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단고기』의 성립 배경과 기원
관리자 2017-03-03 15:31 3792
『환단고기』의 성립 배경과 기원
이문영
1. 환단고기의 등장
『환단고기』는 환인, 환웅, 단군의 시대로부터 고려 말까지를 다루고 있는 위서이다. 1979년에 한문본으로 출간된 이 책은 1986년에 한글번역본 『한단고기』1)가 등장하면서 대중의 호응을 받았다. 위서로 지적된 지 오래지만,2) 대중에게는 점점 더 영향력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
『환단고기』로 대표되는 유사역사학의 문제는 이들이 고대사(상고사)를 다루기 때문에 일어난다. 특정 시대를 보여주는 ‘사료’라고 생각하고 기존의 ‘사료’와 충돌하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데서 일어난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유사역사학에서 내놓는 ‘사료’는 너무나 엉터리이기 때문에 고대사 전공자 입장에서는 반박하고 말고 할 것도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뿐만 아니라 『환단고기』가 위서라는 문제는 이미 증명된 사항에 속한다.3) 그럼에도 유사역사가들은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끊임없이 동일한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유사역사가들은 사료 부족으로 해명할 수 없는 일들을 모아서 불필요한 미스테리를 만들어내거나 한문으로 된 사료를 엉터리로 해석하곤 한다. 이와 같은 일을 일일이 반박하는 것은 대증요법과 같아 일시적인 효과만 지닐 뿐이다. 고치고자 한다면 병의 뿌리를 파헤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즉 『환단고기』가 대체 왜 나타났고 왜 대중의 호응을 받았는지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환단고기』에 대한 대중의 관심의 근원을 알고자 한다면, 고대사에서 논하는 역사적 문제가 아니라, 그 형성 배경에 대한 고찰, 즉 근현대사의 어떤 문제가 이런 위서를 만들어냈는가를 분석할 필요가 있다. 『환단고기』의 내용은 어떤 역사적 근거를 가진 것이 아니라 근현대의 문제로부터 도출된 희망사항의 나열이기 때문이다.
『환단고기』는 1979년 9월 10일에 광오이해사에서 100부가 출판되었다. 이유립은 이 출간을 허용한 적이 없으며, 몰래 출간한 제자를 파문하였다고 알려져 있다.4) 그러나 이 책에는 이유립이 직접 쓴 정오표가 붙어 있다. 출간을 허용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직접 만든 정오표가 붙어 있을 수 있을까? 이 판본은 『자유』지 발행인 박창암을 거쳐 그해 가을에 일본인 가지마 노보루(鹿島昇)에게 전달되었으며, 그가 번역한 일역본이 1982년 7월에 출간되었다. 이유립은 가지마 노보루가 잘 모르겠다고 하는 부분의 해석도 도와주고 출간을 축하하는 글도 보낸 바 있다.5) 더구나 『환단고기』 초판은 금방 팔렸는지 동년 12월 22일에는 재판 100부를 더 찍었다. 재판을 내면서 책값도 인상했다. 원래 1만 원이었던 책이 1만 8천 원으로 올랐다. 1979년의 1만 원은 책값으로는 엄청난 고가인데, 그것을 또 올렸던 것이다. 재판에도 초판과 마찬가지로 정오표가 붙어 있다. 명색만 재판이고 교정 없이 그냥 나온 것이다. 대신 재판에는 ‘재판후지(再版後識)’가 실려 있는데, 발행인인 조병윤은 자신이 이유립에게서 한국사를 공부했다고 말하며 스스로를 정산문인(靜山門人)이라고 소개했다. ‘정산’은 이유립의 호이다.
책의 교정을 이유립이 직접 보았으며, 책이 나온 뒤에 일본인에게 책을 넘겨주었고 12월에 나온 재판의 후기에서 발행인이 이유립의 문하임을 밝히고 있는 점으로 보아 이 책의 발간에 이유립이 화를 냈다는 것은 조작된 이야기로 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런 이야기는 왜 했을까? 그것은 『환단고기』 초판에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유립은 1983년에 배달의숙에서 다시 『환단고기』6)를 출간했다. 1983년에 책을 내면서도 출간연도는 1979년으로 잡아놓았다. 이것은 원래 1979년에 나온 광오이해사 판본을 묻어버리려는 시도였다. 이렇게 책을 내는 데 1982년 가지마 노보루의 일역본 출간이 영향을 주었는지는 앞으로 연구해볼 과제이다. 성급한 추론이지만, 이유립은 일본에서 자신의 책을 해석한 방법을 보고 실수를 눈치 챘고, 그 때문에 수정할 부분이 있다고 여겼을 가능성이 있다. 이때 둘러댈 말이 없었기 때문에 필사를 한 오형기가 실수를 했다는 등의 말이 나온 것이라 볼 수 있다. 『환단고기』 필사자인 오형기는 정체불명의 인물인데, 이유립이 죽었을 때 장례위원장을 맡았다는 이유립 제자 양종현의 증언7)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런 실수8)를 했음에도 이유립은 그를 파문하거나 내치지 않았다.
『환단고기』가 1979년 이전에 이미 만들어졌던 것은 분명하다. 그럼 언제 만들어진 것일까? 이유립은 1948년 월남했는데 이때 『환단고기』를 가지고 남하할 수 없었다는 것은 그들 스스로의 증언에 의해 증명된다.9) 따라서 당연히 이 책은 그 후에 만들어진 것일 수밖에 없다.
『환단고기』의 존재는 1979년 이전에 이미 『태백일사』라는 이름으로 유사역사가들에게 알려져 있었다. 80~90년대에 가장 유명했던 유사역사가 임승국은 1978년 5월에 낸 자신의 책 『고대사관견』에서 『환단고기』 안의 챕터인 「삼성기」와 「태백일사」를 인용했다.10)
또한 1970년대 유사역사학의 선전지였던 월간 『자유』지에서 이유립은 「단군세기」, 「태백일사」 등을 수시로 인용했다. 「북부여기」 같은 경우는 1976년에 이미 『자유』지에 공개되었다.11) 이유립은 1971년에 낸 『환단휘기』에도 「태백일사」의 내용을 일부 인용했다. 이처럼 이유립은 수시로 자신이 가진 비장의 역사책인 『환단고기』를 자랑했으며, 그와 어울린 사람들도 모두 그 책을 알고 있었다.
임승국은 『한단고기』에서 이렇게 이야기한 바 있다.
“자국의 역사에 대해 긍지를 갖고, 그것을 자랑하며, 그 얼을 되새기고자 하는 것이, 또 이를 통해 민족정기를 부추기고자 하는 것은 하등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이제 이 책, 한단고기 한 권을 읽어 마칠 때쯤에는 우리의 참된 역사와 전통, 하느님 나라 백성의 긍지와 자부심으로 맥박이 고동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12)
그러나 1981년 유사역사학계가 총공세를 퍼부어 국회에서 공청회까지 이끌어낼 당시 『환단고기』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환단고기』가 1986년 이후 우리 사회에 미친 거대한 영향력을 생각하면 이 당시에 전혀 언급이 없었다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이와 관련해서 주목할 만한 것은 1983년 10월 29일 국사편찬위원회 주최 ‘제2회 한국사 학술회의’에서 안호상이 “단군시대에 한글이 창제되었다는 기사가 『환단고기』에 있다”고 언급한 것이다.13) 일본에서 그 전 해인 1982년에 일역본이 나왔다는 사실이 과연 이런 주장에 영향을 주지 않았을지 의심스럽다. 『환단고기』 번역 전에 그에 대한 언급은 이와 같이 아주 제한적이었다. 『환단고기』에 대한 열풍은 한글 번역본의 등장으로 인한 것이었다.
여기서 『한단고기』를 내놓아 『환단고기』 열풍을 불러일으킨 장본인 임승국은 과연 어떤 역사관을 가졌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2. 『환단고기』 번역자 임승국
임승국은 1928년생이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청소년기를 일제 치하에서 보냈다. 역사전공자는 아닌데 어느 순간부터 역사학자 행세를 시작했다. 그는 1981년 국회공청회에서 이른바 ‘재야’의 대표 연사로 나와 이런 발언을 했다.
