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 그 연구의 역사
한국고대사, 유라시아를 품다

2013년, 중국 동북지방 고고학의 현주소를 보다 – 길림대 국제고고학학술대회를 참여하고 | 연구소

I. 회의의 시작

 작년에 이어 두 번째로 길림대가 주최하는 학술대회에 참석하러 816~22일에 중국 장춘, 심양, 길림시 등을 방문했다. 작년의 회의는 길림대학과 내몽고연구소의 공동주최라면 이번 대회는 왕립신(청동기시대)와 주영강(신석기시대) 주임교수가 자신들의 연구비에 기반하여 文化交流社會變遷 : 동북아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의 考古硏討會라는 제목으로 이루어졌다. 한국측에서는 나를 제외하고 3명의 발표자와 2명의 옵서버 등 모두 5명의 교수가 참석했다.

 그밖에 외국의 학자로는 언제부터인가 길림대 주최 학술대회의 단골 참석자가 되어버린 상트-페테르부르그의 S. 미냐예프, 몽골국립대학의 투멘, 미국 피츠버그 대학의 R,Drennan, 일본의 도쿄대 박사과정의 이시가와 히데지, 국학원 대학의 우찌다 히로미 등이 참석했다.

 중국내의 기타 참석자들은 길림대 졸업생 위주로 대부분의 학자들은 몇 번의 길림대 주최 학회에서 본 사람들이었다. 길림대의 주임교수 2명이 주최하는 비교적 소규모임에도 불구하고, 그 규모는 매우 큰 편이었다. 왕립신 교수의 최근 활발한 국제활동을 반영하는 것임 동시에 중국 학계의 국제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학회였다. 또한, 북경대 고고문박원에서는 원장인 趙輝李水城 교수가 참석했다.




1. 기조강연

 기조강연으로는 먼저 이수성 교수가 다년간 조사한 세계 鹽業考古의 연구현황과 중국의 염업고고전망을 서술했다. 이는 다년간 미국 UCLALothar Von Falkenhausen과의 공동작업에 기반한 것이다. 팔켄하우젠의 제자인 Rowan Flad는 이후 중국 중부의 염업고고로 박사학위로 받고 하버드 대학교 인류학교로 발령받았으니, 나름 재밌는 국제적인 주제가 된 듯 하다. 플라드의 책은 2012년에 “Salt Production and Social Hierarchy in Ancient China: An Archaeological Investigation of Specialization in China's Three Gorges”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다음으로 기대되는 기조강연은 林沄 교수였다. 70대 중반이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아직도 청년 못지 않은 지적호기심과 통찰력에 길림대학 고고학의 앞날을 제시하는 강연이기 때문이다. 지난 10여년간 지켜본 임운 교수님의 연구주제는 주로 북방교류, 즉 초원과 중국북방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놀랍게도 북한과 연해주 지역의 신석기시대였다. 이번 기조강연에서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의 신석기시대 문화에 대한 통시적 고찰을 통해서 한반도 서북한과 요동지역을 小珠山 문화를 축으로 요동반도~단동일대를 하나의 문화권으로 묶고, 이를 다시 청천강 이북지역당산하층, 세죽리, 신암리 등과 통합시켰다. , 요동~서북한을 소주산문화권으로 묶은 것이다. 청천강 이남 궁산-암사리유형은 통형관 문화권에서 벗어난 고립된 문화권으로 보았다. 또한 신석기시대 후기는 조공가와 유형또는 편보문화에 해당하는 이중구연토기문화 관련유적을 쌍학리와 당산하층까지 이어 보았다. 요도반도 지역의 북구문화에 보이는 산동영향은 지엽적인 것으로 북구문화와 신암리출토 도기(삼당1기시기)의 용산문화와 관련성은 부정한 듯 하다. 다른 한편, 두만강 지역은 영화 남산유형에서 청동기시대가 아니라 구덩이에서 발견된 토기편으로 유형을 설정하였다. 이를 러시아지역 그보즈제보3과 자이사노프카 1와 같은 유형으로 보았으며, 보이스만2유적은 첨저토기가 최하층이라는 점에서 영화남산과는 다른 문화계통이라는 점에서 연해유형으로 분리하였다. 같은 시기는 신석기시대 후기인 흥성하층(3000~2500)을 보고, 사실상 자이사노프카 중층 시기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신석기시대 말기는 금곡문화(2500~2000)와 자이사노프카 중층의 늦은 단계 , 농포리, 자이사노프카1東風유형(흑룡강 지역에 산견되는 문화들, 일부 자이사노프카 영향이 보이기 하지만, 다소 다름) 등으로 보았다. 여기에 그 동안은 공백지역에 가까웠던 조금 더 북쪽에 위치한 [우수리강유역]에 대해서는 刀背山유형(3000년 이전)을 설정하고, 자이사노프카 초기문화와 유사성이 많다는 점을 강조했다.




