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나일본부’ 연구와 식민주의 역사관 2
관리자 2016-05-26 21:17 2716
‘임나일본부’ 연구와 식민주의 역사관 2
신가영(연세대 박사과정)
‘임나일본부’ 연구의 현주소
1980년대 이후 발굴을 통해 새로운 고고자료가 축적되었고, 『일본서기』에 대한 연구가 진전됨에 따라 가야사 연구도 보다 입체적으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과거 일본 학계의 편향된 연구 시각에서 벗어나 백제, 가야 제국이 주체가 되는 ‘임나일본부’ 연구가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앞서 살펴본 천관우와 김현구의 연구는 『일본서기』의 한반도 관계 기사의 주체를 왜에서 백제로 바꿔 파악하여 백제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왜가 가야를 지배한 것이 아니라 백제가 가야를 지배했던 것으로 이해하는 새로운 ‘임나일본부’상을 그려낸 것이다. 이들의 연구를 통해 『일본서기』의 사료적 가치가 인정된 점에서 연구사적 의의가 있지만, 한계도 있었다.
‘임나일본부’ 관련 사료에는 백제가 가야 지역을 지배하였다는 기록이 없다. 무엇보다 ‘임나일본부’와 관련된 왜인들의 활동을 보면, 백제로부터 명령을 받거나 백제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기보다는 오히려 가야 제국과 신라에 더 우호적인 모습으로 기술되고 있다. 또한 가야 지역에서 벌어진 사건들에 대해 가야 여러 세력들의 입장과 상황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왜나 백제의 이해관계를 강조하는 것 역시 당시 상황에 부합하지 않는 면이 있다. 그래서 가야 세력의 독자성을 입증하기 위한 연구도 다양하게 진행되었다. ‘임나일본부’ 관련 자료가 주로 백제, 신라와의 외교 교섭 기사로 이루어졌던 것에 주목하여 가야의 대외관계사라는 시각에서 ‘임나일본부’ 문제에 새롭게 접근하는 연구들이 제출되었다. 요컨대 국내 학계의 연구를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한다면, ‘임나일본부’를 둘러싼 ① 백제와 가야·왜의 관계, 그리고 ② 가야 제국과 왜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임나일본부’ 연구의 첫 걸음은 용어 자체에 대한 분석이었다. ‘임나일본부’는 국내의 어떤 자료에도 기록되지 않았고, 『일본서기』에서만 살펴볼 수 있는 용어이다. 『일본서기』에서 ‘임나일본부’, ‘안라일본부’, ‘일본부’는 웅략 8년(464)에 1건, 나머지는 흠명 2년(541)~흠명 13년(552)에 집중적으로 사용되었다. ‘일본’이나 ‘부’라는 표현은 당시 일본에서 사용되지 않았던 용어이기에 ‘임나일본부’는 『일본서기』 편찬 당시 조작된 것으로 추정한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던 용어지만, ‘임나일본부’를 대체할 용어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임나일본부’에 대해 각양각색으로 이해하고 연구자 다수가 동의할 수 있는 대안이 제시되지 못하였기에 ‘임나일본부’라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상황이다.
‘임나일본부’는 교역기관, 외교기관, 안라왜신관, 사신단, 왜계 관료, 중간자적 존재 등 그 성격이 다양하게 추정되고 있다. ‘부(府)’라는 표현을 주목해볼 때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 바로 기관·기구로 파악하거나 사자(使者)·사신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첫 번째 견해에서는 ‘부’가 설치되지는 않았지만 ‘부’라고 표현될 만한 기관이나 기구는 있었다고 추정하기에 왜인들이 특정 기관이나 기구에 소속되어 있었다고 본다. 두 번째 견해는 ‘임나일본부’에서 ‘부’의 훈(訓)이 ‘미코토모치(ミコトモチ, 御事持)’라는 점에 주목하였다. ‘임나일본부’를 대체로 ‘임나(=가야)에 파견된 왜왕의 사신’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재안라제왜신등(在安羅諸倭臣等)”(『일본서기』 흠명 15년 12월)을 ‘임나일본부’의 원형으로 본다.
대체로 ‘임나일본부’를 가야의 대외관계의 산물로 이해하고 있으며, 백제의 영향력을 강조하는 일부 견해에서는 백제가 설치한 기구·기관으로 파악하고 있다. 6세기 전반 ‘임나일본부’라고 불릴 수 있었던 특정 기구 혹은 사신단이 함안 지역의 안라에 있었던 것은 인정되고 있다. 어떤 관점을 따르든, 현재 국내 학계의 연구는 ‘임나일본부’가 왜의 지배 혹은 통치기구라는 관점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다.