“현실적으로 우리가 왜놈들하고 결투를 한다고 합시다. 칼을 뽑아들고 혹은 권총을 뽑아들고 싸운다고 합시다. 우리 상대방 왜놈은 ‘야마토 다마시(大和魂)’로 처음부터 달려드는데 나는 칼 뽑아들고 화랑정신, 충무정신, 3·1정신 찾다가 벌써 칼이 들어와서 죽을 거예요. 싸우기 전에 죽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통일된 민족이념은 뭐냐?”14)
임승국은 파시즘 자체에 경도된 측면을 많이 보인다. 역시 국회 공청회에서 이야기한 내용을 살펴보자. 국회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 자체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식민사가들은 숫자가 많아요. (…) ‘나치스’의 ‘아돌프 히틀러’는 심지어 이런 얘기까지 했습니다. ‘다수결이라고 하는 것은 수학적 진리일 뿐이다. 책임을 질 사람이 대중의 치마폭 속에 숨어버린다. 다수결은 대가리 숫자주의이니 두수주의(頭數主義)일 뿐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두수주의 원칙으로 사학이나 국사를 결정할 수 없습니다.”15)
그는 이미 1980년 10월에 이런 주장을 한 바 있다.
“그리고 제3제국은 이러한 제1~제2의 위대한 조국의 전통을 계승한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즘의 제국이라는 논리이다. 한마디로 도이취의 민족주의는 아름답게 미식(美飾)된 도이취 역사이념에 뿌리박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톱밥을 주식으로 하던 도이취의 경제파국을 뚫고 20년 만에 다시 세계를 상대로 전쟁할 수 있는 국력을 길러낸 현대의 기적을 이루었든 것이다.”16)
그의 파시즘적 경도는 제국주의의 찬양으로 이어진다.
“이웃나라 일본은 도이취의 역사주의(민족주의)를 본받아 2600년―만세일계라는 가공의 황국사관을 만들어내어 명치유신~2차 세계대전을 치르는 국력을 길러냈으며 자국의 국익을 위하여는 백발삼천장 식의 과장사필과 왜곡사필의 구사도 불사하는 중화사관은 10억 인구를 포용하고 담고 있는 사상적 그릇이오 용기가 아니더냐.”17)
유럽의 독일과 아시아의 일본, 중국을 바라보는 시점의 비하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는 독재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역설한다.
“도이취나 일본은 국수주의 때문에 멸망했지만 우리나라는 도리어 사대주의로 나라가 망했던 것이다. 우리가 국수주의를 경계할 이유가 없다. 근세 이후 국수주의다운 국수주의 한 번도 못해본 한국사의 치욕은 차라리 국수주의가 숙원 섭리일지도 모른다. 항차 공산주의와의 대결을 통해서 국가안보를 추구하려면 공산주의의 사상적 철학적 천적인 강력한 민족주의!(그것을 국수주의라 혹평해도 좋다)와 그 토대 위에 뿌리박은 강력한 체제철학의 필요성은 차라리 숙명적이오, 필수적인 것이 아니겠는가 생각된다. ‘철학 있는 독재는 설득력을 갖는다’는 정치철학을 들먹일 필요도 없이 오늘날 한국 정치엔 철학을 필요로 한다.”18)
따라서 그에게 역사란 지도자의 결단 하나로 결정되는 간단한 학문일 뿐이다. 전두환에게 바치는 헌사를 보자. 문장 중의 ‘감당’은 ‘갈망’의 오자로 보인다.
“실로 국사광복은 대통령 각하의 의지 하나로 결정될 수 있는 민족의 숙원사업인 것이다. 민족사는 오랫동안 용기 있고 과단성 있는 민족의 지도자를 감당하여왔다. (…) 지금 우리는 가장 뛰어난 영단을 지닌 민족 지도자를 모신 ‘새 시대!’에 살고 있다고 자부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은 바로 ‘국사혁명의 호기’라 할 수 있다.”19)
그는 통일된 이념을 위해 역사가 봉사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파시즘에 대한 옹호와 역사의 봉사라는 생각에 큰 영향을 준 사람은 초대 문교부 장관을 지내고 1970년대 중반에 국사찾기협의회를 설립하고 회장을 역임한 안호상이었다.20)
3. 안호상의 역사관
안호상은 초대 문교부 장관이었다. 그가 문교부 장관으로 한 대표적 활동 중 하나가 학도호국단 결성이었다. 학교 안에 군사조직을 만든 것이다. 이 조직의 목적은 “불순 반동분자를 숙청하여 민족적 단합을 꾀하는 것”이었다. 그는 사상의 통일이 민주주의 실천의 첫 단계라고 주장했다.21) 그는 이후에도 자신이 가장 잘한 일로 학도호국단을 만든 것을 들곤 했다.
안호상은 독일 예나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는데 유학 시절인 1930년에 히틀러의 연설을 직접 들은 일이 있다. 이때 안호상은 크게 감명을 받았다.
그는 있는 힘과 있는 열을 다하여 하는 말이 “우리는 빵과 노동과 자유를 원한다. 이 원을 푸러주리는 오직 나치스뿐이다. 이 원을 해결하는 데에 비로소 나치스 승리, 즉 독일의 승리가 있는 것이다. 만일 그대들이 독일의 승리를 획득하거든 한 사람도 빼지 말고 나치스로 오게 하라!” 할 때에 죽은 듯한 군중은 다시 새 생명이나 얻은 듯이 “히틀러 만세”를 열광적으로 외쳐 부른다. 흥분한 군중을 그는 다시 진정시키고 말을 계속하여 “독일을 망처준 자는 베르사이유조약을 작성한 연합국보다 오히려 그 조약에 서명한 독일의 유태적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이다”라고 부르짖을 적에 군중으로부터 쏟아지는 “야!”(그러타) 소리는 대양 우에 폭풍우 밀리듯 하였다. (…) 그의 행동은 철혈로서 된 것 같으며 그의 말은 금심(金心)으로 우러나오는 듯하며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도취와 신뢰를 아끼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역대 혁명가들이 그러하듯이 그가 또한 위대한 웅변의 소유자이다. 어떠한 혁명가에 있어서든지 웅변은 위대한 무기였었지마는 히틀러에 있어선 그것이 위대할 뿐만 아니라 최고로 발달되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게끔 되었다.22)
안호상의 제1공화국까지의 사상과 활동에 대해서는 연구된 바가 적지 않다. 그가 일제강점기에 대종교의 영향으로 단군과 민족주의에 경도되었다는 점23)과 그와 일민주의의 관계24) 등은 많이 밝혀져 있지만, 그 후 그가 유사역사학의 대부로 활동했다는 점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 않았다.
그의 사상은 일민주의로 요약된다. 일민주의는 독재자 이승만의 통치철학이었다. 안호상은 민주주의는 아무나 들고 나오는 것이라 공산주의와 싸우기에 부족하다고 말하면서, 오직 일민주의를 따라서 생각도 행동도 같이 해야만 이길 수 있다고 주장했다.25)
민족주의를 내세우고 우리 민족의 차별성을 강조하다 보면 우리와 남이 무엇으로 구분되어야 하는지 알아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피’다. 초대 국무총리이면서 족청이라는 조직을 만든 이범석은 이렇게 말했다.
“독일의 히틀러가 억지로 순혈운동을 일으킨 일이 있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하지만, 그것은 독일 민족이 형성된 역사적 배경으로 보아 사실상 되지 못할 것이긴 하였으나 현실적으로 유태인을 배척함으로써 민족적 결속에 심대한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이 하나의 실례만 가지고서도 피의 순결이라는 것이 얼마나 존귀한 것이며 중요한 것인가를 (…) 피! 부자의 피! 골혈의 피! 민족의 피! 이 피야말로 모든 문제의 시초요 결말입니다. 우리 조선민족청년단의 사업은 이 피에 대한 연구 분석 종합, 이 피의 조직 재생 배양, 그리고 무한한 활력을 기르는 데 있습니다.”26)
이러한 일민주의 사상은 이승만의 몰락과 더불어 현실 세계에서 사라진 것 같았지만, 유사역사학을 통해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안호상은 일민주의를 제1공화국 이후 ‘한백성주의’라고 부른다. 당연하게도 한백성주의에서도 안호상은 핏줄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했다.
