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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사군, 과연 난하 유역에 있었을까? 2

    관리자 2016-05-29 00:26 2321

    한사군, 과연 난하 유역에 있었을까? 2


    이정빈(경희대 인문학연구원 연구교수)

     


     

    3. 난하 유역의 조선현, 교치의 이해

     

    낙랑군이 난하 유역에 있었다는 최근의 주장은 교치·교군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다. 가령 한 대중역사서 저술가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그럼 낙랑군 조선현은 어디에 있었을까? 청나라 때 편찬된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라는 지리지에 그 정확한 위치가 실려 있다. () 독사방여기요17 북직(北直)8영평부(永平府)’조는 청나라 때 영평부에 대한 설명인데 지금의 하북성 노룡현 일대다. 고조우는 영평부(하북성 노룡현)에 대한 변천 과정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후위(後魏)에서 잠시 이 지역을 북평군에 소속시켰고, 후제(後齊)에서는 군치(郡治)로 삼았다. 수나라에서는 노룡현으로 개칭했다. 또 조선성(朝鮮城)이 영평부 북쪽 40리에 있는데, 한나라 낙랑군의 속현이다.” 여기서 말하는 낙랑군 속현인 조선성이 바로 낙랑군 조선현을 말하는 것이다. () ‘()’자와 관련해서 문제의 핵심은 지금의 하북성 노룡현을 후위(後魏) 때 잠시 북평군에 소속시켰다는 이야기이다.

     

    국회 동북아역사왜곡대책특별위원회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하기도 하였다.

     

    그 다음에 독사방여기요도 말씀하셨는데, 독사방여기요가 청나라 때 나왔다 그래서 청나라 때만 쓴 게 아니라 한서를 비롯한 온갖 지리 지식을 다 갖고 쓴 겁니다. () 이것을 작성한 고조라는 분은 할아버지 대부터 일통지를 계속 작성한 집안이고 이분이 대청일통지작성에 직접 참여했던 분입니다. 이분이 만든 사료에 노룡현 그쪽에 조선성이 있다라고 했지만, 조선성이 있고 거기가 한나라 낙랑군 조선현이다라고 했으면 우리 대한민국 입장에서는 믿으면 되는 거지요. 우리가 중국인입니까, 일본인입니까? 대한민국 입장에서는 믿으면 되는데 여기에 교군, 교현, 복잡한 이야기, 이게 해석도 안 돼요. 교치라는 것은 그런 뜻이 아니라 잠시 이전했다라는 뜻이에요.

     

    그는 독사방여기요를 통해 청대의 영평부(현 하북성 노룡현) 지역에 전한대의 요동군 신창현과 낙랑군 조선현이 위치하였다고 단언하였다. 그리고 사료 속의 교치는 잠시 소속이 변경된 사실을 의미한다고 설명하였다. 지명은 난하 유역에 고정된 채 상급 행정단위의 소속만 변경되었다고 한 것이다. 과연 그처럼 이해할 수 있을까. 일단 독사방여기요부터 다시 살펴보자.

     

    신창성(新昌城)은 즉 지금의 [영평]부 치소이다. 한에서 신창현을 설치하였는데 요동군에 속하였고, 후한에서 그를 계승하였다. 진에서 요동국에 속하였는데, 지금의 요동 해주위경(海州衛境)에 있었다. 후위에서 이곳에 교치(僑置)하여 북평군에 속하였고, 후제에서 [북평]군 치소로 삼았다. 수에서 개명하여 노룡현(盧龍縣)이라고 하였다. 또 조선성이 있는데, [영평]부의 북쪽 40리에 있다. [조선은] 한 낙랑군의 속현이었는데, 지금 조선경내(朝鲜境内)에 있다. 후위의 군주 탁발도(拓跋燾, 태무제) 연화(延和, 432~434) 초에 조선민을 비여(肥如)에 사민하고 조선현을 설치하였고, 아울러 이곳에 북평군 치소를 설치하였다. 고제(高齊, 북제: 550~577)는 군 치소를 신창으로 옮기고, 아울러 조선현을 편입시켰다.(독사방여기요17, 북직8 영평부)

     

    은 신창성의 건치연혁에 관한 것이고, 은 조선성에 관한 것이다. 둘 다 전한대부터의 연혁을 서술하였는데, 일단 명칭의 유래를 밝히고, 그런 다음 청대 영평부로 옮겨온 사정을 설명하였다.

