합법성이라는 명망이 부여되었다.”
이어서 4장부터는 본격적으로 부여국의 역사에 대한 연대기적 서술이 시작되는데, 먼저 중국측 문헌기록에 근거하여 부여사의 흐름을 정리하였다. 즉 기원전 1세기 무렵부터 기원후 4세기까지 중국의 역사적 변동 속에서 부여와 중국의 관계 변천을 검토하면서, 중국 왕조, 특히 현도군(玄菟郡)과 긴밀한 연계 속에 선비족과 고구려를 견제하고자 했던 부여의 전통적인 대외 정책을 면밀히 살피고 있다. 또한 모용선비의 집요한 對부여 공략 과정을 검토하고, 또 고구려 건국신화 속에 담겨 있는 부여상과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초기 기록에서 전하는 고구려의 對부여 전쟁 기록에 대한 분석을 통해 고구려와 모용선비 양자가 당시 스러져가는 왕국 부여의 역사적 유산을 서로 앞 다투어 차지하고자 하였던 과정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부여의 왕권은 세습적이고 일생 동안 독재할 수 있었지만, 자연 재앙으로 인해 폐위될 수 있었다.”
“남서쪽의 연나라와 한나라, 북쪽과 서쪽의 선비족, 동쪽의 읍루로부터의 침입에 맞서면서 유지되었다.”
다음으로 5장에서는 부여의 사회와 영역을 문헌 기록과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통해 나누어 서술하고 있다. 먼저 부여의 건국 신화가 가지는 함의를 검토한 다음,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조의 기록을 바탕으로 부여 사회의 지리ㆍ자연 환경ㆍ사회 조직ㆍ관습과 법률 등을 분석하였다. 이어서 옛 부여 지역 일대에 포진한 여러 성터 유적들에 대한 고고학적 성과를 정리하고 이를 바탕으로 당시 부여의 방어체계를 살피는 한편, 부여의 영역 범위 또한 추정할 수 있게 한다.
“그것이 꾸며낸 것이든 사실에 기초한 것이든 기원 신화에서 표현된 부여와 관련한 주장은 고구려와 백제의 지배층에 의해 창조된 국가 정체성 측면에서 매우 사실적이었으며 핵심적인 요소였다.”
6장에서는 346년 전연(前燕)의 공격으로 부여국이 붕괴된 이후 각지로 흩어진 부여인의 흔적을 더듬는 한편, 부여의 정체성을 일부 보이고 있는 두막루와 동부여에 대해서도 간략히 언급 하고 있다. 또 부여국 붕괴 이후 옛 부여 지역을 두고 투쟁하였던 고구려와 물길의 상쟁과 8세기 무렵 발해로 귀속된 부여인 후예와 그 유산에 대해서도 짚어본다. 그리고 부여 계승국을 자처했던 백제의 입장에 대해서도 면밀한 분석을 행하고 있는데, 그러한 백제의 주장 이면에는 고구려와의 경쟁의식이 자리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부여는 오직 하나의 수도를 가졌다. 그 유적은 동단산(東團山)의 성벽일 것이다.”
이상의 2장부터 6장까지는 부여와 그 주변 역사의 전개를 시대의 흐름에 따라 문헌기록과 고고학적 성과에 기초하여 서술하였다면, 이어지는 7장에서는 조금 더 세부적인 내용으로 들어간다. 특히 지금까지 다양한 이견들이 제시되어 왔던 부여국 왕도 문제에 대해 체계적으로 정리하고자 하는 노력이 돋보인다. 먼저럼 부여국 왕도의 위치와 관련한 그간의 제설들을 검토한 다음, 근래의 고고학적 정황과 고구려 부여성 및 발해 부여부에 대한 검토를 통해 부여의 수도는 오늘날 길림시(吉林市) 동단산 유적 단 한 곳뿐이었음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부여는 B.C. 3세기 초 연(燕)의 영향에 자각 받아 2차적 국가 형성을 이루었다.”
“건국신화는 구체적 장소, 시간, 사회적 필요에 의해 창조된 것이다.”
8장은 논문의 결론이 되는 부분으로, 여기서는 “2차적 국가 형성(Secondary State Formation)”이라는 개념을 적용하여 부여국의 성립과 그 국가적 성격을 정리하는 한편, 부여에 기원을 두고 있는 고구려와 백제의 건국 신화가 당시의 사회적 필요성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주장을 다시 정리ㆍ제시하였다. 아마도 저자는 자신의 연구에서 가장 강조하고 싶은 부분이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상에서 살펴본 그의 부여사 연구는 연구 그 자체로도 탁월한 성과라 할 수 있겠지만, 이러한 이유 외에도 한국 학계의 입장에서는 그의 연구가 소중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다. 우선 한국사의 관점에서 부여사를 바라보고 접근하는 그의 시각은 한국 고대사에 대한 구미 학계의 관심을 확장하고 연구를 활성화시키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 또한 그의 연구는 타자의 시선에서 한국 고대사에 접근하고, 이를 통해 한국 학계의 연구 경향에 참신한 문제제기를 제시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한ㆍ중 학계 사이에 언제나 첨예한 논쟁을 내재하고 있는 고구려사ㆍ부여사 분야를 한국사의 시각에서 접근하고자 했던 그의 연구 방법론 또한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근래에 들어 부여사를 바라보는 바잉턴의 시각에 약간의 변화가 엿보이기도 하는데, 우선 박사학위논문의 1장 ‘한국 역사의 시작(The Beginnings of Korean History)’이란 장 제목이 ‘동북아시아에서 역사의 시작(The Beginnings of History in Northeast Asia)’으로 바뀐 것이 눈에 띈다. 뿐만 아니라 그 서술 면에서도 한국사적 시각을 조금 덜어내는 한편, 동북아시아라는 보다 넓은 시야에서 부여사를 위치시키고자 하는 변화가 엿보인다. 이는 시각의 변화라기보다는 동북아시아 고대 정치체에 대한 그의 연구 시야가 보다 확장된 결과일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염려되는 부분은, 이러한 서술 상의 변화에 지난 2014년의 일이 영향을 미쳤던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를 감출 수 없기 때문이다.
