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낙랑군(樂浪郡) 연구 2
관리자 2015-12-17 15:48 3246
오늘날의 낙랑군(樂浪郡) 연구 2
안정준(연세대)
Ⅲ. 해방 이후의 연구
우리 학계가 주도하게 된 해방 이후의 낙랑군 연구는 1920년대에 일단락된 위치 문제가 아닌, 낙랑군의 지배구조(지배층과 피지배층), 낙랑군의 성격(군현통치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졌는지) 문제로 심화되어갔다.1) 우리 학계가 이러한 문제에 천착하게 된 데에는 일본학계의 연구에 대응한다는 취지가 강했다. 따라서 이 연구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 1960년대까지 진행된 일본학계의 낙랑군 연구에 대해 먼저 간략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본인 연구자들은 1945년 이후에는 더 이상 평양 지역의 낙랑군 유적에 직접 접근하거나 발굴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기존에 발견된 고고자료(보고서)의 분석을 중심으로 낙랑군의 지배구조를 밝히는데 주력했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그들이 내린 결론은, 낙랑군 지배층은 중국인 즉 한족(漢族)이며, 원래 그 지역에 오랫동안 거주했던 고조선 계통의 주민은 그들의 지배를 받는 피지배계층이라는 것이었다.
<표 1> 미카미 쓰기오가 주장했던 낙랑군의 주민 지배 방식
지배층 |
중국인(한족) |
피지배층 |
고조선계(토착민) |
즉 중국인들이 낙랑군의 설치 이후 귀틀무덤․벽돌무덤 등 매우 선진적인 고분을 조영하고 그 내부에 화려한 고급 유물들을 부장할 동안, 우리 고조선계 토착민은 커다란 돌을 덧대어 만든 고인돌을 조영하고, 그 내부에 돌칼 등의 석기류나 주로 부장하는 매우 후진적인 문화양상을 보였다는 것이다.3)
<그림 4> 미카미 쓰기오가 주장했던 낙랑군의 중국인․토착민 무덤
이러한 미카미 쓰기오의 견해는 일제시기 식민사관(정체성론․타율성론)의 연장선상에서 제기된 것이었다. 즉 고조선의 멸망 이후 새롭게 들어온 중국인들과 그 이전에 고조선땅으로 이주해왔던 일부 중국인들이 토착 원주민을 ‘종족적’으로 지배했고, 결과적으로 고대 한반도인들은 자기사회의 발전 동력을 외부(중국)에서 구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상을 그린 것이었다.
중국왕조의 지배하에 중국인들이 낙랑군에서 지배층으로 군림하고, 고조선계 토착민은 그 예하에서 지배를 당하고 살았다는 일본측의 주장은 사실일까. 이에 대해 한국학자들은 ‘그런 강압적인 지배가 이루어졌다면 과연 낙랑군이 한반도에 420여 년간이나 존속할 수 있었겠는가’하는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던졌다.4)
본래 낙랑군은 설치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폐지되었던 다른 군현들(임둔군, 진번군, 현도군)과는 달리 평안도 일대를 중심으로 기원전 108년부터 기원후 313년까지 약 420여 년간 유지되었다. 그 기간 동안 중원에서는 두 차례 이상 왕조가 바뀌었고, 왕조 교체기에 격심한 정치․사회적 혼란을 겪기도 했다. 이러한 혼란의 와중에 가장 변경에 있던 낙랑군은 중원으로부터의 군사․경제적 지원이 끊기는 상황에 자주 직면하기도 했다. 게다가 낙랑군은 애초에 중국으로부터의 대규모 주민(한족) 이주가 이루어진 적이 없었다. 즉 낙랑군 지역에는 중국인들이 소수였고 토착주민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여러 차례의 정치적 어려움 속에서, 그리고 낙랑군 주민의 절대 다수가 토착 원주민으로 구성된 상황에서, 이들의 협력과 참여 없이 군현이 장기간 존속할 수 있었을까. 미카미 쓰기오의 견해처럼 중국인들이 옛 고조선의 중심지역에 들어와 다수의 토착민들을 피지배층으로 두는 강압적인 통치를 했다면, 과연 낙랑군이 4세기 동안이나 안정적으로 그 지역을 통치할 수 있었을까.
당시 중국왕조의 통치자들은 다른 변경 지역의 통치를 통해서 현지 원주민을 배제한 일방적이고 강압적인 지배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고조선은 한나라 군대의 공격에 의해 중앙정부가 소멸된 것은 사실이지만, 사회 기반이 철저히 파괴되거나 그곳 유력자들이 대대적으로 외부로 옮겨진 것이 아니었다. 즉 고조선계 토착주민의 존재를 완전히 배제한 가운데 그 지역을 장기간 통치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던 것이다.
