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주의 역사학과 ‘우리’ 안의 타율성론 2
관리자 2016-05-28 23:18 1896
식민주의 역사학과 ‘우리’ 안의 타율성론 2
강진원(서울대 강사)
환경결정론이 낳은 사생아, 반도적 성격론
만선사관과 함께 한국사의 타율성을 강력하게 뒷받침해주는 근거로 자리매김한 것은 반도적 성격론이다. 반도적 성격론은 한국의 역사가 반도라는 지리적 특성에 의해 결정되었으며, 특히 대륙과 해양에 위치한 외세의 영향에 의해 수동적으로 변화해왔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런데 처음부터 이러한 인식이 자리하였던 것은 아니다. 19세기까지만 해도 일본 측은 대한제국이 반도국이라는 데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20세기 초가 되면 상황이 변모한다. 당시 제국주의자들은 한반도의 모양새가 일본 열도의 중심부를 찌르는 칼처럼 위험하기 때문에 반도를 식민지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아울러 반도란 대륙과 해양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완성되지 않은 지역이므로, 그 공동체 성원들의 성격도 미성숙하다고 간주하였다. 그에 비해 섬나라 일본은 문화적인 장점을 축적할 수 있는 공간이라 하는 등, 대체적으로 반도보다 우월할 수밖에 없는 입지에 있다고 여겨졌다. 지리적 조건에 따라 그곳에 자리한 공동체의 기본 성격이 판가름된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다만 이때까지는 초보적인 수준이었고, 반도적 성격론의 본격적인 전개는 1930년대부터 이루어진다. 만선사관이 근대 역사학의 토대 위에 성립되었다면, 반도적 성격론은 지정학, 그중에서도 환경결정론의 기초 위에 서 있었다. 이는 역사를 좌우하는 결정적 요인이 지리적 조건과 같은 환경에 있다는 논의이다. 그 주창자라 할 라첼(Friedrich Ratzel)은 영토가 국력의 원천이며, 국가는 생존을 위한 공간을 필요로 한다고 주장하였다.
지정학에서 환경결정론적 경향이 강해진 것은 19세기 중반 이후인데, 그 핵심에는 국가의 자연적 특성이 국가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지정학에서의 국가는 유기체적 존재였다. 때문에 환경결정론적 시각을 따를 경우, 국가의 흥망성쇠는 그 나라가 처한 환경에 의해 결정되며, 지리적 위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간주되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20세기 초 매킨더(Halford John Mackinder)의 논의이다. 그는 세계를 핵심지역과 그를 둘러싸고 있는 지역들로 구분하고, 세계의 중심지역을 차지하려는 강대국들의 경쟁에 주목하였으며, 대륙과 해양의 분포를 통해 국가의 흥망성쇠를 논하였다. 이러한 면모는 같은 시기 다른 지정학자들에게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일본에 그러한 흐름이 유입된 것은 1925년 이후 독일로부터다. 초창기에는 환경결정론적 시각에 대한 비판도 있었으나, 팽창주의 정책이 강화됨에 따라 상황이 변모하였다. 일본이 보다 넓은 영토를 갖는 것은 당연하다는 논리가 지정학적으로 뒷받침되었고, 특히 만주사변 이후에는 만몽(滿蒙)을 잇는 지역이 일본의 생명선으로 강조되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 환경결정론적 시각에서 반도적 성격론이 가시화된다.
도리야마 기이치(鳥山喜一)는 한국사가 대륙 세력(중국 본토·만주)과 해양 세력(일본)의 소장(消長)에 따라 영향을 받아왔다고 여겼다. 보다 대표적인 논자는 미시나 쇼에이(三品彰英)이다. 그는 한국사를 규정하는 가장 큰 요인이 반도라는 지리적 조건이며, 조선은 대륙의 부수적 존재라는 부수성, 중국·만몽·일본에 둘러싸인 다린성(多隣性), 그리고 주변성이라는 특징을 가진 결과, 외세에 수동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고 파악하였다. 나카무라 히데다카(中村榮孝)는 한반도가 대륙에 부속된 반도였기 때문에 중국 문화의 영향이 짙었으며, 그 역사는 대륙국가에 대한 종속적 체제 확충으로 점철되었다고 보았다. 이러한 주장들은 한국사의 전개에서 반도라는 지리적 조건을 특히 중시한 것이다. 지리적 여건을 바꿀 수 없기 때문에 한국사는 시종 타율적인 숙명에 처해질 수밖에 없었다.