“한겨레와 한백성은 한 핏줄이다. 한백성이 되게 하는 데는 여러 가지의 요소들이 있으나, 그 가운데서 가장 먼저와 또 쉽게 되는 것은 그 자연적 요소인 핏줄이다.”27)
그는 여러 종족이 섞인 나라는 혼혈이기 때문에 핏줄이 섞일수록 점점 더 나은 나라가 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을 이야기했다. 이승만 때 하던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을 여전히 되풀이했던 것이다.
“한 민족은 같은 한 조상의 한 핏줄을 받은 사람이라야만 한다. (…) 다른 조상의 핏줄을 받은 사람이라면 그들은 같은 한 민족이 될 수 없다. 이것은 스위스를 보아 잘 알 수 있다. (…) 스위스 국민은 있어도 스위스 민족은 없다.”28)
핏줄에 대한 집착은 유사역사가에게 굉장히 중요하다. 임승국은 『한단고기』에서 이렇게 말했다.
“분명히 말하거니와 우리는 모두 ‘선군’의 후손이니 우리 또한 혈관 속에 한님의 피가 흐르는 한님의 아들, 곧 한님임에 틀림없다. 송아지는 황소의 아들이지만 송아지도 소(牛)요 황소도 물론 소이다. 이처럼 한님의 아들인 선군의 피를 받은 우리 또한 모두 한님이요 선군이다.”29)
이처럼 피에 집착하는 모습은 『한단고기』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하느님의 피를 직접 유전으로 받아 곧 하느님으로 태어나는 백성이라는 천민신앙은 온 세상에 자랑하고 싶은 우리의 믿음이다. 이스라엘의 선민사상보다 한 단계 높은 천민사상을 갖는 민족임을 자랑으로 삼자.”30)
안호상의 국가주의적 사고는 평생 고쳐지지 않았다. 그는 70년대 노동운동을 지원했던 도시산업선교회(도산)를 가리켜 “사대주의의 필연적 결과로써 고질적 파벌을 만드는 현상”이라고 매도했다.
“1971년부터 3~4년 동안에 일부의 예수교인, 선교사, 신부 등이 반정부 운동을 일으킬 때, 이 도산은 서울의 산업 중심지인 구로공단에서 이들에 발맞추어 극렬한 선동과 운동을 일으켰다. (…) 예수교의 도산의 선동과 행동은 공산당보다 더 반민족적이요 망국적이다. 현재 공산당은 우리의 생산 공장에서 그와 같은 파괴행동은 할 수 없다. 공산당의 선전과 선동은 믿는 사람이 없으므로 겁날 것은 없지만, 예수와 종교의 이름을 팔아서 공산주의를 침투시킨다는 것은 참으로 위험천만한 일이다. 이러한 반민족적이요 망국적 집단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31)
이런 국가주의적인 관점은 80년대 『환단고기』에 기초하여 노동운동을 파괴하는 공작을 수행한 다물민족연구소의 활동32)과도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안호상은 배달문화연구원을 운영하면서 유사역사가들의 정기적인 모임을 가졌다. 이들은 박창암이 창간한 『자유』지를 기관지처럼 활용하면서 국수주의적 주장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백제의 중국 동남부 점거, 낙랑군이 한반도에 없었다는 등의 주장에 대해 학계가 반응을 보이지 않자, 문교부(현재의 교육부)를 상대로 ‘국정 국사교과서의 국정교재 사용금지 및 정사편찬특별기구 설치 등의 조치 시행 요구에 대한 불허 처분 취소 청구의 소’를 제기했다.33) 또한 이 일을 계기로 국사찾기협의회도 결성했다. 당시 역사학계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회고할 만큼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안호상과 임승국 등의 역사관 형성에 기여한 사람으로 문정창이라는 친일파가 존재한다. 문정창은 안호상과 같이 국사찾기협의회 활동을 했고 『자유』에 글도 실었다. 이들이 뭉친 계기는 교과서 내용 수정을 요청하는 ‘국사 바로잡기 운동’이었다.34) 이때 이유립은 『자유』지에 「국사 바로잡기 천년의 혈맥」이라는 글을 실으면서 『환단고기』를 소개했다.35) 이유립은 그야말로 필사적으로 『환단고기』를 알리고 싶어 했지만 동료들에게도 잘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던 상황이었음을 이를 보아도 알 수 있다.
『자유』지가 유사역사학의 기관지 역할을 하면서 역사학계를 공격할 때 이들에게 싸움의 이론을 제공한 이가 문정창이다. 1978년 11월 24일 역사학계 10개 단체는 유사역사가들의 비난에 반박성명을 내놓았는데36) 문정창은 이를 조목조목 반박하기도 했다.37) 유사역사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문정창에 대해서 알아본다.
4. 유사역사학의 대부 문정창의 역사관
문정창은 1899년생으로 1923년 경남 동래군 서기로 출발해서 황해도 은율군수, 황해도 내무부 사회과장(이사관)을 지낸 일제 부역자이다.38) 문정창은 해방 후에 역사저술가로 활동했다. 그는 일제가 20만 권의 책을 태웠다거나39) 이스라엘과 한민족이 연관이 있다는 등의 이야기,40) 중국 한족의 전설적 시조인 황제가 동이족이라는 주장41) 등을 내놓거나 내놓은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일제강점기를 다룬 『군국일본 조선강점 36년사』 등의 책을 내놓았고, 1971년 제14회 역사학대회에서 발표하는 등 역사학계의 일원처럼 행동했다.42) 그가 쓴 『한국고대사』는 1972년에 문화공보부의 우량도서로 지정되기도 했다.43)
그는 1973년 안호상이 운영하던 배달문화연구원에서 강연한 바 있고 이후 1975년 안호상과 함께 국사찾기협의회를 결성했다. 이때부터 제각각 진행되던 국수주의 사학은 구심점을 가지고 대중들에게 전파되기 시작했다. 오늘날 유사역사학에서 회자되는 이상한 개념의 이야기들은 문정창의 주장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많다. 대표적으로 중국사에서 ‘동이’라고 지칭된 종족들을 모두 하나로 묶는 것 등을 들 수 있겠다. 문정창은 활발한 저술 활동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펼쳐 나갔다.
문정창은 ‘동이’의 개념을 광의로 사용하면서 중국 고대사에 등장하는 동이를 한민족의 조상으로 취급했으며 이를 서량지(徐亮之)나 임혜상(林惠詳) 같은 중국 학자들도 인정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동이족인 소호족 일파가 서쪽으로 떠나서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정착하여 수메르 문명을 만들었다고 주장했다.44) 이 주장은 소설가 윤정모에게 영향을 주어 『수메르』라는 대하장편소설을 만들게 했다.45) 이런 주장을 위해 문장의 일부만을 소개하거나 자신의 결론과 맞지 않으면 무시하는 행태도 서슴지 않았다. 동쪽의 이란 고원으로부터 수메르인들이 이동해왔다는 대목을 동쪽에서 왔다는 부분만 소개하거나, 아무 근거 제시 없이 바다를 끼고 왔다는 대목은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등의 수법이다.46) 문정창은 수메르가 멸망할 때 아브라함이 살아남아서 이스라엘의 시조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이스라엘과 한민족은 형제의 나라가 되는 셈이다. 이스라엘과 한민족의 언어가 다른 것은 아카드 왕국이 언어를 빼앗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47)
이스라엘이 한민족과 갖는 관련성에 대해서 문정창은 이렇게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그 소위 ‘선민’을 영문으로 된 성서 『구약』 역대기상 16장 13절이 Chosen people(소리 나는 대로 읽으면 조선 사람)이라고 기록하였음을 위에서 지적한 바 있다.”48)
영어인 chosen을 알파벳대로 읽어서 조선과 연결시킨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이없는 일인데, 이런 발음의 유사성으로 역사를 재구성하는 수법은 이후 유사역사가들의 전매특허로 사용된다.
