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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담회: '사이비 역사학'의 현황과 한국사 연구

    관리자 2016-10-04 19:18 2698

    17회 콜로키움 : 근대 역사학과 민족주의

    -한국 고대사 연구의 지향을 모색하며- 

    1부 좌담회 : ‘사이비 역사학의 현황과 한국사 연구

     

    날짜 : 2016818() 오후 3~430
    장소 : 경희대학교 문과대학 302
    참석 : 고태우(연세대), 기경량(서울대), 김헌주(고려대), 안정준(연세대), 위가야(성균관대), 전영욱(서울시립대)
    사회 : 이정빈(경희대)


    좌담회 장면

    이정빈: 지금부터 한국고대사·고고학연구소 제17회 콜로키움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콜로키움은 1부하고 2부로 나뉘는데요, 1부에서는 고대사 전공자 세 분, 그리고 근대사 전공자 세 분을 모시고 좌담회를 갖기로 하였습니다. 그동안 젊은 역사학자모임에서 진행해 온 성과를 나름대로 평가하고, 또 다음 모임의 방향을 모색해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공지한 것처럼 전체 주제는 사이비 역사학의 현황과 한국사 연구입니다. ‘사이비 역사학이라는 용어 사용 문제에서부터 근대 역사학의 문제, 좀 더 구체적으로는 실증·민족·발전이라는 세 요소를 가지고 사이비 역사학만이 아니라 오늘날의 한국사 연구를 돌아보고, 또 어떤 방향으로 우리가 공부를 해 나아가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김헌주 선생님의 기조발제문을 듣고, 이에 대해 토론하는 방식으로 진행하겠습니다.

    김헌주의 기조발제(별첨: 사이비 역사학개념의 의미와 한계, 그리고 올바른 역사의 딜레마)

    사이비 역사학’: 용어의 의미와 한계

    이정빈: 김헌주 선생님께서 전반적인 말씀을 해주셔서 논의가 조금 더 편하게 진행될 것 같습니다. 전부 다 답변하긴 어려울 것 같고요, 김헌주 선생님께서 지적하신 문제점에 대해서 기경량 선생님께서 나름의 생각을 밝혀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기경량: 기경량입니다. 저도 사이비 역사학이라는 용어에 대해서 발언 준비를 좀 해왔는데요. 사이비 역사학이라는 표현이 무척 자극적이고 공격적인 표현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학문의 다양성이라든지 대화의 가능성을 차단시킬 수 있다는 비판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부분은 충분히 이해하고요, 처음에 이 용어를 사용할 때도 그런 점에 대한 고민을 적잖이 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학문의 영역에서는 사이비라는 식의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현 상황이 사이비 역사학이라는 단호한 표현이 필요한 시점에 와 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상대를 비난하거나 모욕하기 위해서 이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들의 본질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적확한 용어를 찾는 과정에서 나온 결론이 사이비 역사학이기 때문에 사용하는 것입니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으로 재야사학이라는 용어가 있는데, 이것은 성립하기가 어렵습니다. 대학 내에도 그 사람들의 논리를 수용한 사람들이 많지는 않지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역사학과는 무관한 사람들이 대부분이기는 하지만, 일부 역사학을 전공했거나 혹은 역사학과 유관한 학문을 전공한 사람들도 사이비 역사학을 따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쇼비니즘 역사학자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한편 생각해 보면 과연 그 사람들이 사이비라는 호칭은 거부하면서, ‘쇼비니즘으로 호명되는 것은 흔쾌히 수용할 것이냐는 문제도 있지요. 어차피 사이비라고 부르든 쇼비니즘이라고 부르든 대화가 단절되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고 그 사람들을 그들이 자칭하는 대로 민족주의 역사학자라고 불러줄 것인가. 이 또한 수용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들 의도가 자신들이 민족주의 역사학이고, 역사학계는 식민주의 혹은 매국 역사학이라는 프레임을 짜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방금 김헌주 선생께서 지적해 주셨듯이 사실 지금의 한국사학계도 충분히 민족주의적입니다. 그것을 극복해야 한다는 비판과 지적들이 나오고 있고 어떻게 할 것인가 모색하고 있는 상황인데, 극단주의자들이 사용하는 용어와 개념을 수용해서 학계의 논의 수준을 후퇴시킬 이유도 없습니다.
     
    저는 더 나아가 근본적으로 저들을 과연 역사학이라는 학문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것이 옳은가라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이비 역사학이라고 규정한 것은 그 사람들이 하고 있는 행태가 학문의 범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역사비평』에 사이비 역사학에 대한 글을 올리고 나서 주변에서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신변의 위협에 대해 많은 걱정을 해주었어요. 학자가 자신의 양심에 따라 한 발언에 대해 현실 세계에서의 테러를 염려해야 하는 상황, 이게 지금의 상황입니다. 또한 이 사람들은 국가 권력과 결탁하여 동북아역사지도라는 학계의 커다란 사업을 무산시키고, 하버드 대학에 대한 동북아역사재단의 지원도 차단시켜 버렸습니다. 이를 저는 현실 세계에서 학문에 대한 실질적인 테러가 발생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대단히 엄중한 사태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97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이 사람들의 활동은 역사학계를 말로 모욕하고 비난하는 선을 넘어서 이제 현실화된 위협이 되었습니다. 저는 사이비 역사학이라는 말 외에 역사 파시즘이라는 용어도 사용하였는데 실제로 그러합니다.


    기경량 선생님

     역사학을 공부한 지식인으로서 이 사람들의 실체와 위험성에 대해 대중들에게 적극적으로 알리고, 폭로하고, 경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간명하면서도 핵심을 보여 주는 용어의 사용이 필요한데, 기존에 사용되던 유사 역사학이라는 용어는 대중들에게 직관적으로 와 닿는 용어는 아닙니다. 따라서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나 더 명확한 표현인 사이비 역사학을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이비 역사학의 범주를 어떻게 설정할 수 있는가가 문제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김헌주 선생님도 근현대사의 뉴라이트 쪽 사람들을 근거로 들며 사이비의 범주를 어떻게 설정할 수 있을 것인가 의문을 표하셨습니다. 가장 분명한 것은 환단고기 같은 사서를 이용한 경우입니다. 명백한 위서, 명백하게 조작된 이런 자료들을 이용해 역사 연구를 하는 사람들을 사이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역사관을 주장하는 과정에서 빈곤한 증거를 보완하기 위하여 역사학에서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사료 조작’, 그것을 넘어서는 사료 날조를 하였습니다. 아주 노골적이고 악질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지요. 만약 이러한 행위를 학문의 범위로 끌어들여 논의의 대상으로 인정한다면 역사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붕괴할 것이라고 봅니다. 따라서 우리는 환단고기류의 조작된 사료들을 이용하는 자들을 사이비라고 규정할 수 있습니다.
     
    한편 환단고기류의 사서를 대놓고 이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 사람들의 세계관과 공명하며 작업을 진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위서를 이용하지는 않지만 학계의 통설과 완전히 동떨어진 무리한 사료해석을 통해 거대한 상고 시대 영토를 집착적으로 증명하려는 사람들인데, 이 사람들까지 사이비 역사학으로 규정할 것인가는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넓게 보면 사이비 역사학에 포함시킬 수도 있겠지만, 학문의 다양성을 존중하자는 차원에서 이들까지 사이비로 규정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는 김헌주 선생께서 말씀하신 쇼비니즘 역사가라고 지칭하는 것도 저는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


    로널드 프리츠 저, 이광일 역, 『사이비역사의 탄생 (거짓 역사 가짜 과학 사이비종교)』, 이론과실천, 2010.

     다만 이 문제에 있어서 꼭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는데
    쇼비니즘 역사학사이비 역사학은 그야말로 종이 한 장 정도의 차이라는 것이지요. 서로 세계관이 공명하고 있는데, 한 쪽은 좀 더 나아가 환단고기까지 이용하는 것이고, 다른 한 쪽은 거기까지는 아슬아슬하게 안 간 겁니다. 하지만 쇼비니즘 역사학으로 역사에 입문한 일반 대중이 사이비 역사학의 단계로 넘어가는 것은 비유하자면 안방에서 거실로 나오는 것 정도로 쉬운 일입니다. 양자가 한 발짝 차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주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저는 사이비 역사학에 대해 이제 학계가 단호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학자들이 대단히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가 학문의 자유와 다양성이기 때문에 학문의 장에서는 상대 의견을 존중하는 태도와 어법이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이비 역사학은 학문이 아니라는 점을 다시 강조합니다.
     
