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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민주의 역사학과 ‘우리’ 안의 타율성론 1

    관리자 2016-05-28 23:17 2109

    식민주의 역사학과 우리안의 타율성론 1

     

    강진원(서울대 강사)

     

    식민주의 역사학과 타율성론

     

    역사에 관심이 있거나 없거나 자주 접하게 되는 역사용어들이 있다. ‘식민사학’, ‘식민사관’, ‘식민지() 사관’, ‘식민주의 ()사학역시 그 하나이다. 세부적인 표현은 다르지만, 이는 대체로 일제의 식민지 지배 이데올로기와 정책에 기여하기 위해 한국사를 왜곡한 역사학 내지 역사관을 일컫는다.

    다만 동일한 실체에 대한 용어가 여럿으로 나뉘어 있을 뿐 아니라, 어떤 경우는 실상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특정한 용어를 고정하여 사용할 필요가 있는데, ‘식민주의 역사학이 상대적으로 적합한 표현 아닐까 한다. 우선 해당 연구 풍토는 상당 기간 성과를 축적하였으므로 ‘()사관보다는 넓은 범주, 역사학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게 더 낫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식민식민을 위한’, ‘식민지()’식민지(로서)란 뜻인데, 전자는 관련 범위가 지나치게 협소하고, 후자는 민족주의 역사학을 포함하여 식민지 안에서 일어난 역사학적 흐름 전체를 포괄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식민주의(colonialism)’는 어떤 국가가 다른 국가나 공동체를 지배하는 정책이나 방식을 의미하므로, 해당 연구 풍토를 설명하기에 적절하다.

    식민주의 역사학의 주요 내용은 타율성론·정체성론·만선사관·반도적 성격론·당파성론·사대주의론·일선동조론 등이다. 이를 총론적인 것과 각론적인 것으로 나누어 보자면, 전자는 타율성론·정체성론이요, 후자는 나머지라 할 수 있다. 전자는 후자의 논의가 성립함에 기본적 토대를 제공하였고, 바꿔 말하자면 후자를 통하여 전자라는 결론에 도달하였다고도 하겠다.

    이 글에서는 정체성론과 함께 식민주의 역사학의 큰 기둥이라 할 타율성론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타율성론은 한국사의 전개 과정이 한국인의 자주적 역량에 의한 것이 아니라, 외세의 간섭과 영향에 따라 타율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관점이다. 타율성론이 두드러지게 드러났다고 이해되어왔던 것은 만선사관과 반도적 성격론이다. 따라서 이 두 논의를 중심으로 알아볼 것이다. 그리고 해당 사조의 문제점과 아울러, 오늘날 우리는 거기서 자유롭다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고자 한다.

     

    당면한 현실이 창출한 과거, 만선사관

     

    식민주의 역사학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 지배를 옹호하고 정당화하는 연구 풍토를 지녔다. 따라서 일제의 팽창에 따라 구체적인 내용도 변화·재정립되었다. 대한제국의 식민지화를 기도할 때는 조선사 연구가 활기를 띠었으나, 1905년 러일전쟁 이후 만한경영(滿韓經營)’이 전면화하면서 만선사학이 등장한다. 일제의 영향력이 조선을 넘어 남만주까지 미치게 되자, ‘만선(滿鮮)’을 하나의 역사적·문화적 지역으로 파악하고자 한 것이다.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가 만주는 일본의 국운에 영향을 주기에 만한경영을 위해 해당 지역의 연구가 필요함을 언급한 데서도 이 점이 잘 드러난다. 만선사학의 궁극적인 목적은 만주 지역으로 진출하는 일제에 학문적인 기여를 함에 있었다.

    만선사는 만주의 역사를 뜻하는 만주사와 한반도의 역사를 가리키는 조선사를 합쳐서 만든 용어이다. 언제부터 누구에 의해 시작되었는지는 명확치 않다. 그러나 1908년 남만주철도회사 산하에 만선역사지리조사실이 설치된 이후 만선사라는 명칭이 널리 사용되었다고 여겨진다. 만선사는 시라토리에 의해 주창되었고,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에 의해 체계화되었는데, 주된 관심 대상은 고대사였다.

    주목되는 점은 만선사학 연구자들이 대개 동양사 전공자들이라는 것으로, 국사학(일본사) 전공자들이 일선동조론을 주장하고 있던 것과 대조를 이룬다. 미시나 쇼에이(三品彰英)을 비롯한 일선동조론 연구자들은 조선사가 만주사보다는 일본사와 밀접하다고 여겼기에, 만선사학의 관점에 부정적이었다. 동양사 연구자 대부분이 시라토리의 실증주의 역사학을 기본으로 하였음에 비해, 일본사 연구자들에게는 국학파와 유럽의 문화사학 내지 낭만주의 역사학과 같은 여러 조류의 연구 시각과 방법이 혼재되어 있었다. 결론적으로 만선사관은 일선동조론과는 결을 달리하고 있었다. , 그렇다고 하여 만선사관이 시종 일선동조론을 비판하는 입장을 고수한 것도 아니었다. 이 문제는 뒤에서 다시 다루겠다.

