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비 역사학과 역사 파시즘 2
관리자 2015-11-17 19:41 3305
사이비 역사학과 역사 파시즘 2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강사 기경량
사이비 역사학, 국회에 가다
전두환의 제5공화국 출범 초인 1981년 11월 26~27일 국회 문공위원회에서는 국사 교과서에 대한 공청회가 열렸다. 이는 안호상 등의 청원에 따른 것이었다. 국회 문공위원회에서는 청원의 주체인 안호상(국사찾기협의회 회장), 박시인(서울대 영어영문학), 임승국(한국정사학회 회장) 등을 출석케 하였고, 김원용(서울대 고고미술사학), 김철준(서울대 국사학), 이기백(서강대 사학) 등 역사학계의 대표적인 학자들 또한 출석케 하여 양자 간 토론을 진행시켰다.
TV 카메라까지 동원된 국회에서의 역사 토론 공청회
(《경향신문》1981년 11월 27일)
안호상 등이 주장한 바는 다음과 같다. ○국사 교과서에서 고조선 역사가 일본인들에 의해 1천 년 이상 없어진 것을 인정하여 되찾지 않고 있다는 것, ○단군과 기자는 실존 인물이며 영토가 중국 북경까지 뻗어 있다는 것, ○왕검성은 중국 요령성에 있었으며 낙랑군은 북경 지역에 있었다는 것, ○백제는 3~7세기 북경에서 상해까지 중국 동해안을 통치하였다는 것, ○통일신라의 국경은 한때 북경이었다는 것, ○고구려․백제․신라가 일본 문화를 건설했다는 것, ○여진도 우리의 종족이라는 것 등이었다.
이에 대해 역사학자들은 식민사관은 이미 많은 극복이 이루어졌으며, 교과서의 내용은 사실에 충실한 것이라 반박하였다. 또한 청원인 측이 근거로서 제시하는 사료들은 대개 신빙성이 떨어지거나 한문 해석에 오류가 있다고 하였다. 무엇보다 청원인 측이 위험한 사관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일본의 우월성을 조작한 황국사관이 결국 일본의 패망을 가져온 원인이라는 것을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변하였다.
이틀에 걸쳐 벌어진 공청회에서 과연 어느 쪽이 이겼다고 할 수 있을까. 공청회를 지켜본 언론인들은 대체로 역사학자들 쪽의 주장이 보다 설득력이 있다고 판단한 듯하다.
…… 이날의 공청회는 쌍방 주장의 논거 면에서 청원인 측보다 피청원인 측이 보다 조직적이며 합리적인 것으로 드러났다. 그것은 청원인 측이 전문 사학자로 구성돼 있지 않은데 근거하는 것 같았다. 첫날의 공청회를 지켜본 사람들은 일단 청원인 측의 주장이 약하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경향신문》, 1981년 11월 27일, 3면,〈국회 교과서 시정 공청회 뜨거운 국사 토론 7시간 30분〉
그러나 공청회를 주최한 국회의원들의 반응은 사뭇 달랐다. 이들은 ‘재야 학자’들의 주장에 훨씬 큰 호응과 지지의 모습을 보였고, 역사학자들에 대해서는 시종일관 공격적이며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뒤이어 이기백 교수의 답변이 있었는데, 국회에서의 답변 방법에 생소하여 질문한 강기필 의원의 이름을 거명하지 않고 질문한 의원의 성함을 잘 몰라 죄송하다고 전제하고 답변에 나섰다. 이에 대해 질문한 강 의원은 "여기는 국회 회의장이다. 내 이름이 여기 명패에 적혀 있고 적어도 국회의원이 발언하는데 눈이 나쁜지 모르겠지만, 이러한 면만 보아도 학문에서 여러 가지로 짐작이 되는 바 있다. 이 이상은 이 교수의 명예를 생각해서 더 이야기는 하지 않겠지만 여러 가지 생각해 주기 바란다"라고 직설적으로 공격을 가하였다.
…… 이러한 분위기에 가세하여 임재정 의원이 발언권을 얻어 김원룡 교수와 이기백 교수를 향하여 국회를 대하는 태도가 돼먹지 않았다면서 그런 태도로 역사 연구를 한다면 결과를 안 보아도 뻔하다, 이러한 자세를 고쳐 주기 바란다고 훈계조로 긴 이야기를 하였다.
윤종영, 1999 《국사교과서 파동》, 혜안, 91쪽.
국회의원들의 이러한 태도로 인해 역사학자들은 뜻밖에도 평생 처음 겪는 수모를 당해야 했다.
사이비 역사학과 토론을 하다
전두환 정권 말기인 1987년 2월 25~26일. 정신문화연구원 대강당에서는 ‘한국 상고사의 제문제’라는 주제로 학술회의가 개최되었다. 고대사 분야에 있어서 기존 학계에 대한 ‘재야 학자’들의 공세가 계속 거세지자, 정신문화연구원 측에서 양쪽의 학자들을 한자리에 모아 학문적으로 정리를 해 보자는 취지로 학술 대회를 개최하였던 것이다. 그중에서도 두 번째 날인 2월 26일 종합토론 때의 일이다.
정신문화연구원에서 개최된 역사학자와 ‘재야 학자’ 간의 학술회의
(《경향신문》1987년 2월 27일)
이날 종합토론장에는 연단 위에 15명의 학자가, 방청석에는 8백여 명이 들어차 있었다.
