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서 비판에서 위서 연구로
관리자 2017-03-03 14:18 2528
위서 비판에서 위서 연구로
―일본 위서의 검토 및 한국 위서와의 비교
김시덕
1. 일본의 위서 1: 고사고전
1) 고사고전 이전의 일본 위서
‘고사고전’이라는 개념과 용어는 1970~80년대에 아고 기요히코(吾郷清彦), 사지 요시히코(佐治芳彦), 가시마 노보루 등이 야마토 왕조 이전 일본의 역사를 다루는 19~20세기의 위서군을 진실된 기록이라고 주장하면서 도입하였다.1) 이른바 ‘고사고전’에 속하는 위서들이 나타나기 전에도 일본에는 여러 종류의 정치·종교적 위서가 다수 제작되었다. 그중 저명한 것은 다음과 같다.
① 에도 시대까지 신뢰도라는 측면에서 『고사기』보다 우위라고 간주된 『선대구사본기(先代旧事本紀)』와, 이를 에도시대에 부연한 위서 『선대구사본기대성경(先代旧事本紀大成経)』.2)
② 이세진구(伊勢神宮) 게쿠(外宮)의 신관 와타라이(度会) 가문이 나이쿠(内宮) 신관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가마쿠라 시대에 위조한 『아마테라시마스 이세니쇼코타이진구 고친자시다이키(天照坐伊勢二所皇太神宮御鎮座次第記)』, 『이세니쇼코타이진 고친자덴키(伊勢二所皇太神御鎮座伝記)』, 『도요우케코타이진 고친자혼키(豊受皇太神御鎮座本紀)』, 『조이세니쇼타이진구 호키혼키(造伊勢二所太神宮宝基本紀)』, 『야마토히메노미코토세이키(倭姫命世記)』의 이른바 ‘신토5부서(神道五部書)’.3)
③ 이른바 ‘진구코고(神功皇后)의 삼한정벌’ 전승의 내용을 반대로 바꾸어, 신라가 일본을 침략해 와서 일본이 반격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하치만구도쿤(八幡愚童訓)』 갑류(甲類) 계통 문헌.4)
④ 『일본서기』 등 고대 역사서의 내용이 중세에 승려들 사이에서 구전되는 과정에서 불교 교리와 혼합하여 탄생한 ‘중세 일본기(中世日本紀)’ 문헌.5)
⑤ 일종의 예언서인 『미래기(未来記)』와 『야마타이시(野馬台詩)』.6)
한편, 근대 이후 성립한 위서들 가운데 고사고전에 속하지 않는 저명한 위서로서, 1959년의 이세만 태풍(伊勢湾台風)으로 담벽이 무너지면서 나타났다고 주장되는 센고쿠시대(戦国時代)를 다루는 『무공야화(武功夜話)』가 있다.7)
일본에서는 대체로 전근대 시기에 제작된 위서는 문학·역사·사상사학계의 연구 대상으로 다루어지고,8) 19세기부터 현재에 이르는 사이에 제작된 위서는 후지와라 아키라, 하라다 미노루(原田実) 등 대중 저술가에 의해 다루어지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양자는 상호의 연구성과를 존중하고 인용하는 경향을 보인다.
한국의 경우, 위서에 대한 연구로는 한영우의 일련의 성과, 1988년 『한국사 시민강좌』 제2집의 「고조선의 제문제」 특집, 경희대학교 한국고대사·고고학연구소 관련 연구자들이 주도한 2016년 『역사비평』 114·115·117호의 「한국 고대사와 사이비 역사학 비판」 특집, 그리고 20여 년간 온라인상에서 사이비역사학 신봉 세력과 논쟁을 전개한 소설가 이문영의 연구9) 등이 주목된다.
한영우는 현대 한국 학계에서 위서라 일컬어지는 문헌들이 대체로 19~20세기 사이에 성립된 것임을 인정하면서도, 그 근원에는 조선시대에 저술된 부분이 남아 있다는 추정을 하고 있으며,10) 이에 대하여 한국사학계에서는 비판이 제기되어 있다.11) 앞으로 이 논문에서 살펴보듯이, 핵심이 되는 옛 기록이 전혀 없이도 방대한 양의 위서가 탄생한 사례가 일본과 러시아, 미국 등지에서 다수 확인되기 때문에 필자는 한영우의 이러한 견해에 동의하지 못한다. 그러나 위서의 내용이 사실(史實)과 다르기 때문에 부인만 할 것이 아니라, 각각의 위서가 탄생한 사회적 의의를 학술적으로 검토해야 한다는 한영우의 입장은 주목되어야 한다.
