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 역사학의 표상, 신채호 다시 생각하기 2
관리자 2016-10-13 21:26 2354
민족주의 역사학의 표상, 신채호 다시 생각하기2
권순홍
2. 이분법적 도식과 그 효과
2016년 6월 26일, 이른바 ‘강단’ 역사학계를 식민주의 역사학에 젖어있다고 비판해온 소위 ‘재야’ 단체들이 모여 대규모 협의체를 결성했다. ‘식민사학 규탄대회’와 함께 개최된 발대식에서 이 협의체의 상임대표는 “광복 70년이 지났지만 우리 역사를 우리 관점에서 바라보는 민족주의 역사학은 아직 광복이 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역사를 일제 조선총독부 관점에서 바라보는 노예의 역사학인 식민사학이 여전히 우리 역사학계의 주류”라며 식민주의 역사학을 해체하고 바른 역사를 세우고자 하는 취지를 밝혔다. 그리고 “한계에 직면한 식민사학계가 민족사학에 대해 대대적인 공세를” 취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역사 바로 세우기에 분투해온 단체들이 결집해서 통합적인 역량을 발휘할 적기임을 선언했다.
일본 제국주의 관점의 식민주의 역사학을 답습한 ‘강단’ 역사학계가 학계의 주류를 점하고 있다면 이를 마땅히 해체시킬 것. 그리고 그 자리에 바른 역사로서의 민족주의 역사학을 세울 것. 이것이 당위에 기댄 이 협의체의 목적인 셈이다. 상임대표의 언급에 스며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일단 제쳐두고, 여기서 지적하려는 것은 딱 하나, 그들이 민족주의 역사학을 자임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자임이 배태한 이분법적 도식, 스스로를 식민주의 역사학에 맞선 민족주의 역사학의 대표로 위치시킴과 동시에 ‘강단’ 역사학계를 식민주의 역사학의 추종자로 규정하는 프레임이다.
이처럼 단순하고 선명한 이분법적 도식은 매력적이다. 비록 ‘강단’ 역사학계를 ‘친일·매국’의 소굴로 생각하진 않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강단’과 ‘재야’의 대립이 학술적 토론이 가능한 병렬적 관계로 믿게 된 원인이기도 하다. 그 믿음 아래 ‘양식과 룰’을 지키는 건전한 토론 문화를 기대하거나, 어느 한 쪽에 의한 학문의 배타적 독점을 우려하기도 한다. ‘규정은 정치적 행위’라고 푸코가 말했던가. 이분법적 도식의 ‘친일 vs 민족’의 프레임이 이미 정치적 규정임에도 불구하고, 양자 간의 토론에 있어 학문 외적 요소를 배제할 것을 종용하기도 한다. 이러한 와중에 저 도식은 오히려 더욱 공고해지고, 이 대결에서 비겁한 회피나 반칙은 비난의 표적이 될 수 있다. 그런데 과연 저 이분법적 도식이 얼마나 적절한가. 이러한 이분법이 가능하기는 한가. 여기에 문제를 제기하고 싶다. 양자 간의 병렬적 도식 혹은 논쟁의 구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우선 두 가지가 입증될 필요가 있다. 첫째, ‘강단’ 역사학계가 식민주의 역사학을 추종하고 있는지의 여부와 둘째, 위의 협의체가 민족주의 역사학을 대표할 수 있는지의 여부이다. 시작은 후자부터다.
3. 합의되지 않은 개념, 민족주의 역사학
이분법적 도식의 오류는 그들이 신채호를 전유하는 방식을 통해서 드러난다. 신채호는 그들이 민족주의 역사학의 대표를 자임하기 위해서 내세운 정통성의 상징, 아니 표상이다. ‘강단’ 역사학계가 친일학자인 이병도를 추종하듯이, 우리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은 신채호의 역사학을 계승한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인데, 이는 과거에 지각된 대상을 기억에 의해 재생한 것이 아니라 주관에 의해 조합한 것이므로 상징보다는 ‘상상 표상’에 가깝다. 이로써 ‘식민주의·‘강단’·친일·매국’의 표상으로서 이병도, ‘민족주의·‘재야’·독립·애국’의 표상으로서 신채호가 부각될 수 있었고, 협의체의 공동대표에 의해 “단재 사학과 두계 사학은 공존할 수 없는 두 가치를 대변”한다는 서술이 등장할 수 있었다.