<임운 선생님의 기조강연 " 압록강, 두만강, 우수리강의 신석기문화"로 관심은 중국을 넘어서 북한과 러시아를 커버하고 있다.>



<북경대 이수성 교수의 '지구적 관점에서 본 중국의 염업고고' 내용의 맞고 틀리고는 차치하고 세계사적 관점에서 중국의 소금고고학을 논한다는 자체가 부러웠을 따름이다..>



 그 다음으로 주요한 포인트인 흥개호 일대의 신개류문화는 주지하다시피 러시아 일대의 콘돈문화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임운 선생님의 정보는 1970년대의 러시아 고고학이 세워놓은 편년체계에 아직도 근거한 듯 했다. 말르이세보문화는 콘돈문화보다는 이르기 때문에 도배산문화는 신개류 쪽에 가깝다고 보았다. , 임운 선생의 견해는 新開流(콘돈) - 말르이세보(=보즈네세보)가 된다. 신개류문화의 문양은 魚皮를 모방했다는 오클라드니코프의 옛 견해를 계속 주지하면서, 보즈네세노프카문화 보다는 콘돈문화를 주요한 표지문화라고 보는 점이 기존의 견해와는 다른 점이었다. 이로써 임운 교수님의 편년 체계는 오클라드니코프의 콘돈문화가 발굴과 보고서 간행시기인 1970년대까지임을 알 수 있었다.

 임운 교수의 기조강연은 이제 북방 초원지역에서 다시 극동과 북한으로 눈을 돌리는 길림대학 고고학의 현 주소를 보여준다. 길림대에서 한국에 유학한 학생들도 많고, 이미 3명의 교수를 배출했다.(성경당, 조준걸, 손로) 이들은 공통적으로 남한의 고고학이 아니라 중국 동북지방과 한반도의 관련성에 관심을 둔다는 공통점이 있고, 자연적으로 북한 고고학에 관심이 모아진다. 최근 길림대 잡지인 변강고고연구와 이번 발표에 북한과 중국 동북지역 교차편년에 대한 논문이 부쩍 많아진 것이 그 좋은 예다. 하여튼 임운 선생님의 결론은 원시 고토기의 발생과 함께 동북지구 신석기시대에 대규모의 사람들 이동이 있었고, 압록강, 두만강, 우수리강 3강유역의 특수한 압인문 토기류에 따른 문화권의 성립, 그리고 신석기시대 이래로 한반도 북부지역과의 연관성(주로 청천강 이북지역이 될 듯)으로 요약된다.

 이후, 본 발표 때에 임운 교수님은 이후 내 발표도 경청하시고, 나에게 직접 오셔서 말르이세보문화와 여러 신석기에 대한 질문을 하셨다. 나는 수추섬에서 3년간 조사했던 경험도 덧붙여서 오시포프카-마린스카야-말르이세보-보즈네세보문화로 이어지는 최근의 편년체계를 설명드렸고, 절대연대도 선생님께서 아시는 것보다 훨씬 올라간다고 설명드렸다. 기조강연 때에 설명하신 원시 고토기 얘기도 언급하면서, 말르이세보가 기원전 3000년 경이라면 원시고토기시기 이후 약 5000년의 공백이 생긴다는 설명을 하니 그 자리에서 동의를 하셨다. 그리고 그 이후 폐막식 때에 총평시간에 가장 먼저 나와의 대담을 소개하며, 즉석에서 당신의 기조강연에서 틀린 부분이 있으니 이를 이번에 바로잡는다고 너무나 순수하고 담백하게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닌가. 수많은 학회 참석자 중에서 내 연구를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황송한데 말이다. 하여튼 그 순수한 말씀과 태도에 감격할 따름이었다.