2) 주요한 고사고전 문헌
‘고사고전’이란 오늘날 정사(正史)로 간주되는 『고사기(古事記)』, 『일본서기(日本書紀)』 등의 역사서가 다루지 않는 야마토 왕조 이전 시대를 대상으로 하는 여러 문헌을 가리킨다. 고사고전으로 일컬어지는 주요한 문헌의 개요를, 일본의 저명한 위서 연구자인 후지와라 아키라(藤原明)의 『일본의 위서(日本の偽書)』(文藝春秋, 2004) 26~27쪽에서 인용한다.
① 『호쓰마쓰타에(秀真伝)』: 4세기, 게이코 덴노(景行天皇)가 진다이(神代, 신화시대) 이래의 정치의 근본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편찬케 했다고 한다. 문헌 전체가 신대문자(神代文字, 진다이모지: 한자가 일본 열도에 소개되기 전부터 존재했다고 주장되지만 실제로는 에도시대 후기에 위조되었음이 증명된 문자체계)로 기록된 조카(長歌) 풍의 신화전설집이다(성립 상한 1775년[安永4], 성립 하한 1889년?).
② 『우에쓰후미(上記)』: 1223년(貞応2)에 분고(豊後) 지역의 슈고(守護)였던 오토모 요시나오(大友能直) 등이 편찬했다고 한다. 천지개벽부터 진무 덴노(神武天皇)가 야마토에 도읍을 정할 무렵까지의 역사를 신대문자로 기록한 것. 『고사기』와 『일본서기』에서 신대와 인대(人代)의 연결점에 위치하는 휴가(日向) 3대 최후의 신인 우가야후키아에즈노미코토(鵜草葺不合命: 진무의 아버지)에 대한 서술이 사실은 72대를 이어진 세습 왕통보(이하 ‘우가야 왕통보’라 칭함)라고 주장하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상한 분카·분세이[文化·文政, 1804-30년]?, 하한 1872년).
③ 『미야시타 문헌(宮下文献)』: 후지산 북동쪽 기슭에는 신대의 다카마가하라(高天原, 일본 신화의 판테온)가 있고, 그곳에는 이세진구보다 더 오래된 황실의 종묘 아소잔타이진구(阿蘇山大神宮)가 진좌해 있다. 미야시타 문헌은 그 신관의 후예인 야마나시현 후지요시다시(富士吉田市) 오아스미(大明見) 미야시타 가문의 역사를 중심으로 한 고기록·고문서로 구성되어 있다. ①이나 ②처럼 한 개의 문헌이 아니다. ②와 마찬가지로 우가야 왕통보가 존재하지만, 신황(神皇) 51대, 섭정 21대의 합계 72대라고 되어있는 등의 차이가 있다(상한 1863년[文久3]?, 하한 1886년).
④ 『다케우치 문헌(竹内文献)』: 엣추(越中) 지역에 신대의 도읍 다카마가하라가 있고, 그곳에 이세진구보다 더 오래된 황실의 종묘 고소코타이진구(皇祖皇太神宮)가 진좌해 있다. 다케우치 문헌은 그 신관의 후예인 도야마현 네이군(婦負郡) 신메이촌(神明村) 구고(久郷) 다케우치 가문의 역사를 중심으로 한 고기록·고문서로 구성되어 있다. ③과 마찬가지로 한 개의 문헌이 아니다. ②와 동일한 우가야 왕통보가 존재한다. 옛날 신대에는 일본이 세계를 지배하였으며, 예수 크리스트를 비롯한 전 세계 성자들이 일본으로 건너왔다는 등 파천황의 역사를 기록한다(상한 1892년? 하한 1922년).
⑤ 『아베 문헌(安部文献)』: 사절로서 당나라에 건너간 아베노 나카마로(阿倍仲麻呂)의 후예를 자칭하는 분고 지역 아베 가문에 전해온 문헌. ③이나 ④와 마찬가지로 한 개의 문헌이 아니다. ②~④와 마찬가지로 우가야 왕통보가 있고, 모세가 일본으로 건너왔다고 기록하는 점에서 ④의 방증이 되는 새로운 전설을 담고 있다(상한 1928년? 하한 1934년).
⑥ 『구키 문헌(九鬼文献)』: 아야베번(綾部藩) 번주였던 구키 가문에 전해져왔다고 주장된다. ③~⑤와 마찬가지로 한 개의 문헌이 아니다. ②~⑤와 마찬가지로 우가야 왕통보가 실려 있지만 각각의 대(代)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없다. ④만큼 명확하지는 않지만 신대에 일본이 세계를 지배했다고 해석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상한 1912년 또는 1932년? 하한 1940년).
⑦ 『쓰가루소토산군시(東日流外三郡誌)』: 쓰가루 이즈메(飯詰)의 촌장이라고 주장되는 와다(和田) 가문에 전해져왔다고 되어 있다. 에미시(蝦夷, 현재의 아이누인)의 후예를 칭하는 아베(安倍) 성(姓)의 안도(安藤, 安東) 가문의 역사를 기록한다. 야마토 조정이 성립하기 전에 에미시가 일본의 정당한 지배자였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①~⑥과 매우 다르다(상한 1965년, 하한 1971년).
