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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사군, 과연 난하 유역에 있었을까? 1

    관리자 2016-05-29 00:18 2697

    한사군, 과연 난하 유역에 있었을까? 1

     

    이정빈(경희대 인문학연구원 연구교수)

     

    1. 허상의 타율성론을 향한 비난

     

    최근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한국의 역사학계가 식민주의 역사학을 추종하고 있다는 비난이 일고 있다. ‘매국의 역사학이란 비난도 있었다. 주된 비난의 대상은 고대사 분야이다. 이를 주도하는 이들 중 하나는 한국 역사학계의 다수를 식민사학자로 규정하였다. 심지어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 역사학계가 일본 극우 범죄조직의 자금을 받고 식민사관을 확산시키고 있다고 하였다.

    (www.factoll.com/page/news_view.php?Num=2167).

     

     

    비난의 주요 실례는 임나일본부설과 한사군의 위치비정이다. 둘 다 식민주의 역사학의 타율성론과 관련된다. 그런데 타율성론의 전제가 된 반도적 성격론이 그릇된 명제였음을 천명한 역사학자 중 한 명이 이기백이었다. 타율성론의 논리는 사회 일각에서 비난하는 주류역사학자가 주도해 논파되었던 것이다.

     

    비단 이기백만 아니라 해방 이후 상당수의 역사학자가 타율성론을 비판하는 데 전력하였다. 적어도 이제 남선경영(南鮮經營)을 내용으로 한 임나일본부설을 그대로 따르는 연구자는 한국만 아니라 일본의 역사학계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해방 이후 한국 역사학계에서는 한사군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연구를 진행하였다. 한사군의 사회구성과 성격을 다양한 각도에서 검토하였고, 고조선계 주민의 자율성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1990년대 이후 몇몇 중요한 출토문자자료가 보고되면서 지금은 한층 수준 높은 연구가 진행 중이다. 근대의 식민지(colony) 개념을 고대사 연구에 투사하였다는 비판과 반성도 있었다. 이미 한사군의 존재를 통해 타율성론을 주장한 식민주의 역사학의 자취를 찾아볼 수 없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한사군, 특히 낙랑군의 위치는 지금의 대동강 유역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이 점은 일제시기 식민주의 역사학의 이해와 동일하다. 최근의 비난은 여기에 집중되고 있다. 한사군의 위치비정에 대한 통설이 일제시기 식민주의 역사학자의 고안(考案), 즉 새로운 연구결과였는데, 지금 한국의 역사학계가 이를 맹종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낙랑군을 비롯한 한사군은 이미 조선 후기부터 한반도 북부로 비정되었다. 지금의 통설은 그러한 선행 연구와 함께 고고학적 발굴 성과가 축적되면서 수립된 것이다. 그러므로 학계의 통설이 식민사관 사학을 추종한 것이라는 비난은 억측에 불과하다. 타율성론을 내세워 식민사학자의 허상(虛像)을 만들고, 그 허상을 향해 비난을 퍼붓고 있는 것이다.

     

    최근 비난을 주도하는 인사 몇몇은 대중역사서를 저술하고, 이를 통해 낙랑군을 비롯한 한사군이 현재의 중국 하북성(河北省) 난하(灤河) 유역에 소재하였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와 같은 주장이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와 유사한 주장을 한 선행 연구가 있었다. 이는 현재 역사학계의 소수설이지만, 일정한 연구사적 의의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와 같은 선행 연구는 사료해석과 논리에 몇 가지 결함이 있었다. 또한 지금까지의 고고학적 발굴 성과에 비추어 통설 내지 다수설의 위치를 차지하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의 비난은 그러한 한계는 외면한다. 나름대로 제시한 몇 가지 사료조차 잘못 이해한 것이 대부분이다.

     

    이 글에서는 한사군이 난하 유역에 있었다는 최근의 주장이 어떤 점에서 잘못된 것인지 짚어보고자 한다. 그 구체적인 사례로 교치(僑置)도 살펴볼 것이다. 나아가 식민주의 역사학의 타율성론이 지금 우리 사회에 소비되는 방식, 또는 그에 내포된 역사인식의 문제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2. 낙랑군 수성현의 위치비정 검토

     

    일찍부터 낙랑군은 고조선 후기의 중심지로 파악되었다. 그러므로 낙랑군의 위치비정은 한사군은 물론이고, 고조선의 강역을 이해하는 데 관건으로 여겨졌다. 최근에는 다음의 사료가 새삼 관심을 모았다.