    그리고 지식인의 역할에 대한 고민이 필요합니다. 지금 서점에 가 보면 고대사 관련 책의 7~8할이 터무니없는 내용들을 담고 있는 이상한 책들입니다. 이런 책들이 그야말로 범람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혼란을 느끼는 대중들에게 우리가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할 것인가. 전문가 집단으로서 책임감을 가지고, 다소 부담이 되더라도 아닌 것은 아니라고 대중들에게 분명하게 말을 해주어야 될 때라고 생각합니다.

    이정빈: 김헌주 선생님께서 지적해주셨지만, 사이비 역사학이라는 용어는 근대 역사학의 객관을 전제로 합니다. 근대 역사학의 객관성 혹은 과학성과 관련하여 실증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요. 이 문제에 대해서 누가 먼저? (잠시 침묵) 위가야 선생님부터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경향신문』에 보도된 위가야, 기경량, 안정준 선생님(좌측부터)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32&aid=0002690595

     

    사이비 역사학과 실증

    위가야: 실증이라고 하는 말은 한국고대사 연구자 중에서 노태돈 교수님이 한국고대사연구 100년을 뒤돌아보면서라는 글(노태돈, 고대사 연구 100, 『韓國古代史硏究』 52, 2008)에서 한국고대사 연구의 인식체계 안에 들어와 있는 가장 중요한 세 단어를 민족·발전·실증이라고 할 수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셨고, 또 지금 한국고대사연구자들에게 실증이란 말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대단히 크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실증이라고 하는 건 뭐냐면 문헌이나 여러 자료를 검토하고 연구하는 과정을 통해서 그것을 객관화시키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실증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어떤 실증사학이나 아니면 민족사학, 아니면 사회경제사학이나 이런 사학에서 개별적으로 달리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어떤 수단인 것이죠. 역사학을 연구하기 위한 방법론적인 도구이자 수단인 것인데, 그렇다면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실증이 뭐 이 사람은 실증사학자다, 이 사람은 실증사학자가 아니다라고 할 수는 없는 겁니다.


     

    콩트(Comte, Auguste: 1798~ 1857)                랑케(Leopold von Ranke, 1795~1886)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실증주의사학과 실증사학은 다르다고 하는 의견이 있는데, 이 부분은 근대역사학을 이야기 할 때 할 수 있을 거 같아서 넘어가려고 하는데요. 한 가지만 말씀드리고 싶은 건 우리가 사이비 역사학이라고 지칭하고 있는 분들의 역사연구 안에서도 실증이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라는 문제를 제기해 볼 수 있습니다. 분명 실증이 나타나죠. 아까 제가 말씀드렸다시피 실증이라고 하는 건 하나의 수단이기 때문에 역사를 연구하는 방법 자체가 실증인 거예요.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이 사람들이 구사하고 있는 실증에 대한 건데요. 최근에 저희들이 이렇게 글을 쓰고 또 언론에서 고맙게도 반응을 많이들 보여주니까 그쪽(‘사이비 역사학’)에서도 반작용이 왔습니다. 한 가지는 엄청난 매도였죠. ‘식민사학자들이고 또 교수들의 꼭두각시다라는 매도였습니다. 그와 동시에 또 한 가지는 학술적으로도 대응하겠다고 하면서 지면을 찾은 일이었습니다. 그쪽에서도 어떤 특정 언론사에 지금 연재를 하고 있습니다. 최근의 한 연재물에서 어떤 기사가 나왔냐면, ‘낙랑군은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기사의 내용이 뭐냐면, 저희들이 반박을 했을 때 중국사서들에서 낙랑군이나 한사군이 한반도가 아닌 지금의 중국 영토 안에 있었다고 볼 수 있는 기록들이 존재합니다. 그 기록들은 사실 후대에 설치된 교군에 대한 기록일 것이라고 저희들이 이야기를 했죠. 그것을 반박하기 위해서 그들이 기사를 낸 겁니다. ‘교군이 아니다, 없다고 하면서 그들도 나름의 실증을 하고 있습니다. 한서(漢書) 지리지에는 407천여 명 정도의 낙랑군 인구가 나온다는 거예요. 근데 교군의 근거로 들고 있는 거는 자치통감에 나오는 장통(張統)이라고 하는 사람이 고구려에 의해 낙랑군과 대방군이 멸망하니까 313년에 모용외에게 투항을 하면서 그 사람이 천여 가()를 데리고 가니까 그걸 가지고 군을 설치했다고 하는 기록인데, 이 기록들의 모순을 지적하는 겁니다. 낙랑군의 인구수가 한 407천이 된다. 그런데 모용외가 데려간 인구수는 잘해봐야 7천일 것이다. 그럼 40만 명이 어디 갔냐. 그들의 주장이 그럴듯하죠. 40만은 어디 갔을까요. 궁금해지죠. 그런데 한 가지 함정이 숨어있습니다. 뭐냐면 한서 지리지는 서기 후 2년의 인구통계거든요. 아까 말씀드렸죠. 낙랑군과 대방군이 멸망한 건 313년과 314년이거든요. 그러면 그거랑 가까운 시기의 통계를 가져와야겠죠. 없는 게 아닙니다. 진서(晋書) 지리지에는 낙랑군과 대방군 인구를 약 8600여 호라고 하거든요. 그러면 8600여 호라고 것은 아까 이야기했던 장통이 데리고 간 천여 가와 비교하면 이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엄청난 숫자의 차이와는 좀 다르거든요. 그 정도 숫자가 도망가면 충분히 많이 도망간 거고, 이들을 데리고 군을 설치해서 교군이라고 할 수 있는 건데, 이 진서 지리지의 통계는 이야기하지 않고 가장 숫자의 괴리가 큰 한서 지리지를 가지고 온 겁니다 



    위가야 선생님

     이런 과정을 저는 어떻게 생각하냐면, 아까 말씀하셨던 김헌주 선생님의 사이비용어에 대한 비판이 대단히 핵심을 찔렀지만, 약간 생각이 다를 수 있습니다. 저희가 이야기했을 때는 ()’, 아니다에 굉장히 큰 방점이 찍혀져 있었습니다. 아까 기경량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요. 그런데 ()’하지만 ()’하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방금 말씀드렸던 것처럼 저들은 실증하는 척 하잖아요. 그런데 실증하는 척 하지만 이렇게 하면 역사학이 아닌 겁니다. 왜냐하면 저는 이렇게 생각을 하거든요. 진서 지리지를 이 기사를 쓴 분이 못 봤을까요? 몰랐을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거든요. 기사를 쓴 분이 진서 지리지를 다른 글에서는 인용하거든요. 근데 이 부분만 못 봤을까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일부러 숨겼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랬을 때 이건 역사학이 아니다, ‘()’다 라고 할 수밖에 없는 거죠. 하지만 흉내 냅니다. 역사학인 척합니다. 실증하는 척합니다. 그렇다면 이거는 ()’하지만 ()’인 역사학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제가 사학사 연구를 검토하거나 직접 사학사적인 글을 쓰면서 느끼는 것은 이것이 일종의 관심법이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 사람이 이렇게 썼을 것이다고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거기에는 사실 허점이 있습니다. 실제로 안 그랬을 수 있기 때문에.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저는 사이비라고 하는 용어가 ()’()’를 구분하는 것으로 비춰질 수 있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비판은 타당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비슷하게 흉내내지만 역사학이 아니다는 것을 전달하기 위해서 지금까지는 어쩔 수 없는 용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상입니다.

    이정빈: 위가야 선생님께서는 아무래도 실증이라는 것이 나름대로 어느 정도 달성해야 할 기준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즉 실증과 비실증을 구분할 수 있다고 지적해주셨는데요, 그에 대해서 전영욱 선생님께서 한 말씀 …….

    전영욱: . 전영욱입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 『고구려·백제·신라는 한반도에 없었다』라는 책을 읽었던 에피소드로 이야기를 시작할까 합니다.