문정창은 이집트 문명도 소호족인 수메르 사람들이 이루어낸 업적으로 치부한다. 이로써 한민족이 가장 오래된 3대 문명을 모두 장악한 것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가 원하는 결론이었다. 문정창의 『한국·슈메르·이스라엘의 역사』에는 제목과는 달리 우리가 생각하는 한국의 역사는 나오지 않는다. 그는 수메르와 이스라엘의 역사도 한국 역사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런 그의 주장은 당대에도 잘 이해되지 않았다. 인류가 아프리카 쪽에서 이동해왔다는 것은 상식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다.49)
그는 국사찾기협의회 결성 이전에는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한민족을 연관하는 주장을 하지 않았다. 국사찾기협의회 이전의 책에서 문정창은 위서인 『규원사화』와 『단기고사』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있지만, 『환단고기』는 인용하지 않았다. 그는 『환단고기』에 대해서는 잘 몰랐을 가능성이 높다. 오히려 문정창의 글을 보고 이유립이 영향을 받아 『환단고기』 안에 ‘수밀이국’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국사찾기협의회라는 모임이 유사역사학을 촉발시키는 데 일조를 했다는 점이다. 그 전에는 과격한 주장 정도로 볼 수 있었던 이야기들이 국사찾기협의회를 통해 과대망상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기에는 정규 역사학을 공부한 학자들을 적으로 타게팅한 효과가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외부에 적을 설정하면서 이들의 결속력이 더 높아졌다고 볼 수 있다. 『자유』를 기관지처럼 이용하고, 동시에 국사찾기협의회를 통한 만남 속에서 유사역사학이 한층 더 심화되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문정창보다 먼저 메소포타미아와 고조선을 연관시킨 사람은 『조선상고민족사』50)를 쓴 최동이었다. 그는 내선일체 기독교 조직인 경성기련 위원으로 문정창과 마찬가지로 친일파였다. 그의 책 202~204쪽의 내용은 문정창의 『한국·슈메르·이스라엘의 역사』를 간략히 소개한 것처럼 유사하다.
이런 주장의 밑바탕에는 테리앙 드 라쿠페리(Terrien de Lacouperie)라는 19세기의 학자가 있다. 1894년 영국 런던대학에 근무하던 프랑스인 언어학 교수 테리앙 드 라쿠페리는 중국 한족이 바빌론에서 이주한 종족이라는 괴악한 학설을 발표했다. 중국 고대 문명의 서양 기원(Western origin of the early Chinese civilization)이라는 책을 내놓은 것이다. 문정창이 라쿠페리를 독일인으로 알고 있었던 것51)을 감안하면, 그는 실제로 라쿠페리의 책을 본 적은 없을 것이다. 최동은 바빌론에서 왔다는 설을 ‘교류했다’는 말로 바꾸었는데 문정창은 발상을 뒤집어서 한민족이 바빌론으로 갔다고 주장했다. 최동의 주장도 비약적인데, 문정창은 더욱 비약된 주장을 내놓은 것이다.52)
5. 근대 중국과 일본의 기원 찾기
조상이 어디에서 왔는지 궁금해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궁금증에 속한다. 문정창이나 최동이나 그런 의문을 가지고 자민족적인 입장에서 풀어 나가고자 한 것이다. 종족의 기원을 외부에서 찾는 것은 세계 곳곳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53)
반면 주변 종족의 기원을 자국에서 찾으려는 노력도 볼 수 있다. 사마천의 『사기』를 보면 중국 주변 국가들의 기원을 한족에게서 잡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흉노, 남월, 고조선의 왕들이 모두 중국에서 기원한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런 고대적 관념은 중국을 종가로 놓고 주변 국가를 갈라져 나간 분가로 보는 것인데, 이 관념은 민족이라는 개념이 들어온 뒤에도 살아남아 더 극렬해진 것 같다. 우리나라의 유사역사가는 바로 이런 점을 그대로 역전하여 사용한다. 한민족이 본가이고 중국, 일본은 우리의 지류이다. 문정창은 중국 한족의 시조로 추앙받는 황제(黃帝)가 동이족이라고 주장했다.54) 그렇게 해야 중국의 문명이 한민족에게서 갈라져 나간 것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정창의 이런 주장의 밑바탕에는 근대 중국과 일본의 국수주의 사상이 있다.
중국 근대의 국수주의적 행태는 김선자의 『만들어진 민족주의 황제신화』를 통해 자세히 알 수 있다.55) 우리나라 근대 사상에 큰 영향을 준 량치차오(梁啓超)는 『중국사서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종(漢種)이라는 것은 우리들 현재 전국 방방곡곡에 있는 소위 문명의 후대로, 황제의 자손이다. 황제는 곤륜의 대산맥에서 나와 파미르 고원에서 동으로 향해 중국에 들어오고, 황하의 연안에 거주하며 사방으로 번성해 수천 년 내내 세계에 빛나는 명성을 넓혀갔다. 이른바 아시아의 문명은 모두 우리 종족이 스스로 씨 뿌리고 스스로 수확한 것이다.”
량치차오는 일본도 중국에서 갈라져 나간 것으로 보았다. 이 시기에 피의 순수성을 주장한 사람도 있다. 장타이옌(章太炎)은 한족만이 인간이고 한족 이외의 민족은 짐승이라고 주장하며 피의 순수성을 강조했다. 문화가 같으려면 혈통이 같아야 한다. 장타이옌은 조선과 베트남은 한족과 같은 혈통으로 두 나라는 중국이 회복해야 할 영토라고 주장했다. 량치차오와 장타이옌은 라쿠페리의 학설을 받아들였다. 량치차오는 갑골문자가 라쿠페리의 설을 지지하는 것이라고 여겼고, 장타이옌은 사르곤은 신농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일본 역시 근대에 들어 자신들의 기원에 대해 국수주의적인 주장을 내놓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에 오구마 에이지의 일본 『단일민족신화의 기원』56)을 참고하여 정리하였다.
1895년 일본의 개화론자 다구치 우키치(田口卯吉)는 『일본인종론』에서 일본인은 중국인보다 훨씬 똑똑하므로 중국인과 같은 황인종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일본인 중 보잘 것 없게 생긴 사람들은 선주민족인 에미시57)와의 혼혈 때문이며, 순수한 일본인은 피부가 희고 윤기가 흐른다고 주장했다. 심지어는 아리안 인종보다도 우월하다고 주장하고 일본 민족의 선조는 흉노=훈족이며, 따라서 헝가리와 투르크[터키]는 ‘동포’라고 주장했다.
다구치는 1901년 『국어에서 본 인종의 초대』라는 강연을 통해 일본이 아리안 인종의 본가(本家)라는 주장을 내놓았다. 아리안 인종은 산스크리트어를 쓰는데, 유럽은 게르만어를 쓰고 있으며, 원어에 가까운 언어를 쓰는 것은 투르크, 헝가리, 티벳, 조선, 일본으로 본가는 일본이고 유럽은 말가(末家)로서 감히 우리를 폄하하고 있다고 사자후를 펼쳤고, 박수갈채를 받았다.
일본지상주의자인 기무라 다카타로(木村鷹太郞)는 1911년 『세계적 연구에 기초한 일본태고사』를 내놓아 일본인은 그리스의 아리안족이 동천해 온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들은 봇물 터지듯이 나와서 수메르 기원설, 이집트 기원설, 유태인 기원설 등이 등장한다.
예일대 박사 출신인 오야베 젠이치로(小谷部全一郞)는 1925년 『칭기즈칸은 미나모토노요시츠네』라는 책을 냈다. 이 책에 찬사를 보낸 이 중에는 일본의 아나키스트 사상가 오스기 사카에의 암살과 만주 진출의 배후로 지목되는 아마카스 마사히코(甘粕正彦)나 대아시아주의를 주창한 오오카와 슈메이(大川周明)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책은 일본의 대륙 진출에 적합한 것이었다. 1929년 오야베는 『일본 및 일본 국민의 기원』을 출간했다. 이 책의 제목은 흑룡회의 도야마 미치루(頭山滿)가 썼다고 한다. 이 책의 요지는 일본 민족의 히브리 기원설이다. 이스라엘이 서양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클수록 이들을 자신의 조상으로 삼고자 하는 욕망도 커지는 것 같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문정창은 아예 그 관계를 역전시켜서 이스라엘이 한민족의 지류라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의 시초는 스코틀랜드 출신인 맥로드(McLeod)의 『조선과 열 번째 유태족(Korea and the Ten Lost Tribes of Israel)』58)이다. 이 책은 ‘조선’을 제목에 걸고 있지만 조선에 대한 내용은 1/4에 불과하고 그것도 모두 일본 쪽 자료에 의해서 작성되었다. 저자는 조선에 와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는 조선 사람들이 단군의 자손이라고 말하는 것에서 힌트를 얻어 조선이 이스라엘의 사라진 10지파인 ‘단’ 종족이라고 생각했다.59) 조선과 마찬가지로 일본도 이스라엘의 후예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영향이 한일 양국에 모두 끼쳤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은 제국주의 시대로 들어오면서 아시아 병탄의 야욕을 품게 된다. 그 야망을 위해서는 아시아를 병합할 명분이 필요했다. 일본의 힘이 성장함에 따라 그들의 논리도 제국주의화했다.