     

    협우갈석(夾右碣石)<㉠ 『지리지(地理志)에서 갈석산은 북평(北平) 여성현(驪城縣) 서남쪽에 있다고 하였다. ㉡ 『대강(大康)지리지에서 낙랑 수성현(遂城縣)에 갈석산이 있는데, 장성이 시작하는 곳이다라고 하였다. 수경에서 ‘[갈석산은] 요서 임유현(臨逾縣) 남쪽 수중(水中)에 있다고 하였다. 대개 갈석산은 두 곳이 있는 것이다. 여기서 협우갈석이라고 한 것은 마땅히 북평의 갈석이다.> (사기색은1, 하본기2)

     

     

    사기색은(史記索隱)가운데 갈석에 대한 주석이다. 사기색은은 당() 현종대(712~756) 활약한 사마정(司馬貞)의 저술이다. 사마정은 이 책을 통해 전한(前漢) 무제대(서기전 141~87)에 활약한 사마천(司馬遷)사기를 고증하고 주석하였다. 최근 한 대중역사서 저술가는 이 중에서 태강지리지를 인용한 구절을 제시하고, 다음과 같이 낙랑군 수성현의 위치를 찾았다고 주장하였다.

     

    수서』 「지리지상곡군(上谷郡)를 보면 수성은 옛날의 무수이다. 후위에서 남영주를 설치하자 영주에서는 511현을 비준했다. (수성의) 용성, 광흥, 정황은 창려군에 속한다[遂城 舊曰武遂 後魏置南營州 准營州置五郡十一縣 龍城·廣興·定荒屬昌黎郡]”는 구절이 있다. 수성현이 창려현으로 변했다는 사료이다. 수성현은 당나라 때에는 북경 서쪽의 역주(易州)에 소속되었다는 기록들이 전한다. 이로써 갈석산이 있던 낙랑 수성현은 현재의 하북 창려임을 의심할 바가 없게 되었다.

     

    그는 수서지리지 상곡군조에 전한대의 낙랑군 수성현이 보이며, 수성현이 창려현으로 변화하였음을 입증해 준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때의 창려현이 지금의 하북성 진황도시(秦皇島市) 창려현(昌黎縣)이라고 하였다. 나아가 다음과 같은 <낙랑군 위치도> <고조선 강역도>를 제시하였다.

     


    낙랑군 위치()과 고조선 강역()
    (이덕일, 2006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역사의아침, 108쪽 및 149)

     

    일단 수서지리지의 상곡군조를 보자.

     

    상곡군<개황 원년(581)에 역주를 설치하였다.> 6·38,700호를 통괄한다. () 수성(遂城)<예전에는 무수(武遂)라고 하였다. 후위(386~534)에서는 남영주(南營州)를 설치하고, 영주(營州)에 준하여 5·11현을 설치하였다. 용성·광흥·정황은 창려군에 속하였다. 석성·광도는 건덕군에 속하였다. 양평·신창은 요동군에 속하였다. 영락은 낙랑군에 속하였다. 부평·대방·영안은 영구군에 속하였다. 후제(550~577)에서는 오직 창려 1군만을 남겨두어 영락·신창 2현을 통솔하도록 하고, 나머지는 모두 생략하였다. 개황 원년(581)[남영]주를 옮기고 [개황] 3(583)[예하의] 군을 폐지하였으며, [개황] 18(598)에 개명하여 수성(遂城)으로 하였다. 용산이 있다>.(수서30, 25 지리, 밑줄인용자)

     

    일반적으로 태강지리지는 서진(265~316)의 태강(280~289) 연간에 편찬되었다고 이해된다. 따라서 태강지리지의 낙랑군 수성현은 서진대의 지명일 것이다. 그런데 밑줄친 대목처럼 수대 상곡군 수성현의 수성이란 지명은 598년에 개명되었다. 이전의 명칭은 무수(武遂)였다. 서진대의 경우 안평국 무수현이었다.

     

    수대의 상곡군 수성현은 태강지리지의 낙랑군 수성현과 무관하였던 것이다. 수대의 상곡군 수성현은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保定市) 서수현(徐水縣) 일대로 비정된다. 지금의 하북성 진황도시 창려현과 전혀 다른 곳이다.

     

    현재의 보정시 서수현과 진황도시 창려현(구글어스 수정)

     

    수서지리지에서는 수성현이 창려현으로 변화하였다는 서술도 없다. 번역부터 잘못하였다. “후위에서 남영주를 설치하자 영주에서는 511현을 비준했다고 하였는데, 이는 남영주를 설치하고 영주에 준()하여 511현을 설치하였다고 번역된다. 이 점은 위서지형지를 보면 더 분명히 알 수 있다.