사실 지리적 요인은 역사 전개 과정에서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러나 그것은 공동체의 운명에 결정론적인 파급력을 가진 것도 아니고, 영구적인 속성을 확정해주지도 못한다. 이는 실례를 통해서도 입증된다. 반도적 성격론에 따르자면 반도에 자리한 국가들은 모두 타율적이고 종속적이며, 결국 외세의 영향 아래 놓여야 한다. 그러나 이탈리아반도의 로마나 대항해시기 이베리아반도의 에스파냐·포르투갈만 보더라도 반도적 성격론에 부합하지 않는 역사를 지녔음을 알 수 있다. 나아가 서남아시아 산유국들이나 근세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흥망성쇠에서 보이는 것처럼 지리적 요인의 영향이 크다 한들, 그 또한 시대에 따라 다른 모습을 갖는다. 사막이라는 불모지는 석유 시추 기술의 진전으로 노다지가 되었고, 지중해 한가운데 위치한 이점은 신항로 개척이 진전될수록 그 매력을 잃어갔다. 유틀란트반도와 스칸디나비아반도에 자리하였던 덴마크·스웨덴이 각기 중세와 근세에 맹위를 떨쳤으나, 근대 이후 외침과 혼란에 직면하였던 것은 해당 국가가 반도에 있었기 때문이 아님도 재언할 필요가 없다.
실제 한국사를 살펴보아도 외세에 대한 주체적인 항전 태도는 물론이요, 외래 문물의 영향 또한 국내 정치 세력의 역학관계나 사회·경제적 구조에 따라 변화하였다. 반도적 성격론에 부합하지 않는 양상이다. 반도국은 외세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는 입론의 근거가 허약함은 최근의 연구 결과로도 입증된다. 1816년부터 2007년까지 국가 간 발생한 전쟁들을 분석해보면, 비반도국이 반도국을 침략한 경우보다 반도국이 비반도국을 침략한 경우가 더 많다. 대륙 세력이나 해양 세력이 다른 방면으로 진출하기 위해 반도국을 공격한 사례는 많지 않다. 반도에 있어서 외세가 침입한 것이 아니라, 여러 여건에 따라 반도가 전장이 될 때가 있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단적인 예가 한국전쟁으로, 다른 변수가 동일하다면 열도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다.
매킨더와 하우스호퍼(Karl Ernst Haushofer)의 예에서 드러나듯, 환경결정론은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 팽창과 독일 제3제국 침략 전쟁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이러한 면모는 반도적 성격론도 마찬가지다. 도리야마는 일본의 지배에 의해 조선의 독립이 이루어졌다고 주장하였고, 미시나는 일본으로 인하여 조선이 반도사적인 모습을 지양하게 되었다고 평가하였다. 반도에 위치한 조선은 자력으로 독립이 불가능하다는 전제 위에서 일제의 지배는 정당화되었다. 환경결정론은 제국주의-전체주의 국가의 대외침탈을 합리화하는 시의적절한 이론이었고, 그것은 지구 반대편 일제 군국주의와의 만남 속에 반도적 성격론이라는 사생아를 낳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안의 타율성론, 그 씁쓸함.
한국 학계에서는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식민주의 역사학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이루어졌다. 그 선봉에 선 연구자들은 이기백·이용범·김용섭·이만열·조동걸 등이었는데, 여기에는 하타다 다카시(旗田巍) 같은 일본인 연구자도 함께하였다. 이들의 적극적인 행보로 인하여 타율성론을 포함한 식민주의 역사학은 상당부분 그 힘을 잃어버렸다. 다만 아직까지 그 그림자가 말끔히 거둬졌다고는 하기 어렵다. 특히 일반시민들의 경우 식민주의 역사학을 부정함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인식에 기초한 사고를 드러낼 때가 있다.
우선 만선사관이다. 어느 정도 역사에 관심을 지닌 시민이라면, 만선사관이 식민주의 역사학의 일종임은 알고 있다. 그러나 자신도 모르게 만선사관의 기본 틀, 즉 만주의 역사적 흐름이 한반도에 영향을 주었다는 만주 중심적 인식을 보이는 경우가 있다. 만주의 ‘고토’를 회복하지 않는 이상 한국은 강대국이 되기 어렵다는 생각, 혹은 만주를 영유하고 있을 때가 전성기였다는 생각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만주와 함께할 때 온전한 역사가 되고, 그때 강국이 된다는 관념에 기초하고 있다. 이는 만주와 한반도를 아우른 고구려를 높이 평가함과 아울러, 고구려의 멸망으로 만선일체 의식이 파탄을 맞이하였다고 보며 반도의 역사를 저평가한 만선사 연구자들의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실제로 만주가 반도에 시종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보기도 어렵고, 만주를 영유했을 때만 한국사가 찬란한 시대를 맞이한 것도 아니다.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는 한반도 중·남부에 머물렀지만 고구려에 시종 종속적인 위치에 있지도 않았다. 4세기 후반 백제가 평양까지 진격하여 고구려를 위기에 빠뜨리기도 하였거니와, 6세기 중엽 고구려는 한수 유역을 상실한 뒤 신라와 밀약하여 영토를 할양하고 남부 국경을 안정시켰다. 7세기 중엽 고구려의 백제에 대한 우호적 움직임은 신라가 당과 동맹을 맺은 데 대한 대응 차원이었다. 국가들 사이의 역학관계는 고정될 수 없는 성격의 것이기에 당연한 현상이라 하겠다.
