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서(僞書)를 말하다 1.
관리자 2016-09-02 21:56 2006
위서(僞書)를 말하다 1.
서울대 박지현
2015년 10월 22일 미국에 거주하던 천경자 화백의 별세 소식이 한국에 전해졌다. 꽃과 여인의 화가로 불리던 천경자 화백은 1991년 ‘미인도 위작 사건’ 이후 절필을 선언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큰딸과 함께 거주하고 있었다. 2003년 뇌출혈로 쓰러져 병상에 누운 후 외부와의 접촉을 끊어 그 생사여부에 대해 논란이 일기도 했는데, 2015년 8월 6일에 사망하였다는 것이 확인된 것이다.
예술계에서 위작시비는 비일비재하다. 박수근, 이우환, 이중섭 등 인기 화가들의 작품은 위작 시비로 몸살을 앓고 있다. 여러 위작시비 중에서도 1991년의 ‘미인도 위작 사건’이 특이한 점은, 당시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던 ‘미인도’에 대해 천경자 화백 본인이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고 주장하였음에도 한국화랑협회 미술품감정위원회가 진품으로 감정하고 국립현대미술관 측이 진품으로 인정하면서 작가가 절필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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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작품은 내 혼이 담겨있는 핏줄이나 다름없다. 자신의 작품을 구별못할 그런 작가도 있는가. 나는 결코 그 작품을 그린 적이 없다. 특히 머릿결을 새까맣게 개칠하듯 그리지 않는다. 그리고 머리 위의 꽃이나 어깨 위의 나비 모양도 내 것과는 다르다. 특히 작품사인과 연대표시도 내 것이 아니다.” 1991년 4월 8일 『경향신문』의 천경자 화백 인터뷰 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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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작논란에 휩싸였던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 |
최근 이우환 화백의 작품 「점으로부터」의 위작 논란이 불거지면서 검찰이 조사에 착수했다. 이 과정에서 생존 작가를 배제한 채 조사가 이루어지면서, 이우환 화백의 변호인은 ‘이러한 수사 방식을 이해할 수 없다. 작가의 이미지 훼손뿐만 아니라 한국 예술계의 이미지 훼손이 우려된다.’는 내용의 보도자료를 내기도 했다.
대부분의 위작은 경제적 이득을 노린 전문 위조범들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한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위작시비가 발생하게 되면 해당 작가와 작품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지고, 더 나아가 한국예술계 전체가 피해를 입게 된다는 점이다.
역사학계의 위작, 위서
예술계에 위작(僞作)이 있다면, 역사학계에는 ‘위서(僞書)’가 존재한다. 위서는 ‘위조하여 만든 책이나 문서’를 말한다. 위작이 창작자를 꾸며내듯, 위서는 저자 혹은 작성자를 꾸며낸다. 그뿐만 아니라 저술시기나 작성시기, 간행시기, 간행처 등의 서지사항을 모두 거짓으로 만들어낸다.
위작이 작가와 작품에 대한 신뢰도를 떨어뜨려 그 가치를 훼손시킨다면, 위서는 역사연구에 막대한 악영향을 미친다. 역사연구의 주된 자료는 과거에 작성된 문헌들, 즉 사료이다. 위서는 마치 과거에 만들어진 문헌인 양, 자신들을 역사연구의 자료로 활용하라고 유혹한다. 거짓자료를 토대로 이루어진 역사연구에서 제대로 된 결과가 도출될 리 만무하다.
위조문서는 학계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도 문제가 된다. 유대인들이 세계 정복의 야심을 갖고 비밀회의를 가진 후 채택한 행동지침서로 알려진 ‘시온의정서’는 20세기 초에 만들어진 위조문서이지만, 지금까지도 정치적, 문화적 측면에서 계속 그 존재가 부각되고 있다. 나치가 이 문서를 ‘정당한’ 근거로 삼아 유대인 학살을 저질렀다는 것은 위조문서의 위험성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사료비판과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증장’
역사학계에서는 이러한 위서들을 걸러내는 수단으로 모든 사료에 대해 철저히 ‘사료비판’을 행한다. 사료비판은 간단히 말하자면 사료의 진위를 판별하고(외적 비판), 사료에서 말하는 내용의 신뢰성을 판단하는 것(내적 비판)을 말한다.