3) 고사고전의 우가야 왕조설과 『환단고기』에 기록된 고대 왕조의 계보
이들 고사고전의 주요한 공통점은 다음과 같다. 우선, 신대문자로 기록된 문헌이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고대의 호족 가문에 비전(祕傳)되었다고 주장된다. 신대문자는 히라타 아쓰타네(平田篤胤, 1776~1843)의 『간나히후미노쓰타에(神字日文伝)』(1824년[文政7] 서문) 등을 그 시발점으로 하며, 이미 에도시대에 반 노부토모(伴信友, 1773~1846)가 『가나의 본말(仮字本末)』(1850년[嘉永] 간행) 등에서 위작임을 증명하였다. 그러나 한국의 일부 인사는 신대문자가 『환단고기』에 나오는 가림토문자를 베껴 만들었으며 조선 4대 국왕 세종이 참고한 옛 글자는 가림토문자나 신대문자라고 주장하기도 한다.12)
또한 다수의 고사고전은 신대와 진무 덴노 사이에 70여 대 이어진 우가야후키아에즈 왕조가 존재했으며, 이 왕조는 기상이변으로 인해 멸망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우연인지 아니면 일본 고사고전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는 확언할 수 없으나, 『환단고기』에 수록된 환국 7대, 신시배달국 18대, 단군조선 47대를 합치면 72대가 된다. 고사고전에서 우가야후키아에즈 왕조설이 등장하게 된 이유는, 『일본서기』 권3에서 휴가 3대를 설명하면서 “하늘에서 신이 강림한 이래 지금까지 1,792,470여년이 흘렀다(自天祖降跡以逮于今一百七十九萬二千四百七十餘歲)”라고 기록한 대목을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일본의 국체를 찬미하는 당시의 국가주의자들 사이에는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보이는 이 불가사의한 문장이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황당무계한 문헌으로 간주하는 바람직하지 못한 학설의 온상이 되고 있다고 우려하는 움직임도 있었다. 휴가 3대의 마지막 신이 사실은 72대에 걸친 왕통이었다고 주장하는 『우에쓰후미』의 기술은 이 난제를 해결하는 복음으로 그들에게 받아들여졌다.”13)
이렇게 하여 고사고전에 등장한 우가야 왕조설은 1989년에 고려원에서 간행된 『한국상고사입문』이라는 사이비역사학 계열 문헌을 통해 한국에도 소개된 바 있다.14) 이 책은 이병도와 최태영의 공저로 되어 있는데, 그 진위에 대하여는 출간 이후 논란이 이어졌다. 법학자였다가 역사학자를 자칭하게 된 최태영은 자신의 회고록 『인간 단군을 찾아서』(학고재, 2000)를 비롯하여 언론 인터뷰 등에서, 자신이 이병도를 “올바른” 역사관으로 “개과천선”시켜서 이 책을 공동 집필했다고 주장하였다. 일부 인사들은 『조선일보』 1986년 10월 9일자에 실린 이병도의 「단군은 신화 아닌 우리 국조」라는 기사를 이러한 개과천선에 따른 사죄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사이비역사학계의 주장에 대하여는 이병도 제자 그룹의 반대 증언이 존재하며,15) 학술적으로는 이문영의 반박16)이 유효하다. 필자는 이병도가 『한국상고사입문』를 집필하였다는 위서론자들의 주장을 부정하며, 이러한 주장은 신채호가 『단기고사』의 중간서(重刊序)를 썼다는 설17)과 마찬가지로 거짓이라고 판단한다.
아무튼, 이처럼 우가야 왕조설이 한국의 위서론자들에게 환영받은 한편, 한국의 대표적인 위서 『환단고기』는 일본인이 유라시아 서쪽에서 일본 열도로 이동했다고 주장한 가시마 노보루(鹿島曻, 1926~2001)에게 환영받아 일본어판이 간행되기도 하였다. 최태영과 마찬가지로 법률가였다가 고대역사에 관심을 갖게 된 가시마 노보루는 『환단고기―실크로드 흥망사(桓檀古記: シルクロード興亡史)』(歴史と現代社·新国民社, 1982)를 간행한 이후 일본인=유대인 동조론(日猶同祖論)을 주장한 『일본 유다야 왕조의 수수께끼(日本ユダヤ王朝の謎)』(新国民社, 1988)을 비롯하여 여러 권의 위서 옹호 서적을 집필하였다.18)
4) “소실된 원본”이라는 개념의 공유
고사고전의 옹호자들은 이들 문헌이 덴노 가문이나 무가(武家) 권력 등에 의해 탄압받아 사라질 뻔했으나 특정 집단에 의해 비전되다가 근대 이후에 다시 나타난 것이라고 주장한다. 13세기에 성립했다고 주장되는 『우에쓰후미』의 경우, “서문에 의하면 1223년 3월, 신대문자로 기록된 ‘황어국의 옛 일(皇御国の古事)’이 감춰지고 멸실될 것을 우려한 분고 지역의 슈고 오토모 요시나오가 후계자인 지카히데(親秀) 및 아사쿠라 노부미쓰(朝倉信舜) 이하 7명의 가신을 기용하여 신대문자로 기록된 옛 기록을 수집케 하고 편찬에 착수한 것”19)이다. 그리하여 신대문자로 기록된 고문헌들은 사라지고 『우에쓰후미』만 남아서 수백 년간 비전되다가 메이지 시대에 나타났다고 하는 것이다.
