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와 원(몽골)의 관계, 어떻게 볼 것인가?
관리자 2017-09-25 17:15 9133
고려와 원(몽골)의 관계, 어떻게 볼 것인가?
김윤정
<고려시기 연구의 ‘Red Ocean’, 고려-원(몽골) 관계>
13~14세는 ‘원 간섭기’라고도 불리며 한국사에 있어 국제관계가 크게 부각되는 시기 가운데 하나이다. 1231년(고려 고종 18년) 몽골의 침입으로 시작된 고려와 몽골의 전쟁은 28여 년 간 지속되었다. 강화가 체결된 이후에도 원(몽골)은 達魯花赤[다루가치]를 파견하고 征東行省(정동행성)을 설치하였으며, 雙城摠管府(쌍성총관부)・東寧府(동녕부)・耽羅摠管府(탐라총관부)를 설치하여 고려의 영토를 경영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왕실과 지배층 자제들을 質子(질자)인 禿魯花[투루칵]로 일정 기간 원의 수도 大都(대도, 오늘날 북경)에 거주하며 황제를 숙위하는 怯薛[케식]에 복무하도록 하였으며, 고려의 왕은 원 황제에 의하여 유배를 가거나 빈번히 교체되는 소위 ‘重祚(중조)’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이민족의 지배와 간섭’이라는 점으로 이해되며 일찍부터 주목받았다. 일제 식민지시기 일본인 연구자들이었다. 이들은 13~14세기 고려의 상황을 일제에 의한 식민지 상황과 대비시키며 停滯性論(정체성론)과 타율성론의 근거로써 해석하였다. 따라서 해방 이후에 한국 연구자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초기 연구에서는 고려가 원(몽골) 중심의 세계질서 속에서 유일하게 독립국의 지위를 가졌다는 점에서 고려의 자주성을 강조하였다. 元 지배・간섭 하에서 복류하고 있었던 내재적 역량으로 ‘抗蒙(항몽)’・‘反元(반원)’ 의식 및 새로운 사회를 지향하는 개혁의 움직임이 태동하던 시기로 조명하였다.
근래에는 기존의 항쟁사적 시각에서 벗어나며 고려의 정치・경제・사회의 변화와 대외관계를 보다 유기적으로 결합시키는 시도들이 이루어졌으며, 동양사 일각에서 이루어진 소위 ‘원조사’・‘몽골사’ 연구 성과를 기반으로 고려-원(몽골)의 관계에 대한 논쟁이 이루어지며 이 시기를 구조적으로 접근하게 되었다. 그 결과 특히 2000년대 이후 고려시기 연구에서도 대외관계사 분야의 연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가운데에서도 가장 많은 연구 성과가 배출되고 있는 주제로 부상하였다.
<고려-원(몽골) 관계 지배와 복속의 이분법을 넘어서>
연구의 양적・질적 팽창으로 정치・사회・경제・사상의 다양한 분야에 대한 고찰이 이루어짐으로써, 13~14세기 고려와 원(몽골)은 과거 한중관계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사회전반에 걸친 강력한 영향력을 주고받았음이 규명되었다. 그런데 이들 연구들의 상당수는 궁극적으로 고려와 원(몽골) 관계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의식을 기반으로 이루어진 연구들이라 할 수 있다. 즉, 고려와 원(몽골)의 관계가 기존의 한중관계라 할 수 있는 소위 ‘조공-책봉관계’의 틀을 벗어나는 것인지의 여부 혹은 앞서 언급한 13~14세기 양국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양상들, 즉 고려에 가해진 원의 ‘간섭’ 혹은 ‘지배’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의 답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따라서 원의 '지배'라는 것을 의식할 수밖에 없으며, ‘이민족’인 원(몽골)에 대한 고려인의 대응을 ‘親元(친원)과 反元(반원)’ 혹은 ‘事大(사대)와 自主(자주)’라는 이분법적 시각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다.
1세기 동안 지속되었던 원의 ‘간섭’ 하에 고려에서는 ‘자주적’ 움직임들이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反元(반원)’ 의식은 元(원)・明(명) 교체라는 시대적 상황과 맞물리며 원의 ‘간섭’을 벗어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이해는 13~14세기 고려사회의 다양한 모습이 간과될 수 있으며, 무엇보다도 고려와 원(몽골)의 관계를 정치・외교적 관점에만 초점을 두게 됨으로써 그것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에 대하여 ‘주체성의 확립’ 이상의 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는 한계점을 지닌다. 원 지배 하의 고려사회를 ‘親元(친원)’과 ‘反元(반원)의 양분된 구조로만 설명할 수 있을까? 과연 정치적 행위로써 이루어진 원(몽골)에 대한 대응과 문화적 측면에서의 그들 문화에 대한 대응은 동일하였나? 100여 년 간 고려와 원(몽골)과의 긴밀한 관계가 이후 고려사회에 미친 영향은 무엇이며, 그것이 시사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와 관련하여 다음의 기록이 주목된다.
