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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민족주의적 관점의 한국 고대사 연구 사례와 문제점 | 연구소

해방 이후 민족주의적 관점의 한국 고대사 연구 사례와 문제점

 

 

안정준(연세대)

 

 

목 차

1. 머리말

2. ‘민족국가에서 배제된 지역사

3. 민족사적 관점의 귀속(歸屬)의식

4. 맺음말

 

 

1. 머리말

 

해방 이후 한국 고대사 연구는 다른 시대사와 마찬가지로 식민사관의 극복과 한국사의 학술적 정립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기반으로 진행되었다. 신채호가 혈연과 지연에 토대를 두고 형성된 운명공동체로서의 민족을 역사의 주체로 설정한 이래로 한국 고대사는 곧 민족사의 기원과 발전과정에 대한 논의를 주요 과제로 하였다. 연구자들은 식민사관의 극복을 위해 한국사 발전의 주요 지표로서 국가의 존재에 주목하였고, 고조선 이후 들어선 고대국가의 성립과 발전이라는 문제를 집중적으로 논의하였다.1)

고대사 학계는 그간의 연구사 정리를 통해 고대 국가의 자체적인 발전 과정을 실증적으로 규명함으로써 타율성론과 정체성론을 어느 정도 극복했다고 자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고대사 연구의 근간이 되어왔던 역사 인식 문제에 대해 여러 방면으로부터의 비판에 직면해 있는 상황이다. 특히 2003년 중국의 동북공정을 통한 고구려사 귀속문제에 대응하는 과정, 그리고 최근 상고사 논쟁에 대응하는 과정은 고대사 학계의 역사 인식이 갖는 한계에 대해 되돌아보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드러난 문제점들은 기존에 수차례 제기되어왔던 포스트모더니즘에 입각한 탈민족주의 사관의 요구와도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그동안 한국사 연구에 민족 중심 역사관이나 국가 이데올로기가 내재되어 있다는 비판은 서양사 혹은 한국 근현대사 전공자들을 중심으로 제기되었다. 이들은 근대적 민족 관념을 전근대에 적용시킨 점, 동아시아 삼국의 민족주의가 적대적 공범관계로 얽혀있다는 점 등 이론과 현상적인 측면에서의 여러 문제점들을 지적했으나, 이로 인해 발생하는 고대사 연구의 구체적인 현안에 대해서는 전문성 문제로 인해 접근하기 쉽지 않았다.

필자는 아직 한국 고대사의 전반적인 주제들을 종합적으로 평가할만한 능력은 되지 않는다. 다만 그동안 고대사 관련 몇 가지 주제를 공부하면서 기존의 민족사적 관점을 통한 연구가 갖는 한계와 문제점들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특히 한사군 및 고구려사 연구에서 드러난 몇 가지 현안들은 고대사 전공자뿐만 아니라 타시기 전공자들과도 함께 공유하여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여 이 글을 통해 간략히 소개해보고자 한다.

 

 

2. ‘민족국가에서 배제된 지역사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라는 크로체의 말처럼, 역사 서술은 기본적으로 현재의 관점을 투영하고 있다. 우리가 통상 생각하는 한국사는 현재의 국가를 출발점으로 해서 그 前史롤 형성했던 과거로 소급하여 우리 역사를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성립한 역사서술이다.2) 근대 이후 동아시아 각국은 태고적부터 계기적으로 연속하는 자기 완결적인 민족사를 창출해냈고, 한국사 서술 역시 근대 국민국가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강한 영향을 받았다는 점에 대해서는 굳이 부언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고대사 분야에서도 제국주의 침략의 가해자 측이었던 일본에 의해 식민사관에 입각한 역사 인식이 창출되었지만, 피해자측인 민족주의 사학자들 역시 이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근대적 관점을 고대사에 투영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양자 모두 근대 국민국가 혹은 근대 민족주의의 이데올로기 속에서 고대 텍스트를 해석함에 따라 그 역사적 실상이 크게 왜곡된 바 있다는 지적3) 역시 연구자들이 간과할 수 없는 측면이다. 이 글에서도 우선 해방 이후 민족 중심의 고대사 연구로 인해 발생한 구체적인 문제점을 몇 가지 지적해보고자 한다.

