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나일본부’ 연구와 식민주의 역사관 1
관리자 2016-05-26 21:00 2719
‘임나일본부’ 연구와 식민주의 역사관 1
신가영(연세대 박사과정)
임나일본부설 법정에 서다
최근 임나일본부설의 허구를 비판해온 한 연구자를 ‘식민사학자’라 규정했던 사이비 역사가가 명예훼손 혐의로 법원에서 유죄를 선고받았다. 재판 결과에 반발하는 측에서는 “임나일본부설을 학자가 더 이상 비판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이제는 누가 임나일본부설을 비판할 수 있겠느냐”면서, “식민사관을 비판하면 감옥에 가야 한다”는 식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여전히 이들은 기존 학계에 대한 강한 불신을 거두지 않고 있고, 피해의식마저 느끼고 있는 듯하다. 학문적 논쟁으로 인하여 법정 소송에 휘말리는 것은 결코 학문 연구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은 동의한다. 다만 이들의 주장이 과연 학문적 차원에서 제기된 임나일본부설의 정당한 비판인지 여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오마이뉴스』 2016년 2월 23일
사이비 역사가의 주장을 보면 김현구의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창비, 2010)는 ‘임나일본부’가 실제로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주장을 담고 있으며, 이는 식민사관을 좇는 국내 학계의 문제라고 하였다(이덕일, 『우리 안의 식민사관』, 만권당, 2014; 『매국의 역사학, 어디까지 왔나』, 만권당, 2015). 그가 언급한 김현구 연구의 문제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한반도 남부에는 실제로 임나일본부가 있었다. ② 그런데 임나일본부는 일본의 야마토 정권이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백제가 지배했다. ③ 백제를 지배하는 것은 일본의 야마토 정권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김현구가 임나일본부설을 정립한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의 견해를 그대로 좇아 야마토 정권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이 사실이라고 주장하였다고 강하게 비난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는 최재석의 연구를 주로 인용하고 있으며, 김현구가 『일본서기』의 시각으로 『일본서기』만을 활용하고 있는 것도 비판하였다.
여기서 더 나아가 “가야를 임나로 둔갑시켜(가야=임나) 고대 야마토 왜(倭)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변종인 이른바 ‘한반도 남부 경영설’을 제기하면서 임나일본부가 이 땅에 부활했다. (…) 김현구와 같은 역사관을 가져야 성공한 것으로 생각한 젊은 학자들이 ‘가야=임나’라는 김현구의 논리에 대거 동조하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사료적 근거가 전혀 없는 ‘가야=임나’라는 논리는 그런 과정을 거쳐서 고대사학계의 정설이 되다시피 하였다”고 말하면서 한반도 남부를 일본사에 넘겨주는 매국행위를 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사이비 역사가들은 식민사학에는 학문의 자유가 없으며, 일체의 이론(異論)을 허용하면 안 되는 것이며, 단 하나의 학설만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일까. 임나일본부설을 비판한 여러 학자 중 단 한 사람인 김현구만을 비판하고, 그의 연구에 식민사관이 내재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일까.
하지만 김현구의 ‘임나일본부’ 연구는 ‘한반도 남부 경영설’, 즉 왜의 한반도 남부 지배를 비판하는 것이 요점이다. 왜의 지배를 인정하는 서술은 그 어디에서도 살펴볼 수 없다. 김현구는 『일본서기』 기록의 비판적 활용을 통해 일본 학계에서 제기된 임나일본부설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또한 『일본서기』에만 기록된 ‘임나일본부’ 관련 기사의 대부분은 가야와 왜의 관계 속에서 파악할 것이 아니라 백제와 가야의 관계에서 파악해야 함을 강조한다. 그렇기 때문에 ‘임나일본부’라는 용어 자체에 문제가 있으며, ‘백제의 임나경영’이 보다 적절한 표현이라고 주장한다. 결국 왜가 아닌 백제가 주체였음을 강조한 것이다.
그렇다면 사이비 역사가들의 김현구에 대한 문제제기가 타당한 것이었는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게다가 김현구의 연구를 근거로 국내 고대사학계의 연구에 식민사관이 내재되었다고 매도하는 것 역시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학계의 연구를 제대로 이해하고 비판의 근거를 충분히 제시하면서 합리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 ‘임나일본부’ 연구에서 김현구의 연구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면밀히 파악하지 못한 결과가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고대 한일관계사, 특히 가야사 연구에서 식민주의 역사관의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지 못한 숙제로 남아 있다. 왜의 통치기관이 가야 지역에 있었다고 표방되지는 않지만, 왜가 가야를 비롯한 한반도 남부 지역에 대해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는 견해는 여전히 일본 학계에서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한반도 서남부 일대에서 전방후원분이 발굴되면서 이런 연구 경향이 여전히 불식되지 않았다는 점을 우려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다양한 연구방법을 통해 ‘임나일본부’ 문제에 접근하고 있는 국내 학계를 식민사관이 내재된 하나의 학설이 지배하고 있다는 일방적인 주장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무엇보다도 ‘임나일본부’를 여전히 ‘조선총독부’와 같은 성격으로 이해하는 가운데, 국내 학계의 연구를 식민주의 역사관이라는 프레임 속에 가두려는 움직임이 과연 진정한 학문적 발전을 위한 문제제기인지 의심스럽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침략과 저항의 이중주
진구황후의 신라정벌 상상도
한편 1882년 참모본부에서 편찬된 「임나고(任那考)」도 『일본서기』의 기록을 근거로 가야 지역에 일본부를 설치하여 한반도 제국을 통제했다고 기술했다. 이후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 이마니시 류(今西龍), 아유가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 등은 일본의 ‘임나’ 지배를 전제하고 ‘임나’ 관계의 지명을 연구하기도 했다. 이처럼 일제는 한국 침략과 식민지배를 역사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식민주의 역사학을 만들어냈고, 그중 가장 많이 연구된 분야 중 하나가 바로 임나일본부설이었던 것이다.
