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사군 한반도설’은 식민사학의 산물인가 1
관리자 2015-12-15 18:06 3493
‘한사군 한반도설’은 식민사학의 산물인가 1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박사수료 위가야
동북아역사재단에 역사관을 묻다
사건 1
2014년 4월 22일, ‘식민사학 해체 국민운동본부’가 동북아역사재단에 대해 감사원에 공익감사를 청구했다. 그들은 “재단은 설립 취지와 달리 동북공정에 부응하는 주장을 홈페이지에 지속적으로 게시했고 최근에는 한강 이북이 중국 식민지였다는 주제의 영문 책자를 국고를 들여 발간해 세계 각국에 배포했다”며 감사 청구 취지를 밝혔다.(관련기사 《연합뉴스》 2014년 4월 22일, 〈재야사학계, 동북아재단 상대 공익감사 청구〉)
사건 2
2015년 10월 4일 새누리당 이상일 의원은 동북아역사재단이 외교부의 의뢰를 받아 미 의회조사국(CRS)에 제출한 자료에 중국의 동북공정을 인정하는 내용을 담은 자료와 지도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지적했다. 이 의원에 따르면 동북아역사재단은 고조선의 영토를 현재의 요령성 일부로 경계를 한정하고 기원전 108년 중국 한무제가 설치했다는 한사군이 과거 한반도 일부 지역을 통치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듯한 지도를 미국에 보냈다. 인하대 복기대 교수는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이야기는 일제 강점기 때 식민사학자들이 ‘한국은 다른 나라의 속국’이라고 날조한 사실”이라고 지적했다.(관련기사 《중앙일보》 2015년 10월 5일, 〈“한반도에 한사군” 왜곡된 고대사 자료 미 의회에 보냈다〉)
사건 3
2015년 3월 24일 새정치민주연합 도종환 의원은 동북아역사재단이 2019년 발간을 목표로 준비 중인 동북아 역사지도에서 서기 120~300년 시기 고구려 국경선 위치 비정이 중국이 동북공정 일환으로 만든 중국역사지도집의 위치 비정과 완전히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중국 요하 지역부터 한반도 서북부 지역을 중국 한나라 땅으로 편입시켜 놓고 있다는 것이다. 요하 양쪽 지역을 한나라 땅으로 편입시킨 것에 대해 도 의원은 한사군을 한반도에 위치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관련기사 《경향신문》 2015년 3월 25일, 〈동북아역사재단 추진 역사지도, 중 ‘동북공정’ 지도 베끼기 의혹>)
최근 동북아역사재단은 언론의 맹폭에 시달려야 했다. 폭격의 이유가 된 것들이 위에서 그 전말을 간단하게 소개한 사건들이다. 폭격자들이 들고 있는 재단의 죄상은 다음과 같다.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동북아역사재단이 중국의 동북공정 논리를 답습하는 내용을 지속적으로 홍보·재생산하고 있다. 그리고 그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은 일제 식민사학의 조선총독부 역사관이다. 이 같은 논리 아래 동북아역사재단, 나아가 한국의 강단 사학계는 매국의 역사학이라는 침묵의 카르텔을 공유하는 집단이자 조선사편수회의 후신이라는 충격적 고발이 이어졌다.
식민사학 해체 국민운동본부의 발대식을 알리는 포스터. 동북아역사재단이 조선사편수회의 후신을 자처한다고 맹렬하게 비난하고 있다.
그렇다면 동북아역사재단이 일제 식민사학을 추종하는 역사관을 가지고 있음을 입증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재단 측이 고대 중국의 군현인 한사군(낙랑·현도·임둔·진번)을 한반도 안에 위치시키는 이른바 ‘한사군 한반도설’에 입각한 역사서를 출판하고 또 그를 토대로 역사지도를 그리고 있다는 것을 핵심적인 근거로 들고 있다. ‘한사군 한반도설’은 일제 식민사학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일제는 한국사의 시작을 식민지로 만들려는 정치적 의도에서 ‘한사군=한반도설’을 창작했다. 정치적 날조란 허점이 있게 마련이어서 약간의 사료비판만 가하면 ‘한사군=한반도설’의 문제점은 그리 어렵지 않게 간파할 수 있다. 더구나 일제 식민사학자들이나 이병도 외에도 한사군의 위치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제시한 학자들은 많이 있다.(이덕일, 2009,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위즈덤하우스, 51쪽)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한사군의 일부(그 중에서도 특히 낙랑군)가 한반도 안에 있었던 것으로 결정된 것은 일제강점기 때의 일이다.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를 위시한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의 이 같은 주장은 당시에 이미 신채호 등의 민족사학자들에 의해 반박되었다. 시기를 거슬러 올라가면 낙랑·대방군이 요동에 있었다고 주장한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견해도 찾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의 논리가 그들의 제자격인 이병도에게 그대로 이어졌고, 이병도와 학맥으로 연결된 지금의 강단 사학계가 그를 무비판적으로 추종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일본인들의 논리를 답습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동시에 한반도 북부가 과거 중국의 식민지였다는 사실을 인정함으로써 중국의 동북공정을 뒷받침하는 것이기도 했다.