     

    남영주. 효창(525~528) 연간에 영주가 함락되자 영희 2(533)에 설치하였다. 영웅성(英雄城)에 기치(寄治)하였다. 5·11·1,813·9,036명을 통솔하였다.(위서160, 5 지형지)

     

    북위 영주의 치소는 화룡성(和龍城, 현 요령성 조양시)이었다. 그런데 효창 연간에 함락되었다. 영주의 함락은 이른바 ‘6()의 난과 관련된다. 6진의 난은 북위 북방 변경의 진병(鎭兵진민(鎭民)이 중앙의 차별적인 대우에 불만을 품고 일으킨 반란 사건이었다. 524년 영주에서도 반란이 발생하였다. 북위는 이 무렵 영주를 상실하였다. 고구려의 공격도 있었다. 이와 같은 사정은 1977년 요령성 조양시 낭산(狼山)에서 출토된 한기묘지(韓曁墓誌)를 통해서도 살필 수 있다.

     

     

    영주를 상실한 북위는 533년 남쪽의 영웅성에 남영주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이전 영주의 군현체제에 준하여 남영주의 군현체제를 갖추었다. 이것이 준영주(准營州)”의 의미이다. 이때 남영주 치소 영웅성이 수대의 상곡군 수성현 치소(현 보정시 서수현 비정)였고, 창려군은 남영주에 소속되었다. 교군(僑郡)이었던 것이다.

     

    이와 비교해 진황도시 창려현은 명·청대 영평부(永平府) 소속 창려현이었는데, 창려의 명칭을 얻은 것은 금() 세종대(世宗代)1189년이었다. 이전의 명칭은 광령현(廣寜縣)이었다. 전한대의 낙랑군 수성현은 물론이고, 북위의 남영주 창려군과도 무관한 지명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최근 한 대중역사서 저술가의 주장은 사료해석부터 잘못해 시공을 달리하는 여러 사료 속의 동명이지(同名異地)를 동명동지(同名同地)로 논증하였다. 잘못된 사료해석과 논증에 기초하여 한사군이 난하 유역에 있었다고 주장한 셈이다. 이와 같은 논리라면 조선시기 평안도 평양의 위치도 서울시 종로구에 비정할 수 있다. 평안남도 도청이 지금 서울시 종로구에 있기 때문이다(그림 3 참조). 중세 영국의 수많은 지명도 북미대륙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름 없다.

     

    서울시 종로구 구기동 소재 이북5도청


     

    사실 이제까지 낙랑군 수성현이 난하 유역에 있었다고 본 선행 연구가 없지는 않았다. 리지린과 윤내현이 대표적이다. 다만 그들 연구의 논증 방식은 달랐다.

    리지린은 한서지리지를 통해 갈석산의 위치를 찾았고, 진 장성의 위치에 주목해 낙랑군 수성현의 위치를 비정하였다. 윤내현은 통전의 관련 기록을 통해 갈석산의 위치를 전한 요서군(遼西郡) 비여현(肥如縣)에서 찾았고, 보다 구체적으로 지금의 진황도시 창려현 소재 갈석산에 비정하였다.

     

    사기색은은 물론이고 리지린과 윤내현의 연구에서도 나타나듯이, 갈석산의 위치는 고대의 여러 문헌에서도 서로 달리 전하였다. 진 장성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사기색은에 인용된 태강지리지가 절대적인 사료일 수는 없다.

     

    더욱이 태강지리지는 현재 완질이 남아 있지 않다. 후대의 문헌에서 그 일문(逸文)이 인용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일문마저 문헌마다 차이를 보인다. 서명도 사기색은대강지리지를 비롯하여 진태강삼년지기(晉太康三年地記)·진태강지리지(晉太康地理志)·진태강지지(晉太康地志)·태강지리기(太康地理記)등 각양각색이다. 따라서 이를 연구에 활용하기 위해서는 각종 문헌에 대한 면밀한 사료 검토와 비판이 필수적이다. 최근 사기색은에 인용된 태강지리지4세기 이후의 사정을 반영한다는 분석이 제출되기도 하였다.

     

    사료와 연구의 현황이 이러하므로 그동안 낙랑군의 위치비정에 관하여 다양한 학설이 발표되었다. 여기서 그동안의 연구사를 자세히 소개할 여유는 없다. 다만 최근의 잘못된 주장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살펴보고, 한사군이 난하 유역에 소재하였다는 기왕의 견해가 왜 통설 내지 다수설의 위치를 점하지 못하였는지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하고자 한다.





    2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