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낙랑군(樂浪郡) 연구 1
관리자 2015-12-17 15:39 4201
오늘날의 낙랑군(樂浪郡) 연구 1
안정준(연세대)
Ⅰ. 들어가는 말
최근 정치권을 비롯한 사회 일각에서 한국고대사 문제가 큰 이슈가 되고 있다. 2014년 4월 22일, ‘식민사학 해체 운동본부’라는 시민단체는 동북아역사재단에 대한 감사를 청구하였는데, 이유는 국민의 혈세로 운영되는 해당 기관이 일제강점기 식민사관과 중화 패권주의의 논리를 따른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구체적 사례로 든 것 가운데 하나가 ‘낙랑군을 비롯한 중국왕조의 군현들을 한반도에 비정했다’는 사실이었다. 이 문제는 국회의 ‘동북아역사왜곡대책 특별위원회’로 대표되는 정치권 인사들을 통해서도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낙랑군의 위치에 대해서는 기왕에 요령설, 평양설 등 여러 학설들이 있어왔으나, 현재 학계에서는 기원전 108년에 설치된 한(漢) 군현인 낙랑군이 평양 일대를 중심으로 하여 420여 년간 존속했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1) 학계의 다수설이 공공기관에서 편찬되는 지도나 해외학술서에 반영되는 것은 절차상 지극히 당연한 일임에도 불구하고,2) 이것이 학문 외적인 개입에 의해 중단 혹은 폐지되고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전공자들의 학문적 논의는 일부 언론기사와 사이비 역사가들의 논조에 의해 ‘식민사관’이라는 프레임에 가두어진 지 오래다. 학계 대다수 전공자들의 의견이 무시당하고, 정치권과 일부 비전공자들의 주장이 대등하게, 혹은 그 이상 조명되는 이 ‘이상한’ 역사논쟁은 일반대중들이 지니고 있는 민족주의적 감성에 기대어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근대 이후 낙랑군에 대한 이해는 단순히 과거 사실에 대한 객관적 고찰 이상의 의미를 지녀왔다. 2천여 년 전에 설치됐던 일개 군현의 존재가 우리 사회에 이토록 첨예한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은 무엇일까. 이는 낙랑군 문제가 일제시기 이래로 식민사관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주제로서 활용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이를 중국왕조의 식민도시 내지 식민지(植民地) 성격으로 인식하는 대중들이 적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이비 역사가들은 낙랑군의 위치를 한반도 일대로 비정하는 것 자체가 곧 과거 일제의 식민사관 논리에 동조하는 것이라는 지극히 단순한 논리로 학계를 몰아세우고 있다. 이처럼 학술을 가장한 비학술적인 ‘선동’이 횡행하는 현실에서 가장 우선되어야 할 것은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학계의 낙랑군 연구 현황과 그 문제의식을 대중들에게 정확하게 알리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사실 정치권과 일반 대중들에게는 연구자들이 낙랑군을 평양 일대에 비정한다는 사실 자체만 널리 알려져 있을 뿐, 이 군현의 성격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즉 학자들이 해방 이후 전혀 다른 문제의식을 통해 낙랑군 시기를 들여다보고, 새롭게 발굴된 자료를 통해 일제 ‘식민사관’의 논리를 극복하기 위한 치열한 노력을 기울였던 사실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이다.
이 글에서는 비록 한정된 지면이지만, 오늘날 학계가 인식하는 낙랑군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사이비 역사가들의 주장이 갖는 문제점을 하나씩 짚어볼 것이다. 특히 낙랑군 연구의 주도권이 일본으로부터 남․북한 학계로 넘어온 1945년 해방을 기점으로 연구사를 구분하는 가운데, 학계가 인식하는 낙랑군의 실체와 지배구조,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대표적인 근거들을 소개해 볼 것이다. 해방 이전부터 이루어진 낙랑군 논쟁의 전개과정을 바라보면서 현재 우리 사회 내에 잔존해있는 일제 ‘식민사관’의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Ⅱ. 해방 이전의 낙랑군 연구
1945년 8월의 해방 직후 일본인들은 본국으로 쫓겨 갔다. 이후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의 낙랑군 유적지 발굴과 연구의 주도권은 남․북한 연구자들에게 돌아왔다. 따라서 해방이라는 시점은 이후 낙랑군 연구의 목적과 문제의식이 변화했던 큰 전환점이었던 셈이다. 이 해방 직후의 연구사적 변동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그 이전까지의 연구 경과를 대략적이나마 이해할 필요가 있다.