     

    에서 청대의 신창성은 전한대의 신창현에서 기원한다고 하였고, 이는 후한대까지 요동군에 서진에서는 요동국에 속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서진대까지의 위치는 지금 즉, 독사방여기요가 편찬된 17세기 중반 청()의 요동 해주위경이었다고 하였다. 그러다 북위대에 와서 청의 영평부 지역으로 교치되었다고 하였다. 청대의 해주위는 오늘날의 요령성 해성시(海城市) 일대이다. 그러므로 북위대의 교치는 지명의 이동을 말해준다. 북위대 요령성 해성시로부터 하북성 노룡현으로 신창의 지명이 옮겨왔다고 한 것이다.

    현재의 요령성 해성시와 하북성 노룡현(구글어스 수정)

       


    에서 청대 조선성의 지명은 전한대 낙랑군의 속현(조선현)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당시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는 지금, 17세기 중반의 시점에서 조선경내였다고 하였다. 그러다 5세기 전반 북위대 조선민을 비여로 사민시키고, 비로소 이 지역에 조선현을 설치하였다고 하였다. 전한대부터 북위대까지 낙랑군 조선현이 한반도 안에 있었고, 영평부 소재 조선성의 지명은 북위대 조선민의 사민에서 비롯되었다고 한 것이다.

     

    이처럼 독사방여기요에서는 청대의 신창성·조선성이 전한대의 지명에서 비롯되었고, 북위대 지명이 이동하여 영평부 안에 위치하게 되었다고 서술하였다. 하지만 최근의 주장은 독사방여기요의 서술을 왜곡했다. 교치의 사실도 외면하였다.

     

    낙랑군의 교치는 일찍이 안정복과 한치윤이 지적하였고, 천관우의 구체적인 논증도 있었다. 그리고 1990년대 이후 출토문자자료가 보고되며 한층 입체적인 연구가 진행 중이다. 독사방여기요처럼 난하 유역에 조선현이 설치된 배경부터 보자.

     

    [연화 원년(432)] 가을 7월 기미(17)에 임금의 수레가 유하(濡水)에 도착하였다. 경신(18)에 안동장군 의성공 해근(奚斤)을 보내어 유주민(幽州民)과 밀운(密雲정령(丁零)의 만여 명을 징발해 공성무기(攻具)를 운반하도록 하였는데, 남도(南道)에서 출발해 모두 화룡(和龍)에 모이도록 하였다. 황제가 요서(遼西)에 도착하였다. 풍문통(馮文通: 馮弘)이 그 시어사(侍御史) 최빙(崔聘)을 보내 소고기와 술을 바쳤다. 기사(27)에 임금의 수레가 화룡에 도착하였다. [황제가] 그 성에 친림하니, 문동의 석성태수(石城太守) 이숭(李崇건덕태수(建德太守) 왕융(王融) 10여 군()이 와서 항복하였다. (10여 군의) () 3만 명을 징발하여 [화룡성을 둘러싼] 참호(圍塹)를 파서 이를 지키도록 하였다. () 9월 을묘(14)일에 임금의 수레가 서경(西京: 낙양)으로 돌아왔다. 영구(營丘성주(成周요동(遼東낙랑(樂浪대방(帶方현토(玄菟) 6()의 민() 3만 가()를 유주(幽州)에 옮기고, 창고를 열어 그들을 진휼하였다.(위서4, 세조기, 밑줄인용자)

     

    432년 북위의 태무제(탁발도, 재위: 423~452)는 북연의 풍문통(馮弘, 재위: 430~436)을 공격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낙랑을 비롯한 북연의 6() 명칭이 나온다(밑줄). 여기서 북연의 낙랑군이 확인된다.

     

    북위의 태무제는 유하를 건너 북연의 도성인 화룡성(현 요령성 조양시)을 공격하였다. 유하는 지금의 난하를 의미한다. 이로 보아 432년 북위와 북연의 경계는 난하였고, 낙랑을 비롯한 6군은 요령성 서부 지역에 분포하였다고 파악된다. 북연의 낙랑군은 요서 지역에 소재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위 사료처럼 432년 그 주민의 일부는 유주 지역으로 사민되었다.