앞서 언급한대로 그동안 한국학계의 고대사 연구는 고대사 체계의 수립을 위해 역사발전의 주요 지표로 ‘(민족)국가에 주목하는 정치사 연구가 주류를 이루었고, 특히 1970년대 이래로 고대 국가의 형성 및 발전단계론이 활발하게 논의되었다. 이에 주로 왕권과 중앙집권력의 강화가 그 발전의 방향으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당시 국민국가의 확립을 추구하는 민족주의 사학의 연구 목적에 부응하고, 국가주의적 역사의식 함양에도 기여하는 것이었다.4)

그러나 국가중심의 역사 인식은 결국 거대 세력이 등장하기 이전 시기의 개별 지역과 군소세력들의 역사를 민족국가의 정통이 계승되지 않은 국가 前史로서 파악하는 경향이 강했다. 이로 인해 중앙집권 국가의 성립 이후에도 존재했던 다양한 군소 토착세력들의 존재양태와 특징들을 소홀히하게 되었고, 국경을 넘나들며 다양하고 복합적인 역사를 만들어 나간 변경(지역)의 역사는 민족국가의 테두리 내에 억지로 포괄되거나 아예 서술 대상에서 배제되었다.5)

이와 관련해 낙랑군이 존속했던 420년간의 서북한 지역사를 한국사 서술의 범주에서 제외해왔던 사례를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6) 해방 이후에도 한국 연구자들이 낙랑군 지역의 역사를 한국사에서 부정해왔던 것은 일제시기의 식민사관에 입각한 낙랑군 연구로부터 비롯된 측면이 크다. 1910년대 이래로 본격화되었던 조선총독부의 평양 지역 발굴조사를 통해 일본인 연구자들은 낙랑군 지배층 무덤의 묘제(墓制)와 부장품 등을 분석하였다. 이를 통해 낙랑고분은 중원계 유물이 다수이고 묘주가 중국식 성씨를 사용한 한족(漢族) 계통임을 강조하였다.7) 이들은 낙랑군의 지배구조를 중국인을 지배층으로, 토착 원주민을 피지배층으로 하는 二元的 종족지배구조로 파악하였으며, 낙랑군의 역사는 중국 한족들이 한반도의 비한계 토착 원주민들을 점령하여 지배한 식민지(colony)의 역사라고 보았다.8)

이처럼 과거 일본학자들이 낙랑지역의 문화를 중원문화 일색으로 파악하거나, 종족지배론에 입각한 지배 형태를 제시한 근저에는 기본적으로 중국민족 대 한국민족, 문화 대 고조선 문화라는 이분법적 도식이 깔려있다. 당시 이들은 고대의 중국왕조 군현인 낙랑군을 근대적 식민지(colony)로서 조선인이 세운 민족국가와 대비되는 세력처럼 부각시켰던 것이다.

낙랑군은 420여 년의 존속기간 동안 중국왕조의 대외적 입장을 충실히 수행하는 과정에서 주변의 세력들을 정치적으로 억압하고, 적어도 외형적으로 그들의 독자적인 성장발전을 저해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에 김철준도 고조선의 붕괴 이래로 설치된 한군현이 직할 영토 이외에도 만주와 한반도에 있어서 각 토착사회를 간접적인 지배망 내에 들였고, 결과적으로 토착사회의 통일세력이 성장하는 것을 방해하였다고 보았다. 구체적으로 군사적인 통제 이외에도 군소 우두머리들에게 왕··읍군과 같은 중국의 관함(官銜)을 수여하고 조복(朝服)의책(衣幘)을 주는 등의 방식으로 군현의 통제 하에 두는 가운데 토착사회의 분열을 조장하고자 했다고 본 것이다.9) 그는 이후 한반도에서 고구려를 비롯한 민족국가의 발전은 한군현 세력과의 투쟁 속에서 자체의 통일과 강한 결속을 이루어낸 결과라는 점을 강조하였고, 이러한 시각은 이후 고대사 연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요컨대 근대의 민족국가, 혹은 국민국가적 인식에 입각한 19세기 이래의 고대사 인식은 해방 이후 민족국가를 지표로 한국사를 파악했던 우리 학계에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10) 이로 인해 한()의 군현인 낙랑군은 이후 등장한 민족국가인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과 구별되는 외세로서 삼국의 내재적 발전, 즉 정치적 발전을 저해하는 대립세력으로 설정되어왔다. 그리고 이 시기 『삼국지 동이전 등에 입전된 옥저삼한 이외에 낙랑군의 중심부에 존재했던 옛 고조선계 주민 세력은 사실상 낙랑군세력으로 동질화되어 한국사의 서술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해방 이후 평안도황해도 지역의 고고자료를 통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낙랑 지역이 중국왕조의 내지와 구별되는 정치문화적인 특성들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1970년대 이후 현재까지 중원 각지에서 2만기 이상의 한대(漢代) 고분이 발견되면서, 낙랑 지역 문화가 한문화의 정형이라는 단순한 비교는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었다. 낙랑지역의 문화는 420여 년간 동태적으로 변화했으며, 매시기의 특징들도 중원 지역과 일치한다고 보기 어렵다.11)

