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 역사학의 표상, 신채호 다시 생각하기 3
관리자 2016-10-13 21:32 1900
민족주의 역사학의 표상, 신채호 다시 생각하기3
권순홍
4. 식민주의 역사학에 대한 오해
사실 위의 협의체가 신채호와 민족주의 역사학을 독점하고 전유하는 것은 민족주의 개념을 간과한 측면뿐만 아니라 식민주의 역사학을 오해한 결과이기도 하다. 무슨 오해인가. 이제 그들의 이분법적 도식을 떠받치는 두 가지 명제 가운데 남은 하나, ‘강단’ 역사학계가 식민주의 역사학을 추종하고 있는지를 확인할 차례이다. 이를 위해서는 식민주의 역사학이 무엇인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식민사관의 핵심은 ‘단군역사와 강역의 축소’, ‘위만조선의 고조선 계승설’과 ‘한사군의 한반도내재설’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찬구, 「강단주류학계 실체 고발」, 미사협 홈페이지)
식민사관이란 한마디로 일본 제국주의가 한국을 영구히 지배하기 위한 목적으로 창작한 역사관을 뜻한다. 정체성론, 반도성론 등 여러 논리가 있지만 시기적으로는 고대사가 핵심이고, 그 두 축이 ‘한사군 한반도설’과 ‘임나일본부설’이란 이야기는 이미 했다. (이덕일, 앞의 책, 2014, 50쪽)
협의체의 공동대표들은 식민주의 역사학의 핵심을 위와 같이 파악하였다. 양자 간의 합의도 필요해 보이지만, 한사군 한반도설만은 공히 핵심으로서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단언컨대 한사군 한반도설은 식민주의 역사학의 핵심이 아니다. 이미 그들의 다른 글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식민주의 역사학의 핵심이 타율성론과 정체성론이라는 것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한국사는 자율적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항상 주변 강대국의 영향 아래에서 있었다는 타율성론과 한국사의 단계적 발전을 부정하고 한국사를 정체와 낙후를 거듭한 역사로 파악하는 정체성론, 이 두 가지 색안경을 끼고 본 한사군 한반도설이라야 식민주의 역사학이라는 낙인이 찍힐 수 있다. 같은 한사군 한반도설이라도 타율성론이라는 색안경을 낀 조선총독부의 해석과 그 색안경을 끼지 않은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해석에 대한 평가가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문제는 한사군 한반도설이 아니라 타율성론과 정체성론이라는 색안경에 있다. 최소한 지금의 ‘강단’ 역사학계에 이 색안경을 낀 사람은 없다.
그런데 사실 중요한 것은 이처럼 색안경을 낀 타자인식은 필연적으로 일본의 자기인식과 표리를 이룰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일본의 역사는 정체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외국에 의존적이지 않았다는 비교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1900년경부터 일본에서는 본격적으로 일본의 역사를 아시아, 구체적으로는 조선과 중국에서 분리시키려는 경향이 등장했다. 이는 탈아입구라는 국시 아래 유럽역사와의 유사성을 도출하려는 방향이자, 근대 국민국가의 건설과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강화라는 시대상황이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탈아입구의 중심에는 바로 봉건제가 있었다. 일본의 역사 속에서 유럽의 봉건제와 비슷한 모습을 포착함으로써 탈아입구의 역사적 조건을 마련하려는 시도였다. 기억해야할 것은 여기에 기본적으로 ‘고대 노예제-중세 봉건제-근대’라고 하는 사회진화론적 발전 도식이 전제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후쿠다 도쿠조는 독일어로 발표된 그의 박사학위논문 『일본경제사론』(1900)에서 일본 봉건제의 역사를 유럽의 사례에 빗대어 설명하였다. 이 논문의 집필동기가 유럽의 경제사와 똑같이 진행된 일본의 경제사를 유럽의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것이었던 만큼, 탈아입구의 역사적 근거를 제시했던 셈이다. 한편 이러한 맥락 속에서 후쿠다는 1903년 한국을 방문하고 귀국한 다음 작성한 「한국의 경제조직과 경제단위」라는 논문을 통해 한국 사회의 존재양식, 지배층인 양반의 특징, 경제의 발전단계 등을 근거로 하여 그 다양한 특색을 만들어 낸 최대의 원인으로 봉건제의 결여, 봉건제 이전 단계에서의 정체를 지적하고 있다. 후쿠다는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일본의 한국 지배가 한국에게는 매우 바람직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요컨대, 후쿠다는 유럽적인 것이 곧 보편적인 것이라는 인식 아래에서 일본의 역사 속에서 세계사적 보편성을 띤 유럽적인 것을 봉건제라는 이름으로 찾아냈고, 그 봉건제를 찾아 볼 수 없는 한국의 역사는 세계사적 보편성이 결여된 정체사회로 파악했던 셈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정체성론의 출발이었다.
