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사군 한반도설’은 식민사학의 산물인가 2
관리자 2015-12-17 15:20 3656
‘한사군 한반도설’은 식민사학의 산물인가 2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박사수료 위가야
조선시대에 나타난 ‘한사군 한반도설’
앞서도 잠깐 언급한 바 있지만, 한사군의 위치를 한반도 안으로 끌어들인 것은 일본인들이 처음이 아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조선군 낙랑현이 고구려의 수도 평양이었다는 중국 사서의 여러 주석서들이 ‘한사군 한반도설’을 처음으로 주장한 연구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토대로 조선 초기 세종실록 지리지와 고려사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서 한사군이 한반도 안에 있었다는 위치 비정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들 지리서는 모두 낙랑군을 평양 일대로, 임둔군을 강릉 일대로 비정했다. ‘한사군 한반도설’의 저작권이 일본인에게 있지 않다는 점은 이들 지리지의 위치 비정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명백해진다. .
한사군의 위치에 대한 이 같은 인식은 16세기 박상의 동국사략으로 이어졌고, 17세기 한백겸이 동국지리지를 저술하는 단계에 이르러서는 본격적인 역사지리학 연구소서의 한사군 위치비정이 이루어졌다. 한백겸은 낙랑군과 임둔군의 중심지인 조선현(朝鮮縣)과 동시현(東暆縣)을 각각 평양과 강릉에서 찾았고, 현도군은 동옥저를 중심으로 한 함경도 지역에 위치했던 것으로 보았다. 또한 그는 종래 그 위치가 미상으로 남겨져 있었던 진번군의 위치를 처음으로 비정했는데, 중심지인 삽현(霅縣)이 춘천의 맥국(貊國)에 위치한 것으로 보고 그 영역이 춘천을 중심으로 황해도 일대를 아울렀다고 하였다.
진번군의 위치를 한반도 안으로 끌어들인 한백겸의 견해는 이른바 ‘진번군재남설’의 효시가 되었다. 하지만 유형원은 동국여지지에서 다른 군들에 대해서는 한백겸의 견해를 대부분 답습하면서도 진번군은 요동 경내에 위치한 것으로 보았으며, 진번군의 영역을 한반도 외부에서 찾는 견해는 이후 18세기로 넘어가면서 유득공, 정약용, 한진서 등에게도 받아들여졌다. 물론 그들 역시 낙랑군과 임둔군, 그리고 처음 설치될 당시의 현도군이 모두 한반도 안쪽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한백겸 등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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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득공 사군지 |
정약용 아방강역고 |
한진서 해동역사續 지리지 |
편찬시기 |
1795년 |
1811년 |
1823년 |
낙랑군 |
한수(한강) 이북에서 관서(평안도)에 이르는 지역 |
평안도와 황해도 |
옛 조선 땅, 임둔과 합친 이후 북쪽으로 압록강, 남쪽으로 한수, 동서쪽은 모두 바다에 접함 |
현도군 |
함경남북도 |
함경도 |
함경도 |
임둔군 |
관동(강원도) 지방 |
경기도 서쪽 교외 |
강릉부를 중심으로 한 대관령 동쪽 지역 |
진번군 |
압록강 밖, 흥경(興京) 지방 |
압록강 이북, 흥경 남쪽 동가강(佟佳江) 좌우 |
흥경 동남쪽 파저강(婆豬江: 동가강과 같음) 좌우 |
유득공·정약용·한진서의 한사군 위치 비정.
진번군만 압록강 이북에 있었던 것으로 보고, 나머지 3군의 위치는 전부 한반도 안에서 찾았다.
해동역사續1 「지리고」1 고금강역도(古今疆域圖) 중 사군의 위치를 표시한 지도.
진번군을 제외한 나머지 3군을 모두 한반도 안에 위치시켰다.
하지만 그들과 달리 낙랑군을 비롯한 한사군이 요동, 나아가 요서 지역에 있었다고 주장한 학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요사 지리지, 그리고 청나라에서 편찬한 지리지 등의 기록에 기반하여 이 같은 주장을 했다. 하지만 요사 등에 오류가 많다는 점은 이미 당시에 정약용과 한진서 등에 의해 비판이 이루어졌다. 유득공은 발해고에서 요사 등을 근거로 발해의 역사지리를 서술했지만, 훗날 이들 서적의 오류를 확인하고 대폭으로 수정을 가한 수정본 발해고(「지리고」의 구성과 내용을 완전히 바꿈)를 저술하기도 했다.
