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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이비 역사학' 개념의 의미와 한계, 그리고 ‘올바른 역사’의 딜레마

    관리자 2016-09-29 15:43 2052

    '사이비 역사학' 개념의 의미와 한계, 그리고 올바른 역사의 딜레마

     

    김헌주(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1. 들어가며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이른바 젊은 역사학자 모임(이하 모임)’의 활동과 그 의미에 대해서 짚어보고자 한다. 그간 사이비 역사학의 문제점과 한계에 대해서는 학계 내부에서 여러 고민들이 있었지만, 상고사 논쟁이 사회적 이슈가 되어 재야학계와 강단학계의 대토론회까지 열렸던 1987년 이후로는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모임에서 행한 연구와 강연활동은 언론을 통해 대중들에게 알려졌을 뿐만 아니라 의미 있는 성과도 이루어냈다. 역사대중화란 명목으로 행해지는 난잡한 판에서 중요한 문제제기를 던졌다는 점에서 모임의 1년 간 활동은 그 의미가 적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젊은 역사학자 모임의 활동이 기폭제가 되어 선학들 역시 강연과 연구논문의 방식으로 대응에 나섰다는 점도 고무적이다. 다만, 이 글에서는 그 동안 이룬 성과보다도 각 논의들에 대한 비판지점과 향후 우리세대의 역사학자들이 더 고민해야 할 부분은 무엇인가에 방점을 찍고 논의를 이어가고자 한다.

     

    2. ‘似而非 歷史正史

     

    기경량 선생도 설명하고 있지만 似而非󰡔孟子󰡕 〈盡心下에 나오는 맹자와 그 제자인 만장의 대화에서 나오는 용어이다. 전문과 해석을 옮겨본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사이비를 미워하는데, 가라지를 싫어하는 것은 벼싹을 어지럽힐까 두려워서이고, 처세에 능한 자를 싫어하는 것은 를 어지럽힐까 두려워서이고, 말 잘하는 자를 싫어하는 것은 을 어지럽힐까 두려워서이고, 나라 음악을 싫어하는 것은 正樂을 어지럽힐까 두려워서이고, 자주색(間色)을 싫어하는 것은 붉은 색(正色)을 어지럽힐까 두려워서이고, 향원을 미워하는 것은 덕을 어지럽힐까 두려워서이다.’ 하셨다. 군자는 常道로 돌아갈 뿐이니, 상도가 바르게 확립되면 서민이 에 흥기하고, 서민이 에 흥기하면 사특한 무리들이 없어질 것이다.”

    (孔子曰, 惡似而非者. 惡莠, 恐其亂苗也. 惡佞, 恐其亂義也. 惡利口, 恐其亂信也. 惡鄭聲, 恐其亂樂也. 惡紫, 恐其亂朱也. 惡鄕原, 恐其亂德也. 君子反經而已矣. 經正, 則庶民興, 庶民興, 斯無邪慝矣.)2)

     

    전체 문장에서 맥락상 似而非등의 常道를 어지럽히는 그릇된 무엇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정의(定義)를 역사학에 대입하면 기존 한국사 연구는 , 재야역사학자들의 주장은 似而非가 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은 또다시 맥락상 이 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3) 이 해석에서 몇 가지 질문이 던져진다. 역사학에서 올바름()’의 기준은 과연 무엇일까? 반대로 似而非의 기준은 무엇일까?

    몇 가지 근거를 찾아보았다. 기경량 선생은 사이비의 기준으로, 환단고기 등 위서의 사용과 사료 조작 학문보다 대중선동에 주력한 점을 근거로 들었다.4) 당연히 올바름의 기준은 엄밀한 사료비판에 입각한 연구 학문적 양심을 지키는 것이 될 것이다. 안정준 선생은 논문 말미에 학자적 태도로 연구하는 사람의 학문을 대하는 진지한 자세 스스로의 이념이나 가치관을 객관화하려는 노력을 꼽았다.5) 역시 이것이 일 것이고 반대가 가 될 것이다.

    하지만 랑케 이후 역사철학은 모두 역사학의 현재성과 구성주의적 측면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나아가고 있다. 사실 근대역사학이 국가권력과 같은 결로 짜여져 있으며, 근대역사학이 자부한 과학성과 객관성은 현존 국사의 논리를 정당화한 것이었다는 지적은 진작부터 있어왔다.6) 더 나아가 기존 한국사 연구 역시 유럽에서 출발하여 제국일본을 통해 한국에 정착한 근대역사학이며, 문명/야만, 발전/정체, 남성/여성이라는 이분법적 세계관에 입각해 있었고 한중일 삼국의 근대역사학에 그대로 내재되어 있었음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7) 이러한 구도는 근대성에 대한 성찰적 담론이 나오기 이전까지 계속 유지되었고 지난 10여 년간 많은 논쟁이 있었지만 여전히 많은 토론이 필요한 상황이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의 대립항에 객관성과 과학성을 표방한 근대역사학의 계승자인 기존의 한국사연구가 과연 일 수 있는가에 대한 성찰이 더 본질적 문제일 수 있다. ‘혹은 공자가 얘기했던 常道가 분명하지 않다면 의 기준 역시 불분명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3. 중요한 건 오히려 이름붙이기이다

