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학술동향]본계 금가촌 유적, 정가와자유형과 세형동검문화의 연결고리가 드러나다!
경희대학교 한국 고대사 고고학 연구소 2022-05-31 673
[사진 1] 본계시 박물관에 전시중인 금가촌 유적 출토유물. 출토유물은 4개의 진열장에 나누어 전시하였는데, 무엇보다 견갑형청동기와 청동장경호가 주목된다. (成璟瑭·徐韶鋼 2021 문헌 참조)
본계 금가촌 유적, 정가와자유형과 세형동검문화의 연결고리가 드러나다!
이후석(경희대학교 한국고대사·고고학연구소 연구교수)
본계시(本溪市) 평산구(平山區) 금가지구(金家地區)는 태자하가 서류하여 본계-요양 접경지대 지나가는 구간 남변에 형성된 강안 대지이다. 구체적으로는 태자하의 지류인 세하가 그 남쪽에서 평행하게 서류하여 1973년에 건설된 삼와(葠窩) 저수지로 진입하는 길목인데, 천산산맥(千山山脈)의 지맥으로 인해 남쪽과 동쪽은 산간구릉으로 둘러쌓였지만, 동서 방향으로 좁은 강변 대지가 발달되어 있다. 예로부터 물을 구하기가 쉽고, 시가지와는 일정하게 격리되어 있어 금속가공 공장들이 밀집되어 있는 금속공업단지가 형성되어 있다.
2012년 7월 금속 공장 창고 증축 공사 과정에서 땅이 꺼지면서 청동유물 15점이 일괄 출토되어 알려졌다. 당시 조사 정황은 긴급 현장조사를 위해 파견된 본계시 박물관의 부관장이었던 양지룡(梁志龍)의 인터뷰를 통해 언론에 공개되었으나, 당시 언론기사가 “本溪挖出15件战国青铜器”, “本溪挖出战国时期青铜器”, “本溪工地挖出青铜器” 등의 제목으로 실체를 파악하기 어렵게 나왔기 때문에 국내에는 전혀 알져지지 않았었다.
양지룡을 비롯한 본계시 박물관의 긴급 발굴조사단이 현장에 도착했을 당시 유구는 이미 상당부분 파괴된 상태였지만, 무덤으로 추정되었다고 한다. 구체적인 묘제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석재가 출토되었다는 이야기는 없다. 다만 관련 소식을 직접 접한 길림대학의 성경당(成璟瑭) 교수는 간략화된 석관묘로 본다. 일괄 수습유물은 총 15점인데, 모두 청동유물이다. 2015년 보존처리가 완료되었고, 2020년 11월 본계시 박물관 특별전(“山魂水魄 - 本溪文物中的历史”)에 전시되어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2012년 당시 언론 기사에서 확인되는 것이지만, 가장 주목되는 유물에는 견갑형청동기(靑銅肩甲으로 소개)와 청동장경호(銅壺로 소개)가 있다. 금가촌의 청동장경호는 정가와자의 토제장경호와 유사한데, 토기 표면의 저속 회전 조정 흔적이 청동용기에도 그대로 표현되어 있는 것이 이채롭다. 금가촌의 견갑형청동기는 정가와자 출토품과 전 경주 출토품(일본 동경국립박물관 소장)의 중간 형식인데, 형태와 문양을 보면, 정가와자 출토품에 조금 더 근접한다. 그러므로 중국 학계의 연대관보다는 조금 더 올려 보아볼 수 있겠는데, 전국 전기, 즉 기원전 400년경 전후이다.
이와 같이 본계 금가촌 유적은 요양 탑만촌 유적과 함께 요양-본계 접경지역에 위치하는 정가와자유형의 지역 거점 유적이다. 요서계통 청동유물이 다수 확인되는 유물 구성으로 보아 피장자는 지위가 높은 상위등급 인물이라 할 수 있겠는데, 양지룡은 군사조직의 수령(首領) 같은 존재로 추정한다. 심양 정가와자 유적보다 세형동검문화에 더욱 가까워진 유물들이 확인됨에 따라 남한지역 세형동검문화의 성립 시기 논쟁이 상당부분 해소될 것으로 전망된다. 고조선과 관련되는 정가와자유형의 거점이 심양 일대에서 벗어나서 요양-본계 방면에도 형성되었음을 잘 보여준다.
* 출처 및 참고자료
本溪挖出15件战国青铜器 墓葬主人疑是武士
『新浪遼寧』 2012-10-31. (http://ln.sina.com.cn/news/b/2012-10-31/075816678.html?from=ln_tttj)
本溪挖出战国时期青铜器
『华商晨报』 2012-10-31. (https://news.sina.com.cn/o/2012-10-31/071925476927.shtml)
本溪工地挖出青铜器 翻开辽东战国新历史
『中新網』 2012-10-30. (https://www.chinanews.com.cn/shipin/2012/10-30/news116328.shtml) 동영상
成璟瑭·徐韶鋼, 2021, 「최근 20년 간 중국 동북지역에서 발견된 청동기의 조사와 연구」, 『崇實史學』46, 崇實史學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