동국대 이기동 교수(한국사)가 한 청중의 질문에 답변하는 과정에서 “역사도 학문인 이상 그 대상이 되는 사료의 합리성을 냉정히 따져야 한다”며 “사실 삼국사기 중 백제본기 편 기록은 왕 재위 기간이 70~80년이나 되고 왕의 수명도 대개 1백세 이상으로 나와 있는 등 믿기 어려운 점이 많다”고 설명해 나갔다. 이때 일부 청중들은 연단 앞으로 나가 “이 교수 주장은 일제 식민지 사학자 말송보화 금서룡 등의 주장을 그대로 표절한 것이다” “답변 제대로 못하면 끌어내려” “주최측은 왜 이런 학자에게 발표를 맡겼느냐”는 등 아주 심한 말을 퍼부었다.
……격정적인 일부 청중을 겨우 진정시켜 토론은 그런대로 진행되기는 했으나 이때에는 이미 이 교수 등 절반 가까운 교수가 자리를 빠져나갔으며 회의장은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일부 청중들은 마이크를 잡고 역사학자들을 계속 성토했다.
《동아일보》, 1987년 2월 27일, 6면,〈험악해진 역사 토론 현장〉
일반적인 학술 대회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또 다른 증언에 따르면 당시 방청객들은 “서로 발언하려고 마이크 쟁탈전을 벌이고, 마이크를 얻지 못한 일부 방청객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단상의 이 교수를 향해 고성을 지르고, 일부는 단상으로 몰려가고 난장판이었다”(윤종영, 1999 《국사교과서 파동》, 혜안, 159쪽)고 전한다. 역사학계와 ‘재야 학계’의 입장을 조율하고자 했던 애초 의도와 달리 해당 학술 대회는 폭언과 실력 행사가 난무하는 참사로 마무리되었다. 이러한 경험은 이후 양자 간 대화를 더욱 단절시키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왜 사이비 역사학인가
그렇다면 ‘민족주의 사학’, 혹은 ‘재야 사학’이라 자칭하며 위대한 상고사의 실재를 주장하는 이들은 어떻게 등장하게 된 것일까. 그 뿌리를 찾아가면 일제 강점기의 식민주의 사학에 가 닿게 된다. 일제 강점기 식민주의 사학자들은 일본의 조선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작업을 수행하였다. 그 과정에서 고안된 몇 가지 이론이 있는데 이를 크게 일선동조론, 정체성론, 타율성론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사이비 역사학의 대두는 이중 타율성론에 속하는 반도적 성격론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타율성론은 조선의 역사가 주체성을 결여한 타율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주장이다. 특히 조선이 반도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지리적 결정론에 입각한 반도적 성격론을 제시한다. 조선의 역사는 대륙과 해양의 사이에 낀 반도에서 전개된 역사이기 때문에 숙명적으로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의 대결 틈바구니에 끼어 영향을 받는 수동적 역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이다. 이는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을 통해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획득한 근대 일본인들의 경험과 시각을 전근대로까지 투사한 것이었다.
반도의 역사는 열등하며 타율적이라는 주장은 반도의 국가로서 강대국으로 성장하였던 유럽의 로마나 스페인의 예를 통해서도 쉽게 반증된다. 역사 전개에 있어서 지리적 요소가 매우 중요한 영향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전부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반도적 성격론에 대한 가장 근본적이고 효과적인 반론은 자의적으로 적용한 지리적 결정론의 조악함과 비합리성을 폭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방향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바로 한국사가 반도의 역사가 아니며 대륙에서 전개된 역사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들은 한국사의 ‘열등성’을 부정하고자 고대 한국사가 전개된 공간을 ‘반도’가 아닌 ‘대륙’에서 찾고자 부단히 노력하였으나, ‘반도의 역사는 열등하다’는 그릇된 명제를 그대로 추종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반도적 성격론의 극복이 아닌 내면화에 다름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상고시대에 존재하였던 ‘거대하고 강력했던 조국’을 그려보는 것은 달콤하고 유혹적인 것이었다. 결국 겉으로는 식민주의 사학을 격렬히 비판하고 거부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식민주의 사학의 이론을 내면화한 기괴한 쇼비니즘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 글에서는 고대 국가의 국력과 영토에 이상 집착하며 합리성을 결여한 일련의 역사 연구 행위를 사이비 역사학이라 지칭한다. 다양한 해석 가능성이 공존하는 역사 연구에서 ‘사이비’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은 폭력적인 측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용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이들이 이미 학문의 범주를 벗어났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197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방법론이 미숙한 아마추어들의 ‘쇼비니즘 역사학’ 정도로 이해해 줄 수 있는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1979년 이래 《환단고기》라는 위서를 조작해 퍼뜨리는 등 거짓과 기만을 통해 자신들의 주장을 강화하고 있는 데 이르러서는 이미 최소한의 학문성조차 상실하였다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명백한 위서인 《환단고기》의 문제점은 이미 학계에서 여러 차례 검증이 된 바 있으며, 특히 아마추어 역사 연구가인 이문영의 꾸준한 분석을 통해 그 조작 과정과 실체가 적나라하게 폭로된 상태이다(이문영, 2010 《만들어진 한국사》, 파란미디어.).
대표적인 상고사 관련 위서들
이문영은 ‘창조 과학’ 등 일련의 사이비 과학을 가리키는 ‘유사 과학’이라는 용어에 착안하여 ‘유사 역사학’이라는 용어를 고안하였다. 이는 현재 인터넷 역사 동호인들 사이에서 널리 통용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유사 역사학’이라는 용어는 ‘역사학이 아닌 존재’, ‘학문이 아닌 존재’라는 본래의 의미가 직관적으로 전달되지 않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본인은 보다 직설적으로 대상의 실체를 적시하는 ‘사이비 역사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자 한다.
<3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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