사이비 역사학이 주장하는 식민사학의 계보.
사실이라면 큰일이 아닐 수 없다. 일제의 식민사관을 따르기 위해 한반도 북부의 역사주권을 중국에 넘기는 자들이 한국의 역사학을 장악하고 있는 셈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주장일 뿐 사실이 아니다. ‘한사군 한반도설=식민사학’이라는 등식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 성립하지 않는가에 대해서는 이후의 서술을 통해 차차 확인하기로 하고 우선은 일본인들에 의해 이루어진 한사군 연구의 대강을 검토해 보기로 한다.
일본인들의 한사군 연구-역사지리학과 고적조사
하야시 다이스케(林泰輔)가 근대적인 서술방법에 입각한 최초의 조선역사전문서로 평가받는 조선사(朝鮮史)를 저술한 것은 1892년의 일이다. 하지만 일본인들에 의한 한국사 연구는 그 이전부터 이루어졌으며, 그것이 일본의 한국진출과 관련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이미 연구를 통해 확인된 바 있다.(이만열, 1985, 「19세기말 일본의 한국사연구」, 청일전쟁과 한일관계, 일조각) 일본인들의 한국사 연구가 그들의 현재적 관심사와 무관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들의 한사군 연구를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1892년 조선사의 단계에서 막연하게 기미(羈縻) 제도를 이용해 다스린 지역 정도로 이해하던 한사군의 성격을, 식민지배가 가시권에 들어온 1900년대 후반부터는 ‘식민지’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인 역사가들의 한사군 식민지 규정은 단군조선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것과 결합하여 한국사가 식민지로 시작했다는 역사상을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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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군의 역사지리 연구를 수행한 일본인 역사학자들.
왼쪽부터 나카 미치요, 시라토리 구라키치, 이나바 이와키치, 이마니시 류.
이 같은 역사상 구축과 함께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진 것이 한사군의 공간적 범위를 확인하는 역사지리 연구였다. 1894년에 「조선낙랑현도대방고(朝鮮樂浪玄菟帶方考」를 발표한 나카 미치요(那珂通世)를 시작으로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 이마니시 류(今西龍) 등이 차례로 한사군의 위치에 대한 글을 발표하였다. 이들은 대체로 낙랑군이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대동강 일대에, 임둔군이 강원도 및 함경도를 포함하는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보았다. 현도군은 처음에 함흥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있었던 것이 이후 압록강 이북으로 옮겨갔다고 했다. 반면에 진번군의 위치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렸는데, 압록강 이북에 위치했을 것으로 보는가 하면, 한반도 남부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 남쪽 경계를 충청도에서 전라북도까지 내려 보기도 했다.
결국 이들은 한사군의 남방 경계가 어디까지 미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을 달리했지만, 적어도 그 영역이 한반도 북부 전역에서 압록강 이북까지 미치고 있었다는 데에 대해서는 일치된 견해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들의 연구는 한정된 문헌에 대한 비판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구사된 실증적 방법은 오늘날의 역사학에서도 그 엄정함을 높게 평가한다. 그런데 뒤에서 구체적으로 말하겠지만 한사군을 한반도 안에 있었던 것으로 본 것은 이들이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기존의 연구가 함께 하지 못했던 든든한 아군이 버티고 있었다. 문헌이 제공하는 부족한 정보를 보완할 수 있는 물적 증거가 확인되기 시작한 것이다.
세키노 다다시. 식민지 시기 한국에서의 고적조사를 주도했다.