쓰에마스의 [임나흥망사] 쓰에마스 아스카즈
임나일본부설이란 왜(倭, 고대 일본의 야마토 정권)가 4세기 중엽 가야 지역을 정벌해 ‘임나일본부’라는 통치기관을 설치하고 가야를 비롯한 백제, 신라 등 한반도 남부 지역을 200여 년간 지배 또는 통제했다는 주장이다. 스에마쓰에 의해 정리되어 체계화되었다(末松保和, 『任那興亡史』, 大八州出版, 1949). 통치·지배기관으로서 ‘임나일본부’를 강조할 때는 ‘출선기관설(出先機關說)’, 왜의 한반도 남부 지배에 강조를 둘 때에는 ‘남선경영설(南鮮經營說)’이라고도 불렸다. 『일본서기』의 ‘임나’ 관련 기록 외에도 「광개토왕비」의 신묘년 기사와 영락 10년조, 『송서』 왜국전의 왜왕의 작호, 칠지도 명문 등을 임나일본부설을 실증하는 사료로 자의적으로 해석·활용하였다. 문헌고증이라는 이름 아래 사료를 왜곡하여 임나일본부설을 기정사실화하였던 것이다. 이는 한국사의 역사적 전개가 고대부터 외세의 간섭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타율성론에 입각한 대표적인 연구 사례였다.
스에마쓰의 임나일본부설은 당시 일본의 모든 역사 교과서, 개설서, 전문서적 등에 주요 학설로 소개되었는데, 1960년대 북한 김석형의 ‘삼한 삼국의 일본열도 내 분국설’(김석형, 「삼한 삼국의 일본 렬도내 분국(分國)들에 대하여」, 『력사과학』 1963-1, 1963; 『초기 조일관계 연구』, 사회과학원 출판사, 1966)이 제기된 이후 전환점을 맞게 된다. 김석형은 『일본서기』에 기록된 고구려·백제·신라·임나는 한반도인이 일본열도에 세운 분국(分國)을 가리키며, 임나일본부 역시 일본열도에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김석형의 ‘분국설’ 제기는 사료 해석의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연구자들이 임나일본부설의 문제점을 인지하고 재검토할 계기를 만들었다. 이후 일본학계에서는 왜의 임나 지배보다는 그 지배기구인 ‘임나일본부’ 문제에 관심이 모아지기 시작하였다. 물론 여전히 왜가 가야 지역에 직·간접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는 견해들이 제기되었다. 가야를 야마토 정권의 조공국으로 보기도 하였으며, 왜가 가야에 정치·군사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거나 가야 지역을 거점으로 고구려나 신라에 대항하였다고 파악하기도 하였다.
한편 해방 이후 한국사 연구의 주도권을 잡게 된 국내 학계에서는 식민주의 역사학을 비판하고 극복하기 위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당연히 임나일본부설에 대해서도 『일본서기』와 함께 그 근거로 제시된 모든 사료 비판을 통해 그 허구성을 지적하였다. 특히 가야 지역을 중심으로 한반도 남부의 여러 세력과 왜의 관계에 대해 다양한 시각에서 분석이 이루어졌다.
국내 학계에서 임나일본부설 비판에 첫 포문을 연 이는 천관우이다. 천관우는 『일본서기』를 비판적으로 활용하여 가야사의 복원을 적극 시도하였다. 그는 ‘임나일본부’ 관련 사료는 백제 유민들이 남긴 것으로, 백제가 가야를 정벌·지배했던 기록을 후대 『일본서기』 편찬자들이 조작하여 마치 고대 일본인들이 ‘임나’를 지배했던 것처럼 왜곡했다고 파악하였다. 결론적으로 ‘임나일본부’는 백제의 ‘군사령부’ 같은 성격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千寬宇, 「復元加耶史(中)」, 『文學과知性』 29, 1977; 『加耶史硏究』, 一潮閣, 1991).
김현구는 천관우의 견해에 큰 영향을 받았다. 그는 ‘왜의 가야 지배’ 자체를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김현구의 연구는 일본 극우파 시각에 동조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천관우의 견해를 구체화시킨 것이다. 그는 ‘임나일본부’는 백제가 가야를 통치하기 위해 설치한 기관이었다는 천관우의 견해를 수용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가야 지역에서 활동한 왜인들을 백제가 고용한 존재로 파악했다. 즉, 백제가 왜군을 용병으로 고용해 가야 지역에 주둔시키고, 그곳에 왜인 계통의 백제 관료를 파견하였다고 이해하였다. 고대 한일관계가 가야가 아닌 백제와 왜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그 관계는 특수한 용병관계였다고 생각한 것이다(金鉉球, 『大和政權の對外關係硏究』, 吉川弘文館, 1985; 『任那日本府硏究: 韓半島南部經營論批判』, 一潮閣, 1993).
스에마쓰에 의해 정립된 전통적인 임나일본부설은 더 이상 주장되기는 어렵다. 특히 1980년대 이후 가야 지역에 대한 광범위한 발굴조사에 의해 가야 제국의 독자성을 보여주는 유물이 발견됨에 따라 가야 제국과 고대 일본의 관계도 과거와 달리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가야 지역을 비롯한 남해안 일대에서 왜계 유적·유물이 출토되기도 했지만, 이는 지배-복속의 근거라기보다는 당시 고대 한일 간의 활발한 교류를 보여주는 자료로서 이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