2. 일반 발표

 발표는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로 나누어서 변강고고연구소의 두 강의실에서 이루어졌다. 때마침 내가 속한 청동기시대 분과는 지난 201112월에 내가 특강을 했던 그 강의실이었다.

 이번 학회에서 내 발표주제는 박사논문의 일부였던 중국 북방의 동검(花格劍 또는 秦式劍)에 대한 것이었다. 1999년에 러시아에서 출판했지만, 중국에서는 전혀 관련 연구가 없길래 이번에 발표를 기점으로 보완해서 중국에서 출판할 예정이었다.

 근데 놀랍게도 같은 주제로 올해 상반기에 이미 길림대의 杨建华井中伟 두 교수가 논문을 낸 것이 아닌가!!(각각 [考古與文物][邊疆考古硏究]와 같은 주요 저널에 실렸다). 1차적으로는 올 초에 미국에 있다 한국에 오는 혼란기였으니..최근 논문을 챙기지 못한 내 잘못일 것이다. 현지에서 그 사실을 알고 부랴부랴 나도 파워포인트에 1999년에 러시아에서 출판한 논문을 삽입했다. 서로 접근방법은 다소 다르지만 어차피 문화사적 시공간적 편년이야 크게 다를 게 없으니 다시 보완해서 중국에서 출판할 생각은 접었다.

 한편, 내 발표 다음인 산동대학의 왕청 교수는 고조선의 모피무역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를 했다. 내가 201112월에 출판한 논문과 방법론이나 접근과정이 거의 똑같았다. 올해 말에 투고할 예정이라고 하길래, 내 논문을 보여주니 허탈한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내 논문이 고조선 쪽을 중심으로 했으니 당신은 제나라 산동지역의 무역항에 좀 더 중심으로 논지를 전개할 생각이란다. 왕청교수는 동물뼈의 분석으로 모피의 산지를 분석한 것까지는 나와 유사했으나, 상당부분은 산동반도 안의 斥山의 위치, 그리고 산동반도의 비파형동검 관련 유물에 대한 연구를 주로 했었다.

 우리 분과의 발표에서는 그 외에 한국학자들의 발표는 대부분 한국말로 이루어졌고, 외국학자들의 발표는 영어를 거쳐서 통역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중국학자들과의 활발한 토론으로 이어지지는 못했었다.

 어쨌든, 이번 발표회는 나에게 큰 의미로 다가왔다. 1990년대까지 외국의 중국학자들은 중국학자들을 자료의 제공자 정도로만 보았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최근 선진국들의 중국을 비롯한 동방학에 대한 지원과 연구자는 급감하고, 반대로 중국은 풍부한 신자료와 인적 자원으로 급성장한다. 최근 중국의 연구자와 연구가 기하급수로 증가하면서 외국학자로서 평범한 연구는 결국 중국의 연구에 묻힐 것이라는 불안감이 든다. 중국과 차별화되는 자신만의 연구시야와 방법론이 없다면 외국학자들의 경쟁력이 없다. 아직도 중국학자들과 1:1로 비교한다면 그리 밀릴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그들에겐 풍부한 원자료에 대한 접근성, 인적자원, 연구비 등이 모두 풍부하다. 우리가 여러 가지 핸디캡을 이기고 소수정예로 그들과 경쟁하여 자신들만의 의견과 연구를 할 수 있을까 무척 걱정이 된다.

 더욱이 문제는 한국 고고학계에서 동북아시아 고고학으로 내 다음의 학문 후속세대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내 바로 다음세대(현재 30)는 대부분 현장에서 구제발굴에 종사하며 고고학을 연구하는 그룹이다. 물론, 끊임없이 동북아시아 곳곳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만, 솔직히 각 지역에 모든 시간을 투자해도 될까 말까 할 정도로 각 지역의 고고학연구가 엄청나게 발달하고 있는데, 한국학자가 부전공으로 동북아고고학에 접근한다는 것은 멀리 본다면 결국 한계에 부딫힐 것이다. 게다가 연구자마저 앞으로 줄어들 테니, 앞으로 동북아고고학은 일본과 마찬가지로 해외학계와 경쟁하고 자신의 목소리 내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국내용으로 국내학계를 위해서만 존재할 가능성이 크다.
 