원본이 사라졌기 때문에 전승 과정의 검토가 불가능함에도 그 내용은 진실된 것으로 믿어져야 한다고 주장되는 위서는 전 세계에서 널리 확인된다. 이런 문헌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예수그리스도 후기성도교회의 성경인 『몰몬경(The Book of Mormon)』일 것이다. 북아메리카에 묻혀 있던 『몰몬경』의 원본은 천사가 가져갔고, 영어 번역본만 지상에 남게 되었다고 주장된다.20) 또한 20세기 후반에 미국에 망명해 있던 러시아인 그룹에서 슬라브 민족의 찬란한 고대를 전한다고 주장하는 위서 『벨레스서(Велесова книга)』가 날조되었다.21) 『벨레스서』나 방대한 분량을 자랑하는 20세기 후반의 위서 『쓰가루소토산군시(東日流外三郡誌)』 등의 사례를 통해, 20세기 후반에도 고대사를 다루는 위서가 완전히 무(無)로부터 날조된 사례가 많으며, 따라서 전근대의 고문헌이 그러한 위서 안에 어떤 형태로 남아 있으리라고 상정할 필요는 없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한편, 신라의 박제상(朴堤上)이 지었다고 가탁되는 『부도지』의 경우는 원본을 북한에 두고 남하한 사람이 1950년대에 기억을 더듬어 복원했다고 주장되고,22) 역시 신라의 김대문(金大問)이 저술했다고 주장되는 『화랑세기』는 일본 궁내청 서릉부에 있던 원본을 필사한 것이라고 주장되는 필사본이 1989년에 나타난 바 있다.23) 『부도지』의 원본은 북한에, 『화랑세기』의 원본은 일본 궁내청 서릉부에 있기 때문에 원본 확인이 불가능하다고 주장되는 점이 일본·미국·러시아의 여러 위서를 둘러싼 주장과 상통한다.
5) 위서 비판을 넘어 위서 연구로
일본의 고사고전이나 한국의 위서에 대해 기존의 양국 학계는 주로 그 내용의 진위 여부에만 관심을 갖고 위서를 비판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또 한편에서는 이들 위서가 성립한 19~20세기의 사회적 배경과의 관련에서 위서의 형성 과정을 고찰하려는 움직임 역시 적지 않게 있었다. 위서를 학술적 대상으로 간주하는 이러한 움직임이 위서를 옹호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필자는 이러한 동향을 위서를 둘러싼 논쟁을 단순히 고대사학계의 문제에서 한 차원 진전시켜는 시도로서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한국의 위서에 대하여도 한국사학계뿐 아니라 문학·사회학·정치학 등에서 좀 더 다양하게 검토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지니고 있다. 후지와라 아키라의 말을 인용한다.