그 시작은 동문동종론(同文同種論)이었다. 동일 문명인 한자 문화권에 들어 있는 아시아 인종이 유럽 인종에게 대항해야 한다는 논리로 만들어진 것이다. 1885년 다루이 도키치(樽井藤吉)의 『대동합방론』60)에서 주장되었다. 우리나라에선 의외로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탈아론』(1885)만 널리 알려져 있는데, 동시대에 일본이 아시아의 맹주라고 한 주장도 드높았던 것이다.
다루이 도키치는 『대동합방론』에서 동문동조(同文同祖) 관계에 있는 일본과 조선은 합방하고, 다른 민족인 중국과는 연대하여 서양 세력을 아시아에서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중국은 일본과 협력하여 베트남, 샴(태국), 미얀마와 연합하고 말레이반도를 백인들 손에서 구하여 남양제도를 개척하는 길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다루이 도키치는 겉으로는 일본과 한국의 대등한 합방을 주장했지만, 실제로 한국에는 아무 권리도 주어지지 않은 강제 병합이 이루어졌을 때 숙원을 달성했다고 기뻐했다고 한다.61)
다루이 도키치의 ‘아시아주의’는 황인종이라는 사실에 기댄 인종주의 입장이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사람들을 강력하게 이끄는 이론이 일본에서 등장했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나라의 유사역사가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은 혈통주의에 입각한 ‘아시아주의’였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는 ‘대쥬신론’ 또는 ‘대동이(大東夷)’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살아남았다.
이 혈통주의 속에서 중국은 같은 혈통이 아니다. 당시 일본이 같은 혈통으로 간주한 종족은 일본, 한국, 몽골, 만주, 그리고 시베리아의 고아시아 인종들뿐이었다. 즉, 이른바 ‘동이족’을 같은 혈통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감히 동이족의 땅을 침략하는 러시아를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었고, 결국 그들의 뜻대로 러일전쟁이 벌어지기도 했다.62)
인종주의를 따르는 아시아주의는 ‘지나낭인’들이 주장했고, 혈통주의를 따르는 아시아주의는 ‘조선낭인’(여기에서 만주낭인 등이 파생된다. 조선낭인이라고 해서 조선인은 아니다. 조선에 들어온 일본낭인들을 조선낭인이라고 부른다)들이 주장한 것이다. ‘낭인’이라고 하면 칼이나 한 자루 차고 거들먹거리는 사무라이를 생각하기 쉬운데, 이들 지나낭인이나 조선낭인은 지식인들이었고 여러 직종에 종사하는 전문가들이기도 했다.
이들의 주장을 보자. 1916년에 나온 고테라 겐키치(小寺謙吉)의 『대아세아주의론』의 한 구절이다.
“민족통일 사상은 세계의 대세이다. 왈 전미주의, 왈 대영제국주의, 왈 영어국민통일주의, 왈 범로주의, 왈 범독주의, 왈 범로마주의 모두 그 상징이다. 무릇 피는 물보다 진함에 연유한다. 당연히 대몽고주의가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대몽고주의는 바로 황색인종 연합론이다. 일본과 지나가 제휴해서 풍부한 부원을 개발하고 수많은 인민을 인도하면 지나의 개조 부흥은 기대할 수 있다. (…) 대아세아주의를 가지고 편협한 인종적 감정에 기초한다고 생각하여 이것을 비웃는 자가 있다. 그런데 인종적 편견은 구미인의 가르치는 바이다. 백색인종에게 특히 그 깊음을 본다. 저 황화론의 도발적, 모멸적인 것이 그 실증이다.”63)
백인종도 인종적 편견을 가르치고 있으니 우리도 해야 한다는 유치한 논리가 이 밑에 있다. 그는 자신의 인종주의는 서구의 파괴적·공세적·급진적 인종주의와 달리 점진적·평화적·방어적이라고 주장했지만, 똑같은 것을 놓고 다른 것이라 주장하는 이런 논리는 결국 일본 제국주의로까지 올라간다.
한편, 이런 인종주의에 기초한 낭만적 이론보다 더 현실적인 이론이 등장하는데 그것이 이미 말한 바 있는 ‘동이’라는 혈통에 기인한 아시아주의이다. 이 이론을 확립하고 전파한 것이 ‘흑룡회’라는 단체이다.
6. 흑룡회가 남긴 유산
흑룡회의 뿌리는 천우협이라는 단체까지 올라간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천우협은 일본의 낭인단체로 동학농민운동을 지원하는 활동을 하기도 했다. 동학농민운동은 외세 배격이라는 대의명분을 내세웠고 그 외세에 일본이 포함되는 것은 당연한데, 배격의 대상인 일본의 단체와 동학이 협력했다니 무슨 말인가? 그러나 천우협이 동학농민군을 지원하고자 조선으로 들어온 것은 사실이다. 이들은 일본 정부에 의해 위험분자로 지목되어 체포되기도 했다.
이들 중 일부는 후일 명성황후 시해사건에도 참여했다. 1901년 결성된 흑룡회는 대일본제국의 영토를 흑룡강까지 도달케 하자는 목적으로 단체 이름을 흑룡회라고 지었다고 한다.64)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이들 낭인들은 단순 무뢰배가 아니라, 이론적 배경을 만들 학식을 가진 인간들이었다. 그럼 흑룡회의 사상적 토대를 간단하게 살펴보자.
이들이 기초하고 있던 사상은 ‘동이·북적 문명론’과 ‘동일 혈통론’이었다.65) 이 이론에 근거해서 일본, 조선, 만주, 시베리아를 하나의 권역으로 설정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같은 황인종이라 해도 동이가 아닌 중국은 이 권역에서 제외되었다. 본래 동이족은 중국 동북방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서역 지방에서 이주해 온 한족에 의해 동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다퉈왔다고 설명한다.
유사역사가들의 주장을 들어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이것이 바로 황제-치우의 탁록대전 이후 한족과 한민족이 허구한 날 싸웠다는 그들의 주장과 동일한 이야기 구조임을 금방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66) 또한 이들은 중국 문명이 중동 문명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이 이론은 우리나라의 유사역사가에 의해 중국 한족의 이름을 ‘한민족’으로 바꿔치기하여 되풀이되었다. 물론 당시 일제의 유사역사가들은 그 자리에 ‘일본’이라는 이름을 넣었다. 이들은 일본이 서양의 신문명을 받아들여 동이·북적 민족 중 가장 발전한 만큼, ‘고대 역사’가 증명하는 바와 같이 일본을 중심으로 하나로 뭉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당연하게도 조선과 일본의 합방이 이들의 과제가 되었다. 이들은 아시아, 특히 동이족의 영토에 쳐들어오는 러시아를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시베리아 등지에 많은 낭인들을 보내 정찰하게 했다. 이들의 선전은 매우 성공적이어서 실제로 많은 조선인들이 일본의 대러 전쟁은 아시아 평화를 위해 짊어진 수고로움이라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런 분위기에 편승해서 만들어진 친일단체가 바로 이용구의 ‘일진회’였다. 일진회는 흑룡회와 불가분의 관계였다. 이들은 표면적으로 한일 간의 동등한 합방을 요청하는 척했지만, 일본 정부는 한국 측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강제병합을 하였고, 곧바로 한국인 최대의 정치단체인 일진회를 해산시켜버렸다. 친일이건 뭐건 어떤 한국인 정치단체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용구도 죽으면서 자기가 속았다고 한탄했을 정도였다.67)
흑룡회의 이론은 결국 동이족의 영토를 모두 차지하려는 일본 제국주의의 사상적 토대로 활용되었다. 흑룡회를 만들고 흑룡회의 이론을 창안한 우치다 료헤(內田良平)의 이론을 보자. 그는 아세아라는 이름 자체가 일본의 옛 이름인 ‘위원(葦原)’에서 유래된 것으로 전 아시아가 일본의 옛 영토였다고 주장한다. 이는 『환단고기』에 입각해 전 아시아가 환국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유사역사가의 주장과 동일한 구조를 지닌다. 그의 주장 중에는 이런 황당한 이야기도 있다.