오늘날 국내 학계에서 이루어지는 ‘임나일본부’ 논쟁의 핵심은, 왜의 ‘임나일본부’ 운영 혹은 왜의 한반도 남부 지배 문제가 아니라 가야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왜인들의 실체를 어떻게 파악할지에 대한 문제이다. ‘임나일본부’라는 것은 당시에 존재하지 않았더라도, 한반도 남부에서 활동하던 왜인들을 어떻게 이해할지에 대해서는 연구자마다 의견이 엇갈린다. 이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문제로 귀결된다.
첫째, 한반도 지역의 왜인들과 야마토 정권의 관계이다. 대체로 야마토 정권에서 파견된 왜인으로 이해하지만, 왜왕의 영향력이 직접 미치는 것으로 이해하지는 않으며, 백제나 가야 제국의 주체성을 강조하고 있다. 규슈(九州) 지역 혹은 기비(吉備) 지역의 왜인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둘째, 왜인이 어떻게 가야 지역으로 올 수 있었는지도 주요 쟁점이다. 국내 학계에서는 백제가 왜인을 파견하였다고 이해하거나 안라에서 이들을 불러들였다고 본다. 셋째, 왜인이 가야 여러 세력과 어떤 관계였고, 어떠한 역할을 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연구자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일본서기』(복원)
이처럼 ‘임나일본부’는 서로 다른 관점과 시각에서 다양하게 연구되고 있다. ‘임나일본부’에 대해 다양한 설이 제기된 이유는 ‘임나일본부’가 기록되어 있는 『일본서기』가 가진 자료의 한계 때문이다. 『일본서기』는 8세기 일본 천황제 율령국가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편찬된 역사서로, 일본인들의 한반도 제국에 대한 상대적 우월감이 반영되어 있다. 예컨대 ‘임나’라고 표현된 가야 제국을 비롯하여 고구려, 백제, 신라는 고대 일본의 조공국, 속국으로 기술되어 있다. 즉 일본 중심의 왜곡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일본서기』 기록 자체의 문제와 더불어, 『일본서기』에 인용된 백제 측 기록인 「백제기(百濟記)」, 「백제신찬(百濟新撰)」, 「백제본기(百濟本記)」의 ‘임나’ 관련 기술에 가야에 대한 백제의 인식이 반영되어 있었다는 점도 간과하기 어렵다. 백제사 연구에서는 『일본서기』에 기록된 어떤 사건의 주체를 왜에서 백제로 바꿔 사료를 이해한다. 반면 가야사 연구에서는 「백제기」, 「백제신찬」, 「백제본기」도 일방적인 백제 중심의 기록이기 때문에 사료를 활용하는 데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임나일본부’ 관련 기사는 「백제본기」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서기』 편찬 시기의 윤색된 부분을 제외한다면 사료적 신뢰성이 있다고 인정되었다. 그래서 ‘임나일본부’를 왜가 아닌 백제가 운영하거나 파견한 것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하지만 「백제본기」의 내용도 원자료 그대로 인용된 것이 아니라 『일본서기』 편찬 당시의 관념을 반영하여 일부 개변된 것으로 파악된다. 그렇기에 백제의 가야에 대한 강한 영향력이 실제 가야 제국과 백제의 관계를 반영하고 있었는지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한 것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와 달리 가야는 자신들의 역사서를 남기지 못하였다. 따라서 연구자가 『일본서기』의 조작·윤색된 기록을 통해 가야사의 실상을 제시하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백제와 가야 제국에 대해 일본의 우월적 입장이 반영된 기술은 당연히 배제시킨 후 이용하지만, 그 다음의 사료 분석과 활용은 연구자의 관점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이것이 현재 학계에서 ‘임나일본부’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도출될 수밖에 없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일본인과 백제인들의 역사 기술이 정확하게 이루어지지 않았을 가능성 또한 면밀히 고려하는 가운데 역사 해석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은 역사학에서 문헌고증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임나일본부’ 연구를 비롯한 가야사 연구, 고대 한일관계사 연구들이 『일본서기』를 주로 이용하는 것을 근거로 식민주의 역사학이라고 일방적으로 단언하는 것은 학계의 연구를 폄하하는 것이다. 그 누구도 『일본서기』의 내용을 그대로 사료로 활용하지 않으며, 그 시각을 따르지도 않는다. 가야사를 비롯한 고대 한일관계사 연구자들은 일본 학계의 일부에 식민주의 역사관이 남아 있는 것을 의식하는 가운데 ‘임나일본부’의 실체에 접근하고자 오늘까지 계속 노력하고 있다.
