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국사교과서, 그 안에 담기 허상 1
관리자 2016-10-13 20:40 2363
민족의 국사교과서, 그 안에 담긴 허상 1
– 4·5차 교육과정기 고등학교 국사교과서를 중심으로
장미애(가톨릭대 강사)
역사학과 역사 교육
역사학은 과거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다. 그러나 역사학은 과거의 일을 복원하는 것에만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과거에 있었던 인간 활동에서 관심 있는 자료들을 수집하고, 이들을 선정・평가・해석함으로써 현재 인간의 사고와 행동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한 전망이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 최종 목표라고 할 수 있다. 역사 교육은 이러한 역사학의 성과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며, 그 목표 역시 역사학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역사 교육은 교육 대상자가 과거에 대한 재경험을 함으로써 역사적 심성을 기르는 한편, 이를 통해 현재의 사고와 행동에 바람직한 성장을 하도록 하고, 미래의 인간 생활에 대한 전망을 제시한다.
이러한 역사 교육의 목표는 역사적 지식 습득과 함께 그 지식을 습득하는 과정에서 올바른 가치관을 키우는데 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역사 교육은 단순한 지식 습득을 위한 것뿐만 아니라 일종의 가치 교육 활동의 하나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 교육의 가치 교육적 측면이 국사 교육을 중요하게 여기게 하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 교육의 기본적 특징이 극단적으로 표출되었을 때, 그것이 가지는 위험성 또한 크다고 할 수 있다. 다음의 글은 가치 교육으로서 역사 교육이 왜곡된 형태로 강조되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문제를 보여준다.
“국사교과서는 국민들에게 민족의식과 민족적 자부심, 긍지를 심어 주는 민족 경전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국사교과서 내용은 학문적으로 정리되지 않고 입증할 수 없는 내용이더라도 국민 교육용으로 필요하다면 수록하여야 한다.”
위 글은 1979년 안호상을 비롯한 사이비 역사학측에서 국사교과서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할 즈음 이들에게 영향을 받은 군인들의 말이다. ‘민족’의 자부심・긍지를 위해서 라면 학문적 성과에서 일부 문제가 있더라도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이 과연 진정한 ‘민족’을 위한 길인가에 대해서는 다시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그런데 우리 역사 교육 과정에서는 몇 차례에 걸친 국사 교과서 파동을 겪으면서 왜곡된 형태의 역사상이 조금씩 교과서에 반영되어 갔다. 그리고 2016년 현재에도 이 현상이 되풀이되고 있다는 점이 우려를 자아낸다. 이에 여기서는 국사교과서 파동 과정에서 ‘민족’ 의식, ‘민족’적 자부심의 확립이라는 미명 아래 왜곡된 역사상이 어떻게 주장되고, 교과서에 반영되어 갔는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 과정에서 ‘민족주의’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포장한 채 왜곡된 ‘민족의식’ 교육을 주장하는 이들로서 ‘사이비 역사학’이 역사 교육에 끼친 영향을 검토해 보겠다. 그리고 최근 문제가 된 국정 국사교과서가 이러한 측면에서 어떤 문제점을 안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고자 한다.
국사교과서 파동과 ‘사이비 역사학’의 국사교과서 개정 요구
교과서는 그 지체로 ‘민족주의’적 시각이 강한 경향을 가지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의 국사 교과서의 경우 식민지배라는 우리의 역사적 경험으로 인해 이러한 색채가 더욱 짙은 측면이 있다. 해방 후 우리 나라에서는 새로운 구가의 교육 체제에 대한 다양한 방안들이 논의되었으나 결국 미군정기에 들어서면서 미국식 민주주의를 이식할 수 있는 형태로 교육 체제가 마련되었고, 이로 인해 국사 연구나 국사 교육은 열악한 처지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익을 중심으로 한 초역사적・초계급적 민족이론을 기반으로 한 국사교과서가 만들어지면서 여기에는 민족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한 단군 숭배와 홍익인간 이념을 고취하고 한민족의 배타적 우월성을 강조하는 서술이 이루어졌다. 이후 유신정권기에 들어서며 국사교과서가 국정체제로 전환되었고, 이 과정에서 국사교과서의 서술에는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자리 잡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국사교과서의 국정화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침투와 함께 또다른 형태의 왜곡을 낳게 된다. 국사의 국정화로 인해 단 하나의 역사가 강조됨에 따라 이를 자신들의 역사관을 관철시키는데 좋은 기회로 여기게 된 이들이 출현하게 되는 것이다. 이른바 ‘민족’ 의식의 고취를 목표로 한다는 미명아래 ‘사이비 역사학’의 준동이 시작된 것이었다. 국사교과서에 대한 사이비 역사학계의 개정 요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78년이었다. 이들은 원로 사학자인 이병도・신석호가 일제시대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한 것을 빌미로 이들을 친일파로 매도하는 한편, 이들에 의해 형성된 국사학계의 연구 성과가 반영된 국사교과서에 대해 식민사관에 의해 쓰인 것이라는 관점에서 국사교과서의 내용 시정을 건의하게 된다. 이들이 개정 요구한 주요 내용은 총 8가지 사항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고조선의 영역은 동북으로 바다까지, 북으로 흑룡강까지, 서남쪽은 북경까지이다.