또한 낙랑군 일대의 고고자료들이 갖는 중국 문화적 특성만으로 그 지역 지배층이 모두 중국인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우리가 현재 고고학 자료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낙랑 지배층 고분의 무덤 형태와 부장품에서 나타나는 문화적 양상일 뿐, 그 묘주들의 종족적 DNA를 분석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토착 원주민 유력자가 오랜 기간동안 중국 문화에 익숙해지면서 점차 중국인들이 주로 사용했던 물품을 사용하거나 고분 조영 방식도 중국식으로 바꾸어 갔을 가능성은 없을까.
이러한 문제의식에 근거하여 한국 연구자들은 낙랑군의 중국인(한족)과 토착 원주민을 서로 지배-피지배라는 이분법적인 대립구도로 바라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를 구체적으로 밝히기 위해서 낙랑군의 지배구조와 군현지배의 성격 문제를 본격적으로 재검토하게 되었다.
Ⅳ. 고고자료 발굴을 통한 연구의 진전
일본의 낙랑군 연구가 논파된 주된 계기는 역시 해방 이후 고고자료의 발굴을 통해서였다. 일본인들이 낙랑군 내 고조선계 토착민의 무덤이라고 주장했던 고인돌은 한국학계의 지속적인 발굴조사 결과 기원전 3세기 이전까지만 만들어진 것으로 드러났다. 낙랑군이 기원전 2세기 말(B.C.108년)에 설치되었음을 감안한다면, 이는 결코 낙랑군 시기의 무덤일 수 없는 것이다.
또한 해방 이후 북한 지역에서의 꾸준한 고고자료 발굴로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을 중심으로 약 2,600여 기의 낙랑 고분들이 발굴되었고, 이 가운데 낙랑군 초기부터 기원 전후시기까지 ‘나무곽 무덤’들이 다수 조영되었음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그림 5> 낙랑 고분의 시기별 변천
<그림6 > 기원전 1세기대 나무곽 무덤의 유물
그런데 낙랑군의 지배층이 조영했을 이 무덤들에서 놀라운 유물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고조선계 토착민의 대표적인 문화인 세형동검(한국식동검)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토착민의 전유물들이 낙랑군 지배층의 무덤 내에서 다수 출토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곧 고조선 때부터 이 지역에 오랫동안 살아온 토착민이 낙랑군에서도 줄곧 지배층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컨대 앞서 소개했던 「초원 4년 호구부」(낙랑군의 호구조사 공문서)는 군현에서 행정직을 담당했던 인물의 부장품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무덤(정백동 364호분) 내에서도 세형동검 계통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또 낙랑군의 25현 가운데 하나인 부조현의 현장(夫租長)을 지냈던 고상현이라는 인물의 무덤에서도 세형동검이 발견되었다. 이 사례들은 세형동검을 부장했던 고조선 계통의 토착민이 군현에서 호구조사 등 주요 행정업무를 담당하거나, 혹은 현장과 같은 고위관직을 역임했음을 뒷받침한다.
<그림 7> 낙랑군 현별 구획도
한편 고조선의 멸망 이후에도 이 지역의 토착사회 구성이 붕괴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근거도 나타난다. 보통 중국 한대(漢代)의 군현들은 각 현들이 대략 1만호 정도의 호구수를 기준으로 고르게 나타나는 반면에, 낙랑군의 경우 25현의 각 현별 호구수가 극심한 격차를 보이고 있다[조선현: 9678호, 점제현:1039호, 제해현: 173호(초원 4년 호구부 기준)].
이 역시 연구자들에 의해 그 원인이 밝혀졌다. 낙랑군 산하의 25개현의 행정구역은 중국 왕조의 다른 군현들처럼 호구수(1만호 기준)와 면적에 따라 획일적으로 구획된 것이 아니라, 종래 토착세력들의 영역과 경계를 따라서 구획된 것이다. 즉 한나라는 고조선 시기 이래의 토착세력들이 원래 거주했던 지역과 사회 구성 형태를 깨지 않고 대부분 그대로 인정해주었고, 그 과정에서 현의 규모와 호구수가 위와 같이 불규칙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곧 낙랑군의 설치 당시에도 엄연히 유지되었던 고조선계 토착민 사회의 모습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5)
그렇다면 이 토착민의 무덤에 중국제 물건들이 함께 부장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군현 설치 이후에 중국과의 통교가 잦아지면서 이 지역에 들어온 중국제품, 그리고 낙랑군 내에서 제작된 중국식 물건들이었다. 당시 사회․경제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던 토착민이 중국제 고급물건들을 일상에서 사용하고 이를 무덤에 위신재로서 함께 부장했던 것이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과거에 부유층이 값비싼 미국제나 일본제 수입품들을 구입해 사용하고, 이를 자기 지위를 내보이는 수단으로서 여겼던 것과 큰 차이가 없다. 낙랑군 시기의 ‘명품’은 당시 선진 지역이었던 ‘중국제’였던 셈이다.