한편 이익과 이만운은 독특한 사료 해석을 근거로 낙랑군이 요동에 있었다는 주장을 펼쳐나갔다. 먼저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낙랑군의 영역이 중심지인 조선현이 있던 요동 지역을 중심으로 한반도에 미쳐 평양 서쪽까지를 포괄했다고 주장했다. 위(魏)나라 장수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범했을 때 현도로부터 나와 낙랑으로부터 물러갔다는 기록을 토대로 현도와 낙랑 두 군이 모두 요동에 있었다고 본 것이다. 이만운은 고구려가 요동 서안평을 침범하여 대방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잡아갔다는 기록을 근거로 낙랑군이 요동에 있었을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정약용과 한진서는 대방령 및 낙랑태수의 처자가 요동에서 동쪽에 있던 낙랑군으로 부임하던 도중에 서안평을 지나다가 고구려 군사에게 붙잡힌 것으로 보는 것이 이치에 합당하다고 반박하였다.
이익의 주장은 당대에 별다른 비판을 받지 않았지만 기록된 정황에 대한 오판에 근거한 것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그가 언급한 사건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천왕 20년조에 기록된 것이다. 사건은 ‘①관구검이 현도(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서쪽으로 옮겨간 현도군, 중국 요령성 무순시)로부터 침입→②고구려군의 패배→③환도성(중국 길림성 집안현)의 함락→④동천왕이 남옥저(함흥)로 도주→⑤유유의 분전으로 전세 반전→⑥위나라 군대가 낙랑(평양 부근)으로부터 물러감’의 순서로 진행되었으므로, 현도로부터 나와서 낙랑으로부터 물러가는 경로는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최근 사이비 역사학에서는 이익의 주장을 낙랑군이 요동에 있었음을 증명하는 결정적 근거로 내세우는 경향이 있는데, 진실은 이처럼 허무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낙랑군이 요동에 있었다는 주장들은 당시 조선의 학자들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었을 사료들, 즉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나오는 삼한의 위치(낙랑군과 대방군이 요동에 있으려면 삼한은 아틀란티스여야 한다), 그리고 위나라 명제(明帝)가 몰래 대방태수와 낙랑태수를 파견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두 군을 평정하였다는 기록을 합리적으로 해석해낼 수 없었다. 낙랑의 위치를 백제의 북쪽, 심지어는 동쪽으로 볼 수도 있게 하는 삼국사기의 여러 기록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역사적 정황에서 돌출된 사료 한 두 개에 의지하여 제기하는 주장들이 설득력을 가지기 어렵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정약용은 문헌에 대한 세밀한 고증을 통해 낙랑군이 한반도 안에 위치했음을 논증했다.
한사군을 한반도, 그리고 요동과 요서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견해들은 조선 후기에 들어와 역사지리학을 연구한 실학자들에 의해 일단의 정리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훗날 한사군의 위치에 대해 추정 가능한 논리가 대부분 조선 후기에 나타났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다양한 관점에서 한사군의 위치에 접근했다. 진번군을 제외한 군현의 위치를 한반도 내부에 비정하는 견해, 즉 ‘한사군 한반도설’은 그 중 하나였다. 유득공, 정약용, 한진서 등에 의해 심화된 이 견해는 일본인 역사학자들이 식민지 한사군의 공간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비판적으로 수용되었다. 따라서 ‘한사군 한반도설’은 처음 한사군의 위치를 한반도 안으로 파악한 중국사서의 주석가들 이래 조선 후기에 역사지리학을 연구한 실학자들, 그리고 일본인 역사학자들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 심화되고 또 그 타당성을 인정받아온 학설일 뿐 일제 식민사학의 산물이라 할 수는 없다.