2. 단군시대의 1200년 역사를 삭제하였다.
3. 단군을 신화로 돌려 부정하고 있다.
4. 燕나라 사람 衛滿을 고조선의 창건주로 삼았다.
5. 위만조선의 서울인 왕검성은 중국의 산해관 부근에 있었다.
6. 樂浪은 중국의 북경지방에 있었다.
7. 백제가 400여 년간 중국의 중남부를 지배했다.
8. 신라통일 후 68년간의 영토는 길림에서 북경까지였다.
이들의 주장은 주로 『산해경(山海經)』,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와 같은 사료를 원용한 것이다. 이 사료들은 대체로 사료적 가치가 희박한 것이거나, 만주족이 자신들의 역사적 열등성을 감추기 위해 주변 민족을 자기 민족의 아류로 보기 위한 위작으로 그 역시 신빙성이 희박한 것이라고 평가되던 것들이었다. 이 건의서에 대해 문교부에서는 국사편찬위원회(이하 국편)에 대책을 세우도록 하였고, 이에 대해 국편에서는 국사편찬위원과 학계의 중견학자들의 의견을 모아 회신문을 발표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안호상씨의 건의 내용은 역사의 발전 과정을 총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사료에 대한 충분한 비판과 해석이 결여되어 있다. … 단편적이고 지엽적인 자료만으로 역사를 해석하고 있다. 더욱이 교과서는 국민교육에 가장 기본적인 교재이므로 새로운 학설이 제시된다 해도 학계의 정설로 정립되기까지는 교과서에 수록할 수 없다.
이와 같은 회신 이후 사이비 역사학측에서는 자신들의 주장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를 법원에 제소하였다. 그러나 법원에서는 학문적 내용이 사법적 심판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이유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리게 된다.
대통령에 대한 건의서와 행정 소송 모두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음에도 교과서 개정에 대한 이들의 요구는 그치지 않았다. 이들은 1980년 제 4차 교육과정 개정 작업이 시작되자 자신들의 주장이 교과서에 반영될 좋은 기회로 여기고 교과서 개정을 위한 본격적인 공세를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학생과 군인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회와 책자를 보급하는 한편, 1981년에는 국회에 ‘국사교과서 내용 시정 요구에 관한 청원’을 제출하기에 이른다. 이 청원 내용 역시 앞서 1978년 대통령에 건의했던 내용과 차이가 없었다. 이들의 청원이 제기되자 국회에서는 11월 26일~27일 양일에 걸쳐 공청회를 열었다. 공청회에서는 주요 쟁점이 된 단군・기자의 실존 문제, 고조선의 강역 문제, 한사군의 존재와 위치 문제, 신라의 강역 문제, 백제의 중국지배 문제 등에 대해 양측이 공방이 오간 가운데 언론에서는 비교적 기존 학계의 견해가 설득력이 있는 것으로 판단하였으나, 국회의원을 비롯한 국민정서는 사이비 역사학측의 주장에 많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이비 역사학측의 청원과 공청회의 개최는 4차 교육과정의 개편과정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공청회가 국민적 관심을 끌었던 사항인 만큼 공청회에서 다뤄진 내용을 무시할 수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한 언론의 보도를 보면 다음과 같다.