위서는 대체로 외적 비판을 통해 걸러진다. 저자와 저술시기, 출처, 간행 사항 등을 확인하고, 사료의 서체나 어법, 언어 등이 저술된 시기의 것과 부합하는지를 살피고, 공문서의 경우 작성시점과 작성장소에 맞는 양식인지를 살피는 등의 방법을 통해 사료의 진위를 판별하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인문학자인 로렌초 발라는 언어학적 검토를 통해 사료의 진위여부를 판별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재위 306~337)가 크리스트교로 개종할 때 로마 교황인 실베스테르 1세에게 감사의 표시로 이탈리아 및 기타 서방 여러 지역의 종교적·세속적 통치권을 바친 사실을 담고 있는 문서인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증장’을 검토하였다. 로렌초 발라는 이 문서에서 로마제국 관리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된 ‘사트랍’이라는 단어가 4세기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입증함으로써 이 문서가 위조문서임을 밝혔다.
한국사학계의 위서 논쟁
한국사학계에서는 이른바 ‘재야사서’로 불리는 『환단고기』, 『규원사화』, 『단기고사』를 둘러싼 논란이 있었다. 이 ‘재야사서’들에 담긴 내용에 따르면 한국 상고사는 찬란한 영광의 시대로, 『환단고기』에서는 고조선 이전에 이미 환인(桓因)의 환국시대, 환웅(桓雄)의 신시시대가 있었다고 말한다. 이에 따르면 한국사에서는 늦어도 기원전 7,000년 전에 국가가 출현한 것이 된다. 환국은 대제국을 이룰 정도의 영역을 지배하고 있었으며 철기를 제작하는 수준의 선진적 문화를 보유하고 있었다고 묘사된다.
역사학계나 고고학계에서는 중국 동북지방과 한반도에서 청동기가 사용되기 시작한 시점을 기원전 13세기 전후로 파악하고 있다. 석기-청동기-철기라는 도구의 발전 단계는 전 세계에서 공통적인 현상으로, 한국사에서도 마찬가지로 철은 청동 이후에 사용되기 시작한 재료였다. 청동기 시대에 들어서 계급이 발생하기 시작하였고 이후 국가가 출현하게 된다는 것 역시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지식에 속한다. 그러나 ‘재야사서’에 서술된 내용들은 이러한 모든 상식적인 지식들에 어긋난다.
이러한 ‘재야사서’는 1980년대에 대중적 관심을 끌었으나, 이에 대한 학계의 비판적 연구성과들이 역사 관련 교양지에 발표되면서 1990년대에는 일반의 관심이 점차 수그러들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이를 근거로 한 역사학 서적들이 출간되고 있다. 과연 이 책들은 어떤 책일까. 담겨있는 내용의 신뢰성 여부를 판단하기 전에, 우선 이 책들이 과연 위서가 아닌 진짜 사서인지 그 진위 여부를 검토해 보아야 한다. 예술계의 위작이 얼마나 좋은 회화적 수법을 사용했으며 얼마나 색감을 아름답게 표현했는지와 무관하게 무가치한 위조품에 불과한 것처럼, 만약 이 책들이 위서라면 그 안에 실린 내용이 무엇이든 사료로서의 가치는 없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사료비판을 통해 이 ‘재야사서’들을 파헤쳐 보자.
『규원사화』
『규원사화(揆園史話)』는 그 저자가 ‘북애노인(北崖老人)’이라고만 되어 있어 저자나 저술시기를 검토하기 쉽지 않다. 다만 그 서문에 효종의 북벌 실패를 아쉬워하는 내용이 있어 효종 이후에 저술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북애’라는 호를 가졌던 인물은 여러 명이 있지만, 효종대 이후에 활동했던 인물은 없다. 따라서 저자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알 수 있는 것이 없다.
저술 시기에 대해서는 약간의 정보가 더 있는데, 서문 말미에 있는 ‘상지이년을묘삼월(上之二年乙卯三月)’에 서문을 썼다는 내용이다. 즉 당시 왕의 재위 2년 을묘년 3월에 서문을 썼다는 것이므로, 효종대 이후의 왕 중 재위 2년이 을묘년인 때가 서문을 쓴 시점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조건에 맞는 것은 숙종 2년인 1675년이다. 따라서 서문의 내용에 근거한다면 『규원사화』는 숙종 2년 1675년에 저술된 책이 된다. 하지만 현전하는 『규원사화』는 모두 근대 이후에 만들어진 등사본이나 영인본으로, 숙종 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것은 없다. 1972년 이가원·손보기·임창순 등의 고서심의위원회에서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규원사화』 필사본을 조선시대의 고서로 판정하였으나, 2003년 서지전문가들에 의해 실시된 비공식적인 재감정에서는 일제 때 필사되어 제본한 것으로 판단된다는 감정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따라서 현전하는 필사본 『규원사화』의 서지 정보는 그 저술시기를 조선시대로 보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그러면 그 내용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규원사화』는 조판기(肇判記)·태시기(太始記)·단군기(檀君記)·만설(漫說)로 구성되어 있는데, 환인과 환웅의 천지 개창, 환웅 이래의 역사 등이 주로 서술되어 있다.