낙랑군의 위치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조선후기 실학자들에 의해 상당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왜란과 호란을 겪은 이후 새로운 역사의식을 고양시키고 실증적 역사지리 연구를 집대성하기 위한 필요성에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졌던 것이다. 특히 우리에게 잘 알려진 한백겸, 정약용, 유득공과 같은 실학자들은 당시까지 전하는 한국과 중국측의 여러 문헌들을 정밀하게 연구하였고, 그 과정에서 한사군에 대한 대부분의 문헌자료들을 수집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우리가 아는 낙랑군 재(在)평양설, 재요동설, 재요서설과 같은 대부분의 학설들이 그 당시에 이미 제기되기도 했던 것이다.
이러한 실학자들의 연구 성과들은 청대(淸代) 역사지리학자인 양수경(楊守敬) 등의 연구를 거쳐 20세기 이후의 일제 관학자 및 민족주의 연구자들의 한사군 연구에까지 계승되었다. 즉 낙랑군이 평양 일대를 중심으로 존재했다는 설 자체는 조선후기 이래로 성립되어 이어져온 하나의 학설이었을 뿐, 이를 근대 일본인들에 의해 최초 창안된 것처럼 언급한 최근의 일부 저작이나 발언들은 기존 연구사에 대한 무지에서 기인했거나 의도적으로 실상을 왜곡한 것에 불과하다.
한편 당시 실학자들이 낙랑군의 위치에 대해 평양설, 요동설, 요서설과 같은 여러 학설들을 견지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한사군의 설치와 변천상을 명료하게 보여주는 문헌기록이 본래 부족한데다, 이를 결정할만한 고고자료의 발굴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후 낙랑군 연구의 진척을 가능하게 한 고고자료의 발굴은 20세기에 접어들어서야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관련 자료들이 묻혀있던 평안도․황해도 일대의 발굴을 처음 주도했던 것은 불행히도 당시 한반도를 강점하고 있던 일본인들이었다.
일제는 1910년대에 사회문화조사사업의 일환으로 총독부 주도의 조선고적조사를 진행하였다. 일본인들은 초기에 고구려 유적에 대한 관심으로 대동강 연안을 조사하던 중 낙랑토성과 그 내부에서 “낙랑예관(樂浪禮官)”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수막새), “낙랑태수장(樂浪太守長)” 봉니3) 등을 발견했다.
<그림 1> 낙랑토성 유적과 유물
※ 출처: 국립중앙박물관편, 낙랑(樂浪), 솔, 2001
이때 발견된 ‘낙랑토성’이 낙랑군의 치소라는 점은 문헌자료를 통해서도 뒷받침된다. 중국 북위(北魏)왕조 때의 학자인 역도원이 저술한 수경주(水經注)에는 아래와 같은 기록이 나타난다.
“그 땅(고조선 수도: 평양)은 지금 고구려국의 수도이다. 내가 고구려 사신(蕃使)에게 물어보니 말하길, 「성은 패수(浿水)의 북쪽에 있다. 그 강은 서쪽으로 흘러 옛 낙랑 조선현을 지나는데, 곧 낙랑군의 치소이다. 한 무제(漢 武帝) 때 두었다」라고 하였다”
<그림 2> 옛 고구려 도성 및 낙랑토성 위치
북위의 역도원(酈道元)은 5세기 말~6세기 초에 활동했던 인물이다. 당시는 고구려는 장수왕․문자명왕의 재위기였고, 수도는 대동강 이북의 대성산성 혹은 안학궁 일대로 비정된다. 이때 역도원과 만난 고구려의 사신은 패수(대동강)의 북쪽에 고구려 수도가 있으며, 이 강은 서쪽으로 흘러 옛 낙랑군의 중심치소였던 (남쪽의) 조선현 지역을 지난다고 언급했던 것이다. 따라서 주변에서 많은 중국계 고분과 유물들이 발견되는 낙랑토성을 낙랑군 조선현에 비정하는 견해는 수경주에 나타난 고구려 사신의 발언과 비교해도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4)
이후 조선총독부 고적조사단의 지속적인 고고자료 발굴을 통해서 1914년에 평안남도 용강군에서 점제현신사비(秥蟬縣神祠碑)가 발견되었고, 1916년 대동군 대동강면에 있던 한(漢)식 고분들에서 각종 부장품들이 다량 출토되는 등의 성과가 있었다. 이러한 고고자료들을 근거로 1920년대 중반에는 낙랑군의 중심지가 평양 일대라는 것이 중국의 고증학자들을 비롯한 대부분의 학자들 사이에서 이미 확고한 통설로 자리잡은 상태였다.