고려 태조가 개국할 때에 일이 많은 초창기였으므로 신라의 舊制(구제)를 이용하였다. 광종대에 백관의 公服(공복)을 처음으로 제정하여, 이에 尊卑(존비)와 上下(상하)의 위계가 명백해졌다. 현종대에 이르러 南行(남행)으로 문서가 흩어져 없어져서 제도가 시행된 것을 상세히 알 수 없게 되었다. 의종대에는 평장사 최윤의가 祖宗(조종)의 규범을 모으고 唐制(당제)를 선별하여 詳定古今禮(상정고금의례)를 만들어, 위로는 왕의 冕服(면복)과 輿輅(여로) 및 儀衛(의위), 鹵簿(노부)부터 아래로는 백관의 관복에까지 빠짐없이 기재하니, 一代(일대)의 제도를 이루었다. 元(원)에 사대한 이래로 開剃辮髮(개체변발)을 하고 胡服(호복)을 입는 풍습이 100여 년에 이르렀다. 明(명) 태조 고황제가 공민왕에게 冕服(면복)을 하사하고, 왕비와 군신 역시 모두 사여함이 있으니, 이때 이래로 衣冠(의관) 文物(문물)이 다시 새로워져서 예전보다 더욱 훌륭하게 되었다.
(高麗史 권72, 志26 與服 序)
조선초에 편찬된 고려사에서는 과거 500여 년의 고려의 복식 문화를 위와 같이 정리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개국 이래로 의복과 관련한 제도가 꾸준히 정비되어 일대의 문화를 완비하고 있던 고려의 복식문화가, 13~14세기에 이르러 원(몽골)과의 관계 속에서 큰 전환을 맞이하였고, 開剃辮髮(개체변발)과 胡服(호복)으로 대변되는 원의 복식이 무려 100여 년 간 고려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는 것이다. 복식은 개인과 사회를 드러내는 기호 또는 상징으로, ‘유행’이라는 이름하에 사회 변화를 가장 빨리 반영하는 동시에 인간생활의 기본 요소인 의·식·주인만큼 ‘고유성’을 담지하고 있다. 특히 전근대 유교사회의 복식은 생활문화인 동시에 禮의 표현이자 정치적·사회적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고려에 원(몽골)의 복식이 수용되어 확산되었다 것은 13~14세기 고려사회에 중요한 시사점을 의미하는 문화현상이라 할 수 있다.
<고려의 복식문화와 원(몽골)의 복식문화가 다른가?>
100여 년 간 고려사회에 널리 확산되었다고 하는 원(몽골)의 복식문화는 무엇인지, 그것이 어떠한 특징을 지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존에 고려의 복식이 어떠했는지에 대해서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고려의 복식은 고대 이래로 한반도를 중심으로 착용되던 ‘韓服(한복)’과 더불어 중국의 唐(당)과 宋(송) 등의 제도를 도입하면서 수용한 ‘漢服(한복)’이 공존하는 형태였다. 또한 복식의 소재에 있어서도 고대로부터 발달한 직조 및 염색기술을 바탕으로 苧布(저포)와 麻布(마포), 綾羅(능라) 등이 고려에서 생산되어 상품화되고, 文彩(문채)가 가미된 화려한 錦繡(금수) 등의 직물이 중국으로부터 수입되어 지배층을 중심으로 소비되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고려의 복식에 거란 등지에서 수입한 罽錦(계금) 등의 모직물이 활용되기도 하였으나, 비교적 온난한 기후 속에서 마직물과 견직물이 다수 활용되고 있었다.
반면에 유라시아 스텝 지역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몽골족에게는 털과 가죽 등을 활용한 복식이 보편적인 문화였다.