기존에 위서에 관한 서적이라고 하면 대부분은 진본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위서가 말하는 역사 로망에 자신의 의견을 덧붙여 가일층 공상의 세계를 창조한 것과, 위서의 진위만을 거론하는 규탄조의 것으로 대별된다. 전자는 논외이지만, 후자에 대해서도 완전히 납득할 수는 없다. 위서가 엉터리라는 것은 그 문헌이 발견된 당초에는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 자명해진다. 따라서 진위만을 논하는 것은 불모하다. 여기서 말하는 규탄조의 위서론을 전개하는 사람들은, 위서에 속는 사람들의 미몽을 깨워야 한다는 계몽적 사명감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단순히 위서의 내용이 엉터리라고 논하는 것만으로는 위서를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 효과가 없다. (…) 정말로 필요한 것은, 위서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 역시 하나의 역사적 사실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것이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를 명징한 눈으로 분석하고 학문 체계 속에 위치시키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작업을 행하면 위서를 믿는 사람들 가운데는 진실에 눈뜨는 사람도 전부는 아니라고 해도 나타날 터이고, 학자들 중에도 위서에 학문적으로 접근하려는 사람이 나타날지 모른다. 역사학의 세계는 차치하더라도, 최근 문학계에서는 중세라는 시대에 한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위서 문제에 접근하려는 연구자들이 늘고 있다. 근대에 대두한 “고사기·일본서기 이전의 문헌”이라 칭해지는 위서에 대하여도, 종전의 “초고대사”, “고사고전”이라는 비학문적 레테르를 제거하고 학문적 대상으로 삼는다면, 근미래에는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그러한 날이 찾아오리라 생각된다.24)
3. 일본의 위서 2: 요시쓰네 에조치 도해설
1) 요시쓰네 에조치 도해설에 대하여
요시쓰네 에조치 도해설이란, 가마쿠라 막부를 세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 1147~1199)의 동생인 미나모토노 요시쓰네(源義経)가 오늘날의 이와테현에 자리한 고로모가와노타치(衣川館)에서 형에 의해 살해된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북방으로 도주하여 오호츠크해 연안 지역에서 살아남았다는 주장이다. 이 설에 대하여는 다른 곳에서 검토한 바 있으므로 상세한 소개를 생략하고,25) 여기서는 간단히 정리한다. 요시쓰네가 어렸을 때 북방의 오니(鬼) 나라에서 병법의 비전을 가져왔다는 전승이 중세에 있었다. 1669년에 아이누인 샤크샤인(saksaynu 또는 Samkusaynu)이 일본인의 지배에 저항하여 봉기를 일으키자, 이에 위기감을 느낀 도쿠가와 막부 측에서 이 전승에 착목했다. 그리하여 요시쓰네는 고로모가와노타치에서 사망한 것이 아니라 아이누인의 땅으로 건너가 그들의 왕이 되었다는 것이다. 초기 전승에서는 요시쓰네가 건너간 것이 오늘날의 홋카이도로 되어 있었으나, 홋카이도에 대한 일본인의 지배가 확립되면서 요시쓰네가 활동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이 사할린으로 옮겨갔고, 그가 금나라의 신하가 되었다는 주장을 담은 위서 『금사별본(金史別本)』 및 요시쓰네의 후손이 청나라를 세웠음을 청나라 황제가 직접 밝힌 『도서집감(図書輯勘)』이라는 문헌이 『고금도서집성』에 수록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모리 나가미(森長見)의 『국학망패(国学忘貝)』(1783) 등이 나타나면서 요시쓰네의 전설속의 도피처는 대륙으로 옮겨갔다.
2) 오야베 젠이치로 『칭기즈칸은 미나모토노 요시쓰네이다』
메이지 시대가 되면 영국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하던 스에마쓰 겐초(末松謙澄, 1855~1920)가 ‘칭기즈칸은 요시쓰네와 동일인물’이라고 주장하는 책 The Identity of the Great Conqueror Genghis Khan with the Japanese Hero Yoshitsune: an Historical Thesis』(W.H. and L. Collingridge: London, 1879)를 간행한다. 이 문헌이 『요시쓰네 재흥기(義経再興記)』(競錦堂, 1885)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일본에서 간행되면서 요시쓰네=칭기즈칸 설이 일본에 나타난다. 그리고 이 설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킨 것이 오야베 젠이치로(小谷部全一郎, 1868~1941)이다.
오야베 젠이치로는 1885년에 홋카이도에서 비참한 삶을 영위하는 아이누들과, 그들을 상대로 선교사업을 하는 서양인 선교사들을 보고 느낀 바 있어 1888년에 미국에 유학한다. 1895년에 예일대 신학부를 졸업한 뒤 1898년에 귀국하여 아부타학원(虻田学園)을 창립하는 등 교육 활동에 전념하였으나, 학교는 곧 재정곤란으로 휴교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1919년에 러시아혁명 당시 백군 측을 후원한 일본 육군을 따라 통역관으로서 대륙에 건너간 오야베는 그곳에서 요시쓰네의 흔적을 찾으려 하였고, 마침내 찾았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1920년에 귀국하여 1923년에 완성한 것이 『칭기즈칸은 미나모토노 요시쓰네이다(成吉思汗ハ源義経也)』(富山房, 1924)이다.