     저는 이 어마어마한 두께의 과 관련된 책을 읽고 굉장히 감명을 받았었어요. 이 책의 실증 방법이 어렴풋이 기억나는데요. 저자가 누구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저자가 한반도에 고구려, 백제, 신라가 없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사용한 사료가 메뚜기 떼의 출현과 홍수와 관련된 내용이었는데요. 한반도라는 조그만 땅덩어리에서 메뚜기 떼가 여기에 나타났으므로 다른 곳에도 있어야 한다, 삼국이 중국대륙에 있어야만 설명될 수 있는 사료다, 이런 방식의 실증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그때 당시 굉장히 탁월한 분석이라고 느꼈었어요. (웃음)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런 실증 방식이 주는 감동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는데, 그 특정한 계기가 정확히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역사 연구를 업으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을 가지면서 학계에서 진행하고 있는 기본적인 훈련에 충실했기 때문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요즘은 좀 하게 됩니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이런 간담회 제의를 받고 , 난 아직도 훈련이 부족하구나.’ 하고 생각하기도 했는데요. 어쨌든 그런 일화가 기억나네요. 실증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만, 앞서 잠시 이야기가 나온 것처럼 현재의 사학사적 맥락에서 실증은 근대 역사학이 지닌 일종의 원죄처럼 인식되고 있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실증을 개념으로부터 접근한다면, 선험적으로 주어져 있거나 도그마에 빠져서 마치 종교처럼 믿고 있거나, 그래서 그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상황에 대해 마침내 분석을 가한다는 의미잖아요? 그런 면을 본다면, 실증이 근대 역사학의 가장 핵심적인 방법론으로 인식되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져 왔다는 점은 그 자체로 지금의 연구지형을 가능하게 한 바탕이라는 생각도 드는 것이죠. 역사학에서 실증이란 방법을 버린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는 생각도 들고요.



    다만 문제는 좀 있는 것 같습니다
    . 아까 김헌주 선생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실증이란 방법론이 태생적으로 왜 등장했는가, 그리하여 주로 무엇에 복무했는가등의 질문과 결부된다면, 실증은 근대 역사학의 핵심적인 한계를 만들어낸 방법론이라는 의견도 정당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어 근대 역사학은 제국주의를 정당화하거나 식민지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정치적 수단으로 활용되었고, 동아시아로 범위를 좁혀도 랑케류()의 사학이 이 지역에 이식되어 오면서 비로소 동양이 창조가 되었으며, 다시 한국으로 시선을 좁혀도 개항기와 식민지시기, 해방 이후에 걸쳐 만들어진 한국사 또한 민족이나 국민이라는 역사 주체를 시원적으로 상정하는 것에 아무런 의심이 없었던 것이죠. 그런 점에서 실증은 역사학의 필수적이고 버릴 수 없는 방법론인 동시에 태생 자체가 사실 올바름을 강조하고 강요하는 방식의 창시와 직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떨치기가 어렵습니다.


     

     

    이 부분을
    사이비 역사라는 용어와 관련시키는 것은 제 역량으로는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결국 이 부류들도 실증이라는 방법을 중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대 역사학의 일종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다만, 제가 더 생각하고 싶은 것은 역사학과 대중의 관계에 대한 것인데, 왜냐하면 양자가 맺고 있는 관계를 재설정하는 것이 실증이란 방법론 때문에 생긴 역사학의 일방적·폭력적 속성을 환기하거나 반성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오늘날 대중들의 감각을 나름대로 체감을 해보면, 학계에서 몇 십 년 동안 축적해 온 역사의 다양한 사실(史實) 등이 아니라 재야에서 강조하는 것들에 훨씬 더 고조되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그런 점을 염두에 두었을 때 오히려 저는 실증과 역사학의 관계를 사이비나 정통으로 이야기해서 제대로 된 실증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정리하기보다는 어떤 실증인지를 정리하고 고민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실증이란 표현에 대해서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요. 저 스스로 딱히 근사한 대안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껏 우리가 역사학을 공부하면서 해 왔던 것들을 반추해 보면 자연스럽게 답이 나오지 않을까요? 우리는 연구를 할 때 우선 전체적으로 사학사를 공부하고, 특정 주제에 대한 연구사를 정리한 다음에 그 주제가 그 시기에 왜 부각되었으며 어떤 당대적인 의미가 있었는지를 정리하죠. 하지만 동시에 그 주제를 둘러싼 여러 맥락이 어떤 도그마에 매몰되어 있는지를 파악하면서 궁극적으로 그 주제를 어떻게 다시 분석해야 그 주제 자체가 만들어 놓은 함정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지도 고민하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1980~90년대 만든 민중이란 용어를 지금의 연구자들이 어떤 방식으로 비판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겠죠. 그런 고민 속에서 새로운 형태의 실증이 자연스럽게 나타날 수 있는 게 아니냐 하는 생각이 일단 들어요. 이 연장선상에서 예전에 국정교과서 반대운동이 피크였을 때,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어요. 모든 분들이 역사의 대중화라는 주제를 자연스럽게 생각하셨겠지만, 이것이 사실(史實)을 재미있고 쉽게 전달한다는 식으로 이해되기보다는, 사학사를 대중화하는 방식으로 이해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요. 고민이 좀 단절되기는 했습니다만, 당시에는 사학사를 카드뉴스 같은 걸로 만들어서 뿌려본다거나 하는 생각을 가볍게 해 본 적이 있는데, 어쨌든 실증과 역사학의 관계가 긍정 또는 부정의 프레임에서 논의되기보다는 대중이라는 변수를 통해 고민되는 게 좀 더 생산적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현재 단계에서는 하고 있습니다.

    이정빈: 전영욱 선생님께서 자연스럽게 세 번째 주제로 넘어가도록 말씀해 주셨는데요, 어떠한 실증을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느냐. 실증 여부도 중요하지만 실증의 방향·목적·지향 등의 중요성에 대해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럼 우리가 논의의 주제로 삼았던 민족과 발전에 대해 이야기해 볼 차례가 되겠습니다. 고태우 선생님께서 먼저 말씀하시는 것이 좋겠지요?

    역사학과 대중, 그리고 학계의 오만함

    고태우: , 제 순서가 됐네요. 저는 민족이나 발전 등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앞서 제기된 부분 중 중요한 것들이 토론이 안 된 것 같아서, 또 앞의 여러 선생님들 말씀에 공감하는 부분이 많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다른 생각도 있어서 간략하게 생각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실증도 나왔고, 사이비 용어 문제도 논의되었는데요. 방금 전영욱 선생님께서 대중의 문제를 제기해주셨어요. 그런데 사이비 역사학또는 쇼비니즘적 역사학 뭐로 부르든 간에 이들이 단순히 그들만의 문제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고, 더 깊은 차원의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뭐냐면 대중과 사이비 역사학과 같은 흐름, 혹은 다른 여러 가지 흐름이 맞물려 있다는 것입니다. ‘사이비 역사학에 대해 실증과 관련하여 이런 부분은 잘못됐고, 과도한 해석이고, 견강부회식이라는 지적은 역사가로서 당연히 해야 될 지적인데, 그 밑바탕에는 좀 더 다양한 것들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선 한편으로 비판적으로 말씀드리면 역사학계의 오만함이 상당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제는 역사물, 역사를 소재로 생산되는 것들이 더 이상 역사학자의 전유물이 아니죠. 실증만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도, 곧 영화라든지 다큐라든지 정치가나 저널리스트에 의해서든 다양하게 또는 오히려 적확하게 과거로 다가가게 만드는 부분들이 있고, 거기에도 각각의 장단점이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측면을 생각할 때, 앞서 김헌주 선생님께서 의병 전공자로서 척사론적으로 (웃음) 분석하며 정()과 사()를 말씀하셨는데, 이를 아()와 비아(非我)의 신채호식 문법으로 치환할 수 있을 것이고, 하여튼 사이비와 대비되는 것으로서 정통내지 주류가 대비된다면 인식의 차원에서 한계가 많지 않은가. 실증을 넘어서 우리가 성찰할 길을 좀 더 생각하는 것이 더 생산적이지 않은가 하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두 번째로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이냐의 문제입니다. 사실 근현대사도 포함하여 현재 한국 역사학계에는 실증주의의 문제가 있습니다. ‘역사학계의 방법론이 뭔가, 역사학계에 사관이 있는가라고 할 때, 저는 실증주의, 정확하게는 문헌고증적인 사관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뼈저리게 반성해야 할 부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고, 역사학이 대중적으로도 더 다가간다는 목표가 있다고 할 때,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를 들어 사회자께서 주문하신 민족, 발전과 관련하여 말씀드리자면, 작년부터 불거진 국정화 문제도 보면 여러 다양한 생각들이 많았는데, 대체로 역사학계에서는 정부를 비롯한 국정화 지지론자들은 잘못되었고 우리는 옳다는 식의 논법만이 남는, 여전히 안티테제로서의 의미로 다가간 측면이 강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기본적으로 역사 연구 혹은 해석하는 틀의 이분법적인 문제에 대한 지적이 많이 제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거기에서 얼마만큼 벗어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민족과 관련하여 근현대사를 예로 들면 친일문제가 있을 텐데요.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한 인물이 있는데 그의 행적을 잘 보면 친일로만 규정지을 수 없는 부분도 많다는 거죠. 우파적이고 부르주아적인 성격이 있지만 나름대로 도시의 발전이라든가 생활개선 문제에 대해서 많은 활동을 했던 사람도 있거든요. 큰일 날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이 사람들을 오늘날 관점에서 투영시켜보면 사회운동가로서 해석할 여지도 있습니다. 한 사람에도 여러 정체성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물에 대해 다각도로 해석을 부여하면서 인간 이해의 깊이를 더하고, 시대상을 다채롭게 받아들이며 여러 면으로 조각을 내고 다시 조립할 수 있는 부분들이 너무나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부분들을 우리는 얼마만큼 치열하게 해왔는가하는 질문입니다.
    사이비 역사학의 현황에 대한 용어 문제를 인식론적인 차원에서 살펴볼 때, 저도 정과 사 내지는 이분법적으로 본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물론 저는 사이비 역사학이 분명 문제가, 과도한 해석과 견강부회, 어찌 보면 날조하는 듯한 문제가 너무나 많지만, 거기에 깔려 있는 대중심리적인 차원들, 더 깊은 구조의 문제들, 우리 스스로도 인식론적으로 갇혀 있는 부분들 등에 대해서 더 많이 반성을 하면서 나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의견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정빈: 요컨대 민족·발전을 내세운 근대 역사학을 넘어선다고 할 때, 탈민족 혹은 발전 프레임에 대한 비판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시지요? 이에 대해서 안정준 선생님 말씀을 듣겠습니다.