후쿠다의 다음과 같은 말이 보여주듯이 타율성론은 위의 정체성론을 전제로 한다.
지금 한국에서 욕망의 증진에 따른 생산력 향상 활동을 추구하고 급속한 경제단위의 발전을 이루려면, 봉건제도의 성소이자 근세 국민경제의 양대 요건인 토지와 인민 두 가지에 대해서 자본화를 수행하는 것이 최급무이다. (중략)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금 한인의 독창적인 발전에 의해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한국 경제단위의 발전은 자발적인 것이 아닌, 전래적일 수밖에 없다. 전래적이란 다른 경제단위를 발전시킨 경제조직을 갖춘 문화에 동화된다는 말이다. (중략) 우리 일본인은 이 사명을 즉시 충족시키는 데 가장 적당하지 않겠는가. (福田德三, 『經濟學硏究』, 同文館, 1925, 157~160쪽)
한국은 스스로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으므로 이미 발전을 이룬 사회에게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데, 그 역할로는 일본이 제격이라는 말이다. 한국사의 정체를 전제로 그 타율성을 언급한 것이었다. 결국 식민주의 역사학의 핵심 중의 핵심은 정체성론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정체성론을 기초했던 후쿠다로부터 수학한 백남운이 스승에 맞서 한국사도 세계사적 보편성, 즉 유럽적인 봉건제를 경험했음을 증명하기 위해 『조선사회경제사』(1933)와 『조선봉건사회경제사』(1937)를 일본어로 출간했던 것은 식민주의 역사학을 극복하기 위한 디딤돌일 수 있었다. 결국 세계사적 발전 도식을 기초로 한 정체성론이야말로 식민주의 역사학의 핵심이었고, 따라서 그를 전제로 한 타율성론과 반도적 성격론 등의 식민주의 역사학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셈이다.
5. 신채호의 고민
식민주의 역사학을 극복하는 길은 타율성론과 정체성론을 벗겨내는 일이다. 그 방법에는 두 가지 노선이 있을 수 있다. 첫째, 한국사는 타율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정체되지도 않았음을 증명하는 작업이다. 삼국시대 이전의 한국사에 중국 군현으로서 낙랑·대방군의 역사만 배치함으로써 한국사의 타율성을 부각시킨 타율성론에 맞서, 고조선 및 단군의 역사를 강조하는 신채호 이래 많은 연구들이 그 실례이다. 또 한국은 자생적 근대화를 이루지 못할 뿐만 아니라 여전히 고대적 상태에 머물러 있다고 간주함으로써 한국사의 정체성을 강조한 정체성론에 맞서, 한국에도 유럽식 봉건제가 있었음을 밝히고자 한 백남운의 연구와 이미 조선 후기부터 근대적 자본주의의 싹이 트고 있었다고 본 ‘자본주의 맹아론’을 비롯하여 내적 능력과 발전을 내용으로 한국사를 재구성하려는 ‘내재적 발전론’도 이에 해당할 수 있다.