이 책이 대히트를 기록하자, 당대 일본의 저명 학자와 저술가가 집결하여 『중앙사단(中央史壇)』 10권 2호(国史講習会, 1925)에 특집 「칭기즈칸은 미나모토노 요시쓰네가 아니다(成吉思汗は源義経にあらず)」를 기획함으로써 이 주장이 학술적으로 자리 잡을 여지를 원천봉쇄하였다.26) 폭발력 있는 위서가 등장하자 곧바로 학계에서 반격에 나선 것은, 1986년에 임승국 번역·주해라는 명목으로 정신세계사에서 『한단고기』가 간행되자 1988년에 『한국사 시민강좌』 제2집 「고조선의 제문제」 특집이 기획된 것과 비교된다. 다음은 이기백의 서문 중 일부이다. “제2집은 예고했던 바와 같이 고조선의 문제를 특집으로 엮었다. 최근 고조선의 문제는 많은 논의의 대상이 되어왔고, 따라서 우리 시민들도 적지 않은 궁금증을 가지고 있을 것으로 믿는다.”27) 다만, 일본에서는 『중앙사단』을 통한 맹공격 이후 위서 및 가짜 역사가 학계에 침투하는 일이 거의 없어졌지만, 한국에서는 『한국사 시민강좌』를 전후하여 『규원사화』, 『단기고사』, 『화랑세기』, 『환단고기』 등 여러 위서의 전체 또는 일부를 사실(史實)이라고 간주하는 연구자가 지속적으로 나타났으며, 최근에는 사회 각 분야에서 후원자를 발견하여 국내외에 영향력을 미치기에 이르렀다.
3) 위서 성립의 신종교적 배경
이 논문의 논의와 관련하여 오야베 젠이치로가 남긴 저술은 다음과 같다. 『칭기즈칸은 미나모토노 요시쓰네이다(成吉思汗は源義経也)』(富山房, 1924)는 ‘요시쓰네=칭기즈칸설’ 유행의 기폭제가 되었다. 『일본 및 일본 국민의 기원(日本及日本国民之起源)』(厚生閣, 1929)은 ‘일본인=유대인 동조설’을 유행시켰다. 『요시쓰네와 만주(義経と満洲)』(厚生閣書店, 1935)는 제국주의 일본의 만주 정복에 호응하는 내용이다. 『순 일본부인의 추억(純日本婦人の俤)』(厚生閣書肆, 1938)은 아내의 삶을 논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담은 자서전적 문헌으로,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뒤의 고생담과 『칭기즈칸은 미나모토노 요시쓰네이다』의 성립 과정이 밝혀져 있다.
이상의 저술 가운데 『일본 및 일본 국민의 기원』은 ‘일본인=유대인 동조설’을 주장한 문헌으로 저명하다. 예일대학 신학교를 졸업한 그는 한국인과 일본인이 유대의 잃어버린 10지파임을 믿고 그 증거를 찾기 위해 이들 지역에 선교사로 파견되어 온 니콜라스 맥러드(Nicholas McLeod, 1868~1889)28)의 저술 등을 접하면서 이러한 주장을 하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주장의 영향을 받아, 잃어버린 10지파 가운데 단 지파가 한국인이 되었으며 단군이 바로 그 증거라고 하는 주장도 영생교 등의 한국 크리스트교 계열 일부 신종교(新宗敎)에서 제기되고 있다.29)
한편, 일본인=유대인 동조설을 신봉하는 유대인 랍비 가운데 저명한 인물이 마빈 토케이어(Marvin Tokayer, 1936~ )이다. 그가 일본에서 간행한 『유다야와 일본―수수께끼의 고대사(ユダヤと日本 謎の古代史)』(産業能率大学出版部, 1975), 『성서에 감춰진 일본=유다야 봉인된 고대사―잃어버린 10부족의 수수께끼(聖書に隠された日本·ユダヤ封印の古代史―失われた10部族の謎)』(徳間書店, 1999) 등의 저서에서는 일본인=유대인 동조설이 긍정된다. 이와 동시에 마빈 토케이어는 탈무드를 쉽게 풀이한 『유다야 5천 년의 지혜―성전 탈무드 발상의 비밀(ユダヤ5000年の知恵―聖典タルムード発想の秘密)』(実業之日本社, 1971)과 같은 문헌도 출간하여 히트했다. 그가 일본인을 대상으로 쓴 『탈무드』 해설서가 해적판 번역을 통해 한국에 소개되어 오늘날까지도 한국에서 인기를 끌기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이 밖에 『다케우치 문헌』이나 『아베 문헌』 등은 예수·모세 등의 현자들이 일본으로 건너왔다고 주장하며, 그런 주장에 근거하여 아오모리현에는 헤라이촌(戸来村, 현재는 신고촌新郷村)과 헤라이산(戸来岳)에 각각 위서에 따라 예수 무덤이 조성되어 있다. 특히 헤라이산에 예수 무덤이 있다고 주장한 야마네 기쿠(山根キク)는 사회주의 계열의 정치가이면서 예수가 일본에서 죽었다는 주장을 전개한 점이 독특하다.30)
이처럼 위서의 성립에는 종교적인 배경이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 앞서 살핀 『몰몬경』이 그렇고, 러시아에서 위조되었으며 옴 진리교의 내부 세력에 이용되기도 한31) 반유대주의 문서 『시온 장로 의정서(Протоколы сионских мудрецов)』가 그러하며, 박태선 장로의 천부교에서 성립한 『격암유록』이 그러하다. 『격암유록』 성립의 종교적 배경에 대하여는 최중현의 연구가 참고가 된다.32) 최중현의 연구가 시사하는 것은, 위서라 할지라도 그 나름대로의 형성 과정을 거치며 그 배경에는 특정 집단의 의지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를 진짜냐 가짜냐로 재단하기 이전에 위서의 형성 과정과 배경을 신중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이다.