 두 번째 이번 연구회에서 주목할 부분은 북한인 듯하다. 이미 러시아나 몽골에 대한 연구들은 있어왔고, 남한의 경우는 유학생은 많지만 그리 많지 않다. 사실 중간에 북한이라는 연결고리가 빠진 상태에서 남한만의 연구는 그 한계가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초원지역의 관심과 함께 북한에 대한 연구도 많아진다. 각 지역의 연구를 지방 성급 연구소에서 담당하기 때문에 자연스레 대학의 고고학은 외국고고학 내지는 교류의 고고학으로 전환되는 시점인 듯하다.

 여담으로, 한국학자는 6명이 갔는데, 발표주제는 주로 남한 고고학이었다. 물론, 남한에서 남한고고학을 한다는 것은 당연하지만, 다른 학문이나 한국의 국력에 비해서 여전히 한국 고고학은 지나치게 자국의 틀에 갇혀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내를 위한 외국고고학이 아니라, 현지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는 거시적인 고고학을 해야하지 않을까. 한국의 고고학이 아무리 뛰어나다한들 유적 자체가 그렇게 세계적으로 호소력이 있는 것은 아니니, 어쨌든 우리의 길은 방법론과 시야가 아니겠는가.


 <왕청 교수의 발표, 구체적으로 모피의 집결지인 척산이 어딘지를 비정하고 있다.>




II.
유적의 답사

 2일에 걸친 발표는 2일째 오전에 끝났다. 그리고 곧바로 유적의 답사로 이어졌다. 5시간 정도를 가서 대안에 도착했다. 중국답게 잘 조직된 발굴단의 일사불란한 조직, 그리고 저녁만찬이 이어졌다. 다음날 차에 나누어 타서 대안 길림시 대안 下木戛套 유적을 보았다. 먼저 유적 발굴 공작참으로 갔는데, 이는 현지의 소학교를 이용해서 기지로 만든 것이었다. 학교의 발굴실습장인 만큼 다양한 시설이 있었다. 여기에서 걸어서 30분 정도 거리에 新荒地라는 호수가 있고, 그 근처에 하목가투, 상목가투 등 호숫가에 다량의 유적이 존재했다, 이 유적에서는 신석기시대 이른 단계부터 한서2기까지의 문화가 일렬로 분포했다. 발굴장의 분위기는 왕립신 선생의 발굴팀을 강조하는 듯 상당히 정갈하게 만들어졌음, 발굴을 수많은 과정이 아니라 일종의 축제이며 자신의 세력과시를 하려는 중국의 분위기를 보여주었다. 지난 2000년대 초반에 발굴한 또 다른 표지유적인 井溝子를 발굴했을 때만 해도 발굴수준은 그리 높지 않았었다고 하는데, 이제는 다양한 외국의 기술과 인적, 물적 자원을 동원해서 대내외로 과시하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특히 신석기시대 앙앙계와 초기 신석기시대의 유적도 제법 볼만했다. 현장에서 동물뼈가 일렬로 놓여진 구상유구가 많이 발견되었다. 이를 동물고고학자 陳全家 교수는 제사갱이 아니라 결혼식과 같은 축제의 일환이라는 견해도 현장에서 피력하기도 했다.

 전반적으로 유적지의 문화층은 매우 얕아서 표토 바로 밑에 모든 유구들이 분포해있었다. 이는 퇴적이 거의 되지 않는 寒帶의 특징으로 수 천년의 시간동안 이 지역이 반복적으로 사용되면서 제사유구의 역할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곳곳에 놓인 무덤 유적들에 보이는 매장의 특징들, 특히 아이들과 같이 매장된 여성의 무덤(한서 2기문화) 등은 무척 인상 깊었다.

