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 역사학의 표상, 신채호 다시 생각하기 1
관리자 2016-10-13 21:15 1864
민족주의 역사학의 표상, 신채호 다시 생각하기 1
권순홍
선동적 역사와 이데올로기적 역사는 자기를 정당화하는 신화가 되는 경향을 지닌다. 근대 민족과 민족주의의 역사가 입증해주는 것처럼, 이것보다 위험한 눈가리개는 없다. 이러한 눈가리개를 없애려고 시도하는 것, 혹은 적어도 눈가리개를 조금 들어 올리거나 이따금 들어 올리는 것이 역사가의 직무이고, 역사가가 그러한 일을 하는 한 사람들이 배우려 하지 않을 지라도 현대 사회에 도움이 되는 어떤 것을 말해 줄 수 있다. (에릭 홉스봄, 『역사론』, 민음사, 1997)
1. 신채호의 민족, 민족의 근대
‘민족이란 무엇인가?’ 뚱딴지같은 질문으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이 물음에 답하기란 쉽지 않다. 독자들 중 상당수는 ‘이 땅에 살아온 우리 선조들과 그 후손인 우리’ 쯤으로 민족을 정의하면서, 한편으로 반만년의 유구한 단일 민족사를 자랑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베네딕트 앤더슨은 민족을 근대의 산물로 간주하며 “주권을 가진 것으로 상상되는 정치공동체”라고 정의했고, 어니스트 겔너는 “민족을 발생시키는 것은 민족주의”라고 말했다. 에릭 홉스봄은 아예 “발명된” “유사 공동체”로서의 민족은 “위험한 눈가리개”라며 비판의 날을 세우기도 했다. 이런 견해들은 민족을 근대에 발명된 정치적 공동체로 이해하려는 경향이다. 물론 반대 의견도 있다. 앤서니 스미스는 민족이 근대의 발명이라는 위의 주장들을 비판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상고로부터 이어진 유구한 실체로서의 민족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근대적 민족의 역사적 토대로서 문화와 역사를 공유하는 ethnie(종족 혹은 족류)의 존재를 지적하고 그 역사의 깊이를 강조할 따름이다. 그에 따르면 민족은 정치적 이념보다는 혈통, 관습, 역사, 종교 등 문화적 공통성을 기초로 한다. 민족은 과연 근대의 정치적 산물인가 아니면 근대 이전부터 내려온 문화적 전통인가. 쉽게 답할 수 있을까?
의외로 ‘민족’은 프랑스어 nation과 독일어 volk의 근대 일본식 번역어로 출발하였다. nation은 ‘태어나다’라는 의미를 갖는 라틴어 nasci에서 비롯되었는데, 프랑스 혁명을 거치면서 정치적 이념을 공유하는 합의공동체라는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다. 한편, volk는 사회 하층의 민중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았는데, 18세기 말부터는 공통의 언어를 기초로 역사적으로 형성된 문화공동체라는 의미가 부여되기 시작하였다. 즉 nation이 주로 이념을 공유하는 정치공동체로 볼 수 있다면, volk는 언어·역사 등을 같이하는 문화공동체의 성격이 강했던 셈이다.
1876년, 위의 nation과 volk에 대한 번역어로서 ‘민족’과 ‘국민’이란 용어가 등장하였다. 가토 히로유키가 독일의 법학자 블룬츌리의 책을 번역한 국법범론(1876)에서 nation을 ‘민종’으로, volk를 ‘국민’으로 번역한 것이 시작이었다. 이때 ‘민종’으로 번역된 nation을 이후 히라타 도스케 및 량치차오 등이 ‘족민’ 혹은 ‘민족’으로 수정함으로써 ‘민족’은 nation의, ‘국민’은 volk의 번역어로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블룬츌리라는 인물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당시 유럽에서는 nation을 정치적 공동체로, volk를 문화적 공동체로 파악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히려 nation을 문화적인 것으로, volk를 정치적인 것으로 규정함으로써 통념과 정반대의 해석을 시도했다. 왜일까. 그리고 왜 일본은 굳이 소수의견인 블룬츌리의 개념을 받아들였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블룬츌리는 volk(국민)를 nation(민족)보다 우위에 둠으로써, “모든 민족이 국가를 이루어 국민이 될 권리를 갖는 것은 아니며, 스스로를 통치할만한 지와 덕을 겸비하지
한편 한국의 경우, 1900년 1월 12일자 『황성신문』을 통해서 비로소 ‘민족’이라는 용어가 등장하였고 1904년 이후에야 널리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기왕에 ‘족류’ 혹은 ‘동포’ 등의 용어들이 사용되긴 했지만, ‘민족’이라는 용어 자체가 20세기에 들어와서야 등장했다는 것은 흥미롭다. 단, 이때 사용된 민족의 개념이 량치차오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는 해석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혹자는 한국 지식사회에 끼친 량치차오의 영향을 의심할지도 모르지만, 당시 량치차오의 영향력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의 문장은 주로 중국이 국가적 위기에 처했을 때 작성된 것으로서, 개혁을 통해 서양과 같이 부강한 나라를 건설하고자 하는 진화론적 사고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따라서 중국과 같은 처지에 있는 한국 지식사회에 공명하는 바가 클 수밖에 없었다. 특히 1905년부터 1910년 사이에 한국의 중요 출판물은 거의 량치차오의 문장을 전제 내지 번역하거나 또는 일부를 인용하는 것이었다. 바꿔 말해 한국에서 ‘민족’이란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한 시점이 1904년경부터라는 사실은 량치차오의 『음빙실문집』이 한국에 유통되기 시작한 시점과 결코 무관할 수 없었다.