남북국시대 이후도 마찬가지인데, 금의 발흥 이전까지 여진의 여러 부락은 고려를 섬겼으며, 후금(청) 성립 이전 조선과의 관계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반도에 있었던 고려·조선이 만주에 위치한 여진·만주족에게 영향을 끼친 셈이다. 또 동아시아의 균형자로서 해동천자(海東天子)의 나라를 지향하였던 11세기 고려나, 안정 속에서 위민의 이상을 실현한 15세기 조선, 그리고 전쟁의 폐허를 복구하고 대동(大同)의 기치를 높이 든 17~18세기 조선의 경우는 만주의 영유가 국가의 번영과 별 관계가 없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더 넓은 영토를 확보해야, 그것도 대륙에 가까운 땅을 차지해야 옳다는 믿음이 시대착오적 발상임은 대개가 동의할 것이다. 그렇다면 과거의 무수한 실상을 만주 중심적인 팽창주의적 사고의 틀로 일거에 해석해버리는 태도 또한 지양해야 마땅하다.
다음으로 반도적 성격론이다. 만선사관에 비해 오늘날 보다 뚜렷하게 잔존해 있는 것이 이 논의이기도 하다. 우리는 국제정세나 안보를 논할 때면 “지속적인 외세의 위협에 노출되는 반도라는 지정학적 조건”, 혹은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이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한 반도”와 같은 표현을 꽤 자주 접해왔다. 그리고 이는 한국이 반도에 자리하였기 때문에 대륙과 해양 양대 세력의 각축장이 되며, 전쟁과 평화를 비롯한 우리의 운명은 그들의 형세에 따라 결정된다는 숙명론으로 나아간다. 환경결정론적 사고가 지리학에서 기피되는 접근방식임에도 불구하고, 그 생명력은 여전하다.
외교나 안보처럼 무거운 주제를 다루지 않는 자리에서도 반도적 성격론은 유효하다. 대표적인 사례가 누리꾼들이 “대륙”, “반도”, “열도”와 같은 단어를 사용하여 특정 국가를 지칭하는 방식으로, 이는 지정학적 상상력과 연결되어 있다. 지리적 위치에 특정한 비하와 조롱의 부정적 어감을 부여하는 것도 이와 연관된다. 어릴 적 “강대국 틈에 낀 반도에 있기 때문에 살기 힘들다”, “반도라는 닫힌 땅에 있어서 개방성이 없다”와 같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러한 발언은 실제와 부합하지 않을뿐더러, 설령 특정 시기 그러한 때가 있다 해도 영구지속적인 것이 아님은 앞서 간단히 언급하였다. 그럼에도 아직 일반시민들에게 반도는 무언가 불만이 녹아들 수밖에 없는 지리적 조건으로 받아들여지는 인상이다.
이러한 사고는 이웃국가에도 그대로 연결된다. 대표적인 사례가 일본으로, 섬나라라는 점을 부각하여 일본사 전반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열도적 성격론’이라 해야 할는지도 모른다. 그 편린은 개항기 지식인들이 과거 일본의 미개함을 강조한 것에서도 보이지만, 해방 이후에는 쇼비니즘과 맞물려 한층 강화되었다. “섬나라에 살기 때문에 도량이 좁고 성급하며 국민성이 호전적이다”와 같은 말을 한 번도 듣지 않고 자란 사람은 드물 것이다. 지리적 조건이 그 공동체와 성원의 특징을 결정지은 셈이다.
그런데 실제 열도나 섬나라의 역사는 일각의 선입견과 다른 양상을 보인다. 뉴질랜드, 아이슬란드의 역사가 침략 지향적인 모습으로 점철되었다는 데 동의할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대항해시기 이전 잉글랜드도 마찬가지로 오히려 로마·앵글로색슨족·노르만족의 침입에 시달렸으며, 누차 정복자들의 왕국이 수립되었다. 지리적 조건은 대항해시기 이후와 같음에도 그러하였다. 일본 역시 왜구가 때때로 준동하였을 뿐, 국가권력이 대외적 침략을 실행에 옮긴 적은 임진왜란 정도이다. 통일 전 이탈리아를 보아도 적극적으로 해외에 진출한 것은 시칠리아가 아니라 베네치아였다. 환경결정론적 지리학은 오늘날 많은 비판에 직면하고 있다. 따라서 그 토대 위에 세워진 반도적 성격론 내지 특정 국가에 대한 선입견이 지니는 한계를 명확히 인지해야 할 것이다.