또한 해방 이후 서북한 지역의 낙랑군 고분에 대한 추가적인 발굴과 연구가 진행된 결과 (토광)목곽묘의 존재가 새롭게 밝혀졌으며,12) 그 부장품 가운데 고조선계 토착민의 전통 유제(遺制)인 세형동검문화가 주목되면서, 낙랑군의 지배세력을 중국인으로 파악해왔던 과거의 이원적 종족지배론은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었다. 게다가 한()은 고조선 멸망 이후에도 이 지역의 국읍 이하의 토착유력자들을 낙랑군의 지배층으로 포섭하였고, 종래의 읍락 사회 내부와 토착사회 지배질서는 큰 변동 없이 유지되었다고 보기도 한다.13) 즉 중국왕조의 군현으로서 이루어진 행정지배의 하부 단위에는 여전히 고조선 이래의 토착 지배질서가 온존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국가 단위로 낙랑지역의 역사를 파악할 것이 아니라, 한반도 북부에서 남부까지를 다양한 편차를 가진 여러 지역세계가 있다는 관점에서 새롭게 바라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제기되기도 했다. 낙랑군이 설치된 평양 지역에도 긴 역사에 의해 형성된 지역 고유의 문화가 있고, 그것은 한반도 내 타 지역과도 구별되는 독자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14) 군현지배가 장기화됨에 따라 고조선계와 한인계(漢人系) 주민의 종족적 융합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져, 1세기 후반경 낙랑군 중심부에 지역집단으로서의 낙랑인이 형성되었다는 주장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15)

낙랑인이라는 용어가 적합한 지 등에 대해서는 추후에도 계속 논의가 되어야 하겠지만, 이러한 근래의 연구들은 군소 지역집단으로서의 낙랑지역 역사를 주목하고, 한국사의 범주에서 서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기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한 더 나아가 그동안 도외시했던 지역사의 서술 필요성을 제기함으로써 민족국가를 주요 단위로 했던 고대사 연구의 한계를 전반적으로 되돌아보는 계기를 제공했다고 생각된다. 의식적으로 지역사의 다양한 측면을 주목하는 것이 현재 대중들의 근대적 이데올로기를 극복하는 유용한 방편이자 한국사를 보다 폭넓게 바라보는 유용한 방법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최근 낙랑군 연구사의 흐름은 고대사 연구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작지 않다.

 

 