4. 일본 위서의 연구성과를 한국 위서 연구에 어떻게 이용할 수 있을까
1) 한반도 주민이 고대 일본열도를 지배한 증거가 말살되었다는 주장
위에서 19세기 중기부터 오늘날까지 일본에서 발현된 각종 위서 및 기설(奇說)을 살피고, 현대 한국의 동일 현상과 비교를 시도하였다. 그런데 현대 한국의 위서 및 기설 가운데는, 한때 일본이 한반도 국가들의 식민지였고 ‘한국인’ 내지는 ‘한국 문화’가 일본인 내지는 일본 문화의 기원이었다는 주장이 존재한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즐겨 인용하는 근거가 기타바타케 지카후사(北畠親房, 1293~1354)의 『신황정통기(神皇正統記)』에 나오는 다음 구절이다.
외국의 어떤 책에 “일본은 오나라 태백의 후손이라고 한다”라고 적혀 있다. 전혀 맞지 않는 일이다. 옛날에 일본은 삼한과 동종(同種)이라고 한 책이 있었는데, 간무 덴노(桓武天皇, 737~806) 치세에 불태워버리셨다. 천지가 개벽한 뒤에 스사노오노미코토께서 삼한 땅에 가셨다는 등의 이야기가 있으므로 그 나라도 신의 후예일 것이라는 이야기는 그다지 이상하지 않을 터.33)
위의 문장을 잘 읽으면, 기타바타케 지카후사는 스사노오노미코토(素戔男尊)가 아들 이소타케루(五十猛神)와 함께 신라로 가서 정착하려다가 되돌아왔다는 『일본서기』 「신대권(神代巻)」 중 일서(一書)의 내용을 언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스사노오 등이 신라로 건너간 적이 있으므로 한반도 주민과 일본인이 동족이라는 주장은 기타바타케 지카후사를 시작으로 20세기에는 가나자와 쇼자부로(金沢庄三郎, 1872~1967)의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刀江書院, 1929)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이어진다.
그러나 한국 측에서는 위의 인용문이 일본인에 의한 고대사 인멸을 증거하는 서술로 인식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한국인과 일본인이 동족이라는 주장으로부터, 일본의 모든 것이 한국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이 탄생한다. 심지어 고대 한반도 주민이 일본을 지배했다는 증거로서 제시되곤 하는 전방후원분이 서울권역에서 발견되었으나 ‘식민사학계’가 이를 파괴하고 있다는 주장까지 제기된 바 있다. 일각에서 전방후원분이라고 주장했던 돌산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아무런 유물도 나오지 않았다는 보고가 있었지만,34) 일본에 대한 열등감을 해소하고자 하는 일부 세력에게는 이러한 발굴 조사 역시 ‘식민사학자’들의 음모로 인식될 뿐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확인되는 집단심리는, 서구 세력에 대한 열등감을 해소하기 위해 모세 등이 일본에 건너왔고 일본이 세계를 지배했다는 내용을 『다케우치 문헌』에 수록하고 모세의 십계명과 피라미드 실물을 날조했던35) 일본 위서론자들의 심리에 비견된다.
한편, 가나자와 쇼자부로가 『일선동조론』에서 전개한 바, 언어학적 비교를 통해 한반도와 일본 열도 주민의 관련성을 추적하는 방식은 그가 처음 창안한 것이 아니었다. 이에 대하여는 에도시대 유학자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 1657~1725)의 『동아(東雅)』(1717년[享保2] 성립), 에도시대 고증학자 도 데이칸(藤貞幹, 1732~1797)의 『쇼코하쓰(衝口発)』(1781년[天明元] 간행) 등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특히 도 데이칸은 『동국통감』을 활용하여 고대 일본 문화의 상당수가 고대 삼한에서 비롯되었으므로 이들 요소를 제거해야 순수한 고대 일본적 요소가 남는다고 주장하였고, 이러한 주장이 히라타 아쓰타네의 스승격인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 1730~1801)의 격분을 샀다는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36)
가나자와 쇼자부로는 이러한 에도시대의 학설을 계승하면서, 미나모토노 요시쓰네가 아이누인의 조상이 되었다는 주장, 그리고 미나모토노 다메토모(源為朝)가 류큐왕국의 건국시조가 되었다는 일본=류큐동조론(日琉同祖論)과 마찬가지의 방법론을 조선에 적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일선동조론』 제2장 「민족의 이동(民族の移動)」에서는 훗날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가 『기마민족국가(騎馬民族国家)』(中公新書, 1967)에서 주장한 것과 마찬가지로 유라시아대륙의 기마집단이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이주했다는 주장도 확인된다. 아라이 하쿠세키에서 도 데이칸을 거쳐 가나자와 쇼자부로, 에가미 나미오로 이어지는 일본 학계의 흐름을 검토하는 것은, 이들 학파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근현대 한국의 위서 신봉 세력을 연구하는 데 참고가 될 것이다.
