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비 역사학과 역사 파시즘 1
관리자 2015-11-16 21:28 5196
사이비 역사학과 역사 파시즘 1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강사 기경량
2015년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와 역사 파시즘
《연합뉴스》2015년 10월 12일
박근혜 정부는 2015년 10월 12일 한국사 교과서의 국정화 전환 방침을 발표하였다. 이는 정권 초인 2013년부터 기획된 것이다. 당시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등장하여 큰 논란이 되었던 교학사 출판 한국사 교과서는 채택률 0%대를 기록하며 일선 교육 현장으로부터 철저하게 외면당하였다. 내용의 부실함과 관점의 지나친 우편향이 그 이유였다. 검인정 체제 하의 경쟁 구도 내에서는 자신들의 관점이 투영된 교과서의 영향력을 확산시키는 게 기대난망이라는 것을 깨달은 정부는 방향을 틀어 국정화를 추진하게 된다.
서남수 교육부 장관이 2015년 교육과정 개정안 총론을 고시하는 과정에서 한국사 교과서의 국정화 문제를 공론화할 수 있다고 10일 밝혔다. 정홍원 국무총리와 여당 의원들이 잇따라 제기해 논란이 된 ‘역사 국정교과서 회귀’ 문제에 대해 교육부 장관이 직접 공론화의 불씨를 댕긴 것이다.…… “2015년에 교육과정 개정안 총론을 고시할 예정으로, 이미 관련 작업을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경향신문》2013년 12월 10일, 〈“국사 국정교과서 2015년 공론화” 서남수 교육 밝혀… 논란 예고〉
국정화의 명분은 현행 국사 교과서의 내용이 지나치게 좌편향 되어 있어 도저히 용납할 수 없으며, 교과서 서술의 기준과 방향을 제시하는 역사학계 또한 절대 다수가 좌편향 되어 있어 자정 작용마저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주장을 뒤집어 생각하면 역사학계 구성원 대다수는 검인정 체제 하에서의 한국사 교과서가 좌편향이라는 데 동의하지 않으며, 좌편향 운운하는 주장을 하는 이들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정부는 국가 권력을 동원해 소수 의견을 정설화하고, 표준화하겠다는 것이다.
《한겨레신문》2015년 10월 18일
정부와 여당 정치인, 그리고 이들과 부합한 일부 학자들이 한국사 교과서의 국정화 전환을 추진하며 쏟아낸 발언들을 보면 그야말로 폭력 그 자체이다. 과도한 자기 확신과 정치적 편향성을 바탕으로 역사학계 다수를 ‘절대악’이자 ‘적’으로 설정하고 그 어떤 이견의 가능성도 차단하고 있다는 점에서 강한 공격성과 배타성을 띠고 있다. 국가 권력을 동원해 역사 해석의 권리를 소수 집단이 독점하고, 학계 전반을 ‘비정상’과 ‘좌파’라는 이미지로 매도하며 대중 선동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는 ‘역사 파시즘’이라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역사학을 위협하고 있는 ‘파시즘’은 이뿐만이 아니다. 역사학계에 대한 다른 방향에서의 공세가 존재하며 그 뿌리 또한 매우 깊다.
1974년 국사 교과서 국정화와 역사 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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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교육강화위원회의 설치 《경향신문》1972년 5월 11일(좌) |
국사 교과서 국정화 전격 발표 《경향신문》1973년 6월 23일(우) |
1972년 5월 11일 박정희 정부는 ‘교육의 국적을 찾자’는 대통령의 제창에 따라 문교부 산하에 국사교육강화위원회를 설치하였다. ‘민족’을 중심으로 한 역사 교육을 실시하겠다는 것이었다. 대학예비고사에 국사를 독립 과목으로 출제하는 한편 대학에서도 국사 교육을 의무화하겠다는 구체적인 정책도 발표되었다. 그해 10월에는 유신 헌법이 제정되며 박정희 1인의 독재 체제가 구축되었다.
박정희는 다음해인 1973년 6월 23일 또 다른 국사 교육 정책을 발표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줄곳 검인정 체제 하에 있었던 국사 교과서를 국정화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명분은 학생들이 ‘주체의식과 올바른 국가관 확립’을 할 수 있도록 도모하고 다수의 교과서로 인해 발생하는 입시의 혼란을 고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가장 큰 목적은 결국 새로 출범한 유신 체제에 대한 선전과 정당화에 있었다.
역사학자와 역사 교사들은 모두 국정화에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동아일보》1973년 6월 25일
국사 교과서 국정화 조치에 대한 역사학계와 교육계의 반응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역사 교육의 획일화를 가져온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하지만 정부는 이러한 학계의 여론을 무시한 채 1974년부터 국정화된 국사 교과서를 교육 현장에 배포하였다. 그런데 이는 생각지도 못한 방향에서 파문을 일으키게 된다.