     

    다시 사이비용어에 관하여

    안정준: 두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사이비라는 용어에 대해 김헌주 선생님의 말씀 잘 들었는데요. 선생님은 사이비라는 용어의 어원에 대해 󰡔맹자󰡕를 근거로 엄밀한 분석을 하셨지만, 저희가 규정한 사이비라는 표현은 어디까지나 대중들을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 붙인 일반 용어입니다. 학문적인 관점에서 누군가의 주장을 분석하고 규정할 때에는 사이비라는 용어는 굳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최근에 언론과 대중을 상대로 이덕일 등의 저술가들이 기치로 내건 민족주의 사학과 식민사학(학계)의 대립구도는 한마디로 사기입니다. 이들은 이러한 프레임을 진실인양 호도하기 위해 학계의 연구사를 날조하고 팩트를 왜곡했습니다. 우리 젊은 역사학자 모임이 활동을 시작했던 것도 바로 저들의 사기와 거짓으로 인해 왜곡된 학계의 연구 성과를 대중들에게 바로 알리는 데 1차적인 목적이 있었습니다. 거짓 주장과 엉터리 실증을 토대로 자신들의 주장을 학계의 연구 성과와 대등한 역사학의 범주에 있는 것인 양 내세우는 것, 이것은 역사학이 아니다. 사이비역사학이라고 명명하여 비판했던 것입니다.


    안정준 선생님

     김헌주 선생님은 『맹자』에 표현된 사이비의 어원을 풀이하며, ‘사이비에 대비되는 학계를 정()이라고 규정하고, 기존 학계의 여러 가지 문제에 면죄부를 준 것이라고까지 말씀하셨지만, 이는 저희들의 의도와 전혀 다릅니다. 학계의 연구 목적이나 연구 수준에 대한 문제 제기는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민족발전이라는 토의 주제와 관련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김헌주 선생님께서는 기존 한국사, 특히 고대사 연구가 가진 문제점들을 말씀하셨는데요. 다들 아시다시피 해방 이후 우리 학계의 최대 과제는 일제가 심어놓은 식민사관을 극복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사회 전반에 걸쳐 좌우의 대립과 갈등이 극심했고, 경제적으로도 꽤 낙후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학계 연구자들도 우리 역사를 민족혹은 민족국가라는 하나의 결집된 실체를 통해 설명해야만 하는 시대적 과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이미 신채호 선생님 이래로 우리 사회 전반에서 민족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상당히 강조되기도 했었고, 이러한 흐름이 우리 학계의 연구 방향에 큰 영향을 끼쳤던 것도 사실이지요. 이는 고대사 연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따라서 고대부터 국가가 강조되었고, 국가가 초기에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어떤 발전 단계를 거쳐서 점차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를 갖춘 국가로 나아갔는가를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이는 결국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주장했던 대로 정체되고, 타율적이었던 역사가 아닌, 우리 민족 국가가 자체적으로 성장·발전해갔던 측면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시대가 변한 현재에도 기존의 연구 인식과 방법론이 과연 유효한 것인지에 대한 문제가 내부적으로 제기되고 있습니다. 예컨대 고조선, 삼국 등의 민족국가들을 한국사라는 동일한 틀 내에서 설명해왔던 것도 역사적 실상에 부합하지 않는 측면이 있습니다. 고대 삼국의 부()에 대한 연구에서도 이러한 인식의 흐름을 볼 수 있는데요. 이전에 일부 고대사 연구자들은 부체제론을 통해 고구려, 백제, 신라의 초기 국가 발전 단계를 동일한 틀로 설명하려고 했었고, 심지어 고조선, 가야 등의 국가 발전 단계까지도 모두 부체제를 통해 설명하려하기도 했습니다.
     
    근래에는 부체제가 국가 발전 단계론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정치 운영원리로서 이해되고 있고, 삼국의 부()가 갖는 성격이 각각 차이가 있다는 점이 강조되기도 합니다. 사실 고구려와 신라, 백제, 그리고 고조선 등의 세력들은 각각 지리적, 종족적으로 큰 차이가 있고, 지배체제의 발전 과정도 각각 다른 점이 많습니다. 이들 국가들의 정치·사회적 성장 과정을 한국사라는 동일한 틀 속에서 단일한 발전 단계론을 통해 설명하는 것은 역사적 실상에도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포함해 고대 국가들을 민족국가로 인식해왔던 것은 근현대 전공자들이 지적했던 대로 많은 문제점들을 안고 있는 것이고, 고대사 전공자들 내에서도 이에 대한 반성에서 기존과 다른 관점으로 접근해보려는 연구들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연구사 날조와 그릇된 사료 해석을 일삼았던 사이비 역사가들에 대한 비판이 결코 학계의 이러한 문제점들을 정당화하거나 외면하려는 의도가 아니라는 점도 다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정빈: 안정준 선생님께서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들을 쭉 정리해서 말씀해주셔서 다시 논의를 앞으로 돌려 자유롭게 여러 이야기를 나누어도 좋겠습니다. 아까부터 김헌주 선생님께서 계속 손 드셨는데, 하실 말씀.

    김헌주: 지금 이게 각자가 딛고 있는 철학적 기반이 다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논의가 평행선을 달릴 수 있는 것 같은데요. 이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대중적 전략으로 사이비라는 용어를 쓴다고 하셨잖아요? 물론 저는 당연히 모임의 연구자들이 학문적으로 다양한 고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임에서 발표한 논문들에서도 그런 고민을 읽었고요.

                                                    김헌주 선생님



    그럼에도 저는 약간 비판적으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 예를 들면 국정교과서 국면의 상황입니다. 아까 전영욱 선생도 잠깐 말씀을 하셨는데요. 예컨대 우리가 2015년 시점에 국정교과서 반대를 할 때 친일독재 교과서 반대로 하자는 구호가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역사문제연구소 젊은 학자들이 논의를 했었는데요. 무슨 말씀이냐면, 친일독재라는 것이 그 교과서를 설명하는 전부가 아니거든요. 그 교과서의 문제가 친일독재도 있지만 학문의 다양성 문제, 민주화, 인권 등 다양한 문제가 있는데 (대중에게 선명하게 보여준다는 명분으로) 친일독재 반대가 핵심 프레임이 되어버렸다는 것이죠.
     