“천지 이변 때문에 일본 본토와 대륙의 교통이 완전히 두절되기에 이르고, 그 결과 아세아 대륙의 중앙에 위치하여 인류 진보의 선구가 되는 만주와 몽고에서 중앙아세아에 걸친 지대는 교통이 불편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기후도 한랭하게 되어 이에 세계적 민족의 대이동이 시작되었다고 보인다. 그래서 우리 야마토 민족은 이때 그 본거지인 만몽의 주요 지역을 파괴당하고 남하하여 황하를 중심으로 해서 발전하기에 이르렀지만, 본토(일본)와의 연락 교통이 완전히 두절되었기 때문에 홀로 대륙에 남아 일본의 통치를 떠나 독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에는 결국 같은 야마토 민족이면서도 역사와 풍속을 달리하고 언어도 통하지 않는 관계가 되었다.”68)
중국 대륙에 자기들 종족의 일부가 남아 있었다는 주장은 우리나라 유사역사가들도 흔히 하는 이야기다.69) 이들 대륙에 남은 동이족은 한족과 경쟁하고 대립하면서 자신들의 옛 땅인 만주, 몽골로 쫓겨나게 된다. 따라서 일본과 만주, 몽골, 조선은 다 같은 혈통이라는 것이다. 바로 내선일체론이다. 이런 점을 우리나라 유사역사가들도 전혀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조선이 종가이고 일본은 분가라는 것이 다를 뿐이다.
그리고 1920년대 말 대공황을 만나면서 일본에는 파시즘이 일어난다. 파시즘 아래서 흑룡회의 이론은 더욱 기승을 떨치게 되었다. 만주사변과 같은 전쟁의 이면에는 대동이족의 영토를 찾겠다는 신념이 일정 부분 가미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파시즘의 대두와 더불어 천황의 신격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팔굉일우의 대일본제국, 대아시아주의, 대동아공영론이 등장했는데, 이들의 등장에도 역시 이런 이론이 어느 정도 기여한 바 있다고 보겠다. 천황을 유교적 가부장 체제의 정점에 놓고 혈연공동체로서 국가를 건설해 나가고자 한 것이다. 물론 우치다 료헤의 이론 같은 것은 그 황당함이 하늘을 찌르고 있어서 일본 내 주류 사상이 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이들은 파시즘 일본 내에서도 비주류 중의 비주류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사상은 면면히 살아남아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는 중이다. 오늘날 유사역사가들이 ‘피의 순수성’, ‘혈통의 신성함’을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런 사상의 영향을 깊이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 일부는 국제결혼이 늘어나는 것이 한민족의 순수 혈통을 ‘더럽히려는’ 선진국들의 음모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불행히도 오늘날 유사역사학을 신봉하는 많은 사람들은 유사역사학의 뿌리가 바로 이런 일본에서도 주류로 취급받지 못하는 사상의 찌꺼기로 만들어진 것임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유사역사가들은 ‘동이’라고 되어 있는 종족은 다 같은 민족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한몽연합국가론이나 대쥬신벨트 건설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고, 심지어 묘족이나 티베트도 우리 민족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어떤 유사역사가는 청이 우리 민족의 정통이고 우리는 곁가지라며 자기 정체성마저 상실한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이런 발상의 근원에 일본의 흑룡회가 있고, 또한 대동아공영론이 있었던 것이다.
유사역사가들은 왜 이런 대동아공영론의 이론을 떠들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이들의 사상적 기초를 놓은 인물들이 일제강점기에 그들의 사상에 깊이 영향을 받은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흑룡회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던 기독교 지도자 중 하나였던 최동은 그들의 이론에서 일본을 한국으로 바꾼 『조선상고민족사』를 내놓아 유사역사가의 이론적 기초를 만들었다. 이 이론은 일제강점기에 계속 들어온 것이기 때문에 당대의 학식 있는 인물들에게는 쉽게 이해되는 내용이었다. 일제강점기에 고급 문관으로 근무했던 문정창은 이 이론에 깊이 경도되어 여러 권의 책을 내놓았다. 이미 말한 바 있지만 중동 지방의 문명에서 우리나라가 기원했다는 주장도 문정창이 내놓은 것이다. 그 이론은 20세기 초에 흑룡회에서 내놓았던 주장의 주어를 살짝 바꿔 놓은 것에 불과했다.
『환단고기』를 내놓은 이유립은 친일 단체인 조선유교회에 있으면서 당대에 널리 퍼져 있던 흑룡회의 이런 이론들을 접했을 가능성이 있다.70) 그렇지 않다 해도 최동과 문정창의 영향은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사상들이 『환단고기』 안에 깊이 배어 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일본 극우사가인 가지마 노보루는 『환단고기』가 자신들 극우사관과 일맥상통한다는 것을 알아보고 일본에 수입하여 소개했던 것이다. 가지마 노보루가 중동 지방에서 일본의 문명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는 사가라는 점은 임승국의 『한단고기』에도 여러 차례 언급되고 있다.
유사역사가들이 중동 지방이 일본의 시작이라고 주장하는 일본의 극우사가 아고우 키요히코(吾郷清彦) 등의 이론을 좋아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본래 뿌리가 같기 때문에 그 이론을 보는 순간 친근함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일본 안에서는 이런 극우사관은 거의 소멸된 상태이다. 이를 안타까워하는 유사역사가는 일본이 ‘대쥬신’의 정체성을 망각했다고 개탄하기도 한다. 이들의 정체성 안에는 이처럼 일본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그리고 이런 자신들의 정체성을 숨기는 좋은 방법은 다른 희생양을 찾는 것이다. 그 덕분에 국내 역사학계는 친일파의 본산지라는 음해 공격을 끊임없이 받았다.
7. 앞으로의 과제
국내 유사역사학은 일제강점기에 신문물의 세례를 받으며 태어나 땅 밑을 흐르다가 1975년 국사찾기협의회의 결성으로 1차 개화했다. 이들은 『자유』지라는 발표 매체를 얻음으로써 교류의 장을 확보했다. 1981년 국회 공청회를 통해 역사학자들과 대등하게 논쟁할 수 있는 존재로 자신들을 포장하는 데도 성공했다. 이 공청회에서 유사역사가들은 이론상으로는 철저히 패배했으나 국회의원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는 데 성공했고, 그 결과 국사 교과서에 변동이 생겼다.71) 이 무렵 일어난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파동과 더불어 국내에는 국수주의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72) 그리고 그 열풍의 뒤를 이어 국수주의의 결정판처럼 만들어진 『환단고기』 국역본이 등장했다.
『환단고기』의 열풍이 사그라들던 중에 박창범 교수의 천문학 연구가 등장하면서 유사역사학은 과학이라는 날개를 달고 영향력을 한층 더 확장했다. 최근에는 역사분야 베스트셀러 작가인 이덕일의 주도로 ‘미래로 가는 바른역사협의회(미사협)’가 등장하여 국사찾기협의회 이후 가장 큰 단체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대중 역사책 저술가로 유명한 이덕일은 존경하는 역사학자로 문정창을 꼽을 만큼 유사역사학에 경도되어 있다.73) 최근에는 『환단고기』를 옹호하고 나섰다.74) 미사협 안에는 『환단고기』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선전하는 단체들이 여럿 가입해 있는 상황이기도 하다.