元 太宗 窩鏶台(대만 국립고궁박물원 소장)
이들은 각종 布(포)와 견직물을 이용하여 발목까지 오는 원피스 스타일의 예복을 착용하기도 하였으나, 이는 극히 제한된 상황에서 착용되는 것이고, 대체로는 유목민족의 발명품으로 여겨지는 바지[袴(고)]와 가죽 부츠[靴(화)]를 착용하였다. 고려에게 공물을 요구하는 품목 가운데 수달피와 담비피 등 가죽류가 큰 비중을 차지하였고, 몽골 사신이 고려국왕으로 받은 예물 가운데 수달피만 챙기고 포 등의 직물은 버리고 갔다는 일화는 모자와 의복 등 다양한 복식 양식에서 양・낙타 등의 털과 가죽, 각종 소재를 압착시킨 펠트 등의 소재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음을 반증한다. 이러한 복식은 원(몽골)이 제국의 영역을 확장하고 남쪽으로 내려온 이후에도 북방의 上都(상도, 오늘날 내몽고 지역)를 오가며 국정이 운영하는 과정에서 여전히 착용되었다. 이에 더하여 서아시아・이슬람 국가들과의 직물교류로 색실로 화려한 무늬를 직조하는 실크 tapestry 등 직조술이 발달하였을 뿐만 아니라, 金絲(금사)와 金箔(금박) 등을 활용한 장식적 요소들이 결합함으로써, 중국 복식사에서도 화려한 복식문화를 보유한 것으로 평가되기에 이르렀다.
元 成宗 鐵穆耳(대만 국립고궁박물원 소장)
무엇보다도 원(몽골)의 문화를 상징하는 것은 앞서 고려사 찬자들이 언급한 ‘개체변발’과 ‘호복’이다. 일반적으로 ‘剃髮(체발)’ 혹은 ‘변발(辮髮)’이라고 하는 머리 양식은 머리의 정수리 부위의 頭髮(두발)을 깎는 풍습인데, 이는 북방 유목민족들에게는 보편적인 문화였다. 거란족은 머리 정수리 부위를 모두 깎고 남은 둘레의 머리를 그대로 늘어뜨렸고, 여진족은 남은 머리를 땋았던 반면에, 몽골족은 남은 머리를 땋은 후 말아 올렸다. 더욱이 몽골족의 경우에는 정수리 양쪽의 머리를 밀고는 앞머리를 남겨 늘어뜨리는 開剃(개체)와 옆・뒷머리는 귀의 뒤편에서 땋아 올린 ‘辮髮(변발)’을 합쳐 ‘개체변발’이라 하였고, 이러한 머리의 양식은 몽골의 대칸으로부터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보편적인 양식이었다.
또한 몽골족은 漢族(한족)과는 다른 양식의 ‘호복’이라 불리는 袍(포)를 착용하였다. ‘漢族(한족)의 袍(포)’가 넓은 소매에 옷깃이 둥근 團領(단령)이었던 반면에 소위 ‘호복’은 좁은 소매에 곧은 옷깃이 여며지는 直領(직령), 아랫부분이 치마와 같이 퍼져서 기마 등의 활동에 보다 적합한 형태라는 점이 특징이다. 특히 몽골족은 허리 부위에 많은 주름을 넣은 ‘텔릭(telig)’이라는 양식의 의복을 널리 착용하였다. 이들은 다양한 소재를 텔릭의 소재로 활용하였고, 정치・경제・사회적 지위에 따라 소매와 어깨 등에 장식물과 繡(수)를 첨가하기도 하였다.
<13~14세기 고려에 유행한 원(몽골)의 복식문화>
이러한 원(몽골)의 복식문화가 어떠한 이유에서 고려에 확산되었는가? 생활문화의 일부라 할 수 있는 복식문화에 있어서까지 원의 문화가 침투했다는 것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가?
고려가 원(몽골) 복식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기 시작한 것은 고려와 원(몽골) 전쟁 과정부터라 할 수 있다. 몽골군에게 포로로 피납된 고려인들은 臣屬(신속)의 의미로 개체변발이 강제되었고, 몽골군에게 투항한 고려인들은 자발적으로 몽골식 머리와 옷을 갖추어 입음으로써 몽골에 대한 소속감을 표시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 ‘복속’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몽골의 복식은 몽골 전쟁의 폭력성과 기존에 고려가 몽골에 대하여 지니고 있었던 멸시와 부정적 인식과 결합되어, 이들 문화에 대한 강한 거부감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양국이 화친을 맺은 이후, 고려는 원(몽골)과 사대관계를 유지하면서도 그들의 문화에 함몰되지 않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였고, 그 결과 원(몽골)에 복식의 비롯한 고려의 문화를 바꾸지 않도록 해줄 것[不改土風(불개토풍)]을 요구하여 이를 보장받게 되었다.