    그러므로 학계의 연구자들이 우리가 다양한 고민을 하고 있는데 대중들에겐 단순하게 보여줘야 돼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아까 고태우 선생이 말씀하신 것처럼 역사학자의 오만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역사학의 실증에 관한 깊이나 분석은 학자들과 대중들이 다르죠. 그러나 식민지기에 왜 신채호가 그런 고민(예컨대 고토회복론)을 했고 지금 민주화시대에 우리가 왜 국정화 반대를 해야 하느냐를 설명해주면 전공자가 아닌 대중들도 다 알아듣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또 다시 다른 방식의 정()과 사()가 되는 것입니다. 학계는 정이며 인식론과 철학적 깊이가 있으니 대중들에게 이런 문제를 보여줌으로써 계몽한다는 태도란 것이죠. 물론 저는 학문의 계몽이 불가피한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런 자세를 가질 때, 또 다시 너희 모르지? 틀렸어!” 이런 방식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끝까지 얘기가 통하지 않는 분들에겐 어떻게 접근할 것이냐는 문제가 남는다는 것이죠. 저도 저들이 사이비적인 성격이 있음을 부정하진 않습니다. 다만 그 얘기만 했을 때 다른 얘기까지 하는 데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또는 한계가 있지 않을까 그것이 제 지적이고요. 그런 점을 고민했으면 좋겠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이정빈: 그동안 답변에서 기경량 선생님, 안정준 선생님 모두 사이비 역사라는 용어가 방편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을 지적하셨습니다. 이에 대해서 김헌주 선생님은 그게 학계의 오만일 수 있다, 이렇게 비판하신 것이지요? 여기에 대해선 어떤 선생님께서?

     

    대중과 학계의 거리

    기경량: 대중들과 눈높이를 맞추는 문제와 관련해, 최근에 경희대학교 총민주동문회에서 강연을 한 적이 있습니다. 강연의 끝머리에 한 분이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역사학계가 식민사관을 벗어났다는 겁니까, 못 벗어났다는 겁니까.’
     
    굉장히 난감한 질문이었습니다. 지금 역사학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식민사관 극복 이야기는 진도가 굉장히 멀리 나와 있어요. 초기에 정체성론이나 타율성론을 극복하자는 차원에서 이러저러한 연구를 수행했던 단계가 있었고, 그 결과 일제강점기에 일본 학자들이 주장하던 식의 식민사관은 극복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지금은 그 극복하는 방식 자체도 근대성의 질곡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니냐는 반성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역사학계는 그런 것을 고민하는 단계란 말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대중들에게 식민사관을 완전히 극복 못한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면, ‘, 역시 역사학계는 식민사관을 못 벗어났군요. 저 사람들 말이 맞네.’가 되어 버린다는 겁니다.
     
    고민의 지점이 완전히 달라요. 대중들이 생각하는 것과 역사학계의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고민의 층위나 수준이 굉장히 다르다는 거예요. 아까 역사학자들의 오만이라는 말씀을 하셨지만 우리들이 하는 발언들을 대중들이 쉽게 수용할 수 있다고 보는 것도 저는 오만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스스로도 비전공인 분야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지를 상기해 보았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여러 가지 전제들이 대중들에게는 전혀 당연하지 않은 것일 수가 있습니다.
     
    근대 역사학이 가지고 있는 여러 문제들, 폭력성, 한계 등을 극복하기 위한 비판과 시도들은 당연히 정당하고 저도 동의합니다. 그런데 객관적인 실증이라는 것이 과연 근본적으로 가능한 것이냐라는 식의 고민은 충분한 지적 훈련을 받지 않은 대중들과 나누기에 고차원적이라는 거지요. 대중들의 시각과는 안 맞는 것일 수 있어요. 
     
    예전에 고대 삼국은 한반도에 없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키보드 상에서 논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논리로 밀리니까 나중에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아느냐는 식으로 나오더군요. 사이비 역사학의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펼치면서 그 논리적 빈곤함을 포스트모더니즘을 들먹이며 정당화하더라는 것입니다. 모더니즘에 대한 비판과 문제제기는 중요하지만 매우 저차원적인 주장들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름에 기생할 수도 있어요. 이러한 것들도 우리는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이정빈: , 중요한 말씀 두 가지 정도로 생각해 볼 수 있겠는데요. 하나는 학계와 대중에 대한 구분이 가능한가. 이 문제를 좀 더 이야기 해 봤으면 좋겠고요. 두 번째는 탈근대 역사학입니다. 이를 방패로 내세운 사이비 역사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 좋겠습니다. 먼저 학계·대중 문제는 이쪽 분야 공부를 많이 하신 전영욱 선생님께서.

    전영욱: 공부를 많이 하지는 않았는데……. (청중 웃음) 다들 느끼시는 것처럼 저 역시도 너무나 어려운 문제라는 생각이 일단 먼저 들지요. 저런 이야기를 들으면 그게 맞는 것 같고,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이게 맞는 것 같다는 생각도 솔직히 드는데요. 그런데 기본적으로 제가 가지고 있는 생각은, 일단 김헌주 선생이나 고태우 선생이 이야기하는 학계 또는 전문가가 가지는 오만의 기원이라는 게 과연 무엇일까 하는 점에 집중하고 싶습니다. 역사학은 고귀하고 신성한 것이라는 세간의 주목과는 달리, 뭐랄까, 역사학의 태생이랄까요? 그 부분은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려고 해도 좀 어두워요. 한 마디로 역사학은 통치를 위한 지식이었던 것이죠. 소위 역사적 지식이란, 그것이 세분화되고 목록으로 만들어지면서 통치의 체화에 복무했었죠.
     
    그런데 근현대에 들어 생긴 한국적인 맥락을 본다면, 참으로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런 역사학이 통치로부터의 해방을 위해 활용되었다는 측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러다보니 소위 식민사관에서 벗어나기 위한 실증은 그 자체로 신성시되었던 것인데, 여기에 사실 근본적인 패착이 있었던 게 아닌지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식민사관으로부터의 탈피라는 목적은 역사학과 대중의 접점을 가장 자연스럽게 만들었던 시대적 과제였던 것 같아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말이죠. 그 과정에서 역사학을 통해 대중과 직접적으로 소통해 왔던 사람들은,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는 사이비 역사학자였잖아요? 해방 이후 식민사관을 벗어나기 위한 다양한 방식의 노력 중에 결과적으로 대중에게 가장 강력하게 어필했던 것은 안호상 등이 제기한 국사 찾기였죠. 국가의 지원도 있었고, 그러다보니 『국사교과서』에 고대사와 관련된 재야의 주장이 반영되는 실례도 나타났던 것이죠. 이런 부분들은 한국 사회에서 민족주의 사관, 특히 고대사와 직결되는 민족주의 사관의 뿌리가 매우 깊으면서 넓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역사학과 대중이 만나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 그러나보니 오늘날의 연구지형 위에서 전문가가 대중이 지닌 민족주의적 감수성을 파헤치거나 거기에 균열을 내는 것 자체가 가능하기는 할까 하는 생각마저 들기도 해요. 어쨌든 아까 사학사와 관련된 발언을 한 이유이기도 한데요. 사람들에게 사실(史實)의 올바름을 강요하지 않으면서 현재 가진 감수성에 균열을 일으킬 수 있는 방법이란, 결국 학계가 지금까지 어떤 문제의식의 변화, 방법론의 변화를 수반하여 연구를 해왔구나 하는 점을 알리는 것 정도가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죠. 이것이 가능했다면 이덕일이나 사이비 역사학자들의 이야기가 얼마나 옛날 것인지, 얼마나 황당한 것인지를 알 수 있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 것입니다.
     