    만선사관은 만선사학의 관점을 일컫는다. 주지하듯 만선사관에서는 만주와 한반도의 역사가 하나의 단위로 파악된다. 즉 만주의 역사가 중국으로부터 분리되어 한반도의 그것과 관련성을 맺게 된 것이다. , 그렇다고 하여 만주사와 조선사가 하나로 통합된 것은 아니었으며, 양자는 병렬적으로 존재하였다. 더욱이 만주사와 조선사가 동등한 지위를 점하고 있지도 않았다. 어디까지나 만주사가 중심이었고, 조선사는 종속된 위치였다. 이는 한반도의 왕조 개창자들은 만주의 역사 전개 과정에서 패배한 자들이며, 역대 왕조는 항상 만주사의 변화에 영향을 받았다는 이나바의 견해에서도 잘 드러난다. 한국사 전개의 주도 세력을 일선동조론에서의 일본에서 만주로 바꿔놓은 것인데, 조선사가 만주사에 종속된다고 인식한 이유는 조선이 만주에 부속된 반도라는 지리적 특징 때문이다. 즉 만주가 조선에 영향을 끼친다는 만선사의 관점은 반도적 성격론과 맥이 닿아 있다.

    만선사 연구에서 가장 중시된 국가는 고구려였다. 고구려의 영역을 보면 그 역사는 만주사이면서도 조선사에 속하였기에, 만선사 개념에 가장 적합한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만선사 연구자들은 고구려가 중국과의 대립 및 전쟁을 통하여 발전하였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만주로 진출하여 중국과 대립각을 세운 일제의 현실이 과거 중국 세력과 상쟁하던 고구려에 덧씌워진 것이다. 그 평가 역시 후하여 강국이자 대국으로 인식되었다. 이나바와 같은 이들에게 고구려는 배워야 할 것이 많은 대상이었고, ‘만선일여(滿鮮一如)’를 실현한 국가였으며, 조선을 병합한 일제의 만주 진출은 고구려의 발자취를 뒤이어 새로운 발전을 하는 것이라고까지 이해되었다. 고구려가 그처럼 강건할 수 있었던 이유는 만주와 조선의 국경을 아울러 나라를 세웠기 때문이었고, 신라는 반도에 머물렀던 탓에 나약해졌다고 여겼다. 그리고 만주와 반도를 아우르던 고구려의 멸망은 만선일가(滿鮮一家)가 파탄을 맞이한 사건으로 평가되었다.

    그런데 만선사는 사실에 근거한 치열한 논쟁이나 확고한 학문적 정의가 결여된 채, 일제의 대륙 침략이라는 현실의 수요로 인하여 급조되었다. 학문적 성과가 축적되기 전에 기본적인 입장이 제시되었기에, 논의 전개 과정에서 모순된 면모도 드러났다.

    첫째, 만주사와 조선사의 구분이 모호하였다. 만선사의 연구 내용은 한반도와 만주에 있었던 각 공동체들의 역사를 취합하였을 뿐, 어떠한 하나의 세계를 연구한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만선사 성립 이후에도 조선사와 만주사는 병존하였고, 어디 역사로 보아야 할지에 대해 뚜렷한 입장이 서지 못하였다. 고구려의 경우 한반도 북·중부까지 진출하였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만주사였지만 조선사의 일부로도 인식되었다. 그런데 발해는 한반도 북부를 점유하였음에도 조선사의 범주에서 다루어지지 않았다. 고구려 멸망과 통일신라성립으로 만선일여 인식이 무너졌고, 신라와의 관계가 소원하였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만주와 한반도가 역사적 공감대를 형성하지 않으면 만선을 아우르는 역사로 평가되지 않았다 하겠다.