한국의 역사학자를 분류할 때 분류 기준 중의 하나가 단재 신채호에 대한 평가 여부이다. 식민사학자들의 단재 신채호에 대한 거부감은 상상 이상이다. 물론 겉으로는 인정하는 척하지만 한 발 더 들어가 보면 전근대적이라고 비난하고 민족주의 역사학자라고 비난한다. 겉으로는 실증의 잣대를 들이댔지만 신채호만큼 중국의 고대 1차 사료 및 한국 1차 사료를 많이 본 학자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채호는 실증이 결여된 민족주의 역사가로 비난한다. 그들의 잣대는 조선총독부 학무국의 잣대이다. 조선총독부의 관점으로 신채호의 역사관을 바라보기에 그만큼 뼈아픈 것이다. 또한 신채호의 역사관이 되살아나면 자신들은 설 자리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덕일, 『우리 안의 식민사관』, 만권당, 2014, 205쪽)
위의 인용문과 같이 그들은 신채호의 적자를 자임함과 동시에 ‘강단’ 역사학계의 신채호 부정을 폭로하고 있다. 이들의 간단명료한 이분법적 재단에선 신채호 비판이 곧 비난이자 부정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었고, 이는 식민주의 역사학의 필요조건이자 반민족주의 역사학의 충분조건이었던 셈이다. 이로써 더욱 선명한 레토릭이 마련될 수 있었다. 신채호 역사학에 대한 배타적 독점과 전유이다.
뤼순감옥에서 쓸쓸하게 옥사한 단재 신채호 선생이 이들에게는 “정신병자이자 또라이”였던 반면 이병도는 “국사학계의 태두이자 최초의 근대적 역사학자”로 떠받들어졌다. (이덕일, 앞의 책, 14쪽)
식민사학자들이 다시 날개를 달고, 신채호 같은 민족사학자들은 여순감옥에서 쓸쓸히 옥사하는 그런 (중략) 시대가 과연 돌아오지 않을까? (이덕일, 『매국의 역사학, 어디까지 왔나』, 만권당, 2015, 362쪽)
이것은 민족주의 역사학에 대한 독점이기도 한데, 이 레토릭의 설득력은 다음 질문에 대한 답에 달려 있다. 과연 위의 협의체가 전유하는 민족주의 역사학은 그들만이 독점할 수 있는 것인가.
우리 역사를 우리 관점으로 바라보는 민족주의 역사학 (허성관, 「인사말」, 미사협 홈페이지)
식민사관에 반대되는 역사관이 뭡니까? 민족사관입니다. (박성수, 「식민사관 해체를 말한다」, 미사협 홈페이지)
식민주의 역사학에 반대하면서 우리 관점으로 바라보는 역사학. 이것이 바로 그들이 밝힌 민족주의 역사학의 의미에 관한 언급의 전부이다. 바꿔 말해 이와 같은 민족주의 역사학의 정의는 식민주의 역사학의 정의에 기생한다고도 할 수 있다. 오로지 “일제가 한국을 영구히 지배할 목적으로 창작한 역사관”으로서의 식민주의 역사학에 저항하는 것을 목표로서 선전하고 거기에 민족주의 역사학이라는 간판을 건 셈이다. 민족주의 역사학은 민족주의와 불가분일 뿐만 아니라, 필연적으로 민족에 관한 고민을 담보하지 않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민족과 민족주의의 개념규정에 관한 언급의 부재는 아쉽다. 위의 언급에 따르면 민족주의는 ‘우리를 우리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 쯤으로 읽힐 수 있을 뿐이다. 신채호의 절대화와 그를 향한 집착은 이와 같은 개념의 취약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다.