‘임나’에 대한 편견과 오해
한국 학계의 임나일본부설 연구는 해방 이후 지속적으로 이어졌으며, 엄밀한 사료 비판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이비 역사가들이 국내 학계를 식민주의 역사학이라 매도하는 근거는 무엇일까. 우선 이들은 ‘임나일본부’를 왜의 지배·통치기관으로 여기는 과거 스에마쓰 식의 ‘임나일본부’설이 한국과 일본 학계에서 여전히 통용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들은 사료상의 ‘임나’를 ‘임나일본부’로 인식하고 있으며, ‘임나일본부’를 여전히 ‘조선총독부’와 같은 것으로 이해하는 선입견을 보인다. 그래서 한반도에 ‘임나’가 존재한다는 주장 자체가 식민주의 역사관에 따르는 것이라고 말한다. 『일본서기』 편찬자들의 ‘임나’ 인식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 ‘임나일본부’ 문제에 접근한 것이다. 따라서 ‘임나’가 한반도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강한 거부감을 나타낸다.
- 『우리 안의 식민사관』, 176쪽 지도와 설명
“김현구는 임나를 지배한 것은 백제였다는 안전판을 마련한 채 지금의 전라남도 전역과 경상도 서부 및 충청북도와 강원도 일부까지 가야(임나)의 강역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안의 식민사관』, 340쪽)
“임나일본부를 차마 그리지 못했지만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은 임나일본부의 존속을 전제로 지금까지 유지되는 학설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임나를 가야라고 주장하면서 심지어 옛날 쓰다 소키치가 주장했던 임나는 김해 일대인데, 지금은 한국 학자들이 전라남도 전부 그리고 충청북도, 충청남도 그리고 반 이상을 집어넣고 임나, 가야라고 표기하고 있어요” (국회 동북아특위에서의 발언. 『매국의 역사학, 어디까지 왔나』, 266쪽)
“현재 한국 고대사학계는 김현구뿐만 아니라 여러 학자들이 ‘임나=가야’라고 전제하고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가야가 임나라는 것은 허무맹랑한 말이다. 『일본서기』 자체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다. ······ 김현구뿐만 아니라 여러 국내 사학자들은 여전히 ‘임나=가야’라고 말하면서 임나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전제로 임나가 전라남도 전역을 차지했다는 등 낙동강 유역을 차지했다는 등 소설을 써대고 있는 실정이다” (『매국의 역사학, 어디까지 왔나』, 268~269쪽)
이러한 인식은 짐짓 이해되기도 한다. 『일본서기』에서 ‘임나’는 왜에 가장 먼저 ‘조공’한 나라이며, ‘임나’라는 명칭은 스진(崇神)천황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게다가 ‘임나’는 왜의 번국(蕃國)이자 내관가(內官家)로 왜에 의해 지배되었기에, 『일본서기』에서 기록된 ‘임나’를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것을 문제시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임나’의 위치를 가야 지역, 즉 한반도 남부에 비정하는 것 자체가 식민사관이라는 단순한 논리로 학계를 매도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임나’가 한반도가 아닌 일본에 있었다고 추정하는 견해는 종종 제기되었다. 『일본서기』 숭신기의 기록을 통해 ‘임나’는 일본의 쓰시마(對馬島)에 있었으며, 『일본서기』에서 가야가 멸망한 562년 이후에도 ‘임나’가 기록되고 있는 것을 볼 때 ‘임나’와 가야는 별개의 존재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임나’가 한반도 남부에 있었다는 것은 아무런 사료적 근거가 없는 주장이라고 치부한다.
하지만 ‘임나’라는 명칭은 『일본서기』에서만 사용된 것이 아니었다. 414년 건립된 고구려의 「광개토왕비」에는 ‘임나가라(任那加羅)’, 924년 건립된 「봉림사 진경대사보월능공탑비」에는 ‘임나(任那)’, 『삼국사기』 강수열전에는 ‘임나가량(任那加良)’ 등 한국 측 사료도 확실히 ‘임나’를 사용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기록들에서 ‘임나’가 김해 지역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고령 지역을 가리키는지에 대한 논란은 있지만, ‘임나’가 가야의 한 세력을 지칭하는 명칭으로 사용된 것은 분명하다.
영토는 임나를 총괄하였다. [『제서』에 이르기를 “가라국은 삼한의 종족이다”라고 하였다. 지금(당나라) 신라의 노인들이 말하기를, “가라와 임나는 옛날에 신라에 멸망되었다. 그 옛 땅은 지금 모두 나라의 남쪽 7~8백리에 있다”] (『한원』 권30, 번이부, 신라)
중국 측 사료에서도 ‘임나’는 확인된다. 『송서』 왜국전, 『남제서』 왜국전, 『양서』 왜전, 『남사』 왜국전, 『통전』 신라전 등에서도 ‘임나’를 살펴볼 수 있다. 660년경 편찬된 『한원』 신라전에는 ‘임나’가 한반도에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는 기록이 있다. ‘임나’라는 명칭을 인정했다는 이유로 식민주의 역사관을 운운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이다.