3. 민족사적 관점의 귀속(歸屬)의식

중국의 동북공정과 고구려사 귀속 문제가 2003년에 큰 이슈가 되면서 정부와 한국사 관련 학회들의 공동 대응이 이루어졌다. 12917개 한국사 관련 학회가 연명한 공동선언문이 발표되었고,16) 이후에도 동북공정의 고구려사 인식을 비판하는 저서들이 차례로 출간되었다. 최근까지 고구려사를 배타적으로 점유하려했던 양국 학계의 논쟁 과정에서 중요한 쟁점 가운데 하나가 고구려 주민의 귀속의식이었다. 중국학계에서는 고구려 주민이 종국에 중국왕조의 영토로 편입되면서 한화(漢化)의 길을 걸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반면, 한국에서는 고구려의 존속기간 동안 그곳 주민이 중국인들과 구분되는 강한 동류의식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처럼 고구려사에 적용된 귀속의식은 해당 시기와 관련한 텍스트를 해석하고 분류하는 기준으로도 적용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최근 활발하게 발견되고 있는 중국소재 고구려백제 유민 일족의 묘지명에 대한 연구이다. 1917년 나진옥이 󰡔망낙총유문(芒洛冢墓遺文_󰡕4편에서 부여융, 고자, 천남생의 묘지명을 수록한 이래, 2015년 후반기에 고을덕 묘지명이 소개되기까지 국내에 소개된 중국 출토 고구려백제 유민 일족의 묘지명은 총 38점에 달한다. 이들은 모두 문헌에 나타나지 않는 고구려백제의 역사상을 살펴볼 수 있게 하는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까지 지속적으로 출토되고 있는 유민 관련 자료에 대한 양국 연구자들의 시각 차이는 매우 크며, 이러한 인식차이는 근본적으로 고구려사의 귀속 문제를 바라보는 입장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이후 영토 내의 모든 민족을 중화민족이라는 개념을 통해 표현하기 시작했으며, 1980년대 이래로 국경 기준이 아닌, 공동의 문화심리적 요소, 즉 공동의 언어, 민족적 소속감, 공동의 조상 인식 등을 중화민족의 기준으로 삼기에 이르렀다. 이는 중국 내 각 소수민족들이 형성된 이후 최종적으로 중국영토에 편입되면서 공동의 문화적심리적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던 만큼(融合), 모두 중화민족이라는 대가정의 일원이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은 현재 중국의 영역 내에 포함된 고구려사를 바라보는 시각에도 투영되었다. 특히 2010년대 이후 중국 학계에서는 수당대에 발견되는 고구려백제인 관련 묘지명 자료에 대한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는데, 여전히 고구려백제 유민의 귀속(歸屬)과 한화(漢化)’라는 주제가 반복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연구경향은 기존의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의 입장을 고수한데 따른 한계라고 하겠다.17)

문제는 이에 대응하는 국내학계의 연구 방식이다. 고대사 학계에서는 전근대 주민도 언어, 문화, 지역, 혈연의식 등을 매개로 하는 같은 족속, 같은 공동체로서의 동류의식이 존재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18) 이는 고구려사에도 적용되어 고구려인들 역시 스스로 주변 국가의 주민과 구별하는 자의식을 지니고 있었다고 본다. 자연히 2000년대 후반부터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국내의 고구려백제 유민 일족 묘지명 연구 역시 고구려백제인으로서의 자각 및 정체성에 주목하고, 이를 묘지명 자료의 해석 및 분류에 반영하고 있다.

예컨대 묘지명의 가계(家系) 기술에서 先祖의 출자에 대한 관념이나 출신지 표기, 당 조정이 고구려인으로 인식하는 지 여부 등을 묘주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기준으로 삼고, 이를 통해 고구려 유민여부를 분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19) 이는 당으로 유입된 유민이 여전히 스스로를 고구려인으로서 인식하였는가, 즉 정체성을 기준으로 유민의 범주를 확정하는 것이었다.20)

그러나 최근 연구에 의하면 묘지명의 가계(家系) 기술이 정체성과 같은 자의식을 자유롭게 드러낸 자료가 아니라, 당대의 현실적인 배경을 감안하여 전략적선택적으로 기술되었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 즉 묘주 일족의 정치사회적 지위를 고려해 작성된 公的 기록이라는 측면을 주목하였던 것이다.21) 당시 고구려 유민 지배층이 당 조정 하에서도 일정한 정치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고 있던 현실적인 배경, 그리고 행장 등을 근거로 작성된 묘지명이 외부(조정)의 시선을 무시하기 어려웠다는 점 등을 고려한다면, 묘지명에서 고구려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자기 인식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22)