     

    그럼에도 근대 역사학의 성립요건에서 1차 사료에 대한 비판적 검토는 필수적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따라서 사이비 역사학이 함량 미달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사료 조작이라는 혐의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연구가 함량 미달이라고 해서 사이비라는 명칭을 붙이는 것에 대해서는 고민이 필요하다. 1차 사료에 대한 과학적 분석뿐 아니라 민족(국민)국가의 서사를 통사적으로 정리하는 것 역시 근대역사학의 중요한 구성요건이기 때문이다.8)사이비 역사학민족을 고대에서부터 이어져내려 온 단일한 목적성을 가진 역사적 실체로 인정한 채, 웅대한 대륙을 회복하자는 고토회복론을 방법론적 기반으로 삼고 있다. 더구나 그들 역시 중국 정사 등의 1차 사료를 활용하고 있기도 하다. 한사군을 중국에 위치시키기 위해 무리한 해석을 하고 있지만 어찌되었든 독립군 사관에 입각해서 1차 사료를 활용하여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사이비 역사학에 대한 명명은 역설적으로 더욱 풍부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니 어쩌면 사이비 역사학은 한국 민족주의 역사학이 태생적으로 내재하고 있는 모순을 그대로 보여준다.9) 신채호가 중화사관에 대한 비판의식 속에서 일제 식민지를 극복하기 위해 󰡔조선상고사󰡕를 썼듯이, ‘사이비 역사학자역시 21세기 한국을 식민지와 동격으로 인식한 채 중화사관과 식민사관 척결을 외치며 논의를 이어간다. 그들이 저서와 강연 등에서 신채호를 언급하고 있음은 더 논할 필요도 없다. 물론 황당한 얘기다. 식민지기 당시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고대사를 소환했던 신채호의 문제의식과 21세기에 중화사관과 식민사관 척결을 외치는 이들의 문제의식은 전혀 다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런 논리를 추종하는 고학력의 지식인, 정치인, 관료들이 존재한다는 현실이다.10) 그들이 중시하는 건 사이비 역사학의 내용이 아니라 신채호의 현신으로 자부하는 학자들이 보내는 메시지다. 오히려 이 문제에 대해 좀 더 심도 있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개인적으로 80년대 대학을 다녔던 세대들이 내재하고 있는 민족해방론적 정서와 밀접하다고 보고 있다. 현재 정치성향에서 진보적인 스탠스를 취하고 있는 상당수 사람들은 식민지친일청산실패한국사회 모순 심화라는 단순도식에 익숙해져 있다. 이 도식 자체가 무조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문제에 대한 공식으로 기능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이덕일이 공격하는 고리는 사실 이것이지 실증의 문제는 부차적으로 보인다. 스스로 올바른 민족주의의 정당성을 선점하고 이면에서 비판자들의 학연11)을 과도하게 단순화시켜 인신공격을 가하는 것12)이 그들의 주된 전략임을 상기해보자.

    하지만 사이비 역사학이란 명명은 이러한 과정을 소거해버리게 되는 난점이 있다. 또한 이 논전을 관전하는 자들은 사이비라는 명명을 식민사학의 거울상으로 인식할 우려도 있다. 오히려 지금 중요한 것은 저들에게 이름을 붙여주는 것이다. 민족주의의 진보성을 강조하는 입장이라면 쇼비니즘적 역사학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고, 민족주의에는 진보성과 제국주의적 성격이 공존한다고 보는 입장이라면 민족주의적 한국사 연구가 잉태한 쌍생아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민족주의는 언제든 지킬박사와 하이드와 같이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렇게 다양한 이름붙이기를 통해 그들의 사료분석이 아니라 메시지를 공격하고 그 메시지가 언제든 폭력으로 전화할 수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 더 적극적인 역사대중화라고 생각한다.13)

     

    4. 대응방식의 변화

     