또한 낙랑군․대방군에 대한 고고자료의 발굴은 일제시기에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일제시기에 발굴한 낙랑지역 고분의 수가 70여기에 불과한 반면, 해방 이후 북한에서 발굴한 낙랑고분의 수는 (1990년대 중반까지) 무려 2,600여기에 달한다.5) 현재 우리가 아는 낙랑군 관련 유적의 대다수는 일제시기가 아닌 해방 이후에 발굴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학계에서 가장 주목하는 낙랑 관련 유적 및 유물들 역시 주로 이 시기에 새롭게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된다.
해방 이후에 발굴된 대표적인 관련 유물 가운데는 1990년 7월에 평양 정백동 364호분에서 나온 부장품인 「초원 4년 호구부 목독」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 출처: 윤용구, 「낙랑·대방지역 신발견 문자자료와 연구동향」, 한국고대사연구 57, 2010
이 목독 3점은 중국 전한(前漢) 원제 재위기인 초원(初元) 4년(기원전 45년)6)에 제작된 것으로 낙랑군이 설치된 지 60여 년이 지난 뒤에 작성된 것이다. 이 기록은 낙랑군 예하 25현의 가호(家戶) 및 인구수와 그 전년대비 증감치를 기재한 장부형태이다. 당시 낙랑군에서 세금과 노역을 부과하기 위해서는 군현의 주민 현황(호구수)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했는데, 초원 4년 호구부의 내용은 이를 위한 기초 자료로서의 성격을 띠는 것이다.7) 즉 이 목독자료는 군현의 공문서(公文書) 성격을 띠고 있으며, 기원전 45년 당시에 평양 지역의 낙랑군 내에서 군현지배를 위한 문서행정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근거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낙랑․대방군 지역에서는 이 지역을 지배했던 중국왕조의 연호가 새겨진 물품들이 다수 발견되었다. 예컨대 2세기 말부터 만들어진 황해도․평안도 일대의 벽돌무덤 내에서는 글자가 새겨진 벽돌들이 발견되었다.8) 여기에는 당시 낙랑군과 대방군을 지배하던 왕조(후한․위․진)의 연호가 시기별로 정확하게 표기되었으며, 왕씨(王氏), 한씨(韓氏) 등 중국인 혹은 중국화한 토착민의 성씨도 기록되었다.9) 또한 이 벽돌에는 낙랑군 산하 ‘장잠현의 현장(長岑長)’, ‘오관연(五官掾)’과 같은 군현의 관리명도 기재되어 있어서 이 무덤에 중국 군현의 관리를 비롯한 지배층이 묻혔음을 알 수 있다.10)
일제시기 뿐만 아니라 해방 이후에도 중국 군현 지배와 관련한 문자들이 벽돌무덤 내에서 지속적으로 발견되었으며,11) 기타 낙랑군 시기의 고분 내에서 중국왕조의 연호가 새겨진 칠곽이나 양산 등의 물건들도 발견되고 있는 실정이다.12) 이러한 근거들을 고려할 때 일부 사이비 역사가들의 저서에서 현재 학계가 일제시기의 총독부 주도로 발굴한 자료들만을 근거로 낙랑군의 위치를 확정했다는 주장은 명백한 거짓이다. 또한 일제시기 고고자료들 가운데 출처가 의심스러운 일부 자료를 제시하면서 고고자료 자체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려는 시도들은 현재 학계가 제시하고 있는 논거들을 비판하기 어려운 궁색함의 반영일 뿐이다.
일부 사이비 역사가들은 역사 연구상에서 1차 사료는 문헌자료로 두는 것이 원칙이며, 낙랑군의 위치 문제를 파악하는데도 고고 유물․유적보다 문헌사료를 우선시해야한다는 논리를 펴기도 한다. 하지만 역사연구상에 그런 공식은 없다. 복잡한 인간사를 그러한 단순불변의 공식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발상부터가 잘못된 것이다.