1974년 7월 25일 재야 역사 단체였던 한국고대사학회(회장 안호상)는 국정 국사 교과서가 단군을 신화로 규정하여 한국사의 범위를 위축시키고, 일제의 식민지 사관을 그대로 도습한 역사 교육을 강요하고 있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다음날인 26일에는 재건국민운동 중앙본부에서 ‘국사 교과서 평가대회’를 개최하며 공개적인 비판의 자리를 마련하였다.
사이비 역사학이 대두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전 문교부 장관 안호상
이러한 활동의 중심에는 안호상이 있었다. 안호상은 대한민국 초대 문교부 장관을 지냈으며, 이승만 정권 하의 통치 이론인 ‘일민주의(一民主義)’를 제시한 인물이다. 나치의 유겐트를 모델로 삼았다고 비판 받은 바 있는 ‘학도호국단’을 발족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는 독일에서 철학을 전공하여 박사 학위를 취득한 바 있으나 역사를 전공하지는 않았다. 다만 단군과 고조선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그가 이른 나이에 대종교에 입교하여 평생 단군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중의 일이지만 그는 말년인 1992년에 대종교의 최고직인 총전교 자리에 오르기까지 한다.
당시 국정 국사 교과서는 고조선 부분의 서술에서 “단군은 제사장이라는 뜻이며, 왕검은 정치적 군장을 뜻하는 것”이라 설명하고, “단군 왕검은 곧 제정 일치 시대의 족장”이었다고 하였다. 안호상 등은 이러한 국사 교과서의 서술에 강한 불만을 표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단군은 경배해야 마땅할 한국인의 시조이자 위대한 사상의 시원이었다. 따라서 국사 교과서에서 단군이 미발달 사회의 일개 족장 정도로 묘사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안호상 등은 1975년 10월 8일 ‘국사찾기협의회’를 결성하여 기존 역사학계에 대한 전방위적인 공세를 펼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대변지인 《자유》에 역사학계를 비난하는 글들을 연이어 실었는데, 그중에는 욕설에 가까운 인신공격도 매우 많았다. 특히 1978년 9월 29일에는 국가를 상대로 국정 국사 교과서의 내용 정정을 청구하는 행정 소송을 벌여 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물론 역사학계도 가만히 있었던 것만은 아니다. 1978년 11월 23일 역사학 관련 10개 학회 대표들이 모여 국사찾기협의회가 비과학적인 주장으로 국민을 오도하는 일체의 행위를 중지할 것을 촉구하는 경고 성명서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성명서를 발표하는 역사학자들의 모습(《경향신문》1978년 11월 24일)
이들은 국사찾기협의회에 가입된 재야인사들이 ①한자를 한국인이 만들고, ②공자 맹자도 배달겨레의 후손이며, ③백제가 4백년간 중국 중남부를 통치하고, ④공주 무령왕릉은 백제사를 왜곡키 위해 위조품을 미리 묻었다는 등 상식 이하의 기발한 주장을 선전하고 다닌다며 이 같은 현상은 한국 문화의 후진성을 드러내는 부끄러운 일이라고 개탄했다.
무령왕릉을 발굴했던 김원용 교수는 “재야 인사들의 잦은 시비가 너무나 허무맹랑한 낭설이라 그동안 학계는 관여치 않았으나 문예진흥기금으로 발간되는 《자유》지가 전국 곳곳에 나가 국민을 오도함이 지대하므로 학계가 더 이상 보고 있을 수만은 없어 나서게 된 것”이라고 털어 놓았다.
《경향신문》1978년 11월 24일, 5면 〈소송 제기에 경고 성명 맞서-2라운드에 접어든 국사논쟁〉
이 시기 안호상 등은 쇼비니즘에 입각한 비상식적인 주장들을 다수 제기하였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것이 무령왕릉 조작설이다. 무령왕릉은 1971년 발견된 백제 고분이다. 도굴이 전혀 되지 않은 채 백제 때 모습 그대로 발굴이 이루어져 화려한 금제관식과 금귀걸이 등 수많은 유물이 수습된 바 있다. 무엇보다 무덤의 주인을 밝히는 묘지석이 출토되어 학자들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하지만 중국과 일본에까지 영토가 뻗어 있는 ‘대제국’ 백제를 상정하고 있던 이들에게는 무령왕릉의 규모나 출토 유물의 수준이 만족스럽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에 무령왕릉을 왕릉으로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무덤 안에서 출토된 묘지석마저 조작된 것으로 치부하는 등 비상식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역사학계는 이 같은 사이비 역사학자들의 터무니없는 주장을 반박하는 한편 《경향신문》의 지면을 통하여 “이것이 한국고대사다”라는 기획 시리즈를 연재하는 등 일반 대중에게 학계의 입장과 연구 성과를 소개하기 위해 노력을 하였다. 그러나 이미 이 정도 대응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2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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