 하목가투 유적에서 다시 버스에 올라서 내몽고 통료시로 향했다. 무려 450km에 이르는 장거리를 좁은 중국의 버스로 달려야하는 힘든 일정이었다. 그나마 길이 좋다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우리의 숙소는 通遼博物館 바로 앞이었다. 드디어 통료박물관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었었지만, 결국 볼 수는 없었다.

 다음날 일찍 哈民유적을 향했다. 2012년 중국 10대발굴로 선정된 말이 필요 없는 최근에 가장 hot~한 홍산문화유적이다. 원래 길림대 공동발굴이었다가 현재는 내몽고연구소가 전담하는 식으로 바뀌었다. 워낙 중요한 유적이 된 탓에 내몽고연구소에서 직접 관리하면서 공작참을 건설했다. 하지만 우리가 도착했을 때에는 유물들은 거의 볼 수 없었고, 인골들이 묻혀있는 주거지를 포함 전면적으로 복원하는 작업이 진행 중이었다. 향후 대형박물관을 만들 계획이니 아마 진입로부터 시작해서 중국 특유의 거대한 박물관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주거지들은 모두 복원처리 과정이어서 흙에 덮여있거나 아세톤 냄새가 너무 짙게 배어있어서 제대로 유적관람이 불가능했다. 수십 개의 인골이 묻혀있는 주거지도 10여초 정도만 볼 수 있었다. 외국 학자들을 데리고 오는 답사인데도 정작 현장에서는 아세톤 처리 때문에 거의 볼 수 없었던 바, 나에게 직접 불만을 토로하는 외국학자들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400km를 달려서 고작 흙에 덮여있는 유적을 본다니 기가 막혔을 것이다. 어찌보면 이는 길림대 고고학과의 행사로서의 한계라고도 볼 수 있다. 현재는 길림대는 빠지고 내몽고연구소에서 발굴을 하고 있고, 내몽고연구소의 직원들 중에서 길림대 출신의 비율이 갈수록 줄어들기 때문이다. 작년에 내몽고문물고고연구소와 길림대가 공동으로 주최한 학술대회와 비교되는 부분이다.

 유적을 답사하고 점심을 먹기 위해 다시 통료로 왔고,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통료시 박물관을 들렀지만, 아쉽게도 11:30~14:00까지 점심시간으로 문을 닫은 상태였다. 바로 옆에서 묵었는데도 박물관을 볼 수 없었다는 기가 막힐 뿐이었다. 한국학자들을 사실 많은 외국 참가자들이 이런 부분들을 보면서 아주 아쉬워할 것이 분명하다.

 하여튼 통료에서 대부분의 일행들은 서로 헤어졌고, 우리는 다시 장춘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약간 돌아가지만 길이 좋은 고속도로 대신에 마을들을 가로지르는 옛 도로를 택하는 바람에 300km남짓한 길을 7시간이 넘게 걸리는 고행이 되었다. 그리고 우리 일행은 곧바로 길림으로 가는 動車를 탔다. 11시 가까워서 도착을 할 수 있었다.



<길림 대안 하목가투유적의 길림대 고고학과 실습생들>



<내몽고 하르친 하민 유적>



III. 길림시와 심양

1. 21일의 길림시 답사

 21일 아침부터 길림시 유적과 박물관 탐방에 나섰다. 사실 중국 북방을 수십번 다녔건만 정작 길림시는 처음이었다. 이제는 중국의 어느 도시를 가도 서로 비슷비슷한 모습이기 때문에 도시의 풍광이랄까 사람들의 모습에는 큰 감흥은 없었다. 다만, 길림시박물관의 유물들은 궁금했다. 예전에 사진으로 보았던 길림시박물관과는 달리 새롭게 개관하여서 서단산문화의 유물들을 제법 볼 수 있었다. 비교적 고고학유물은 적지만 한번은 꼭 가볼법 했다.

 현장답사지로는 시간이 촉박한 관계(저녁에 곧바로 심양시로 향해야했다.)로 길림시의 대표적인 유적인 모아산과 용담산성만 돌아보기로 했다. 두 유적은 길림시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송화강을 건너서 동쪽에 병풍처럼 둘러싼 산맥들이다.