<그림 8> 낙랑군의 지배층 구성
요컨대 고조선이 멸망한 이후 그 지역의 토착세력들은 흩어지거나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중국왕조는 다수의 토착민 사회가 온존한 옛고조선 지역에서 이들의 협력과 도움 없이는 군현의 장기적인 운영이 불가능하였다. 이로 인해 낙랑군의 주요 지배층 가운데 상당수는 토착민으로 구성되었으며, 낙랑군의 지배층 유적은 고조선계 세형동검 문화의 기반 위에 중국 문물이 결합된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고고자료를 기반으로 한 한국학계의 연구로 인해 낙랑군이 중국인에 의해 운영된 중국인 사회라는 오랜 통념은 깨졌다. 이와 더불어 지배층은 중국인이요, 피지배층은 토착민이라는 일본학계의 이원적 종족지배론도 함께 붕괴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중국 군현이라는 외형과 그 지역에 파견된 일부 중국인 관리들의 존재만으로, 낙랑군 역사를 ‘민족’ 대 ‘민족’의 대립구도로 이해하고, 심지어 근대 이후의 민족적 자긍심이나 영토 관념까지 투영시키는 것은 당시 시대상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Ⅴ. 낙랑군 연구와 관련한 ‘선동’과 문제점
일제 관학자들은 고조선 멸망 이후 설치된 한사군(漢四郡)이라는 역사적 실체를 근대적 시각에 입각해 식민지로 성격을 규정하고, 이를 타율성(他律性)론의 정립 차원에서 적극 활용하였다. 당시 신채호 등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일제의 식민지 논리 자체를 부정하기 보다는 한사군의 설치 자체를 부정하거나 그 위치를 한반도에 두어선 안된다는 입장에서 연구를 진행하였다. 그러나 지금 현재 우리 학계는 일제의 식민사관 논리와 타율성․정체성론 하의 한국사 인식이 갖는 문제점을 전근대사 전반에 걸쳐 이론적으로 논박하였기 때문에 굳이 한사군의 위치 자체를 두고 ‘금기’를 둘 필요가 없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대로 학계의 낙랑군 연구가 그 문제의식을 심화하여 지금에 이르는 동안, 소위 ‘애국사학’을 한다는 사이비 역사가들은 여전히 낙랑군의 위치 문제에만 천착하고 있다. 이것은 낙랑군을 근대적 식민지로 규정하며, 민족 대 민족의 대립구도로 파악했던 과거 일제 식민사관의 논리적 틀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심지어 2천여 년 전 낙랑군의 존치 문제를 현대 국가의 영토와 등치시키는 중국 동북공정의 논리구조가 어떤 문제를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예컨대 사이비 역사가들이 주장하는 바대로 단순히 낙랑군이 평양 일대에 비정되는 것 자체가 일제 식민사관과 중국 동북공정을 뒷받침하는 것이라고 가정해보자. 그 경우 중국 요령지역에서 관련 유적․유물들이 다량 발견되어서 낙랑군이 중국에 존재했다는 것이 후대에라도 새롭게 증명이 된다면 다행이겠지만, 지금처럼 북한 지역의 발굴성과들이 지속적으로 보고되어서 낙랑군이 한반도에 존재했던 것이 더욱 분명해질 때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그때 가서는 식민사관과 동북공정 논리가 전부 맞다고 인정할 것인가.
낙랑군의 위치 문제만을 기준으로 한 이념적 ‘선긋기’는 결국 식민사관과 동북공정의 논리적 함정에 빠지고, 연구 인식수준마저 크게 퇴보시킬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혹자는 낙랑군을 요령지역으로 기록한 후대의 몇몇 문헌자료들만을 근거로 삼아 우리 역사교과서에 ‘요령설’을 공식입장으로 확정하는 것이 ‘애국’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렇게 해서 대한민국 내에서는 일종의 ‘애국’이 될런지는 모르겠지만, 이 문제를 함께 연구하고 있는 외국학계에서는 영원히 웃음거리 밖에 되지 못한다.