     

    평주. 북평군<()에서 설치하였다>. 2·430·1836명을 통솔한다<조선현(전한과 후한·진에서 낙랑에 속하였다. 이후에 폐지되었다. 연화 원년(432)에 조선민을 비여에 옮겨 다시 설치하고 [북평군에] 속하였다). 창신현(전한에서 탁군에 속하였고, 후한과 진에서 요동군에 속하였는데, 이후 [북평군에] 속하였다. 노룡산(盧龍山)이 있다)>.(위서106, 5 지형지)

     

    조선현은 전한대부터 서진대까지 낙랑군에 속하였지만 이후 폐지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432년에 비여로 옮겨 다시 설치해 북평군에 속하였다고 하였다. 독사방여기요에서 연화 초에 낙랑을 비여에 교치하였다고 한 사실은 이를 참고한 서술로 보인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자면 낙랑군이 교치된 것이 아니라 그 속현 중 하나였던 조선현이 교치된 것이다. 다만 북평군 비여에는 조선민을 이주시켰다고 하였는데, 이는 432년에 사민된 낙랑군민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낙랑군민의 일부를 사민시켜 북평군 조선현을 설치하였을 수 있는 것이다.

     

    삼합장 유적 발굴

     

    북연의 낙랑군민은 평주 북평군만 아니라 유주의 곳곳에도 사민되었다. 5세기 이후 지금의 북경을 비롯해 중원 지역의 각지에서 활동한 낙랑 유민은 그와 관련된다. 왕도민(王道岷, 508년 사망), 원원평(元願平)의 부인 왕씨(王氏, 509년 사망), 왕정(514년 사망), 왕기(王基, 522년 사망), 왕서(王舒, 530년 사망)의 묘지, 그리고 2014년 북경시 대흥구(大興區) 황춘진(黃村鎭) 삼합장촌(三合莊村) 일대에서 발굴된 한현도(韓顯度)의 묘 등 다수의 사례를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사례는 난하 유역의 조선현과 무관치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전한대의 한사군과 직접 연관해 보기는 어렵다. 어디까지나 교치의 흔적이다.

     

    이처럼 북연대 낙랑군은 요서 지역에 소재하였고, 432년에 그 민의 일부가 사민되면서 난하 유역에 조선현이 등장하였다. 그러면 북연대의 낙랑군은 언제부터 요서 지역에 위치하였을까. 다음의 사료가 참고된다.

     

    [건흥 원년(313) 여름 4] 요동인(遼東人) 장통(張統)이 낙랑·대방 2()을 점거하고, 고구려왕 을불리(乙弗利)와 더불어 서로 공격하였는데, 여러 해 동안 [공격이] 그치지 않았다. 낙랑인 왕준(王遵)이 장통을 설득하여 그 민() 천여 가()를 거느리고 모용외(慕容廆)에게 귀부하였다. 모용외는 그를 위하여 낙랑군을 설치하였고, 장통을 태수(太守)로 삼고 왕준을 참군사(參軍事)로 삼았다.(자치통감88, 진기10 민제)

     

    3세기 후반 이후 낙랑군은 대방군과 함께 서진의 평주에 속하였다. 그런데 이른바 영가(永嘉)의 난()’(307~312)이 발생하며 서진 평주의 지배력은 약화되었다. 결국 319년 서진의 평주자사 최비(崔毖)는 치소인 양평(襄平, 현 요령성 요양시)을 탈출하였다. 불과 수십 명의 기병만 데리고 고구려로 망명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국제정세의 전개 과정 속에서 평주의 낙랑군·대방군은 요동국 출신의 장통이 점거하였다. 그런데 장통은 고구려와 대립하였고 결국 모용선비에 귀부하였다. 이에 모용선비는 그를 위하여 새로이 낙랑군을 설치하였다고 하였다. 북연대까지 존립한 요서 지역의 낙랑군은 이때 출현한 것이다. 그러면 그 이전의 낙랑군은 어디에 위치하였을까.