    고조선의 경우는 이런 정도가 더욱 심하다. 오다 쇼고(小田省吾)는 고조선의 중심지가 평양에 있기에 조선사의 일부로 여겼으나, 야노 진이치(矢野仁一)는 고조선의 영향력이 압록강 이북에도 미쳤다고 여겨 만주사로 보았다. 이나바는 기자와 위만 모두 중국인이기에 고조선은 식민지이며, 그래서 중국사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근대의 특수 현상인 식민지란 개념을 고대사에 곧바로 적용하는 것의 문제점은 이미 핀리(Morris Finely)도 지적한 바이다. 다만 그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만선사는 지리적인 측면을 중시한 역사 이해이기에, 중국인의 이주나 통치를 근거로 해당 공동체를 중국사로 보는 것은 적절치 않다. ‘조선사의 타율성을 내세우는 데 몰두하여 만선사의 기본 인식과 마찰을 빚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둘째,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지대한 영향력을 긍정하였다. 만선사 연구자들은 임나일본부의 치폐를 중심으로 한반도 남부의 역사를 서술하였다. 562년 전까지 해당 지역의 역사적 주체는 왜였다. 이는 조선사가 만주사에 종속된 존재라는 만선사의 기본 이해와 배치된다. 여기에는 만선사 연구자들의 관심이 한반도 남부가 아니라 만주에 있었다는 것도 한 원인이 될 것이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배경으로는 만선사관이 근대 역사학의 토대 위에 수립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근대 역사학은 자국사를 중심으로 다른 지역의 역사를 타자화하였기에, 만주사나 조선사 역시 일본사를 염두에 두고 재구성된 측면이 존재하였다. 오다 쇼고는 물론이요, 대표적인 만선사가 이나바가 만선사 못지않게 일본사에 대해서도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당시 국제관계 속에서 일본의 강고한 위상을 강조한 것은 그 일례이다. 만선사는 일본을 중심으로 조선과 만주의 역사를 바라본 것이었고, 그 연구자들은 내셔널리즘을 넘어 쇼비니즘이 성행한 시기를 살아갔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일본의 영향력이 타율적인한반도에 미친다는 것에 별다른 이견은 없었을 것이다.

    셋째, 만선사의 시기적 범주가 분명치 않았다. 신라가 반도를 통일한 이후, 한반도와 만주의 관계는 소원해졌다. 양국을 하나의 역사단위로 포괄하여 이해하기 곤란할뿐더러, 반도사(통일신라사)가 만주사(발해사)에 종속되었다는 흔적도 찾기 힘들다. 만선사관에 입각한다 하더라도 이나바가 언급하였듯이, 이때부터 만선일가 관념은 파탄을 맞이하였다. 즉 만선사의 기본 전제가 무너진 셈이다. 그렇다면 만선사는 사실상 7세기 후반 이후 종결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럼에도 만선사 연구자들은 청-조선시대까지 다루고 있다. 이나바의 연구가 대표적이다. 그는 통일신라 성립 이후 시일이 흐를수록 만선분리가 강화되었다고 보았는데, 그렇기에 광해군의 후금 외교와 효종의 나성정벌을 만선이 교류·협력한 사례로 특기하였다. 그러나 이는 실질적으로 와해된 만선사의 기본 전제를 후대까지 연장시키기 위한 접근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이상과 같이 만선사는 그 파급력에 비해 상당히 허약한 체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나마 체계화를 시도한 이나바마저도 역사적 고찰에 의해 그러한 인식을 제안한 것이 아니라, 일제의 만선 지배를 역사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만선불가분의 역사를 제창한 것을 보면, 이는 당연한 귀결이었는지도 모른다.

    재미있는 점은 일제의 팽창이 지속됨에 따라 또 다른 역사 연구가 본격화되었다는 사실이다. 몽골 방면으로 세력을 뻗치면서 만주와 몽골을 묶은 만몽사가 나타났고, 1937년 중일전쟁으로 중국 내륙으로의 침략이 가시화되자 동아사가 등장하였다. 그리고 1941년 태평양전쟁 이후 전략적 범위가 남태평양까지 확대됨에 따라 대동아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만일 태평양전쟁 결과 미국을 제압하기라도 했다면, 아시아와 아메리카 대륙을 포괄한 아미사(亞美史)’가 만들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제 만주 점령이 완료되어 만주사·만선사는 학문적 임무를 완수한 상태였기에, 조선사 또한 새로운 역사학에 발맞추어 재조명되었다. 조선사가 만주사에 종속되어 있다는 데서 한 발 더 나아가 일본·중국·만주를 포괄하는 동아사의 범주에서 조선사의 타율성이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이나바가 1930년대 이후 종전의 견해를 수정하여 한족(漢族)의 만선 침공에 있어 몽골이라는 변수에 주목한 것은 그 일례이다.

    이러한 일련의 흐름은 만선사가 만몽사·동아사·대동아사와 마찬가지로 일제의 의해 창조된 자의적·편의적인 역사단위에 불과함을 보여준다. 아울러 일제의 한국사·동양사 인식 자체가 현실적 필요에 따라 변모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오늘의 현실과 내일의 목표가 오래된 것임을 설명하기 위해 과거를 무리하게 뒤트는 것. 그것이 바로 만선사관의 본질이자, 식민주의 역사학의 한 특징이었다. 이를테면 만선사관은 당면한 현실이 창출한 과거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