이미 1979년에 등장했지만 주목을 받지 못했던 이 책은 단지 국역이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각광을 받은 것이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왜 이런 어이없는 책이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소비되는가 하는 문제는 진지하게 연구해야 할 과제이다. 이런 과정 없이 단지 『환단고기』 그 자체만을 비판한다면, 그 이전부터의 주장으로 되돌아가버림으로써 비판의 근거를 없애버린 것처럼 행동할 공산이 크다.75)
『환단고기』는 그 첫마디를 “우리 환국의 건국이 가장 오래되었다(吾桓建國最古)”76)라는 말로 시작한다. ‘처음’과 ‘오래됨’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삼성기전 하편」에서는 첫마디에 “인류의 조상은 나반이라 한다(人類之祖曰那般)”라고 적고 이후 중국과의 대결에서 우리가 승리하였다는 내용을 적어 중국에 대한 뿌리 깊은 열등감을 해소하고자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 열등감 때문에 핏줄의 문제가 묘하게 꼬이고 말았다. 중국의 고대 신화, 전설의 인물 중 대부분을 동이족, 즉 한민족의 일원으로 설정하다 보니 중국사와 한국사의 구분이 불분명해진 것이다. 대개의 경우는 중국을 방계의 족속으로 취급하고 감히 종가의 권위에 도전하는 무지몽매한 집단으로 취급하고 있다. 핏줄 문제에 있어서 한 가지 더 부연하자면, 「단군세기」는 한민족이 중국을 통치하고, 일본과 몽고의 기원을 한민족에서 찾고 있는데, 이는 바로 대아시아주의의 역사적 기초를 우리 민족에게 찾고자 하는 심정이 반영된 것이다.
고대의 막강함을 자랑할수록 현실의 누추함을 외면할 수 없게 되는데 이 때문에 『환단고기』 안에도 현재의 불운함을 논하는 장면이 발견된다.77) 『환단고기』 「태백일사」는 고려 말을 끝으로 더 이상 역사를 기술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조선에 대한 멸시에 있다. 고려의 역사에서도 금나라를 사대한 사실이나 몽고의 침략으로 결국 항복한 내용 같은 것은 언급되지 않아서, 고려사를 모르는 상태라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엉망진창의 기술을 한다.
자신의 생각에 자랑스러운 것들만 기술하고 싶었기 때문에 실제 역사의 면면을 소개할 수가 없었다는 고민의 흔적이 이 책 안에 들어 있다. 그러나 이런 고민의 흔적은 이 책이 제시하는 텍스트만 읽을 때는 도통 보이지 않는다. 덕분에 고대의 영광에 열광하는 사람들은 『환단고기』에 빠져들게 되었다. 자극적인 주장을 쉽게 전파하는 현대의 환경이 이 싹을 키워 거목으로 만들었다. 이는 특이한 현상이 아니다. 과거 파시스트 국가의 역사가들이 해온 일이다. 우리 사회의 좌절감이 깊을수록 역사를 통한 보상을 원하는 반동도 심해진다. 결코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심도 깊은 조사가 필요한 이유라 하겠다.
그 과제를 위한 준비 단계로 『환단고기』의 형성 배경을 조사해보았다. 아직도 미진한 부분이 많다. 『환단고기』 텍스트 자체를 통해 좀 더 정교한 분석을 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민족주의를 이용하여 일본에 대한 적대감을 자신들의 세력을 확대하는 데 이용해왔다. 그렇지만 살펴본 바와 같이 이들의 뿌리는 일본의 유사역사가들에게 있었다. 유사역사가들은 앞서 임승국의 예에서 본 바와 같이 일본 제국주의를 미워하면서 동시에 일본 제국주의를 부러워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 역시 세계사적인 흐름에서 독특한 것은 아니다. 프랑스의 민족주의는 독일을 적대시하면서 동시에 히틀러의 많은 입장에 공감하였다.78) 21세기의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은 충격적이다. 이 흐름을 분석하고 그 근원을 밝혀내는 것이 역사학계가 지속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과제이다.
이문영
파란미디어의 편집주간이자 소설가. 서강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했고 유사역사학을 오랫동안 비판해왔다. 대표 저서로 『만들어진 한국사』가 있다.
1) 임승국 역, 『한단고기』, 정신세계사, 1986. 임승국은 『환단고기(桓檀古記)』의 환(桓)을 ‘한’이라고 읽어야 한다고 주장해서 자신의 번역서를 『한단고기』라 명명했다.
2) 『환단고기』를 처음 위서라고 논증한 글은 이도학, 「재야사서 해제 환단고기」, 『민족지성』, 1986. 11이다.
3) 조인성, 「“재야사서” 위서론―단기고사·환단고기·규원사화를 중심으로」, 『단군과 고조선사』, 사계절, 2000, 210~239쪽; 이문영, 『만들어진 한국사』, 파란미디어, 2010 등에서 충분히 증명되었다.
4) 이정훈, 「환단고기의 진실」, 『신동아』 2007. 9 권말부록. 이 글에 따르면 이유립의 허락 없이 『환단고기』를 출간한 광오이해사 대표 조병윤을 파문한 것으로 되어 있다.
5) 가지마 노보루(鹿島昇) 역, 『桓檀古記: シルクロード興亡史』, 新国民社, 1982. 이 책의 해제에서 가지마는 『환단고기』를 이유립에게 직접 받았다고 말하고, 후기에서는 번역 후에 이유립과 박창암에게 보내 지도를 받았다고 나온다. 1984년에 나온 재판본에는 이유립이 가지마에게 보낸 축시가 속표지에 실려 있다.
6) 광오이해사본과 배달의숙본은 목차에 있는 「가섭원부여기」로 구분이 가능하다. 광오이해사본에는 목차에 「가섭원부여기」가 없다.
7) 양종현, 『백년의 여정』, 상생출판, 2009, 341쪽.
8) 오형기는 수많은 오탈자를 낸 것 이외에도 책 뒤에 발문을 써서 이유립이 못마땅해 했다고 한다. 이정훈, 「환단고기의 진실」, 『신동아』 2007. 9 권말부록. 전형배 증언.
9) 이정훈, 앞의 글; 양종현, 앞의 책에 모두 이유립이 남하할 때 책을 가져오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다.
10) 안동준·임승국, 『한국고대사관견』, 경인문화사, 1978, 91쪽에서 임승국은 『환단고기』 본문의 일부를 인용하고 있다. 하지만 『환단고기』라는 서명은 나오지 않고 「삼성기」와 「태백일사」라고만 소개했다. 이것은 이유립이 이때까지 『환단고기』라는 서명을 정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11) 『자유』 1976년 10월호, 자유사, 70~74쪽.
12) 임승국 역, 앞의 책, 5쪽.
13) 이기혁, 「이색논단: 한글의 비밀을 밝힌다 “<해설> 히브리문자 기원설을 계기로 본 훈민정음”」, 『신동아』 1997년 5월호, 418쪽.
14) 제108회 국회문교공보위원회회의록 제20호, 1981. 11. 27, 8쪽.
15) 위의 글, 67쪽.
16) 임승국, 「‘제5공화국’의 민족주의 이념」, 『자유』 1980년 10월호, 62쪽.
17) 위의 글, 63쪽.
18) 임승국, 「이적 해국사필과 국가안보」, 『자유』 1980년 11월호, 30쪽.
19) 위의 글, 74쪽.
20) 「사대·식민주의사관 뿌리뽑자 원로들 국사찾기협의회 결성」, 경향신문 1975. 11. 3. 기사에 따르면 국사찾기협의회는 안호상, 유봉영, 문정창, 임승국, 이유립(기사에는 이름이 昱으로 나와 있으나 岦의 오탈자로 보인다), 박시인 등이 1975년 10월 8일에 결성했다.
21) 안호상, 「학도호국대 결성의 의의」, 『조선교육』 1949년 5월호.
22) 안호상, 「히틀러, 아인스타인, 오이켄 제씨의 인상」, 『조광』 1938년 11월호, 조선일보출판부, 89쪽. 당시 표기를 그대로 옮겨 현재 맞춤법과 다른 부분이 있다.
23) 은희녕, 「안호상의 국가지상주의와 ‘민주적 민족교육론」, 『중앙사론』 43, 2016. 6.
24) 연정은, 「안호상의 일민주의와 정치·교육활동」, 『역사연구』 12, 2003. 6.
25) 안호상, 『일민주의의 본바탕』, 일민주의연구원, 1950.
26) 이범석, 「제1기 수훈 입소식 훈사」(1946. 12. 1), 『민족과 청년』, 227쪽.
27) 안호상, 『나라역사 육천년』, 한뿌리, 1987, 111쪽.
28) 위의 책, 259~260쪽.