공교롭게도 량치차오는 1899년 블룬츌리의 국가론을 번역하고, 1903년 「정치학대가백륜지리지학설」에서 블룬츌리를 소개하면서 블룬츌리식의 ‘민족’ 개념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었다. 량치차오가 일본 지식사회와 연결되어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당시 일본에서 널리 유통되던 블룬츌리의 ‘민족’과 ‘국민’ 개념이 량치차오를 매개로 하여 한국 지식사회까지 전래되었다고 풀이할 수 있다. 량치차오는 「정치학대가백륜지리지학설」(1903)에서 ‘민족’이란 단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민족이란 동일한 언어와 풍속을 가지고 동일한 정신과 성질을 가지며 그 공동심이 점차 발달하여 건국의 계제를 이루는 것이다. 다만 아직 연합하여 일국을 만들어 내지 못했을 때에는 끝내 인격이 법단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이를 가리켜 민족이라 하지 국민이라 하지는 못한다.” 민족은 국가를 세워야만 국민이 될 수 있으며, 그렇지 못하면 국민이 되지 못한다는 것으로, 블룬츌리의 논리를 수용한 것이었다. 이와 동시에 량치차오는 같은 글에서 금후 중국은 마땅히 “한·만·몽·회·묘·장을 합하여 하나의 대민족을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서 량치차오가 강조한 것은 국가 내의 제민족을 동화시켜 새로운 국민을 만드는 것이었는데, 이는 19세기 중기 이래 중국 정체성의 위기 및 기존의 정치적 권위에 대한 회의와 무관하지 않았다. 즉, 서구열강의 침입과 청일전쟁 패배 등으로 인해 촉발된 국가의 위기 속에서 제민족의 동화를 통한 신국민 창출과 신국가 건설이야말로 량치차오의 관심이었던 것이다. 결국 량치차오도 근대국가 수립을 위한 일본 지식사회의 노력과 마찬가지로 중국의 새로운 근대국가 수립을 위해 고민하던 중 블룬츌리의 개념을 선택했던 것이었다.
한편, 한국에 전래된 민족 개념이 량치차오의 영향 아래 있었다는 것은 신채호가 주필로 있던 『대한매일신보』 중 1908년 7월 30일자에 실린 「민족과 국민의 구별」이라는 논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민족이란 것은 동일한 혈통을 가지며, 동일한 토지에 거주하며, 동일한 역사를 가지며, 동일한 종교를 섬기며,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면 이것을 동일한 민족이라 칭하는 바이어니와, 국민 두 자를 이와 같이 해석하면 불가할지라. (중략) 국민이란 것은 그 혈통, 역사, 거주, 종교, 언어가 동일한 외에 또 반드시 동일한 정신을 가지며, 동일한 이해를 느끼며, 동일한 행동을 하여 그 내부 조직이 일신의 골격과 서로 같으며, 그 대외의 정신이 한 부대의 군대와 서로 같아야 이를 국민이라 말하나니. (중략) 금일에 이르러서는 만일 국민 자격이 없는 민족이면 대지 위에 발을 디디고 살 조그만 땅도 없을지라. (「민족과 국민의 구별」, 『대한매일신보』 1908. 7. 30)
민족을 버리면 역사가 없을지며, 역사를 버리면 민족의 그 국가에 대한 관념이 크지 않을지니, 오호라 역사가의 책임이 막중할진저. (신채호, 「독사신론」, 『대한매일신보』 1908. 8. 29)
신채호는 이와 같은 지식사회의 맥락 속에서 민족을 정의하는 요소를 정립하고 민족의 정체성을 수립하는데 있어서 가장 선두에 있었다. 그는 민족을 핵심적인 과제로 설정하지 않은 모든 형태의 역사 서술을 거부했다. 민족을 도외시하는 역사 서술은 신채호의 관점에서는 영혼이 없는 역사였으며, 무력한 역사일 뿐이었다. 따라서 신채호는 민족을 근대의 발명으로서가 아니라, 역사를 통해 존재해온 객관적인 실체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고,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신채호는 민족을 ‘발견’한 것일 수도 있다. ‘민족을 버리면 역사가 없다’는 공식 속에서 역사는 민족 없이 존재할 수 없으며, 민족은 역사 없이 이해될 수 없는 것이었다. 신채호에 의해 역사가의 임무는 새롭게 설정되었다. 새로운 역사 주체로서 민족의 정체성을 규명하고 민족의 운명을 추적하는 것, 이것이 역사가의 새로운 임무가 된 것이다.
다시 말해 신채호가 ‘민족’이라는 개념에 주목했던 이유는 비록 제국주의 열강들에게 국가는 빼앗길지라도, 민족은 그 존재와 자율성을 보장받을 수 있는 대안적 형태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국가를 도둑맞은 특수한 환경에서 민족의 존립은 대중의 인식에 달려 있었고, 신채호의 역사관은 그러한 집단적 기억을 강화하고 지탱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20세기 초, 제국주의 열강들 틈에서 자유와 독립을 갈망했던 한국인들에게 유일한 나침반일 수 있었다. 새로운 역사 주체로서 민족 정체성 수립, 한국 근대 역사학의 시초이자 민족주의 역사학의 ‘태두’로서 신채호를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으며, 신채호 역사학의 의의는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