단적인 예로 우리가 중국 길림성 집안(集安) 지역을 고구려의 수도(국내성)로 비정하는 논거들만 보아도 이러한 발상의 허위가 너무나 분명해진다. 현재까지 집안시 일대에서 발견되는 고구려 계통 적석총들, 그리고 결정적으로 광개토왕비가 지난 1600여 년간 왕릉 주변에 우뚝 서있는 것이 수도를 입증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러한 고고 유적․유물들을 1차적인 판단 근거로 삼는 가운데, 고구려 국내성에 관한 여러 문헌사료들을 이와 더불어 해석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인 것이다.
낙랑군의 위치 문제도 마찬가지다. 현재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에서 발견되는 수천기의 중국계통 고분들, 그리고 그 고분 내에서 발견된 중국계 인명(人名)과 군현 관리의 명칭 등이 새겨진 수많은 벽돌과 칠기(漆器) 유물들, 그 외에도 점제현 신사비, 봉니(封泥) 등 중국군현 관련 출토품들을 1차적인 기준으로 삼고 낙랑군의 위치를 비정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수순이다. 이러한 자료들을 근거 없는 ‘공식’ 하나로 일거에 부정하고, 자기 논리만을 뒷받침하는 문헌자료만을 제시하는 방식은 의도된 역사왜곡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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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4세기 초반에 한반도의 낙랑군이 고구려에 의해 소멸된 이후, 중국땅으로 넘어간 낙랑군 출신 이주민 집단을 구성원으로 하는 낙랑군[교군(僑郡)]이 중국 왕조들에 의해 설치되기도 했다. 이 글에서는 4세기 이후의 낙랑군(교군)은 논의하지 않는다.
2)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지난 7년 여 동안 추진했던 편찬사업인 「동북아역사지도」를 비롯해 2013년 12월 출간된 영문판 The Han Commanderies in Early Korea History(초기 한국사에서의 한사군)에서는 낙랑군의 위치를 한반도 평양 일대를 중심으로 비정하였다.
3) 봉니(封泥)란 당시 죽간(竹簡)·목간(木簡) 등의 공문서를 봉인하기 위하여 이를 묶은 노끈의 이음매에 점토덩어리를 붙이고 인장을 눌러 찍은 유물을 말한다.
4) 관련 연구는 노태돈, 「고조선 중심지 변천에 대한 연구」, 단군과 고조선사, 사계절, 2000, 43~46쪽을 참조.
5) 리순진, 평양일대 락랑무덤에 대한 연구, 사회과학출판사, 1966.
6) ‘초원(初元)’은 중국 전한(前漢)의 연호이다. 연호란 중국에서 비롯되어 한자(漢字)를 사용하는 아시아의 왕조국가에서 당시 연대를 표시하는 방법이었다.
7) 낙랑군 초원 4년 호구부 목독에 대해서는 尹龍九, 「새로 발견된 樂浪木簡」, 韓國古代史硏究 46, 2007과 윤용구, 「낙랑군 초기의 군현지배와 호구파악」, 낙랑군 호구부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010을 참고.
8) 기본적으로 이 벽돌들은 고분을 이루고 있는 구조물의 일부이기 때문에 타 지역으로부터 이동해온 것으로 보기도 어렵다.
9) 중국왕조에서는 변경 군현의 토착민에게 한식(漢式) 성씨를 사여하는 경우도 있었다.
10) 이 벽돌의 기록들은 공석구, 高句麗 領域擴張史 硏究, 書景文化社, 1998, 78~80쪽에 연대순으로 정리되어 있다.
11) 전주농, 「신천에서 대방군 장잠장 왕경(帶方郡 長岑長 王卿)의 무덤 발견」, 문화유산 1962-3, 1962 ;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편, 「발굴소식: 새날리에서 발견된 벽돌무덤」, 조선고고연구 2003-3, 2003, 34쪽 ; 윤송학, 「황해남도 신천군 새날리 벽돌무덤 발굴보고」, 조선고고연구 2004-4, 2004, 39쪽.
12) 김덕철, 「락랑일대에서 발굴된 귀틀무덤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2001-4, 2001, 34쪽.
<2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