29) 임승국 역, 앞의 책, 38쪽. 선군이라고 한 것은 단군을 임승국이 독음을 달리하여 읽은 것이다.
30) 위의 책, 166쪽.
31) 안호상, 앞의 책, 256쪽.
32) 「권력과 사이비 역사학 결합땐 심각한 폐해」, 연합뉴스 2016. 10. 9.
33) 「'78 문화계 분야별로 본 3대 이슈 (2) 학술」, 동아일보 1978. 12. 11.
34) 「국사광복… 이색 행정소송」, 경향신문 1978. 9. 29.
35) 이유립, 「국사 바로잡기 천년의 혈맥」, 『자유』 1978년 12월호, 34쪽에서 “그리고 그 문인 계연수 님에게 위탁하여 환단고기(桓檀古記)를 모아 발간하니 그 편차 내용과 범례는 이러하다”라고 쓰고 목차를 나열하였다. 이 목차에도 나중에 배달의숙본에서 추가한 「가섭원부여기」가 없다.
36) 「‘국사되찾기운동’ 역사관 오도하고 있다」, 동아일보 1978. 11. 24.
37) 문정창, 「민족사는 전체가 수호해야 한다」, 『자유』 1978년 12월호. 문정창은 이 글에서 한자는 한국인이 만들었고, 공자는 동이족이고, 백제가 중국 동남부를 지배했으며, 무녕왕릉 지석은 위조품이라고 주장했다. 이 내용은 경향신문 1978. 11. 29~30 양일간에 걸쳐 기사에도 실렸다.
38)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친일인명사전―친일문제연구총서 인명편 1(ㄱ~ㅂ), 796쪽.
39) 정확히 말하면 이 주장은 서희건이 한 것으로, 그가 문정창의 책을 잘못 인용하면서 벌어진 해프닝이다. 자세한 내막은 이문영, 『만들어진 한국사』, 파란미디어, 2010, 279~280쪽 참조.
40) 문정창, 『한국·슈메르·이스라엘의 역사』, 백문당, 1978.
41) 문정창, 『고조선사 연구』, 백문당, 1969. 필자는 재판된 『고조선사 연구』, 한뿌리, 1993, 322쪽에서 해당 내용을 확인했다.
42) 「전국역사학대회 25일 개최 ‘역사교육과제와 방향’ 주제로」, 동아일보 1971. 6. 24. 문정창은 「한국사학사론」을 발표했다.
43) 「우량도서 23종 선정 문공부」, 동아일보 1972. 12. 6. 문정창의 『한국고대사』는 제대로 된 역사책이라 보기 어렵다.
44) 문정창, 앞의 책, 1978.
45) 「인류 최초의 수메르 문명은 한민족 역사」, 주간한국 2011. 1. 5.
46) 문정창, 앞의 책, 43쪽, 62쪽.
47) 위의 책, 83쪽.
48) 위의 책, 152쪽.
49) 동아일보는 문정창의 책을 소개하면서 소호금천 씨가 수메르인의 한 갈래라고 썼다가 항의를 받고 수메르인이 소호금천 씨의 한 갈래라는 정정보도를 내기도 했다. 동아일보 1978. 11. 6.
50) 최동, 『조선상고민족사』, 동국문화사, 1966.
51) 문정창, 앞의 책, 1969, 317쪽.
52) http://www.businessinsider.com/a-decorated-scientist-has-ignited-a-passionate-debate-with-claims-that-the-founders-of-chinese-civilization-were-not-chinese-2016-10(접속일: 2017. 1. 22. 1:00). 위 『비즈니스 인사이더』 2016년 10월 8일자 기사는 중국의 화학자 선웨이동(孫衛東)이 중국문명이 이집트에서 기원했다고 주장했다는 내용과 함께 이런 주장의 뿌리에는 라쿠페리가 있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괴이한 주장도 세상에 한 번 나오면 잘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준다.
53) 브루스 링컨 지음, 김윤성·최화선·홍윤희 옮김, 『신화 이론화하기』, 이학사, 2009. 이 책은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그 기원을 트로이 등에서 잡고 있음을 소개하고 나치즘에서 신화를 어떻게 파시즘에 이용했는지 분석했다.
54) 문정창의 이런 주장은 그의 각종 글에 나타난다. 대표적으로 『고조선사연구』에서는 제3편 「한민족(漢民族)의 형성에 관한 연구」라는 챕터를 만들어 소개하고 있다.
55) 김선자, 『만들어진 민족주의 황제신화』, 책세상, 2007. 이하 내용은 이 책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56) 오구마 에이지 지음, 조현설 옮김, 『일본 단일민족신화의 기원』, 2003. 이하 내용은 이 책의 10장 「일본민족 백인설」을 정리한 것이다.
57) 에미시는 한자로 ‘蝦夷’라고 쓰는데 보통 아이누족을 가리키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라고 한다.
58) Levy Mcload, Korea and the Ten Lost Tribes of Israel, Yokohama: Published for the author partly at C. Levy and the Sei Shi Bunsha Co., 1879.
59) J. 스콧 버거슨, 『발칙한 한국학』, 이끌리오, 2002, 41~53쪽에서 이 책의 내용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60) 이 책이 간행된 것은 1893년이다. 강창일, 『근대 일본의 조선침략과 대아시아주의』, 역사비평사, 2003, 298쪽
61) 위의 책, 298~303쪽.
62) 러일전쟁과 아시아주의에 대해서는 박상수, 「동아시아 근대 ‘아시아주의’ 독법―계보, 유형, 층위」, 『아세아연구』 56(4), 2013. 12 참고. 아시아주의라는 용어의 역사에 대해서는 김채수, 「일본의 우익과 아시아주의」, 『일본문화연구』 20, 2006. 10을 참고.
63) 강창일, 앞의 책, 311쪽.
64) 위의 책, 177쪽.
65) 위의 책, 374쪽.
66) 문정창, 앞의 책, 1971, 35쪽. 농경문화인 동방족(선퉁구스)의 정착보다 수세기 뒤늦게 동하한 서방 서장족은 이제 황제 헌원의 승리로써 정복국가를 건설하여 중국 본토 내의 선주민인 동이족 일반의 통치자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67) 강창일, 앞의 책, 379쪽.
68) 위의 책, 352쪽.
69) 김종윤, 『한국인에게 역사는 있는가』, 책이있는마을, 2000은 중국에 있는 한족이 진짜 한국인이고 한반도 거주민은 원래 일본인이라고 주장한다.
70) “선생님의 일생에서 도약기를 꼽는다면 아마 서기 1930년 초반의 청년기에 입경하여 입회한 안순환이 세운 명교학원 시절이었을 것이다. 가전한 많은 서책의 섭렵과 운초, 벽산, 단재의 사관을 기초로 비로소 경향 각지의 학자들을 만나 폭넓게 교류하며 민족주의 사관 정립과 바른 국사찾기에 대한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양종현, 앞의 책, 342쪽.
71) 이 문제에 대해서는 윤종영, 『국사교과서 파동』, 혜안, 1999 참고.
72) 선도소설이라는 이름이 붙은 『단』과 같은 소설이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73) 「임지은 기자의 톡톡토크」, 『월간중앙』 2007년 2월호. 이 외에도 자신의 책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역사의아침, 2009)을 비롯하여 여러 매체에서 이야기한 바 있다.
74) https://www.youtube.com/watch?v=gFXpxV20C1o(접속일: 2017. 1. 22, 1:00). 2013년 10월 30일에 있었던 강연의 질의응답에서도 이덕일은 『환단고기』를 옹호했다. 이덕일은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김영사, 2002)에서도 “『환단고기』가 위서라고 받은 비판은 부당한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75) 실제로 일부 유사역사가는 『환단고기』를 인용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자신에게 면죄부를 발행하곤 한다.
76) 『환단고기』 「삼성기전 상편」.
77) 예를 든다면, 『환단고기』 「태백일사」 신시본기에서 “이에 다시 우리나라가 미진하고 우리 종족이 강하지 못함을 한스러워 한다”라고 말하고 “공물을 바치는 사신의 북행이 누백 년이 되어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니 책을 덮고 길게 탄식한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78) 브루스 링컨, 앞의 책, 232쪽.
역사비평 2017년 봄호(통권 제1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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