‘한사군 한반도설=식민사학’이라는 등식이 성립할 수 없다는 데에 대해서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고대사를 고대사로 보지 못하는 사람들
2015년 6월, 국방대학교에서 발간하는 등재학술지 국방연구 제58권 제2호에 「漢나라 군사작전으로 본 위만조선 왕험성 위치 고찰: 북한 급변사태 시 중국의 연고권 개입 명분에 대한 함의」라는 제목의 논문이 게재되었다. 인하대 국제관계연구소 소속 박성용 박사 등이 2년 동안의 연구를 통해 집필한 것이다. 저자들은 이 논문에서 한나라 육군·수군의 합동작전, 보급문제, 출발지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위만조선의 수도 왕험성은 한반도 평양이 아닌 요동반도 또는 하북성에 있었던 것으로 보는게 타당하다고 주장했다.(관련기사 《연합뉴스》 2015년 7월 20일, 〈“위만조선 수도, 한반도에 없었다”<인하대 연구팀>〉)
저자들의 주장이 얼마나 타당한지를 지금 여기서 거론하는 것은 지면(?)과 능력이 허락하지 않는 관계로 다른 전문가들의 지적을 기다리기로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논문을 언급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서술이 사이비 역사학이 왜 그토록 한사군의 위치비정에 몰두하고 있는지를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왕험성재평양설과 직결된 낙랑군재평양설은 고조선의 강역과 역사를 축소함으로써 한국 상고사를 왜곡하고, 차후 북한급변사태 시 중국이 북한 북부 지역을 점령할 명분을 확보하는 역사적 근거로 작용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박성용·남창희·이인숙, 2015, 「漢나라 군사작전으로 본 위만조선 왕험성 위치 고찰: 북한 급변사태 시 중국의 연고권 개입 명분에 대한 함의」, 국방연구 제58권 제2호, 2쪽)
박성용 박사등이 논문에서 주장한 한나라 군대의 침공 경로와 왕험성의 위치를 나타낸 지도.
(관련기사 《교수신문》 2015년 8월 12일, 〈“위만조선 수도 王險城, 한반도에 없었다” … 중국 동북공정 무력화할 논리 제시〉)
북한급변사태 시 중국이 북한 북부 지역을 점령할 명분으로 중국의 식민지였던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역사를 들고 나올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낙랑군 나아가 고조선의 수도인 왕험성의 정확한 위치를 밝혀야 한다는 것을 논문의 서술 동기로 들고 있다. 그리고 연구 결과 다행히도 왕험성이 한반도가 아닌 현재의 중국 영토 내에 위치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음을 확인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역으로 중국의 동북지방에 급변사태가 발생했을 때, 우리가 그 지역을 점령할 명분을 확보했다고 생각하고 계신지 라는 의문이 생기지만, 저자들의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니, 그 질문은 일단 마음 한켠에 접어두기로 한다.
이와 비슷한 주장은 사이비 역사학의 대중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동북아역사재단의 공식 견해대로 위만조선의 도읍이 평양 지역이었다면 대한민국은 더 이상 중국의 동북공정에 시비하지 말아야 한다. 그 대신 ‘과거 한반도 북부가 중국사의 영토인 것은 맞지만 지금은 우리 땅이니 내어줄 수 없다’고 달리 주장해야 한다. (이덕일, 2009,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위즈덤하우스 28쪽)
이들이 공유하고 있는 감정은 동북공정을 진행 중인 중국이 역사를 근거로 한반도 북부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해 올 것이라는 불안감이다. 불안감은 고대국가의 영역을 현대 국민국가의 영토와 등치시키는 입장에서 배태된 것이다. 즉 그들은 고대사를 고대사 자체로 이해하지 않는다. 철저하게 현대의 관점에서 고대사를 해석하기 때문에 별다른 고민 없이 한사군의 군현지배를 근대국가의 식민지 지배와 동일시하고, 이 때문에 그 영역을 한반도 외부로 몰아내는 것이 현대 대한민국을 위한 역사 해석이자 우리 땅을 지켜내는 길이라고 믿는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이해는 그들의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현대의 몽골인민공화국이 징기스칸과 그 후예들의 정복 전쟁을 근거로 유라시아 대륙 전체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같은 관점으로 고대사에 접근하여 현실의 침략정책에 역사적 당위성을 부여한 집단이 없었던 건 아니다. 제국주의 일본이다. 사이비 역사학이 그들이 그토록 비판하는 일제 식민사학의 프레임에 갇혀 역사를 바라보고 있음을 알려주는 또 다른 사례이다.