또한 고구려 주민이 다종족으로 구성되어 다양한 출자 인식이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된다. 지배층 이외에도 5~6세기 이후 고구려의 영토 내에 거주하게 되었을 한인(漢人)말갈인 등의 이종족 구성원들이 고구려라는 거대한 국가체에 일정한 소속감을 가짐과 동시에 자신들의 족성을 한동안 견지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묘지명의 가계(家系) 기술에서 선조의 출자에 대한 관념이나 출신지 표기를 오직 당대 국가 단위를 기준으로 중국왕조 혹은 고구려의 양대 구분으로만 접근하는 것은 고구려 내의 다양한 지역사회과 그 구성원의 존재를 고려하지 못한 분류라고 할 수 있다. 즉 고구려 유민 개개인의 정체성 표현 정도를 기준으로 국가 기준의 유민의 범주를 규정한다는 것은 학문적으로도 명확한 기준이 되기 어려울 뿐더러 다종족으로 이루어진 고구려의 주민 실상을 제대로 반영한다고 보기도 어렵다.23)

요컨대 종족이나 정체성 유무 등을 고구려 유민선정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1차적으로 사료상 그 분류기준이 명확하게 제시된다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중국학계에서 고구려 유민(遺民)(중국학계에서는 移民으로 통칭)’의 범주를 그 출생지를 기준으로 규정한 견해가 상대적으로 당시 당 사회에 점차 적응해갔던 고구려인들의 현실을 나름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느껴지는 것은 필자만의 착각일까.24)

그동안 이루어진 묘지명 텍스트의 잘못된 분류 및 해석은 결국 기존 민족국가로서의 고구려에 대한 집착, 그리고 중국측의 고구려사 귀속 논쟁에 대한 대응으로서의 접근도 일정하게 영향을 끼친 것으로 추측된다. 국가 단위가 아닌 지역사 단위로서의 고대사회에 주목하는 가운데, 고대의 텍스트를 현재의 대중적 열망이나 정치외교적 요구로부터 분리해서 해석하는 노력이 여전히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4. 맺음말

 

해방 이후의 분단 체제 속에서 남북한은 공히 정권의 역사적 정당성을 주장하는 일환으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강조해왔으며, 이는 시민사회에서도 진보보수 가릴 것 없는 당위적 명분으로 통했다. 이러한 역사적 특수성 속에서 최근의 상고사 논쟁은 다수 대중들의 역사인식이 여전히 민족주의라는 대명제 속에 갇혀 있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이러한 민족 혹은 민족국가 중심 연구는 국민 정체성의 본연을 형성하는 고대사 분야에서 특히 강조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한국 근현대사 및 동서양사 전공자들은 여전히 한국 고대사 연구에 탈민족주의가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미 많은 연구자들이 인지하는 것처럼, 고대국가의 지역적 특성과 국가상을 올바르게 규명하기 위해서는 근대 국민국가가 전유하는 역사상에서 한걸음 물러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차원에서 민족국가를 지표로 한 지역사 배제, 그리고 고대인들의 국가 귀속의식 강조 등은 고대사의 학술적인 진전에 긍정적으로 작용하기 어렵다고 생각된다.

 

참고문헌

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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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시(박경희 역), 2001, 표상으로서의 광개토왕비문, 만들어진 고대, 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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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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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채호가 독사신론을 통해 민족주의 역사관을 제창한 이래로 지난 1세기 동안 한국고대사 분야에 내재되어 있는 의식을 민족’, ‘발전’, ‘실증이라는 단어로 집약하기도 한다(노태돈, 2008, 고대사연구 100-민족, 발전, 실증-, 한국고대사연구 52, 6).

2) 김기봉, 2008, 한국 고대사의 계보학, 한국고대사연구52, 34.

3) 이성시(박경희 역), 표상으로서의 광개토왕비문, 만들어진 고대, 삼인, 35~79.

4) 노태돈, 2008, 고대사연구 100-민족, 발전, 실증-, 한국고대사연구󰡕 52, 14~15.

5) 임지현, 2005, 국민국가의 안과 밖-동아시아의 영유권 분쟁과 역사논쟁에 부쳐-, 인문연구48, 11~12.
6) 현행 국사교과서 역시 4세기에 달하는 낙랑군 시기를 서술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는 실정이다.