지난 2007년부터 2014년까지 동북아역사재단은 국제교류재단과 함께 하버드대학 한국학연구소(The Korea Institute, The Harvard University) 한국고대사연구실의 ‘한국 고대사 프로젝트(EKP)’를 지원한 바 있다. 마크 바잉턴 박사 또한 이 프로젝트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한 연구자였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는 2014년 동북아역사재단의 갑작스런 지원 중단을 계기로 당초 계획된 과정을 온전히 마무리 짓지 못한 채 2016년 말 종료되고 말았다.
지원 중단의 배경에는 ‘한국 고대사 프로젝트’의 결과물 중 하나이자 마크 바잉턴 박사가 집필을 맡았던 한국 고대사에서 한 군현(The Han Commanderies in Early Korean History)이라는 책이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고 서술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서술이 동북공정과 식민사관을 촉진한다는 논리를 앞세워 당시 정치권과 일부 관계를 맺고 있던 유사역사학 추종자들은 이 프로젝트에 압력을 가했고, 결국 그것이 프로젝트에 대한 지원 중단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물론 이는 어처구니없는 모함에 지나지 않으며, 현재 한국 학계에서 ‘낙랑군 재 평양설’은 정설의 위치에 있다. 바잉턴 교수는 한국 학계에서 상식으로 통용되는 입장과 연구 성과를 정리하여 구미 학계에 소개하였다는 이유만으로 그러한 터무니없는 비판을 받았던 것이다. 이 일은 당시 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던 사건이었지만, 사회적으로는 그다지 큰 이슈가 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지난 6월 당시 도종환 의원이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되면서, 이 문제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되었다. 당시 장관 후보자였던 도종환 의원의 역사 인식에 대한 학계와 시민사회의 깊은 우려 때문이었다.
도종환 의원은 그동안 일부 유사역사학의 논리를 추종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 왔고, 그러한 후보자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되는 것에 대한 사회적 우려가 제기되었다. 예컨대 2016년에는 유사역사학 추종자들과 국회 동북아역사왜곡대책특위가 주도하여 ‘동북아역사지도사업’을 폐기시킨 일이 있었는데, 당시 대책특위 위원 중 한 명이었던 도종환 의원은 지도 상에 낙랑군이 평양에 표기된 것에 대해 강한 문제 제기를 한 바 있다(동북아역사왜곡대책특위 회의록 2015.3). 이는 앞서 ‘한국 고대사 프로젝트’에 대한 지원을 중단할 당시 내세운 논리와도 매우 흡사한 것이다.
중앙일보와의 인터뷰 당시 마크 바잉턴 박사는 2014년 동북아역사재단의 지원 중단을 계기로 ‘한국 고대사 프로젝트’가 제대로 끝을 맺지 못한 채 마무리되면서, 한국 고대사 연구를 더 진척시키기 못한 것에 아쉬움을 토로하였다([분수대] 도종환과 바잉턴. 2017.6.9. 중앙일보 35면). 또 도종환 당시 후보자의 민족주의적 사관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기도 했다. 현재 그는 하버드 대학 내 인류학(고고학)과에서 중국 동북 지역에 대한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고 한다. 이를 통해 부여ㆍ고구려ㆍ발해 등에 대한 관심을 이어갈 수 있겠지만, 해당 프로그램은 한국사가 아닌 중국사 중심으로 구축되었기에 앞으로 그의 한국사 연구에는 많은 장애가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 예상된다.
다시 그의 박사학위논문으로 돌아와, 논문의 1장 ‘한국 역사의 시작(The Beginnings of Korean History)’이란 장 제목을 거론하고 싶다. 제목처럼 그는 부여의 역사를 한국 역사의 시작선상에서 파악한 연구자이다. 특히 1장의 서술 중 “엄밀하게 볼 때 그 직접적인 통치 영역이 한반도에 미치진 못했지만, 한국사 최초의 국가 수준 정치 조직은 부여”라는 언급은 부여사와 한국 고대사를 바라보는 저자의 시각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2007년 1월 중국의 동북공정이 공식적으로 끝난 이후로도 현재까지 ‘포스트 동북공정’ 국면 속에서 몸살을 앓고 있는 부여사 연구의 현실을 생각할 때, 이와 같은 그의 연구 시각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다.
바잉턴 박사의 한국사 연구가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지원 중단을 당하는 과정을 바라보며, 같은 연구자로서 참담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우리는 소중한 타자의 시선을 이렇게 밖으로 내몰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