서문을 통해 추정한 저술 시기와 관련하여 내용에서 주목되는 것은 단군기 중의 한 구절이다.
또 『고려사』 광종 10년 마침내 압록강 밖의 여진을 쫓아내어 백두산 밖에 거주하게 하였다고 한다(又高麗史光宗十年逐鴨綠江外女眞於白豆山外居之云).
이 구절은 『고려사』를 참고하여 서술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합당하다. 그러나 『고려사』 광종 10년 기사 중에는 이와 같은 내용을 찾을 수 없다. 따라서 『규원사화』의 저자는 적어도 『고려사』를 참고하여 이 내용을 서술한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실제 이 사건은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다만 광종 10년이 아니라 성종 10년에 있었던 사건이었다.
10년 10월 압록강 밖의 여진을 쫓아내어 백두산 밖에 거주하게 하였다(十年十月逐鴨綠江外女眞於白頭山外居之).
『고려사』 권3 세가3 성종 10년 10월
그렇다면 『규원사화』의 저자가 『고려사』를 참고하여 해당 사건을 서술하였으되, 성종을 광종과 혼동하여 실수를 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이와 똑같은 실수가 다른 저술에서도 나타난다는 것이다.
『고려사』 광종 10년 압록강 밖의 여진을 백두산 밖에 거주하게 하였다(高麗史光宗十年逐鴨綠江外女眞於白豆山外居之).
『해동역사』 속집 지리고13 산수1
『해동역사』는 한치윤이 말년에 저술하기 시작하여 60편을 저술하였으나 완성을 보지 못한 채 사망하자 그 조카인 한진서가 지리고 15권을 추가하여 완성한 책으로, 완성된 시점은 1823년이다. 『해동역사』 속집에 같은 사건이 『규원사화』와 같은 실수를 범한 채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다른 시기에 다른 책에서 같은 실수를 범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따라서 이 상황은 2가지의 설명이 가능하다. 하나는 한진서가 『규원사화』를 참고하면서 그 실수도 그대로 옮긴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반대로 『규원사화』의 저자가 『해동역사』 속집을 참고하면서 그 실수도 그대로 옮긴 것이다.
『규원사화』의 저술 시기를 1675년으로 본다면, 한진서가 『규원사화』를 참고한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한진서는 『해동역사』 지리고를 서술하면서 그가 참고한 문헌들을 모두 명기하고 있지만 그 중에 『규원사화』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또한 해당 기사는 ‘鎭書謹按’으로 시작하고 있는데, 이는 한진서 본인의 생각을 서술한 것이라는 의미이므로 이 부분은 다른 문헌을 참고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해동역사』 지리고의 내용이 『규원사화』를 인용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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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원사화』 |
『해동역사』 지리고 속집13 산수1 |
『규원사화』가 『해동역사』의 해당 기사를 참고하여 옮긴 것이라면, 『규원사화』의 저술 시기는 1823년 이후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앞서 보았듯이 서문의 내용을 통해 추출한 조건들에 맞는 해는 1675년 밖에 없다. 그렇다면 결국 서문의 내용과 서문 말미의 저술시점에 대한 기술이 서로 모순되는 것이 되므로, 서문을 신뢰할 수 없게 된다.
이뿐만 아니라 『규원사화』 만설 중에도 유의할 만한 부분이 있는데, “경주의 첨성대는 천수백년이 지나 ... (慶州之瞻星臺過千數百年...)”라고 한 부분이다. 『삼국유사』나 『세종실록』 등에 따르면 첨성대는 신라 선덕여왕대(632~646)에 건립되었다. 1675년은 첨성대가 건립되고 약 1,000여년이 지났을 시점으로, ‘천수백년’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정도의 시간적 거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모든 점들을 고려한다면 『규원사화』의 저술 시기는 1675년으로 보기 어려우며, 적어도 『해동역사』 지리고가 완성된 1823년 이후에 저술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규원사화』의 실제 저술시기를 추정해본다면, 그 내용에서 ‘문화(文化)’를 고전적 의미인 ‘문치교화(文治敎化)’가 아닌 ‘culture’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구절이 참고된다. ‘culture’가 ‘문화’로 번역되어 사용된 것은 일본에서부터였으며, 20세기 초에 다른 번역어들(경제, 예술 등)과 함께 우리나라에 전해졌다. 1900년대라면 첨성대가 건립되고 약 1,300년이 지난 시점이므로 앞서의 ‘천수백년’이라는 표현에도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따라서 『규원사화』는 근대 이후에 저술된 책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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