둘째, 식민주의 역사학의 타율성론과 정체성론이 전제로 하고 있는 세계사적 발전도식의 목적론적 인식에 문제를 제기하는 방법이다. 비단 사적유물론에서 말하는 ‘고대 노예제-중세 봉건제-근대 자본주의’라는 도식뿐만 아니라 그 바탕에 깔려 있는, 역사는 미개에서 문명으로 진화한다고 하는 사회진화론적 인식 자체가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서구적 근대성과 발전론이 제시하는 단선적 도식만을 정답으로 간주하는 인식을 비판하고 역사는 하나의 방향 혹은 목적을 향해 발전, 진화, 진보해 나간다는 인식 자체를 거부함으로써 ‘정체’라는 개념을 부정하는 것이다.
신채호는 분명 전자와 같은 입장에서 타율성론에 대립했다. 민족을 역사의 핵심에 놓음으로써 의도적으로 왕실 중심의 유교적 사관에서 거리를 두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민족의 역사를 중국과 무관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역사를 창조하기 위해 단군과 고조선을 강조했고, 따라서 자연히 한사군의 역사도 배제될 수밖에 없었다. 신채호의 역사 서술을 관통하는 것은 바로 민족국가의 계보였다. 그리고 민족사의 방향성을 분명히 하기 위한 구체적인 시도로서 신채호는 민족이 끊임없이 이웃 나라와 경쟁하는 과정이 곧 역사임을 명확히 했다. 그는 종족의 쇠망을 ‘약육강식’의 사회진화론적 법칙으로 설명했던 것이다. 혈통에 의해 규정된 민족, 그러한 민족의 흥망성쇠가 강조되면서 신채호의 사회진화론적, 목적론적 인식은 명확하게 증명된다.
그런데 이러한 신채호의 민족주의에서 약간의 변화가 감지된다. 민족주의의 바탕을 이룬 사회진화론적 인식을 의심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서 단재 신채호 이야기를 해야겠어요. 오늘날 신채호 추모회가 열리고 해서 가 보는데, 우리의 많은 역사가들이 와서 신채호에 대한 높은 추념의 뜻을 나타내는 것은 좋습니다만 신채호가 무정부주의 운동했다는 말을 빼버리고 있어서 유감입니다. 내가 보기로는 신채호는 무정부주의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무정부주의 운동을 하기 위해 최후를 마친 사람인데, 이런 얘기는 않고 그저 한국의 뛰어난 역사가로만 칭찬한단 말입니다. (李庭植 면담·金學俊 편집/해설, 『혁명가들의 항일회상』, 民音社, 1988, 275쪽)
위의 회고는 신채호와 함께 활동했던 정화암의 탄식이다. 신채호는 1920년대부터 무정부주의자들과 활동을 함께했고, 그 와중에 체포되어 결국 옥고를 치른 끝에 숨을 거두었다. 민족주의 수립의 주역이었던 그가 무정부주의, 즉 아나키즘을 수용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요소들이 작동한 것이겠지만 그 중에서도 주된 이유는 사회진화론적 인식의 허상을 간파했기 때문이었다. 사회진화론은 사실상 제국주의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활용되었다. 사회진화론의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논리대로라면 강자인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약자인 한국이 식민 지배를 받는 것도 자연스러운 것으로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애초에 사회진화론에 기반을 둔 민족주의와 식민주의는 서로 모순되는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근대 자본주의를 승인한다는 점에서 많은 공유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신채호에게 있어서 근대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우승열패의 민족주의가 이전과 똑같을 순 없었다. 그는 이제 사회진화론의 허상을 부정하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소위 정치는 강자의 행복을 증진하여 망국약민이 다시 머리를 들지 못하게 하는 그물이며, 소위 역사는 성자는 군주를 만들고 패자는 도적을 만들어 이둔으로 시비를 삼은 구렁이요, 소위 학설은 이따위 정치 이따위 역사를 옹호한 마설이다. (신채호, 「위학문의 폐해」, 『단아잡감록』, 1920년대)
약육강식의 구도에 복무하는 정치와 역사, 학설 등까지도 거부하게 된 신채호에게 이제 새로운 역사의 주체는 민중일 수 있었다. 특히 1917년의 러시아 혁명, 1919년의 3·1운동과 5·4운동의 경험은 그가 민중의 힘을 느낄 만한 계기였다.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 무기이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휴수하여 부절하는 폭력-암살, 파괴, 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박삭치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신채호, 「조선혁명선언」, 1923)
1920년대 중반 이후 신채호가 혁명으로 일제를 타도하고 민족해방을 완수한 뒤 건설하고자 한 사회는 “자유적 조선 민중의”, “민중적 경제의”, “민중적 사회의”, “민중적 문화의” 한국 사회로서 빈부차별이 없는 평등사회였다. 이 와중에 신채호가 새로이 포착한 역사 변화의 주체는 바로 민중이었다.