    결국, 좀 추상적으로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는데, 전문가가 대중에게 다가가는 방식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는 어려운 것이다라는 점을 알리는 게 아닐까, 이게 역사 대중화의 첫 걸음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죠. 근대 역사학 때문에 전문가나 대중이 빠져 있는 선험적인 어떤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게 가장 중요할 텐데, ‘역사는 쉽다’, ‘역사는 어렵지 않다는 표현을 계속해서 강조하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사실(史實)을 둘러싼 수많은 맥락을 고민하게 하는 방식이 대중화의 첫 걸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국민이나 민족 등과 같은 정체성 자체를 고민하게 하는 방식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죠. 이런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역사의 어려움이겠죠.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껏 수행해 온, 사실을 쉽고 재미있게 제공하는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의 방식으로 대중과의 접점을 끊임없이 추구해 가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오만에 빠져 있는 전문가 집단계몽되어야 하는 대중 사이의 관계가 지금과는 좀 다른 방식으로 고민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일단 하고 있습니다.

    이정빈: 그래도 기본적으로 학계와 대중이 구분된다고 말씀하신 거죠? 다만 양자가 관계를 맺어온 역사를 염두에 두고, 간격을 좁히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으로 이해되는데, 이에 대해서 안정준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안정준: 대중과의 소통 문제를 말씀하셨는데, 사이비 역사학 문제는 고대사 분야에 많이 치중해 있는 만큼 고대사 연구자 입장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전에 어느 종편 프로그램에서 어느 비전공 출연자가 고구려사를 강연하면서, “어차피 고대사는 불확실하다. 사료도 워낙 부족한 실정이니, 연구자가 고대사를 인지하고자 하는 의도가 강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다. 식민사관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자연히 그렇게 구성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민족사관의 관점에서 이를 바라봐야 할 것이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이 분은 사료를 통해 역사 고증을 합니다. 전공자 입장에서 볼 때는 엉터리 수준에 거짓말도 들어가 있지만, 자기 나름대로 실증 방식을 통해서 대중들 앞에 그럴듯한 역사상을 제시합니다. 사실 일반인들 가운데는 역사학에 대한 이해가 많이 부족한 분들도 있습니다. 또한 해방 이후부터 지속되어온 민족주의의 이념이 정서적으로 뿌리 깊게 자리 잡은 분들의 경우에도 사이비 역사가들의 그릇된 주장에 혹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전공자의 입장에서 일반인들 사이에 횡행하는 역사 왜곡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대중들을 상대로 한 용어 사용뿐만 아니라 어떤 논리를 통해 제시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다양하게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 저희들이 󰡔역사비평󰡕에 썼던 글들이 대중들 모두를 이해시키고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역사학자들이 학문적 성과를 대중들에게 널리 이해시키고 공감을 얻기 위해서는 일반인들을 상대로 한 보다 다양한 유형의 정보를 제공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역사 용어 역시 학문적이고 엄밀한 것만 고집하기보다는 시의적으로 적당한 용어를 한시적으로 사용하는 방법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예컨대 사이비라는 용어도 지금 현재는 유용하게 사용하지만 나중에 저들의 대응방식과 성격이 조금씩 바뀌면 또 다른 용어로 대체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저는 사이비라는 용어가 학계 밖에서 역사를 연구하거나 저술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다수 포괄하는 용어라고 보지도 않습니다. 예전에 제가 경희대 총민주동문회에 가서 강연을 했을 때, 청중 가운데 한 분이 그럼 지방에서 향토사를 하시는 분들이나 기존 학계와 다른 생각을 가진 아마추어 연구자도 전부 사이비냐라고 질문하셨는데, “결코 그렇지 않다. 학계의 연구사를 날조하거나 팩트를 왜곡하는 사람들에 한정해서 그렇게 지칭한 것이라는 답변을 드렸습니다.




    젊은 역사학자의 한국사 콘서트 "한국고대사와 역사 파시즘"


     

    연구자들이 생각하고 의도하는 것들을 대중들에게 제대로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소통하고 공감을 이끌어내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그것이 한편의 완결된 글이나 완결된 용어 등으로 해명될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양하고 시의적절한 전달 방식과 용어들을 생각해야 할 것이며, 여기에 너무 엄밀한 잣대를 들이대면 오히려 전달이 어려워질 수도 있습니다.

    이정빈: 아까 기경량 선생님께서 학계와 대중과의 관계 문제, 또 하나는 탈근대 역사학에서의 사이비 역사학 문제, 두 가지를 말씀해 주셨는데요. 고태우 선생님께서 두 가지를 다 말씀해 주셔도 좋고, 그 중에 하나만 말씀해 주셔도 좋습니다.

     

    사이비 역사학과 포스트모더니즘 사이의 상대주의, 역사 해석의 유동성

    고태우: . 쉬운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요. 제가 앞에서 사용한 오만이란 표현에는 토론을 위해서 일부러 쓴 의도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까 기경량 선생님께서 포스트모더니즘과 사이비 역사학의 관계에 대한 질문을 받으셨다고 하셨습니다. 사이비 역사학이 포스트모더니즘을 거론하며 그럼 우리 해석도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주장을 하는 것이겠지요. 일종의 절대적인 상대주의이고, 이런 부분은 역사철학적인 질문이라 어려울 수 있습니다. 사실 그런 부분도 저는 다시 우리의 성찰거리로 삼을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은데요.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해서는 이미 학계에서 수백 편의 논문이 나와 있기 때문에 다 아시는 부분인데, 그런 조류들이 서구학계에선 이미 30년 전부터 이야기로서의 역사’, 혹은 지식권력에 대한 비판적 입장에서 역사해석의 절대성을 부정하고 근대 비판적인 이야기들을 해왔습니다. 이런 부분들을 한국학계에서 한편으로는 여전히 방법론적으로 우리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는지, 또 그런 미흡한 이해가 상대주의에 대한 혼돈상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어 포스트모더니즘 역사학은 서술/해석의 상대주의라는 부분에 더 강조점이 있다고 보이거든요. 그니까 사이비 뭐라고 표현할까요. 이것이 담론의 효과겠죠. ‘사이비 사이비하시니까 사이비 역사학으로 굳어지는. (웃음) 어쨌든 사이비 역사학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빌미로 우리 주장의 일리가 있다, 혹은 맞다고 주장하는 것은 정말 단순하고도 절대적인 상대주의가 아닐까 싶어요. 이런 것도 있으면 저런 것도 있다. 네 것이 맞으면 내 것도 맞다. 하지만 앞서도 여러분께서 제기하셨듯이 사이비 역사학을 역사학적으로 보면 실증의 문제가 있는 것은 분명히 틀림이 없죠. 서술과 해석의 상대주의를 강조한 포스트모더니즘 역사학과, ‘사이비 역사학에서 빗대는 절대적인 상대주의는 엄연히 다른 것이라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덧붙여서 우리가 좀 더 차분하게 역사학 연구를 봤을 때, 포스트모더니즘 역사학 내지 상대성을 강조한 저자들이 사실 실증을 안 한 것도 아니죠. 󰡔치즈와 구더기󰡕로 유명한 카를로 진즈부르그라든가 󰡔마르탱 게르의 귀향󰡕의 나탈리 제먼 데이비스 같은 이는 해석의 상대성을 염두에 두고 그럴 것이다’, ‘~일지도 모른다이런 식으로 표현한 것이지, 이런 학자들이야말로 실증을 철저하게 하고 있다고 보거든요. 그들이 무턱대고 상대성을 강조한 것은 아니라는 점, 이런 측면들까지 우리는 좀 더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포스트모더니즘 역사학에 대해 너무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것은 아닐까 하는 반성도 해볼 수 있겠습니다.
     
    또 한편으로 대중과 관련하여 짧게 말씀드리면, 지금은 여러 매체, 미디어를 통해 역사가 해석되기에 역사물을 생산하는 역사학계의 영향력이 흔들리면서도 계속 유동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기존에는 역사학계에서 자료를 독점할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이제는 이른바 지식정보사회에서 (사람들의) 사료 접근성이 인터넷, 미디어 등을 통해 많이 높아졌고,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다양성에 입각해서 해석할 수 있는 상황이 주어진 점, 매체가 발달하여 역사 해석의 경계도 흐릿해지고, 역사가로 훈련받았던 사람들도 미디어를 활용하여 여러 활동을 하면서 대중적 역사가로서 활약하는 사례도 많아진 점이 있습니다. 따라서 역사의 생산과 소비, 해석의 경계가 과거보다 명확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테라 모리스-스즈키가 이런 말을 했는데요. 역사 연구를 볼 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로 해석의 영역이 있고, 둘째로 동일화의 영역이 있다고 했어요. 동일화란 어떤 것을 기념하고 어디에 동감하고 슬퍼하고 애도하며 욕망을 부여하고 상상력을 발휘해가는 측면을 말합니다.