하지만 원(몽골)의 정치외교적 영향력이 증대하는 과정에서 고려사회에 원(몽골)의 복식 역시 침투되었다. 고려의 대내외적 안정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원(몽골)과의 우호적 관계 구축이 중요하게 되자, 1278년(충렬왕 4년)에 전국의 관리들에게 개체변발과 호복으로 바꿀 것을 지시하는 ‘衣冠改變令(의관개변령)’을 반포하였다. 원(몽골)과 복식문화를 공유하고 있음을 가시적으로 보여줌으로써 그들과 우호적 신뢰관계를 다지고자 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전국에 있는 관리들은 개체변발을 하고 호복을 착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머리 양식의 변화로 인하여 이에 적합한 몽골식 笠이 관모로 착용되는 등, 고려 관인 사회에 원(몽골)의 복식문화가 전면적으로 수용되었다.
왼쪽부터 강민첨(?~1021), 이조년(1269~1343), 이포(?~1373), 이색(1328~1396)의 초상이다. 이 가운데 이조년과 이포 부자의 초상은 13~14세기 고려 관인 사회에 수용된 원(몽골) 복식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귀한 자료이다. 이들은 고려전기 강민첨, 고려말 明(명)으로부터 받은 紗帽(사모)와 단령포를 입은 이색과는 달리, 직령포와 몽골식 립을 착용하고 있다. 특히 이들이 착용한 챙이 달린 관모는 원 세조 쿠빌라이의 황후인 차브이가 쿠빌라이를 위하여 고안해 낸 이후 널리 유행한 전형적인 몽골식 관모 가운데 하나이다.
충선왕은 자신의 후비인 淑昌院妃(숙창원비)에게 주기 위하여 당시 자신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던 원의 황태후에게 원(몽골) 지배층 여성의 관모라 할 수 있는 姑姑(고고)를 요청하였고, 이를 받자 숙창원비는 고고를 쓰고 고려신료들과 함께 연회를 베풀기도 하였다. 그림은 고고를 쓴 원의 황태후 答己의 모습이다.
더욱이 고려와 원(몽골) 사이에 인적・물적 교류가 증가함에 따라 원(몽골)의 복식 역시 자연스럽게 고려사회에 확산되었다. 원 공주 출신의 고려왕비와 원 관료들이 고려에 와서 머물렀을 뿐만 아니라, 고려국왕을 비롯한 지배층들은 황제를 알현하기 위하여 원(몽골)을 방문하거나 장기간 체류하는가 하면서 고려의 지배층들은 단지 관복에만 국한되지 않고, 보다 다양한 원의 문화를 수용하였다. 한편 13~14세기 원을 직접 경험하는 고려인의 수 역시 크게 증가하였다. 사신 이외에도 환관, 내료, 응방인, 역관 등이 원(몽골)과의 중요한 외교업무를 담당하였고, 이들 가운데에는 신분이 미천한 자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원과 고려의 역로망이 연결되는 등 양국 사이를 이동하는 교통편이 확장됨에 힘입어 민간차원의 교류 역시 증대하였다. 14세기 중반에 이르면 원의 관리부터 민간 상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고려인들이 원에 생활하여, 이 무렵 원의 수도인 大都(대도)에서 생활하고 있던 고려인들의 중국 사회 적응을 목적으로 朴通事(박통사)와 같은 외국어 교재가 편찬되었으며, 공민왕대 이르면 그 수가 2만 명에 이르렀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러한 점들은 일부 관인만이 외국을 경험하는 과거와는 달리 13~14세기에는 일반민들까지도 원에 진출하여 활동할 수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원(몽골)의 복식 역시 사회전반에 걸쳐 확산될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1997년 3월 해인사 대적광전의 목조 비로자나불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불상의 안의 服藏(복장) 유물 가운데 하나이다. 1350년을 전후한 시기에 제작된 의복으로, 허리에 주름을 많이 넣은 전형적인 ‘호복’ 양식의 ‘요선 철릭’이다. 특히, 이 의복의 안쪽에는 ‘15세 소년의 장수를 기원한다’라는 묵서가 있어서, 15세 소년이 실제로 착용하였거나 적어도 향후의 착용을 염두에 둔 것이라는 점에서, 원(몽골)의 복식문화가 일부 관인들에게만 국한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는 경남 밀양 소재의 朴翊(박익, 1332~1298)묘의 벽화이다. 묘의 주인인 박익을 위한 공양・제례에 동원된 시종들 역시 원(몽골) 복식을 착용하고 있는 모습이 확인된다. 특히, 남서쪽 벽면에 묘사된 마부들은 챙이 달리고 윗부분이 둥근 몽골식 笠(립)을 착용하고, 그 아래로 개체변발을 하고 있는 것이 볼 수 있다. 원(몽골)의 문화를 향유하는 계층이 확대되어 피지배층이라 할 수 있는 이들 마부와 시종들까지도 생활문화에 변화가 나타났음을 의미한다. 아마도 이러한 경험들이 고려사 찬자들에 의하여 원(몽골) 복식이 100여 년 간 확산된 것으로 기록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 문화의 ‘재구성’>