해방 이후에 지속되었던 일본학계의 낙랑군 연구(이원적 종족지배론)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발견된 자료들에 대한 객관적이고 치밀한 검토가 필요했던 것이지, 편협한 애국심의 발로에서 자기주장에 유리한 자료들만을 취하고 나머지는 외면해 버리는 ‘꼼수’가 아니었다. 미카미 쓰기오의 낙랑군 연구가 이제 일본학계 내에서도 더 이상 인정받지 못하게 된 것은 바로 해방 이후의 발굴조사와 우리학계의 연구 성과에 기인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사이비 역사가들은 기존에 발굴된 북한 지역의 낙랑군 관련 고고자료들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 필자가 시중의 책들을 아무리 뒤져봐도 고고자료에 대한 뚜렷한 분석이 이루어진 글을 찾아볼 수 없었다. 해방 이후의 고고자료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조차 않거나, 무책임한 ‘조작론’, ‘음모론’을 통해 독자의 감성에만 호소하고 있는 경우들이 많다. 그동안 낙랑군의 평양 일대 비정 등을 근거로 ‘동북아역사지도’ 사업의 폐지를 줄기차게 주장해온 이덕일 소장(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은 2015년 11월 학자들과 국회의원들이 모인 토론회장에서 아래와 같이 주장하였다.
“북한이 왜 느닷없이 낙랑목간(초원 4년 호구부)을 공개했겠느냐. 북한 입장에서는 남한에서 식민사학이 계속 유지되는 게 좋은 거에요. 제가 생각할 때는 만약 대한민국이 우리(이덕일류) 같은 역사학으로 바뀌게 되면 자기들(북한)이 우위로 주장할 수 있는 절대품목(한국사) 하나가 없어지게 된다는 거예요.”6)
이 토론회 자리에서 이덕일 소장은 오로지 남북한의 대립구도에 근거하는 가운데, ‘초원 4년 호구부’라는 자료를 대한민국 역사학을 파괴하려는 북한의 ‘음모’, 혹은 그 결과물이라고 주장했다. 문제는 국회의원들과 전공학자들이 다수 모인 자리에서 저런 엄청난 주장을 하면서도 정작 근거는 아무것도 제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처럼 사이비 역사가들은 낙랑군 고고자료와 관련 연구들에 대해 제대로 된 학문적 비판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 만약 이 분야에 대한 학계의 연구방향이 문제가 있다면 학술논문을 통해 정식학회에서 발표를 하고 본인 주장에 대한 연구자들의 동조를 확보할 일이지, 왜 국회와 언론을 통한 여론몰이에만 주력하는가. 만약 정치권과 여론을 통한 압박으로 학자들의 문제의식과 결론이 갑자기 뒤바뀐다면 그것이야말로 학계가 건강하지 못하다는 근거가 아닌가.
사이비 역사가들은 전공자들의 동의를 얻지 못하자 현재 이루어지는 낙랑군 연구를 일제 식민사관-이병도-학계로 이어지는 가공의 ‘식민사관 프레임’에 가두어 불신의 늪에 빠트리기 위한 대중선동을 지속하고 있다. 현재 학계의 한사군 위치 비정이 이병도의 연구에만 갇힌 결과라는 주장 역시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다. 앞서 설명한대로 낙랑군의 중심지가 평양이고, 군치가 대동강 남안의 낙랑토성이라는 사실은 1920년대 중반에 이미 해외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확정된 상태였으며, 이병도가 이러한 학설을 집대성한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나온 한사군 관련 연구 논문은 1,000편이 넘는데, 이 가운데 이병도가 쓴 논문은 채 10여 편이 되지 않는다. 이병도는 고고자료만을 근거로 낙랑군 25현의 구체적인 위치를 일일이 비정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주로 문헌을 통한 최대한의 연구를 시도해보았던 것이지, 연구사적으로 낙랑군의 한반도 비정을 결정지은 사람이 아니다. 당장 이병도의 저작들을 모두 제외하고 다시 연구를 진행한다고 해도 낙랑군이 평양 일대를 중심으로 존재했다는 통설은 흔들리지 않는다. 낙랑군 이외에 이병도가 기존에 주장했던 현도군과 임둔군의 위치에 대한 연구는 이제 더 이상 학계의 통설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많은 후학들이 이를 비판하여 다른 위치로 비정하고 있는 것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사이비 역사가들은 계속해서 이병도가 낙랑군=평양설을 정통으로 계승한 학자이며, 고대사학계가 그의 학설을 중심으로 한 폐쇄적인 구조 속에서 결론을 내고 있다는 설을 유포하는 실정이니, 이병도의 연구사적 위치가 대중들에게 실제 이상으로 부풀려진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학계가 아닌 사이비 역사가들의 ‘공로’라고 할 수 있다. 그 자체가 사실왜곡이요, 이를 근거로 학계를 ‘매국세력’이니 ‘식민사학’이니 하며 매도하는 것 자체가 선동이 아니고 무엇인가. 거짓이 진실처럼 둔갑하고, 진실이 거짓에 가려버리는 비정상적인 사회에서, 순수학문인 역사학조차 누군가에겐 일종의 ‘수단’처럼 인식되는 상황은 아닌지 우려스럽지 않을 수 없다.