한편 중국 측 사료를 근거로 제시하며 ‘임나’와 가야가 다르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다. 『송서』, 『남제서』 등에 기록된 왜왕들의 작호를 보면 “왜·신라·임나·가라(加羅)·진한(秦韓)·모한(慕韓) 6국 제군사”, “왜·백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 7국 제군사” 등 ‘임나’와 ‘가라’가 각각 다른 나라로 구별되어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이때의 ‘임나’와 ‘가라’는 대체로 김해 지역과 고령 지역의 가야국으로 추정된다. 즉, ‘임나’와 ‘가라’는 가야 제국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가야의 여러 나라 중 하나를 각각 가리키는 명칭으로 사용된 것이다. 둘 다 가야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보아도 문제될 것은 없다.
가야의 명칭에 대해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와는 달리 논란이 있다. 가야를 가리키는 명칭은 다양하게 전하고 있는데, 가야에 관한 기록들은 가야인 스스로 편찬한 것이 아니고 타자에 의해 쓰였거나 가야가 멸망한 이후 기록된 것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용례로 사용하는 가야(加耶)는 『삼국사기』의 편찬자가 오늘날 우리가 ‘가야’라고 부르는 여러 나라들을 하나로 통일하여 가야라고 기록한 것이다. 당시 명칭으로 ‘가야’를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가야라고 불리는 나라들은 ‘대가야’, ‘안라’, ‘가락’, ‘금관국’과 같이 고유한 명칭으로 기록되거나, ‘임나’, ‘가라’, ‘가야’와 같이 동일한 명칭으로 기록되기도 하였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가야도 초기에는 김해 지역의 가야를 가리켰지만, 어느 시기 이후에는 주로 고령 지역의 가야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이해된다.
즉, 가야의 명칭은 기록에 따라 가리키는 대상과 그 범위가 다른 경우가 있기 때문에 주의가 필요하다. 특히 『일본서기』에 기록된 ‘임나’는 착종되어 사용되었다. 가야의 여러 나라 중에서 하나의 세력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가야의 여러 나라 전체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가야 지역이 아닌 곳이 ‘임나’라고 기록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임나’가 곧바로 어떤 가야를 의미하는 것인지 단정하기는 어렵다. 다양한 ‘임나’의 용례가 있기 때문에 『일본서기』에 기록된 ‘임나’를 한반도에 비정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은 사료 분석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신라가 임나관가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어떤 책에서는 21년에 임나가 멸망하였다고 한다. 통틀어 말하면 임나이고, 개별적으로 말하면 加羅國, 安羅國, 斯二岐國, 多羅國, 卒麻國, 古嵯國, 子他國, 散半下國, 乞湌國, 稔禮國 등 모두 열 나라이다.]” (『일본서기』 권19, 흠명 23년 정월)
“천황이 백제가 고구려에게 멸망하였음을 듣고 久麻那利를 문주왕에게 주어 그 나라를 세우는 것을 도왔다. 이때 사람들이 모두 “백제국이 비록 무리들은 이미 죽거나 倉下에 모여 근심하였는데도 오로지 천황에게 의지하여 다시 그 나라를 세웠다”고 하였다. [문주왕은 개로왕의 母弟이다. 일본의 舊記에서는 “久麻那利를 말다왕에게 주었다”고 하였는데, 아마도 잘못일 것이다. 久麻那利는 임나국의 下哆呼唎縣의 別邑이다.]” (『일본서기』 권14, 웅략 21년 3월)
이처럼 한국과 중국 측의 사료를 볼 때 ‘임나’가 한반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일본서기』를 통해서도 ‘임나’가 한반도 남부에 있었음을 충분히 입증할 수 있다. 하지만 ‘임나’의 위치를 일본에 비정하는 견해에서는 한국, 중국, 일본의 ‘임나’ 기록을 제대로 분석하지 않은 채 『일본서기』의 ‘임나’ 관련 기록 중 자신의 주장에 유리한 기록 일부만을 ‘그대로’ 활용하고 있는 한계를 보여준다.