소위 ‘親元(친원)’ 혹은 ‘부원배’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개체변발과 호복이 고려 사회 전반에 수용되고 확산된 문화현상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러한 원 문화의 유행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러한 문화현상은 고려와 원(몽골)이 정치・외교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구축하게 됨에 따라 파생된 것이었다. 사회 전반에 걸친 교류의 폭이 확대되면서 원(몽골)에 대한 고려인들의 인식 역시 변화하였기 때문이다. 원의 과거시험 응시와 케식의 수행 등으로 원 조정에 진출하는 고려인의 수가 증가하고, 원(몽골)과의 교류로 그들을 직접하는 기회가 증가하면서 원(몽골)은 더 이상 과거와 같이 ‘잔인하고 흉폭한 오랑캐’ 내지는 ‘오랑캐 가운데 가장 나쁜 존재’라는 부정적 인식은 잔존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려인들은 원(몽골)이 사방을 모두 통일함으로써 태평성대를 이룩하였고, 이러한 원(몽골)을 天子(천자)이자 中華(중화)로 인식하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황에서 과거 고려인들이 원(몽골)과 관계를 처음 맺을 때 보장받고자 하였던 자신들의 문화에 대한 경계 역시 크게 약화되었다. 원(몽골) 중심의 세계질서를 직접 목도하는 속에서 이들 문화에 대한 긍정 역시 이루어졌으므로, 上國(상국) 문화의 일부인 그들의 복식문화 역시도 고려에 적극적으로 수용된 것이다. 오히려 고려는 원(몽골) 중심의 세계질서 속에 존재하는 ‘고려’를 상정한 가운데 고려의 발전과 내적 필요를 위해서는 그들의 문화 역시도 개방적인 자세로 받아들임으로써 자신들의 문화적 범주를 확장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공민왕 즉위 이후 前代(전대)의 폐단을 개선하고자 하는 유교적 풍속 개혁이 추진되고, 원(몽골)이 몰락하고 새로운 중원의 주인으로 明(명)이 등장하면서, 원(몽골)의 복식 역시 고려 사회에서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새로운 문화적 모델로 명의 복식이 주목됨에 따라, 원(몽골)의 복식은 더 이상 고려가 지향해야 할 ‘상국의 문화’가 아닌 ‘오랑캐의 문화’로 인식되어 각종 금령 조치들이 반포되어 지양해야 할 대상이 되었다. 그럼에도 1세기에 걸쳐 일상생활에 침부한 복식을 일시에 탈피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후 고려 단종대까지도 ‘호복’의 착용에 대한 문제가 지적되었고, 호복인 텔릭은 그 모습이 변형되어 조선시기 군과의 복식인 ‘天翼[철릭]’으로 계승되어 조선 복식문화의 일부로 자리잡게 되었다.
우리는 흔히 우리의 문화, 즉 ‘자문화’를 ‘외래문화’와 등치 내지는 대립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우리의 문화 속에 과연 ‘진짜’ 우리의 문화는 얼마만큼 있는 것일까? ‘진짜’ 우리의 문화는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까? 13~14세기 고려사회에 원(몽골)의 복식문화가 확산되는 양상에서 확인되는 바와 같이, 100여 년간 원(몽골)과의 관계 속에서 고려의 문화적 범주는 고정된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시대적 변화 및 관계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역동적인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와 ‘타자’가 배타적으로 존재하며 하나가 다른 하나를 대체하는 것이 아닌, 둘 사이의 끊임없는 상호작용 속에서 양자가 새로운 절충과 대안을 마련해 가며 주조되어 가는 모습, 그것이 13~14세기 고려의 모습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