한편, 앞서 언급했듯이 신채호는 새로운 역사 주체로서의 민족을 강조하고, 그 정체성을 수립하는데 앞장 서 있었다. 그럼 신채호가 말하는 민족주의는 무엇인가. 그는 민족주의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채호는 민족주의를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으로서,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지 않으면서 우리 민족의 나라를 우리가 주장하는 주의로 풀이하였다. 이에 따라 1910년 초에 “지금은 한국이 제국주의 속에 빠지고 민족주의의 고통한 지경을 당하여 쇠잔한 명이 급하”다는 진단을 내릴 수 있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민족주의가, 앞서 확인했던 것과 같이, 20세기 초 한국 지식사회가 안고 있던 위기의식으로부터 배태된 민족 개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은 재고의 여지가 없다. 신채호에게 있어서 민족이란 위기의 국가를 대신할 새로운 역사의 주체였고, 바로 그러한 민족이 제국주의의 간섭을 받지 않으면서 국가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이야말로 민족주의의 힘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때의 제국주의는 단순히 영토를 빼앗는 것을 넘어 국권을 침탈함으로써 말미암아 역사의 주체를 뒤흔드는 폭력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신채호에게 있어서 민족주의 역사학은 새로운 역사 주체로서의 우리 민족을 내세운 역사서술에 다름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민족’이 품은 함의의 깊이였다.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이해 속에서 위의 협의체가 민족주의 역사학을 대표할 수 있으며 ‘강단’ 역사학계는 그로부터 배제되어야 할까. 이와 관련하여 오히려 해방 이후 한국고대사학계의 연구 성과들이야말로 민족주의적이라는 평가는 그들의 이분법적 도식과 신채호 전유의 오류를 짐작케 한다. ‘강단’ 역사학계는 4·19를 계기로 한 민족주의의 고양이라는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1960년대와 1970년대의 대부분을 민족사의 부활 작업에 바쳤고, 식민주의 역사 서술의 영향을 배제하기 위해 모두 민족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예컨대, 1970년대 한국고대사학계가 인류학적 방법론을 원용하여 국가형성문제에 집중했던 것도 낙랑군을 강조한 식민주의 역사학에 대한 저항인 셈이었다. 결국 민족주의 역사학이 민족을 역사의 주체로 설정한 역사 서술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면, 국내의 한국고대사 연구는 자타가 인정하는 민족주의 역사학이라는 것에 이론의 여지가 없다.
더구나 20세기 후반 이래 서구 학계의 영향을 받은 탈근대 혹은 포스트모던의 연구경향이 나타남에 따라 기왕의 한국사 연구 특히, 한국고대사 연구는 바로 민족주의적이라는 이유로 비판받아 왔다. 식민주의 역사학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민족이 강조될 수밖에 없었다고 하더라도, 민족적 형식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민족을 초역사적 내지는 자연적 실재로서 부당 전제한 끝에 역사를 신화의 영역으로 이끌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역사 인식과 서술 체계에 있어서도 민족 중심의 역사 서술을 탈피하고 일국사 중심의 역사를 해체해야한다는 문제제기도 있었다. 그래야 미래지향적 동아시아사 서술이 가능할 것이라는 진단이었다. 이러한 비판들은 기왕의 연구 경향을 민족주의적 역사 해석으로 평가함과 동시에 민족을 넘어선 새로운 공동체 창출이라는 지향을 공유하는 셈이다. 바꿔 말해 이러한 비판들은 ‘강단’ 역사학계의 연구, 즉 기왕의 한국고대사 연구가 민족을 역사의 주체로 두는 역사 서술, 즉 신채호 이래의 민족주의 역사학이었다는 전제 아래 이른바 탈민족 혹은 탈민족주의를 추구했던 셈이다.
반면, 이와 같은 탈민족주의적 비판에 대해 이른바 ‘강단’ 역사학계, 즉 국내의 한국고대사학계에서도 반응이 없지 않았다. 그런데 그 반응의 방향은 민족주의적이라는 평가에 대한 인정이었고, 여전히 그 민족주의는 유효하다는 것이었다. 우리에겐 아직 해결하지 못한 남북한의 민족 문제가 남아 있으므로, 민족을 역사의 주체로 설정하는 민족주의 역사학은 여전히 유효할 수 있다는 대답이었다. 그리고 민족주의 역사학을 통한 민족의 특수성과 다양성의 인정이야말로 오히려 새로운 공동체 창출의 교두보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도 있었다.
여기서 민족주의 역사학의 현재적 유효성을 평가하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위의 협의체가 짠 이분법적 도식의 허구성을 밝히기 위함이다. 결론적으로 그들이 식민주의 역사학이라고 비난하고 있는 ‘강단’ 역사학계야말로 신채호가 정립한 민족주의 역사학을 오늘날까지 이어 온 셈이다. 그것이 민족을 역사의 주체로 설정한 역사 서술임은 두 말할 나위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