2) 위서의 내용을 진실로 믿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기마민족설이 지금도 한국 사회 전반에서 사실로 믿어지고 있는 것에서 보듯이, 그리고 홍산문화권에서 발굴되는 유적・유물을 삽화로 이용하면서 『환단고기』가 새로이 해석되고 선전되는 데서 보듯이,37) 현대 한국에서는 여전히 사이비역사학과 위서가 사회적으로 무시하지 못할 영향력을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영향력이 확대되고 있다. 이는 일본에서 더 이상 위서가 만들어지거나 사회적으로 물의를 빚을 정도로 힘을 떨치지 않게 된 것, 그리고 한때 나치 독일에서 진정한 역사를 담았다고 숭앙된 『오에라 린다의 책(Thet Oera Linda Bok)』38) 등이 현재 거의 잊혀진 것과는 대조적인 현상이다.
현대 한국에서 계속 사이비역사와 위서가 만들어지는 원동력의 하나로, 일본과 ‘실패한 근대’에 대한 분노와 열등감이 일부 집단에서 여전히 뜨겁다는 사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열등감을 해소하기 위해, 한때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든 일본의 지배집단인 덴노 가문의 기원을 백제라고 하거나, “차이나가 조선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례 등이 속출하고 있다.39) 서구 세력에 대한 일본인의 개인적·집단적인 열등감이 세계를 지배한 칭기즈칸을 일본인으로 뒤바꾸었다면, 일본·중국에 대한 한국의 열등감이 일본 덴노를 백제 왕실로 만들고, 중국을 한국으로 뒤바꾸려는 시도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 21세기 한국의 현실이다.
이처럼 열등감의 산물로 만들어진 위서와 가짜 역사는 실제 역사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남몽골(내몽골) 독립운동 세력이 관동군과 연합하여 설립한 몽골군유년학교 교재로 1939년에 작성된 「몽고군유년학교교육참고자료(蒙古軍幼年学校教育参考資料)」의 목차를 보면, 마지막 제9집에 요시쓰네=칭기즈칸 설이 등장한다.
제9집 어느 전장의 칭기즈칸(或る戦場の成吉思汗)의 모두에는 「요시쓰네의 꿈(義経の夢)」이라는 항목이 있다. “요시쓰네 설을 주장하는 사람은 히요도리고에(鵯越) 전술을 다시 한 번 중앙아시아의 사막지대에서 연출했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 일본인 교관들은 “칭기즈칸은 요시쓰네이다”라는 전설을 말하면서 ‘일몽친선(日蒙親善)’을 꾀했지만, 몽골인들은 극단적으로 이 담론을 싫어했다. 민족의 개조(開祖)를 식민지 종주국의 고대 인물과 연결시킨 담론이 피지배자를 불쾌하게 한 것이다.40)
20세기 전기에 동부 유라시아에서 활동한 일본인들은 요시쓰네가 칭기즈칸이 되었다는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남몽골 현지의 몽골인들을 불쾌하게 하였다. 만주와 시베리아에 대한 이들 일본인의 로망은 현대 한국으로 이어져, ‘한민족의 기원’을 찾기 위해 시베리아와 몽골에서 사업을 전개하는 한국인을 낳았다.41)
이 논문에서 검토한 근현대 일본과 한국의 위서 현상은, 이들 위서를 신봉하는 세력이 현실과 열망의 경계를 명확히 인식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근대 일본의 경우 서구 세계에 대한 열등감이, 근현대 한국의 경우 일본과 ‘실패한 근대’에 대한 분노가 위서 탄생의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 이들에게는 ‘바람직한 역사’라는 당위가, 기존에 학계에서 설명해온 ‘실제 그러했다고 논증되는 역사’를 대체해야 한다고 인식된다. 그런 의미에서 위서 연구는 위서가 다루는 시기인 고대나 선사시대를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질 뿐 아니라, 위서가 형성되고 유행하는 근현대 시기를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해서도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위서의 유행이 일종의 사회적 현상이라는 점에서, 역사학뿐 아니라 문학·사회학·정치학 등의 분야가 학제적으로 위서 연구를 진행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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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비평 2017년 봄호(통권 제11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