     

    미천왕 14(313) 겨울 10월에 낙랑군을 침범하여 남녀 2천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 15(314) 가을 9월에 남쪽으로 대방군을 침범하였다.(삼국사기17, 고구려본기5)

     

    31310월 고구려는 낙랑군을 공격해 2천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고 하였다. 또 이듬해인 3149월에는 남쪽의 대방군을 침범하였다고 하였다. 이는 자치통감에서 여러 해 동안 고구려와 장통이 대립하였다고 한 사실과 통한다. 그리고 고구려가 장통의 낙랑군·대방군 세력을 제압한 사실을 전해준다. 장통은 왕준의 설득도 있었지만, 고구려의 남진에 압박을 받아 모용선비에 귀부하였던 것이다.

     

    삼국사기에서 대방군은 고구려의 남쪽으로 표현되었다. 대방은 본래 낙랑군 속현 중 하나였는데, 후한 건안(196~219) 연간에 요동의 공손씨 정권이 낙랑군의 또 다른 속현 중 하나였던 둔유현 남쪽에 군()으로 설치한 것이었다. 공손씨 정권은 대방군을 통해 한()으로 넘어간 유민을 불러 모으도록 하였다. 이로부터 314년까지 삼국사기를 비롯한 여러 사서에서 대방군은 낙랑군과 함께 한반도 북부에 소재하였다고 나온다. 따라서 대부분의 연구자는 313·314년 이전까지의 낙랑군·대방군이 한반도 북부, 구체적으로 대동강 유역에 소재하였고, 요서 지역과 난하 유역의 낙랑군 및 조선현은 교치된 것으로 이해하였던 것이다.

     

    이상을 통해 살펴본 것처럼 낙랑군은 4세기 전반 대동강 유역에서 요서 지역으로 교치되었고, 5세기 전반 요서 지역에서 난하 유역으로 교치되었다. 그러므로 후대의 문헌에서 낙랑군 또는 그와 관련된 지명이 난하 유역에 보인다고 해서 이를 한사군과 직접 연관해 보기는 어렵다. 기존의 몇몇 연구는 이에 대한 이해가 미진해 널리 지지받지 못하였다. 뿐만 아니라 앞서 서술하였듯 일제시기부터 최근까지 각종 출토문자자료, 고고자료가 축적되면서 낙랑군이 대동강 유역에 소재하였음은 한층 분명해졌다. 결코 역사학계의 다수가 식민주의 역사학을 추종해 그리 본 것이 아니다.

     

     

    4. 영토순결주의, 또는 식민주의 역사학의 주술

     

    최근 역사학계를 비난하는 인사들은 한사군이 한반도에 없었다는 점, 고조선의 강역이 중원대륙을 포함하였다는 점을 강조한다. 적지 않은 수의 지식인도 그러한 비난과 주장에 동조하고 있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지적이 상기된다.

     

    태국의 역사학자 위니카출이 만들어낸 지리적 신체(geo-body)라는 말이 있습니다. 국민국가는 신성한 영토이고 수천 년 동안 한 번도 바뀌지 않고 이어져왔다는, 역사적으로 맞지 않는 믿음을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데 누군가가 역사적 사실을 들어 다른 역사공동체의 영역이었다고 할 때, 사람들이 마치 손가락이나 발가락이 절단된 것과 같은 아픔을 느끼는 현상을 말하는 것이지요. 일종의 영토순결주의입니다. 예컨대 한사군의 영토가 지금의 대동강 유역이었다고 했을 때, 많은 분들이 굉장히 불쾌함을 느껴본 경험이 있으실 텐데요. 그런데 그건 우리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19~20세기 초 유럽 역사를 보면, 모든 근대적인 역사서술은 이런 식입니다. 아마 우리가 역사를 보는 생각 속에도 알게 모르게 들어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임지현의 발언, ‘동아시아 역사상의 한국토론회, 2014. 7)

     

    우리는 암암리에 한국사를 고정불변의 인격처럼 간주하고 그 영토를 신체의 일부처럼 여기고 있다. 이러한 정서는 현대 한국사의 무대인 한반도에 특히 강하다. 이 점에서 한사군은 우리의 신체 중 일부가 타인에 의해 범해진 것과 같은 불쾌감을 유발할 수 있다. 최근의 비난은 이러한 정서에 편승한 것이 아닐까. 이와 관련하여 북한 역사학계의 고대사 연구가 참고된다.