현대 국민국가의 관점으로 고대사를 인식하는, 또 자신의 현재적 관심사를 고대사 인식에 투영하는 사이비 역사학의 주장들은 때로는 황당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해프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사이비 역사학의 주장들을 대중에게 보급하는 선봉장격인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은 동북아역사재단측에서 제작한 동북아역사지도가 중국의 동북공정을 그대로 반영했다고 맹렬히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담기양의 『중국역사지도집』은 한나라 소속인 고구려현을 만주와 평안북도 일대로 표시했고, 『동북아역사지도』는 이것을 베꼈다. 그런데 담기양의 『중국역사지도집』은 우습게도 서한(서기전 202년~서기 8년) 때의 지도라고 설명해 놓고 고구려 ‘군郡’이라고 표기했다. 『한서』「지리지」에는 고구려군이 없다. 한사군의 하나인 현도군에 고구려현이 있을 뿐이다. 담기양의 『중국역사지도집』은 왜 『한서』「지리지」에 있지도 않은 고구려군을 만주와 평안북도 일대로 그려놓은 것일까? 고구려사를 중국사로 둔갑시키려는 동북공정의 일환이다. 고구려가 처음부터 한나라 소속의 군이었던 것으로 설명해야 고구려의 전 역사를 중국사로 포함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이덕일, 2015, 매국의 역사학, 어디까지 왔나, 만권당, 133쪽)
담기양의 중국역사지도집이 처음 출간된 것은 1982년이다. 이덕일 소장의 주장대로라면 중국은 이미 1980년대부터 있지도 않은 ‘고구려군’을 조작해 내는 등 고구려사를 자국의 역사로 편입시키기 위한 역사 조작을 자행해 온 것이다. 그리고 한국의 역사학계는 그것도 알지 못한 채 그 지도를 그대로 베꼈다. 사실이라면 중국 역사학계는 교활하고, 한국 역사학계는 한심하며, 이덕일 소장은 탁월하다고 해야할 것이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이덕일 소장이 말하는 지도는 중국역사지도집 2권 27-28페이지에 수록된 「서한 유주자사부」 지도이다. 이 지도는 중국 한(漢)나라의 행정 구역 말고도 그 주변에 위치한 여러 민족(?)들의 거주지도 함께 표시되어 있는데, 고구려는 그 민족 중 하나로 적혀 있다. 그런데 지도를 그린 담기양은 고구려족의 거주지를 현도군이 설치된 지역과 동일시했기 때문에 현도군이라는 표시를 고구려를 표시한 지역과 가까운 곳에 적었다. 이 때문에 이덕일 소장은 현도군에 붙어있는 ‘군(郡)’을 고구려에 붙여 읽어, ‘고구려군’이라는 행정구역을 창조한 것이다.
중국역사지도집 2권(1982) 27-28, 「서한 유주자사부」 지도.
이덕일 소장은 ‘현도군’에 붙어있는 ‘군(郡)’을 옆에 비스듬히 적혀 있는 ‘고구려’에 붙여 읽고, 중국이 고구려의 역사 전부를 중국사에 편입시키기 위해 ‘고구려군’을 조작해냈다는 음모론을 제기했다.
무엇이 역사학으로 박사학위까지 받은 사람이 이 같은 초보적인 실수를 하고, 또 그것을 대중에게 공표해서 망신살을 자초하는 지경에 이르게 했을까. 필자에게 타인의 마음 속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가 현재적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았다는 데에 그 원인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에게 있어서 중국의 동북공정은 한국사를 중국사의 시공간에 편입시킴으로써 현대 중국의 침략 정책을 뒷받침하는 음모였다. 따라서 그의 관심은 온통 이 음모를 명약관화하게 드러낼 수 있는 증거를 찾고, 또 그 음모를 분쇄할 수 있는 역사상을 만들어 내는 데에 쏠려 있었다. 그런데 우연히(하지만 실수로) 중국이 고구려의 전 역사를 중국사로 포함시키기 위해 조작한 증거인 ‘고구려군’을 찾은 것, 아니 찾았다고 믿은 것이다.
그가 고대사를 당대를 살았던 고대인의 시각에서 보지 못하고 현대를 사는 자신의 입장을 투영해서 이해하는 것은 그의 역사 이해를 편협하게 만드는 일종의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이것은 비단 이덕일 소장 한 사람 뿐만 아니라 사이비 역사학을 공유하고 주장하는 모든 이들을 얽매고 있다. 이 강박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그들의 역사학에서 ‘사이비’라는 꼬리표를 뗄 수 있는 날은 요원하다 할 것이다.
역사비평 2016년 봄호(통권 11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