도쿄제국대학 공과대학 조교수였던 세키노 다다시(關野貞)는 식민지 시기 한국에서의 고적조사를 주도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1902년과 1909년에 한국에 방문하여 고적을 조사했는데, 1909년의 조사에서 대동강 유역의 석암동 고분을 발굴·조사하였다. 그는 처음에는 이 고분을 고구려 고분으로 보았다가 훗날 견해를 수정하여 낙랑군 시대의 유적으로 보았다. 이 때문에 일제가 고구려 유적을 낙랑군 유적으로 조작하여 ‘한사군 한반도설’을 고고학적으로 뒷받침하려 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이덕일, 2014, 우리 안의 식민사관, 만권당, 69~73쪽) 하지만 이것은 당시 세키노의 사전 지식 부재 때문에 생긴 일이며 오히려 최초의 낙랑고분 발굴조사가 식민사관 창출을 위해 사전 기획 하에 이루어 진 것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게 하는 사례일 뿐이다.(정인성, 2006, 「關野貞의 낙랑유적 조사·연구 재검토」, 호남고고학보24)
세키노는 1910년부터 1915년까지 조선총독부 촉탁의 신분으로 조선 전역의 고적을 조사했으며, 이 과정에서 대동강 일대의 토성리 토성 등 그 지역이 과거 낙랑군의 중심지였음을 알려주는 유적들이 발굴·조사되었다. 1916년부터는 고적조사위원회가 발족하여 5년을 기한으로 하는 고적조사계획이 입안·실행되었다. 이후 1920년대 중후반에 이르기까지의 조사를 통해 확인된 유적과 유물들은 낙랑군의 중심지가 평양이었음을 확인시켜주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로 인정받게 되었다.
일본인들의 한사군 연구와 식민사학
이제까지 확인한 것처럼 일본인들의 한사군 연구는 문헌 비판을 통한 실증을 통해 위치를 비정하고 고적조사를 통해 확인된 고고자료가 실증의 물적 근거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학문적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다. 오늘날의 한군현 연구에서도 중요한 선행 연구로서 비판과 극복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연구는 한사군의 성격을 식민지로 규정한 채 그 위치를 확인하는데 그쳤다는 데에서 한계를 지적할 수 있다. 한사군 그 중에서도 400여년간 지속된 낙랑군의 군현통치가 존속 기간 내내 동일한 상태로 유지되었는지, 심지어는 군현통치가 실질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충분히 제기될 수 있었음에도, 그들의 노력은 오직 식민지의 공간을 확인하는 데에만 집중되었던 것이다.
그들이 한사군의 성격을 식민지로 규정한 것은 한국이 일찍부터 외국의 식민지였다는 이해를 확산시켜 결과적으로 제국일본의 식민지배 정당화에 이용되었다. 훗날 일본인의 한국사 연구를 비판한 일본인인 하타다 다카시(旗田巍)에 따르면 그들의 연구 자세를 제약한 것은 일본의 한국지배라는 현실이었고, 그 결과 도출된 역사상은 한국사의 진실을 놓친 그릇된 한국사상이었다.(하타다 다카시, 1983, 일본인의 한국관, 일조각, 154쪽) 일본인들의 한사군 연구가 식민사학이라는 비판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흥미로운 것은 한사군의 성격을 식민지로 규정한 채 그 통치의 실상 및 지배구조에 대한 일체의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위치 비정에만 집착하는 모습을 사이비 역사학에서도 쉽게 확인 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들이 한사군이 한반도 밖에 있었다(또는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의 이면에는 중국의 식민지였던 한사군이 현재 우리의 영토 안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강박이 자리하고 있다. 이 때문에 그들은 한반도 북부에서 발견되는 고고학 자료를 모두 일제 식민사학의 조작으로 치부한다. 이처럼 자신의 위치 비정을 고수하기 위해 발견된 고고자료의 해석을 거부하는 모습은 도쿄제국대학 동양사학과 조선사 담당 교수였던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를 연상시킨다. 그는 대방군의 중심지가 한강 유역에 있었다는 자신의 주장에 매몰되어 황해도 봉산군에서 발견된 대방군 유물을 인정하지 않았다.
사이비 역사학은 식민사학을 거부하고 또 그에 대해 가장 격렬한 비판을 가하고 있지만, 그 근간을 이루는 논리와 연구방법은 식민사학과 다를 바 없다. 우리는 어쩌면 지금 식민사학의 목소리로 식민사학을 비판하는 식민사학의 슬픈 변종과 마주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2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