역동적인 고대 한일 교류사를 기대하며
스에마쓰의 임나일본부설처럼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하였다고 추종하는 이는 국내 학계에 없다. ‘임나일본부’를 왜의 통치기관으로 이해하는 연구자도 없다. 사이비 역사가들이 김현구의 ‘임나일본부’ 연구를 식민주의 역사관에 따른 것이라고 파악하는 것 자체가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이해가 미흡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미 학계에서 제기되었지만, 그의 연구의 의의는 일본 학계의 ‘한반도 남부 지배설’을 『일본서기』를 통해 비판한 것이고, 그 한계는 『일본서기』의 ‘임나’ 관련 기록들에 백제의 가야 인식이 반영되었을 가능성을 간과한 것이다.
사이비 역사가들은 식민사관이 내재된 하나의 학설이 국내 학계를 지배하고 있다고 말하였지만,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임나일본부’와 관련된 연구를 살펴보면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도 많은 연구자들이 고대 한일관계의 실상을 규명하기 위해 ‘임나일본부’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연구들을 정확하게 소개하지도 않은 채 실상을 왜곡하는 것은 선입견 혹은 공명심에 사로잡혀 성급한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결코 학술적인 범주의 ‘연구’라고 지칭할 수 없다.
오늘날 학계에서 ‘임나일본부’ 문제는 단지 임나일본부설을 극복하기 위해 연구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왜인들이 어떻게 한반도에 존재하게 되었는지에 관심을 갖는 가운데, 백제의 입장에서 그리고 가야 제국의 입장에서 이를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즉, ‘임나일본부’ 문제는 6세기 안라를 중심으로 한 대외관계 기사와 더불어 한반도 남부에서의 제세력들 간의 이해관계를 설명할 수 있는 주요 연구 쟁점이다. 특히 가야사 연구에서는 신라와 백제의 가야 진출에 대응하여 가야 제국이 존립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였는지를 그려낼 수 있게 되었다. 『일본서기』의 기록만이 아니라 고고자료를 통해서도 가야 제국과 야마토 정권 및 일본열도의 여러 세력들의 관계를 연구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임나일본부’라는 부정적 용어에서 벗어나 새로운 고대 한일관계상이 제시될 것으로 기대된다.
< 참고문헌 >
연민수, 『고대 한일관계사』, 혜안, 1998.
연민수, 『古代韓日交流史』, 혜안, 2003.
김현구,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한일분쟁의 영원한 불씨를 넘어서』, 창비, 2010.
이덕일, 『우리 안의 식민사관』, 만권당, 2014.
이덕일, 『매국의 역사학, 어디까지 왔나』, 만권당, 2015.
김현구, 「‘任那日本府’ 연구의 현황과 문제점」, 『한국사시민강좌』 11, 1992.
이영식, 「‘임나일본부’를 재해석한다」, 『역사비평』 26, 1994.
朱甫暾, 「『日本書紀』의 編纂 背景과 任那日本府說의 成立」, 『韓國古代史硏究』 15, 1999.
金泰植, 「고대 한일관계 연구사―任那問題를 중심으로」, 『韓國古代史硏究』 27, 2002.
이연심, 「임나일본부의 성격 재론」, 『지역과 역사』 14, 2004.
이재석, 「소위 임나 문제의 과거와 현재―문헌사의 입장에서」, 『역사학연구』 23, 2004.
나행주, 「6세기 한일관계의 연구사적 검토」, 『임나 문제와 한일관계』, 景仁文化社, 2005.
연민수, 「임나일본부」, 『한국고대사 연구의 새 동향』, 서경문화사, 2007.
정효운, 「중간자적 존재로서의 ‘임나일본부’」, 『동북아 문화연구』 제13집, 2007.
中野高行, 「『日本書紀』에 있어서의 「任那日本府」像」, 『新羅史學報』 10, 2007.
백승충, 「‘임나일본부’의 용례와 범주」, 『지역과 역사』 24, 2009.
김태식, 「임나일본부설의 흐름과 쟁점」, 『한일 역사의 쟁점 2010 (1) 하나의 역사, 두 가지 생각』, 경인문화사, 2010.
백승충, 「‘任那日本府’의 파견 주체 재론―百濟 및 諸倭 파견설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중심으로」, 『한국민족문화』 37, 2010.
남재우, 「식민사관에 의한 가야사 연구와 그 극복」, 『한국고대사연구』 61, 2011.
이주헌, 「가야 지역 왜계고분 피장자와 임나일본부」, 『지역과 역사』 35, 2014.
백승옥, 「‘任那日本府’의 所在와 등장배경」, 『지역과 역사』 36, 2015.
이연심, 「한일 양국의 ‘임나일본부’를 바라보는 시각 변화 추이」, 『한국민족문화』 57, 2015.
역사비평 2016년 여름호(통권 제11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