7) “(낙랑군 시대)예술은 완전히 지나(중국) 본국의 것과 동일한 것이다. 털끝만큼도 土民의 수법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섞여있지 않았다. 이 유물들은 이주해온 漢族들이 만든 것이다”(關野貞, 1932, 朝鮮美術史, 朝鮮史學會)

8) 三上次男, 1966,『古代東北アジア史硏究, 吉川弘文館, 23~82.

9) 金哲埈, 1975, 『韓國古代國家發達史, 한국일보, 45~61.

10) 김원룡은 낙랑군은 의 식민지로서 그 묘제, 문물은 거의 모두 중국 漢代의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비록 우리나라 안에 있었다 하더라도 우리나라의 고고학이나 미술사에서 제외하여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金元龍, 1973,『韓國考古學槪論, 一志社, 119).

11) 오영찬, 2006, 낙랑군 연구, 사계절, 24.
12) 尹龍九, 1990, 樂浪前期 郡縣支配勢力種族系統性格:土壙木槨墓의 분석을 중심으로-, 歷史學報126, 21~34. 오영찬, 2006,『낙랑군 연구, 사계절, 82~87.

13) 오영찬, 2006, 앞의 책, 82~85; 윤용구, 2010, 낙랑군 초기의 군현지배와 호구파악,『낙랑군 호구부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176.

14) 이영훈오영찬, 2001, 낙랑연구의 현황과 과제, 낙랑, 국립중앙박물관 ; 李成市, 2004, 동아시아에서의 낙랑-과제와 방법에 대한 시론, 한국고대사연구34, 13~14.

15) 오영찬, 2006, 앞의 책, 159~175.

16) 이 당시 한국학계의 대응과 공동선언문에 대한 검토는 鄭杜熙, 2004, 中國東北工程으로 제기된 韓國史學界의 몇 가지 문제, 역사학보183을 참조.

17) 현대 중국의 소수민족과 한족이라는 양대 민족구분을 예정된 결론으로 전제한 가운데, 이를 2천 년 전의 고대 역사상부터 일관되게 적용하는 것이 과연 정치적 목적 이외의 학문적 발전에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들지 않을 수 없다.
18) 강종훈, 2008, 최근 한국사 연구에 있어서 탈민족주의 경향에 대한 비판적 검토, 한국고대사연구52, 65~68.

19) 李文基, 2010, 墓誌로 본 在唐 高句麗 遺民祖先意識變化, 大邱史學100, 6~13.

20) 묘지명에서 先代가 중국에 기원했다가 이후 唐朝에 돌아갔다고 기술한 경우에는 묘주 집안이 고구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지 않았으므로 고구려 유민이 아닌 내왕한 중국인들로 분류하기도 하였는데(권덕영, 2010, 한국고대사 관련 中國 金石文 조사 연구-唐代 자료를 중심으로-, 史學硏究97, 26~29), 이 역시 같은 귀속의식을 기준으로 한 분류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21) 李成制, 2014, 高句麗百濟遺民 墓誌出自 기록과 그 의미, 한국고대사연구75, 162~165.

22) 묘지명에서 기술된 慕華 의식 그리고 漢人 계통으로의 가계 조작 역시 묘주 일가의 정치사회적 처신의 일환, 혹은 개개인의 성향에 의해 발생한 선택적전략적 기술이라는 점에 보다 주목할 필요가 있으며, ‘고구려 유민선정의 결격사유로 둘 수도 없다(안정준, 2016, 당대(唐代) 묘지명에 나타난 중국 기원(起源) 고구려 유민(遺民) 일족(一族)의 현황과 그 가계(家系) 기술). 역사와 현실101).

23) 현재의 중국 영역 내에 존재했다고 파악되는 북방 말갈을 고구려의 직접 지배가 미치는 주민으로서가 아닌, 영역 밖의 이질적인 존재로 규정하려는 연구 경향 역시 이러한 민족사적 관념과 전혀 무관하다고만 할 수는 없는 것 같다.

24) 葛劍雄, 1997, 中國移民史, 福建人民出版社, 34; 苗威, 2011, 高句麗移民硏究』, 吉林大學出版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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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진 : 관리자 | 등록일 : 2016-10-24 17:40:49 | 조회 : 12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