    이를 놓고 볼 때 한국 역사학계는 전자의 측면
    , 곧 해석의 측면에만 너무 주목해왔던 것은 아닌가. 나와 어떤 현상을 동일화하는 문제를 간과하다 보니, 역사학계가 대중과의 소통에서 삐걱거리거나 뭔가 어려움을 겪고, 한편으로는 고민이 계속되는 부분이 남아 있지는 않을지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해석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정서적인 측면들을 더 고민하며 새로운 방법론을 생각해보는 작업들을 계속 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측면에서 오만함, (역사학계의) 약간의 정체(停滯), 이분법 이런 부분들을 지적하고 싶었습니다.

    이정빈: 어느 정도 정리를 한 다음에 발언 기회를 갖겠습니다. 극단적 상대주의자를 제외하면, 포스트모던 역사학 역시 실증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그 점은 인정하겠는데, 중요한 것은 해석보다는 의미 부여? 이를 동일화라고 부르나요?

    고태우: 의미부여 말고 감정과 정서적 영역까지 포괄하는 동일화를 지칭했습니다. 제가 제대로 설명을 못 드렸나 보네요. (웃음)

    이정빈: , 무슨 뜻인지 대략 느낌만 알겠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위가야 선생님.

     

    욕망하는 역사

    위가야: 거기에 대한 건 아니고 역사대중화라고 하는 문제를 이야기할 때, 아까 대중과 학계의 괴리 이런 것에 대해 오만함이라고 하는, 이게 물론 토의의 활성화를 위해서 사용하신 단어이지만, 오만함이라고 하는 것도 일견 맞지만 또 한 가지 그 이면에는 (다른) 고민이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저도 경희대 총민주동문회에서 했던 강연회에 가서 지원을 좀 했었는데 그 때 들었던 말이 있었어요. 예상은 했지만 막상 들으니 저는 굉장히 충격이었습니다. 뭐냐면 꿈을 빼앗지 말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우리 영토가 그렇게 광활할 수 있었던 거 아니냐. 왜 꿈을 뺏으려고 하느냐고 하는 거예요. 여기에 굉장히 중요한 맥락이 들어있다고 생각합니다.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그걸 설명하지 못합니다. 학자들한테는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동료들한테는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대중한테는 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역사에 대한 상이 다르기 때문이거든요.
     
    대중이 생각하고 있는 역사상은 일종의 우리가 사는 데 사용하는 무기, 우리의 정치에 이용할 수 있는 무기로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특히 이 사이비 역사학을 하는 사람들이 파고드는 심리가 그렇다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우리는 그거에 대해서 뭐라고 해야 하느냐. . 그러니까. 그겁니다. 계속 한사군 이야기를 해서 이상하지만 사이비 역사학측에서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으면 안 되는 이유를 가장 크게 대는 게 북한이 만약에 급변사태가 났을 때 중국이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것을 이용해서, 그 역사적 사실을 통해서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반박할 것이냐. 사실 역사학자들은 반박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역사와 현실정치를 곧바로 연계시키는 것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겁니다. 역사학자들은 누구나 그럴 텐데. (총민주동문회 강연회에서) 그 이야길 했어요. ‘몽골이 유라시아 전체를 다 지배했는데 지금의 몽골이 러시아 땅 전부 우리 거라고 이야기 안하지 않느냐. 만약 그렇다고 하면 누가 동의를 하겠느냐.’ 그러자, ‘아 그건 너네나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라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이 괴리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의 문제는 역사학자의 오만이라기보다는, 저는 지금도 계속해서 생각하는 게 이 인식상의 괴리를 어떻게 극복하고 접근할 것인가 아니면 접근할 수 있도록 이야기를 해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아직도 있습니다. 아직 저는 해답을 찾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문제점이 확실히 역사대중화와 우리의 문제에 남아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실증을 이야기할 때, 학계 특히 고대사학계 같은 경우에 실증이, 아까 저는 실증이 수단이라고 말씀드렸었지만 어느 순간 실증이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고 있는 게 아닌가 합니다. ‘실증을 했으니까 됐어라는 느낌말이죠. 논문을 쓸 때, 그 논문이 어떠한 이야기를 해내는가를 보는 것보다 이렇게 실증을 했어라고 하는 게 지금 우리 학계가 빠져있는 일종의 도그마 같은 거랄까요. 제가 너무 세게 이야기하는 건가요. 이것은 옛날에 일본의 식민사학에 가해진 비판이거든요. 일본의 식민사학, 고도로 발전된 실증사학이라고 하는 게 그렇다는 비판을 많이 해요. 그래서 일본 학자 중에서 실증사학의 거의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는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 같은 사람을 후대의 일본학자인 미시나 쇼에이(三品彰英)가 뭐라고 비판했냐면요. ‘이 사람은 자기의 모순지적주의의 취향을 만족시키고 있다.’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 오류를 사실 우리도 어쩌면 답습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그런 불안한 마음을 가지면서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실증이 목적이 아니라 수단일 뿐이고 실증을 통해서 어떠한 역사상을 우리가 서술해 나갈 수 있을 것인가를 계속 고민하고 공부해야 될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정빈: 위가야 선생님께서 아까 고태우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동일화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신 건가요?

    고태우: 약간 다르긴 한데요. (청중 웃음) 대중의 욕망이라든가 학계의 실증주의 문제에 관해서는 방금 위가야 선생님의 말씀에 기본적으로 동의합니다. (웃음)

    이정빈: 실증에 그칠 것이 아니라 그 목적 내지 방향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는 말씀을 해주셨는데요. 중요한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이비 역사학이라는 현상을 통해서 우리가 앞으로 어떤 고민을 해야 하는가, 이에 대해서 말씀을 듣겠습니다.

     

    한국사 연구를 전망하며 - ‘민족발전을 넘어

    기경량: 근대사 전공하신 분들이 지적하신 사항들이 있잖아요. 우리가 사이비 역사학이라 지칭하는 자들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한국 역사학계가 가지고 있는 모순이나 넘어서야 할 것들이 은폐되거나 혹은 가려지는 위험성이 있지 않느냐. 거기까지 우리가 살펴야 하지 않겠느냐는 지적으로 저는 이해를 했는데요. 우리가 사이비 역사학을 공격한다고 해서 지적하신 그런 부분들에 대해 소홀해진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두 개는 그냥 다른 차원의 이야기라고 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지요. 우리가 건강식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어요. 서구식의 기름진 식생활에 대해 문제점을 지적하고 단백질과 야채, 비타민, 섬유질 위주로 식사를 해야 한다고 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이 앞에 누군가 영양실조에 걸린 굶주린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에게는 탄수화물이든 지방이든 일단 입에 넣어 주고 살 수 있는 활력을 만들어 주는 것이 중요한데, 그 옆에서 기름진 음식은 좋지 않다, 건강식을 먹어야 한다 말하는 것은 허무한 이야기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 말은 둘은 그냥 다른 차원의 이야기이고, 맥락에 따라 둘 다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이비 역사학에 대한 공격, 비판을 하는 것과 학계 내부에서 과거의 민족이나 발전 위주로 만들어졌던 역사적 담론들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병행될 수 있습니다. 근대사 전공자 분들이 고대사 전공자들에게 가지고 있는 스테레오 타입이 있는 것 같아요. 고대사 하는 사람들은 대개 발전주의, 민족주의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일 거라는. (웃음) 그런 선입견이 약간 있으신 것이 아닌가 하는 섭섭함이 저는 좀 있습니다. 고대사 공부하는 사람들도 분명 근대 역사학의 한계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김헌주: 일단 마지막 질문에 먼저 답변 드리겠습니다. 일단 저는 발전주의와 민족주의는 오히려 근현대사 연구자들이 훨씬 강하게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 비슷한 것이죠. 국사라는 하나의 짜인 스토리 안에서 발전과 민족 같은 강박이 다 있는 것이죠. 물론 저는 그걸 완전히 부정하는 입장은 아닙니다. 당연히 중요하죠. 발전이나 실증, 민족은 논의할 가치가 충분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각자의 생각들을 들어보는 것 못지않게 대안제시도 요구하는 것 같아서 제가 가진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단 계속 고민이 되는 게 있거든요. 전영욱 선생님이 말씀하신 사학사적 대중화라는 의제가 참 좋은 것 같거든요. 제가 강의를 나가면 이른바 역덕’(역사 오타쿠의 줄인 말)들의 역사지식을 제가 못 따라가는 부분도 많습니다. 고대사 사료를 줄줄 꿰는 학생도 있고요. 이렇듯 대부분 역덕들은 실증과 팩트에 주목합니다. 그런데 사학사를 잘 아는 사람들이 있어요. 경성제국대학과 이병도의 관계 등 이런 사학사를 꿰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사학사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고 다양합니다. 1980년대 민중사학의 등장, 2000년대 전후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 21세기에 들어선 지금에는 여성주의 문제가 역사학 연구에 영향을 미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전제 하에서 1980~90년대가 만들어낸 대학의 민주화, 그들이 꿈꿨던 민족주의, 즉 민중적 민족주의가 주창되는 현실적 변화를 사학사적 맥락 속에서 바라 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사이비 역사학은 해방 이후에 늘 있어왔지만 각 시대마다 발현되는 맥락이 다르다는 생각입니다. 예컨대 지금 같은 국정교과서 국면에서 발현되는 맥락, 유신시대 당시에 극우적 성격으로 발현되는 측면, 오히려 민주화 시대의 진보적 민족해방론에서 발현되는 측면이 모두 다르다는 것이죠.
     