이번 국사교과서 수정에서 가장 눈길을 모으는 것은 단군조선의 건국을 비롯해 고대 우리민족의 이동과 강역을 밝힌 것이다. … 지금까지 고조선을 대동강유역의 평양에 묶어 두었던 古朝鮮의 강역을 요서지방과 만주서남부일대로 확대해서 본 것이다. 日帝植民史學이 강조한 漢郡縣도 고조선 일부지역을 침식한 것으로 수정하고 있다. ….(『경향신문』, 1982.12.6. 7면)
위의 기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1981년 공청회 당시 가장 문제가 된 분야였던 단군조선과 고조선 문제, 한군현 문제 등이 사이비 역사학의 주장을 반영하는 쪽으로 변화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아래 표는 3차와 4차 교육과정기 고조선 관계 서술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
3차 교과서 | |
고조선 건국 |
제목 |
단군 신화 |
내용 |
하느님의 아들인 환웅과 곰의 변신인 여인 사이에서 출생한 단군 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는 단군 신화를 가지기에 이르렀다. … 천신의 아들이 내려와 건국하였다고 하는 단군 신화는 우리 나라 최초의 건국 신화로서, | |
고조선과 한사군 |
제목 |
고조선의 변천/ 한 군현의 세력 |
내용 |
처음에 산뚱 반도와 북중국 방면에 있던 동이족들은, 전국 시대에 중국에서 각 지방의 소국가들을 통합하는 파동이 일어나자, 만주와 한반도로 이동해 왔다. … 그 뒤, 진(秦)⋅한(漢) 교체기에 또 한 차례의 파동이 일어나면서 이주민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되었다. 기원전 195년경, 고조선 북방에 와서 이주민 세력의 대표가 된 위만은, 고조선의 준왕을 쳐서 나라를 빼앗았다. … 한편, 한(漢)은 고조선이 자기네들의 무역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동방 침략 기지인 요동 지역을 위협하였으므로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였다. 고조선은 이에 대항하여 1년간이나 싸우다가, 왕검성(평양)이 함락되면서 망하고 말았다(B.C. 108). … 한은 고조선을 넘어뜨린 후 낙랑, 진번, 임둔, 현도의 4군을 두어 식민지로 만들었다. 그러나, 임둔군과 진번군은 한의 군현을 축출하려는 토착 세력에 견디지 못하여 곧 없어지고, 통구(퉁코우)의 현도군도 요동 방면으로 쫓겨갔다. 다만, 낙랑군과 후한 말기에 옛 진번군 지역에 설치되었던 대방군만이 오래 계속되다가, 고구려와 백제에게 망하였다. |
위 표에서 볼 수 있듯 3차와 4차 교육과정기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단군에 대한 설명에 있어서 그 소제목부터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3차 교육과정기의 교과서에서는 ‘단군 신화’라는 소제목 아래 단군 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한 과정이 신화적 史實임을 명확히 하고 있으나, 4차 교육과정기의 교과서에서는 ‘단군의 건국과 고조선’이라는 소제목 아래 『삼국유사』에 전하는 단군의 고조선 건국이 실재하였던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 특히 단군의 고조선 건국 연대를 표기한 것은 사이비 역사학측에서 제기해 왔던 문제를 그대로 수용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사이비 역사학측에서 지속적으로 제시한 단군의 신화화에 대한 문제 제기가 일부 받아들여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단군에 대한 강조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처음 국사교과서에 문제를 제기했던 사이비 역사학측의 구성원들이 가지고 있었던 특징이라고도 할 수 있다. ‘국사찾기협의회’의 중심 인물이었던 안호상의 경우 1964년 배달문화연구원장을 지냈을 뿐만 아니라 1992년에는 대종교 총전교를 지냈을 정도로 대종교와 관계가 깊은 인물이었다.
대종교는 단군을 교조(敎祖)로 하는 종교로서 특히 역사학적으로는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강조하는 다양한 저작들을 내놓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환단고기』이다. 『환단고기』는 동이 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중국에 대한 사대의식을 배척한 것을 특징으로 한다는 것과는 달리 오히려 일본 제국주의적 논리의 왜곡된 체험을 바탕으로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서술을 하고 있다는 오류를 범하고 있으며, 그 내용에 있어서도 위작(僞作)으로 볼 측면이 많다는 비판이 있다.
대종교 계열 역사 인식을 바탕으로 구성된 ‘국사찾기협의회’와 같은 사이비 역사학측의 주장은 민족주의 역사 서술이 가질 수 있는 역기능적 측면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민족주의 역사서술은 국권침탈의 과정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신채호를 중심으로 하는 민족주의 역사가들은 국권의 침탈로 인해 더 이상 국가와 민족의 역사를 동일하게 서술할 수 없게 되자 이를 극복하는 새로운 서술 방법을 찾았다. 그 과정에서 단군을 시조로 하는 역사 서술 방식을 취하게 되었고, ‘민족의 시조=단군’의 구도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 서술 방식은 그 시대적 요구에 의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해방 이후 이미 40여 년이 지난 시점에서 여전히 그와 같은 역사 인식을 가지고 ‘민족’을 강조하는 것은 학문적 발전 수준이나 당시 시민 의식의 수준을 볼 때 매우 퇴보된 역사 인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이비 역사학측에서 지속적으로 단군 중심의 ‘단일민족의식’을 강조하는 것은 당시 정권이 가지고 있었던 정치적 목적과 결합하여 더욱 큰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이러한 교과서의 수정은 신군부의 5공화국 국정지표에 따른 것으로 올바른 민족사관의 확립과 우리 역사에 대한 긍지를 통해 민족중흥에 이바지 한다는 목표 아래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그 동안의 연구 성과가 반영된 것이기 보다는 단군조선의 건국과 고조선 영역문제를 집요하게 제기했던 사이비 역사학측의 주장을 수용한 것으로 최소한의 정치적 반응이었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