     

    북한의 고구려-수 전쟁 약도

    (손영종, 2008 조선단대사(고구려사4), 과학백과사전출판사, 75)

     

    가령 북한의 역사학계에서는 고구려-수 전쟁이 한반도 밖에서 전개되었다고 본다. 유명한 살수대첩의 살수(薩水)도 한반도 북부의 청천강이 아닌 중국 요령성 소자하(蘇子河)에 위치하였다고 본다. “위대한 평양은 선사시대 이래 자랑찬 고구려의 멸망 이전까지 한 번도 이민족의 침략에 짓밟힌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순결성의 논리에 의해 무리한 해석을 강요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북한 학계의 순결성의 논리란 인용문의 영토순결주의이자 한사군이 한반도 북부에 소재하였다는 사실을 부정하고자 한 사회 일각의 정서와 통한다.

     

    영토순결주의가 비단 몇몇 인사 내지 북한 역사학계의 감정적 문제만은 아니다. 근대 역사학, 이른바 국사의 민낯일 수 있다. 돌이켜보면 한국사를 민족사로, 민족을 인격처럼 서술해 온 한국 역사학계의 여러 연구에도 반성할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곧 근대 역사학에 대한 성찰이기도 할 것이다. 다만 최근의 비난과 그에 동조하는 사회 일각의 정서는 비합리적인 사료해석과 논증에 기초해 한국의 역사학계가 추구해 온 근대 역사학마저 뒤흔들고 있다. 근대 역사학에 대한 성찰에 이르기까지는 너무나 먼 길이 남은 것일까.

     

    일찍이 타율성론(반도적 성격론)을 비판한 이기백의 조언은 여전히 유효하다.

     

    역사를 좌우하는 결정적 요인이 지리적 조건이었다는 이 지리적 결정론이야말로 반도적 성격론이 디디고 서 있는 발판이었다. 그러므로 반도적 성격론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지리적 결정론을 비판해야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오히려 지리적 결정론을 긍정하는 입장에서 이를 비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많이 발견하게 된다. 그 결과는 결국 식민주의 사관이 파놓은 함정에 빠지는 것이나 다름없는 양상을 가져오게 되었다. () 그러므로 식민주의 사관의 극복은 역사관의 근본적인 변혁 자체가 이루어져야만 가능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넓은 국토를 개척하여 군사적 강대국이 되어야만 위대한 국가가 된다는 낡은 역사관 자체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눈을 민족 내부의 문제로 돌려야 한다. 민족 내부에 쌓여 있는 모순을 개혁하여 우리의 역사를 앞으로 진전시킨 노력들이 역사적으로 높이 평가되도록 해야 한다.

     

    넓은 국토를 지닌 군사적 강대국, 다시 말해 위대한 고대사를 말해야 비로소 식민주의 역사학에서 탈피한다는 강고한 믿음이 오히려 식민주의 역사학의 사유일 것이다. 그리고 그 사유는 비합리적인 믿음이라는 점에서 주술이라고 부를 수 있다.

     

    최근 사회 일각에서는 위대한 고대사를 애국으로 포장하기도 한다. 한국사의 고대국가, 특히 고조선이 넓은 국토를 지닌 군사적 강대국이었기를 욕망하며 이를 마치 현대의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비전처럼 제시한다. 1970~1980년대 대륙 수복의 의지가 담긴 진취적인 통일 지향의 민족사관과 다를 바 없는 역사인식이다.

     

    대륙 지향의 민족사관이 일제시기 황국사관과 흡사하다는 지적이 새삼 주의를 요한다. 21세기의 우리 사회가 20세기 전반 식민주의 역사학의 주술에서조차 헤어 나오지 못하고, 그를 잉태한 괴물 즉 제국주의 역사학의 망령에 빙의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허상의 타율성론을 향한 공허한 비난에 굳이 응답하는 까닭이다.


    역사비평 2016년 여름호(통권 제11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