어떠한 관점을 지닐 것인가?
지금까지 만선사관과 반도적 성격론을 중심으로 식민주의 역사학의 타율성론에 대해 살펴보았다. 역사의 주체는 인간이며, 시간의 흐름에 따른 인간의 역동적인 경험과 그 변화 과정을 살펴보는 것이 역사학에서 요구되는 자세라 하겠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속성을 정해놓고 무수한 인과관계를 단순화하여 이해함과 아울러, 그것이 지속됨을 역설한 만선사관이나 반도적 성격론은 일종의 ‘프로파간다’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당 논의의 잔영에 마음이 편치 않은 이유는 거기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떠한 관점을 지녀야 할 것인가? 식민주의 역사학 연구가 근대적 학문 토대 위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탈근대적 관점을 가질 필요성이 제기되기도 한다. 다만 해당 논의는 다른 기회에 다룰 수 있거니와, 스스로의 배움이 일천하여 특정한 견해를 언급하기가 주저된다. 여기서는 글을 쓰며 든 생각을 거칠게나마 정리하며 갈음하고자 한다.
첫째, 넓은 영토에 대한 집착의 지양이다. 만주 중심주의적 사고는 말할 것도 없고, 과거 환경결정론적 지정학에서도 ‘요충지’는 장악해야만 할 대상이었다. 오늘날 침략 전쟁이 용인되지 않는 시기라 하여도, 이는 문제가 있는 사고이다. 고전 지정학적 명제는 외교 전략을 경직된 방향으로 유도하고, 국방에 대한 과도한 투자를 이끌어낸다. 또 이러한 사고는 힘의 논리로 점철된 국제관계를 좋다고 여기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평화와 공존의 추구는 현대 선진국가가 걸어야 할 길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설령 과거 영토 확장과 지리적 위치가 중요한 변수였다 한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한 오늘날에는 오히려 다른 측면에서의 개발과 확장을 통해 진보해야 할 것이다.
둘째, 역사란 다양한 요인이 얽혀 전개된다는 점의 인지이다. 어떤 시기 두 공동체의 우열관계는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영구불변한 것이 아니며, 또 그 원인이 지리적 조건에 의해서만 결정되지도 않는다. 신라 중·하대의 대일관계에 대당관계의 악화 및 개선이 큰 변수로 작용한 것이 그 일례이다. 아울러 9세기 이후 티베트가 ‘평화로운 은자의 나라’로 자리매김한 데는 종교적 요인 외에 국제적인 교역 상황의 변동이 자리하였을 수 있다.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놓고 관련 사실을 취합하여 진실에 도달하는 자세, 혹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아울러 지정학적 위상 또한 시대에 따라, 대상국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셋째, 일관성 있는 관점의 견지이다. 한국사의 영역을 축소한 만선사관은 비판하면서도, 중국 동북방 제족(諸族) 대개를 한국사의 범주에 포괄하려 한 일제강점기 민족주의 역사학 연구자들의 견해에 찬동하는 것. 그리고 반도적 성격론은 부정하면서도 일본이나 중국·미국의 국민성을 섣불리 판단하고 찬양 내지 혐오하는 것은 그다지 건강한 태도가 아니다. 오늘날 존경받는 국가공동체 성원들이 어떠한 점을 지향하는지에 대해 한 번쯤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넷째, 당면한 현실에 부응하기 위한 학문 연구에 대한 경계이다. 만선사관이나 반도적 성격론이 가진 큰 문제점은 여러 면에서 반증이 가능하다는 것이요, 그것은 해당 논의가 당시의 상황이나 정책적 목표에 발맞추어 뿌리를 내렸기 때문이다. 역사학은 어떠한 담론을 먼저 세우고 그 틀에 사실을 조립해 넣는 학문이 아니라, 사실에 근거하여 한 시대의 구조와 체계를 논하는 경험론적 사고에 기인한 학문이다. 그러므로 일반시민들은 정부나 국가권력이 뜻하는 바를 연구자들에게 강요하지는 않는지, 학문 연구가 정책적 목표에 좌우되지 않는지 지켜보아야 한다.
어제의 우리가 식민주의 역사학의 그늘을 지우려 애썼다면, 내일의 우리 아이들은 새로운 관점에서 보다 나은 공동체 유지에 힘썼으면 한다. 이 글이 거기에 조그만 보탬이나마 되었기를 희망한다.
역사비평 2016년 여름호(통권 제11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