    그래서 향후에는 이런 측면들을 더 자세하게 살펴보아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예를 들면 각 시대에서 중요한 지식인들이나 언론인들이 생산해낸 사이비 역사학적 담론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고태우: 사실 김헌주 선생님이 기조 발제한 3번 문제하고도 관련되는데, ‘대중이라 하면 워낙 다양한 속성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기에, 이를 단순히 하나로 보는 것은 저 스스로의 오만인 것이겠습니다만, 그 쇼비니즘적인 측면들, 뭔가 계속 강한 것에 대한 욕망이 어디서 오고, 지금 현재 한국사회의 어떤 부분 때문에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가 하는 문제가 중요할 것입니다.
     
    이건 여러 각도로 생각할 수 있다고 보는데요. 과거의 성장일로 사회에서 이제는 사실상 저성장 내지는 제로성장 사회로 가고 있고, 고령화라든가 여러 가지 사회구조적인 배경 속에서 다시 또 강한 것에 대한 욕망이라든가 위안을 찾고자 하는 식으로요. 위안을 얻기 쉬운 것이 역사잖아요. 영웅의 역사 이걸 보면 재밌게 느끼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그런 사회 심리 부분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런 쇼비니즘적 역사관, 현상들이 나타났는가이런 걸 더 분석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어떤 관점이 문제가 있다거나 실증, 설명이 잘못됐다고 비판하는 것은 사실 쉬운 거죠. 왜 그렇게 믿고 싶어 하고 그런 신념을 갖게 되는가, 왜 여러 사람들이 꽤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부분을 다시 해석하고 비판적으로 극복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잖아요. 앞서 다른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박정희시기 때의 국정화 문제라든가 안호상 등등 그런 것까지도 포함해서 현재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가. 이런 문제의식이 같이 결부되면 훨씬 더 의미 있는 성과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들을 이전부터 계속 갖고 있어서 이 말씀을 드리고 싶었어요.
     
    사실 근현대사도 편견이나 신화가 많습니다. 발전, GDP 성장 이런 것들이 대표적이죠. 고대사나 전근대사에서도 많지요. 중앙집권에 대한 신화 엄청나게 강하잖아요. 왜 중앙집권이 더 올바른 가치인 것이고 더 나은 사회체제, 국가체제인지. 여기엔 물론 역사적으로 국민국가 단계로 수렴된 맥락, 국민국가에 대한 사람들의 경험이 축적된 것이 있기 때문이겠지만, 사실 중앙집권화라는 용어는 가치 평가를 배제하고도 해석될 수 있는 것이잖아요. 다양한 가치를 인정하며 연구하고 서술하자는 이야기들은 많이 나오고 있는데 실질적으로 우리는 그리 하고 있는가? 여기 청중석에서도 여러 세대(?)가 계시듯이 당대의 시대적 과제 속에 앞 세대 나름의 고민들이 있고, 또 오늘도 여기 계시는 분들의 관점이 조금씩 다르게 느껴지는 것처럼 우리가 하고 있는 고민들도 각자가 다 다르기 때문에 각 영역에서 다양한 부분들을 계속 추구해가야겠죠. 또 이제는 좀 목적론적인 사관, 대표적으로 마르크스주의적인 목적론, 민족국가, 근대화론적인 목적론에서 벗어나는 것이 필요하겠습니다. 이런 것들 상당히 뿌리 깊다고 보거든요. 인간의 행복 내지는 인권, 평화, 소수자, 환경, 특히 저는 최근 환경에 굉장히 관심이 많습니다. (웃음) 인간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고 지구까지도 생각할 수 있는 방식으로 좀 더 가야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근현대사 연구에도 많은 반성이 필요할 것이라고 덧붙이고 싶습니다. 

    이정빈: , 시간이 많이 지난 관계로 한 분만 더 발언기회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안정준 선생님! 시간이 없는 관계로 요약 없이 마이크를 넘기도록 하겠습니다.

    안정준: 이미 다 나온 얘기인데, 짧게 정리하면서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제가 경희대 총민주동문회에서 강연을 했을 때, 50대 정도로 보이는 한 남자 분이 제 옆에 앉으셨어요. 그리고 진지하게 낙랑군이 정말 평양에 있었냐?”라고 물으시길래, 제가 하고 대답했죠. 그랬더니 이 분이 한숨을 푹 쉬시면서, “알았다. 그런데 참 답답하다. 우리가 어떻게 인식했으면 좋겠냐라고 탄식을 하시더군요. 사실 우리 학계에서 각종 연구사 정리를 한 글을 보면 이제 학계에서 식민사관을 극복했다는 문구들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학문적으로는 극복했겠지요. 하지만 우리 사회 일반 대중들의 머릿속에서는 아직 식민사관이 극복되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연구자들은 학문 내에서만 논리적으로 식민사관을 벗어났다고 자부할 것이 아니라, 아직도 일반 대중들의 인식 속에 널리 잠재해있는 식민사관을 어떻게 극복하고 다른 방향으로 전환시킬 것인가에 대해 지속적으로 고민하고 그 방법을 모색해야만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그게 진정한 식민사관의 극복이지요.
     
    또 한편으로는 근현대사 전공자분들이 지적하신대로 고대사 연구에 있어서 아직까지 민족주의적 인식이 다분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학계에서 지금 가지고 있는 학문상의 문제와 대중들의 인식에 대한 문제는 서로 분리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희 젊은 역사학자 모임에서 하는 활동은 바로 대중들을 상대로 한 작업들입니다. 저희들 역시 아직까지는 학계의 연구 성과에 대한 일부 왜곡된 사실들 몇 가지를 바로잡은 것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일부 문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많은 과제들을 남겼지요. 앞으로 대중들의 역사 인식을 전환시키기 위해서는 해방 이후 민족주의적인 역사 인식이 자리 잡게 된 연원을 밝히고, 이것이 지금 현재의 역사 인식으로 이어지는 과정과 배경을 먼저 검토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를 위해서는 고대, 중세, 근현대 등 각 시대 전공을 불문하고 서로 모여서 논의하는 자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정빈: 말씀을 잘 해주셔서 제가 따로 정리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사이비 역사학이라고 하는 일련의 현상으로 우리의 모임이 시작되었는데요, 단순히 사이비 역사학에 대한 비판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연구를 모색해 나가는 데도 우리의 모임이 기여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럼 이상으로 좌담회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 이 좌담회는 경희대학교 인문학연구원 부설 한국고대사·고고학연구소 제17회 콜로키움, 근대 역사학과 민족주의-한국 고대사 연구의 지향을 모색하며-의 제1부로 기획되었다. 좌담회의 주요 내용은 사전에 논의되었다. 이에 논점을 서로 공유한 바탕 위에 주제별로 토론하였다. 좌담회를 마치고 참석자 각자가 발언 녹취록을 작성하였고, 이를 나유정(한국외대)이 수합·정리하고 참석자 전원이 검토한 뒤 고태우가 최종 편집하여 재정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