    이미 선학들이 실증적 방식으로 사이비 역사학에 대한 많은 비판 작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명맥이 이어지고 시대적 상황에 따라 더 부흥하는 현실을 보면 이런 고민은 더욱 깊어져간다. 실증적 비판이 정답이었다면, 21세기판 상고사 논쟁은 벌어지지 않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논쟁은 쳇바퀴처럼 반복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결국 질문을 근본적으로 전환하고 대응방식도 변할 필요가 있다. 사실, ‘사이비 역사학은 지난 반세기 동안 꾸준히 존재해왔다. 이승만 · 박정희 독재정권을 거치면서 확립된 국수주의적 한국사 교육의 결과는 상고사 논쟁으로 발현되었고,14) 1980년대 민주화운동 시기에 배태된 민중적 민족주의론은 고토회복에 대한 열망을 감추지 않았다.15)사이비 역사학은 시대적 요청에 따라 전혀 다른 얼굴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사이비 역사학은 특정한 극단주의자들의 퇴행적 역사인식이 아니라 우리가 이라고 인식했던 기존 한국사 연구 및 각 시대 주류담론과 불가분의 관계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사이비 역사학에 대한 비판은 한국사 연구 자체에 대한 성찰을 전제로 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관학의 좁은 범위에서 합리적으로 통제되던 한국 민족주의가 시민사회에서 어떻게 급진화되는지도 고민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런 고민들이 전제될 때, ‘사이비 역사학에 대한 비판도 더 힘을 얻을 것이다.



    1) 이 글은
    사이비 역사학이란 개념의 의의를 인정하지만, 동시에 해당 개념의 한계를 비판하고 보완하기 위한 목적으로 작성되었다. 그런 측면에서 본문에서는 작은 따옴표를 붙여서 사이비 역사학이라고 통칭하겠다. ‘사이비 역사학개념에 대한 대안은 이 글의 3장에서 제시하도록 하겠다.
    2) 전문 해석은 한국고전번역원 사이트(http://www.itkc.or.kr/itkc/Index.jsp)의 해석을 참조했다.
    3) 기경량 선생의 연구에서 사이비 역사학용어를 가짜 역사, 유사 과학 등과 비교한 점에 미루어 볼 때, 무리한 해석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기경량, 사이비 역사학과 역사파시즘, 󰡔역사비평󰡕 2016 봄호, 220쪽 참조.
    4) 기경량, 위의 논문, 220.
    5) 안정준, 오늘날의 낙랑군 연구, 󰡔역사비평󰡕 2016 봄호, 281.
    6) 조지 이거스 지음, 임상우 역, 󰡔20세기 사학사󰡕, 푸른역사, 1998, 216.
    7) 도면회 윤해동 엮음, 󰡔역사학의 세기󰡕, 휴머니스트, 2009, 24.
    8) 도면회, 한국 근대 역사학의 창출과 통사 체계의 확립, 󰡔역사와현실󰡕 70, 2008.
    9) 모임의 모든 연구자들은 사이비 역사학이 오히려 식민사학의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전적으로 동감한다. 다만 앞에서 언급했듯이 한국사연구의 토대가 일본의 근대역사학에 있음을 상기해본다면, 한국사 연구에 내포한 식민성과 제국에 대한 희구 역시 동시에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사 서술에 내재된 식민성과 19세기 후반 형성된 한국 민족주의가 내재한 식민주의에 대해서는 앙드레 슈미드 지음, 정여울 역, 󰡔제국 그 사이의 한국(1895~1919)󰡕, 휴머니스트, 2007을 참조.
    10) 경북대학교 명예교수 이정우는 김현구 교수에게 고소당한 이덕일 소장을 이덕일 소장은 한국사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쌓아온 최고의 역사학자 중 한 사람이다.”라고 평하며 해당 소송을 비판하고 있다. ([시대의 창]한국은 아직 식민지인가? 경향신문, 2016.2.18)
    11) …(전략) 국회 토론 과정에서 이덕일 소장은 낙랑의 위치를 한반도 평양에 비정하는 학계 통설을 두고 일제 조선사편수회 출신의 이병도 이래 식민사학의 카르텔에 따른 일제강점기 일본 학자 주장의 반복이라고 주장했다. (“덮어놓고 식민사학’? 사료 놓고 따져보자한겨레신문, 2016.3.8)
    12) 󰡔우리 안의 식민사관󰡕(이덕일 지음, 민권당, 2014)에서는 임나일본부설을 비판한 대표적 연구자인 김현구 전 고려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그의 학설을 식민사관으로 평가하고 있다.
    13) 최근 여성연예인들의 민족사에 대한 무지를 폭력적으로 비판하는 일련의 흐름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14) 이른바 상고사 논쟁의 역사적 변천에 대해서는 송호정, 최근 한국상고사 논쟁의 본질과 그 대응, 󰡔역사와현실󰡕 100, 2016을 참조하라. 다만, 송호정 교수는 재야사학자들의 상고사 인식과 공교육을 분절적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필자의 견해와 다른 지점에 서있다.
    15) 1980년대 대표적 민중가요인 광야에서는 만주벌판을 민족의 영토로 설정하고 있다. 가사는 아래와 같다.
    찢기는 가슴 안고 사라졌던 이 땅에 피울음 있다.
    부둥킨 두 팔에 솟아나는 하얀 옷에 핏줄기 있다.
    해뜨는 동해에서 해지는 서해까지
    뜨거운 남도에서 광활한 만주 벌판
    우리 어찌 가난하리오 우리 어찌 주저하리오
    다시 서는 저 들판에서 움켜쥔 뜨거운 흙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