이런 신채호의 변화를 “이해하기 어려운” 일로 볼 수도 있지만, 민족주의를 수립했을 때나 아나키즘을 수용했을 때나 변함없이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의 기세는 한결같았다는 점이 중요하다. 단, 그 제국주의가 근대 자본주의의 최종형태라는 것을 간파함으로써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사회진화론적 인식을 유지할 수 없었다. 이제 신채호 역사학에게 남은 일은 고조선과 단군에 대한 강조를 넘어서 식민주의 역사학이 전제로 하고 있는 목적론적 인식 자체를 비판함으로써 정체성론과 타율성론을 극복하는 것일 수 있었다.
1910년대 말에 쓰여진 『조선상고문화사』에서는 그 내용의 전부를 차지하며 대단히 강조되었던 고조선과 단군의 역사가 1924년경 집필된 것으로 보이는 『조선상고사』에서는 비교적 축소되어 11편 중 2편만을 차지한 것도 위와 같은 인식 변화의 일환이지 않을까. 더욱이 대종교의 영향 아래서 집필된 『조선상고문화사』와는 달리, 『조선상고사』와 『조선사연구초』에서 『천부경』 등의 대종교 경전들을 위서라고 비판했던 것도 아나키즘 수용 이후 나타난 변화의 일면일 수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조선상고문화사』에는 등장하지 않았던 역사 주체로서의 ‘민중’이 『조선상고사』에서는 아래와 같이 언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일부 인민들이 神人과 영웅들의 허위를 覺悟하고 왕왕 자치촌, 자치계 같은 것을 설립하여 민중의 힘으로 민중의 일을 自決함을 시험하였나니 (신채호, 朝鮮上古史, 鐘路書院, 1948, 88쪽)
그들이 井田設을 아무리 高調로 불렀으나, 본래 民衆을 揮動하여 부귀계급을 타파하려는 운동이 아니오. 오직 군주나 귀족을 유세하여 그 기득한 부귀를 버리고 그 소유를 민중에게 평균히 나누어 주자 함이므로 (신채호, 앞의 책, 137쪽)
요컨대 위의 협의체가 민족주의 역사학의 대표를 자임하면서 그 표상으로서 신채호를 내세웠지만, 신채호에 대한 배타적 독점과 굴절된 전유에 다름 아니었다. 신채호의 민족주의는 그들의 그것과는 달랐고, 그마저도 신채호 스스로가 어느 정도 극복한 것으로 볼 수 있었다. 따라서 신채호 역사학의 성격은 어느 한 가지로 국한될 수 없는 역동성을 갖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다만, 역사 주체에 관한 신채호의 고민은 여전히 우리의 숙제로 남아 있다.
이상을 통해 민족주의 역사학의 표상으로 소비되고 있는 신채호를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몇 편의 글로 이 쟁점이 해결되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렇게 나설 수밖에 없었던 것은 ‘사람들이 배우려 하지 않을 지라도 현대 사회에 도움이 되는 어떤 것을 말해 줄 수 있다’는 홉스봄에 대한 믿음인지도 모르겠다.
역사비평 2016년 겨울호(통권 제 11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