학문의 영역에 접근하는 것은 이제 누구에게나 그 길이 열려있다. 학자들의 저술은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얼마든지 구해볼 수 있으며, 금석문이나 중국 24사 문헌자료들도 웹에서 쉽게 검색이 가능하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눈앞에 쌓인 정보와 자료의 양이 아니다. 연구하는 사람의 학문을 대하는 진지한 자세, 그리고 자기 스스로의 이념이나 가치관을 객관화하려는 노력, 그 자체가 역사연구의 ‘출발’이자 궁극적인 ‘지향’이라는 점을 결코 망각해선 안될 것이다.
1) 해방 이후의 북한에서는 초기에 높은 수준의 연구가 이루어지기도 했으나, 이후 이 주제가 점차 정치․이념의 도구로 변질되면서 순수한 학술 연구로만 이어지지 못한 측면이 있었다. 해방 이후 북한의 고조선․낙랑군 연구 동향을 정치․사회적 변동과 관련해서 논한 글은 오강원․윤용구, 「북한학계의 고조선․단군 연구동향과 과제」, 북한의 한국사 연구동향(1)-고․중세편-, 국사편찬위원회, 2003, 63~96쪽을 참고하기 바람.
2) 엄밀히 말하면 여기서 언급된 ‘중국인(한족)’은 낙랑군이 설치되기 이전에 이미 고조선에 망명해서 살고 있었던 중국인들, 그리고 낙랑군 설치 이후에 새롭게 중원에서 유입된 중국인들을 포괄한 개념이다.
3) 三上次男, 古代東北アジア史硏究, 吉川弘文館, 1966, 23~82쪽.
4) 孫晉泰, 韓國民族史槪論, 乙酉文化社, 1954, 95~99쪽 ; 金元龍, 「삼국시대의 개시에 대한 일고찰」, 東亞文化 7, 1967 ; 韓國考古學硏究, 一志社, 1967, 525~533쪽.
5) 吳永贊, 「樂浪郡의 土着勢力 再編과 支配構造」, 韓國史論 35, 1996, 31~40쪽 ; 윤용구, 앞의 논문, 2010, 157~162쪽.
6) 한군현 및 패수 위치 비정에 관한 국회토론회(2015.11.16)중 이덕일 소장의 발언 내용[[마방] 한국 상고사-한군현 및 패수 위치 비정에 관한 논의_20151116(https://www.youtube.com/watch?v=NrALsUDAtUM), 1:17:40~1:18:17 부분을 참조].
■ 참고문헌
○ 책
孫晉泰, 韓國民族史槪論, 乙酉文化社, 1954
리순진, 평양일대 락랑무덤에 대한 연구, 사회과학출판사, 1966
金元龍, 韓國考古學硏究, 一志社, 1967
공석구, 高句麗 領域擴張史 硏究, 書景文化社, 1998.
○ 논문
金元龍, 「삼국시대의 개시에 대한 일고찰」, 東亞文化 7, 1967
吳永贊, 「樂浪郡의 土着勢力 再編과 支配構造」, 韓國史論 35, 1996
노태돈, 「고조선 중심지 변천에 대한 연구」, 단군과 고조선사, 사계절, 2000
오강원․윤용구, 「북한학계의 고조선․단군 연구동향과 과제」, 북한의 한국사 연구동향(1)-고․중세편-, 국사편찬위원회, 2003
尹龍九, 「새로 발견된 樂浪木簡」, 韓國古代史硏究 46, 2007
윤용구, 「낙랑군 초기의 군현지배와 호구파악」, 낙랑군 호구부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010
역사비평 2016년 봄호(통권 11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