 먼저 모아산 부여고분의 유적으로 향했다. 모아산은 우리나라의 사적에 해당하는 국가문물보호구로 지정되어 있지만, 실제 보존상황은 참혹하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제대로 표지판은 없어서 실제 무덤의 표지석은 찾을 수 없었고(제대로 돌아볼 시간도 없었던 탓도 있었겠지만..) 조차 없고, 1950년대에 조사된 유적의 정확한 위치는 모르고 1989~1997년 사이에 발굴된 200여개의 무덤에 대한 정보도 제대로 공개되지 않았다. 이 유적은 여러 정황으로 볼 때에 부여의 왕성에 부속한 무덤이 분명하니, 더더욱 아쉽다. 게다가 최근에 다시 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에서 발굴을 재개했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내부사정(연구소의 이사)로 발굴이 지지부진하다고 들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용담산성으로 갔다. 이미 완전히 유원지 공원으로 정비가 되어서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1950년대에 李文信이 발굴한 자료에 따르면 한나라 시기의 유물이 있어서 부여의 유적일 가능성도 있다고 하는데, 일단은 고구려시기의 것들이 많은 편이라고 했다. 성벽 일부 정도만 확인할 수 있었다. 황당한 것은 용담산성의 입구에 부여의 상징이라고 안테나식 동검(촉각식검병의 세형동검)을 거대한 크기로 세워놓은 것이 아닌가. 현재 부여의 실체는 제대로 밝혀진 것도 없다. 물론, 부여의 영역 내에 유목계의 집단이 있음은 분명하고, 촉각식 동검도 그 안에서 쓰였다. 하지만 이것을 상징화하는 것은 참 앞뒤가 안 맞는다. 마치 경주의 대릉원에 동해 추암동 고분에서 출토한 금동관을 걸어놓는 격이었다. 지방정부가 경쟁적으로 문화재들을 보수하고 기념물을 건립하면서 제대로된 역사고증이 없이 만들어놓는 경우가 비일비재한데, 여기에서도 예외는 아닌 듯 하다.



<길림시내 지도와 유적, A가 모아산유적>


 짧은 답사를 뒤로 하고 심양으로 향했다. 요령성고고연구소의 지인들과의 저녁식사 약속이 있기 때문이었다. 뜻밖에도 무순시박물관장이었던 肖京全선생을 만날 수 있었다. 초면이지만 진즉에 많은 자료들로 알던 분이었다. 퇴임하셨지만 여전히 학문에 대한 열정도 높고 건강하신 듯 해서 다행이었다. 호텔은 요령성박물관 옆의 요령성대극장에 잡아서 여러모로 편했다.

 

2. 22일의 요령성 박물관 답사

 출국에 앞서서 요령성박물관을 다시 복습하기로 했다. 20066월에 개관식날 온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7년이 흘렀고, 그 사이에 몇 번을 왔는지 기억도 못할 정도로 자주 왔었다. 그런데 벌써 요령성박물관은 새로운 박물관으로 이전을 준비한다. 바로 옆의 길림성과 흑룡강 성은 제대로 된 박물관 마저 없다는 것과 대조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현재의 박물관은 이후 심양시박물관으로 바뀐다고 한다. 아마도 심양시 안에 있는 청나라관련 유적들을 다 모아놓고 일부 유적으로 묶여있는 곳을 개발하려는 의도가 있는 듯 하다. 내년도 중에 신 박물관이 개관한다고 한다. 아마 그렇다면 정가와자 유적의 유물을 비롯하여 그동안 묵혔던 여러 유물들을 한번에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해본다. 하지만 점진적으로 유물들을 옮기던 중이어j서 요령성박물관의 전시실들은 상당후 문을 닫았고, 열려있는 곳들도 유물이 많이 없고, 전혀 업데이트가 되지 않아서 거의 폐점분위기인 듯 했다. 1층의 묘비실을 비롯한 몇 실은 아예 닫았고, 요하문명전도 많은 유물들이 빠져나간 상태였다.

 부경대에 입사하던 그 해에 처음 요령성박물관을 보며 황홀해했었고, 요령지역의 고고학에 대한 많은 지식을 넓힐 수 있었다. 이제 그 박물관도 문을 닫고, 나도 서울로 직장을 옮겼다. 그리고 나를 도와주며 내 밑에서 공부하던 이광명 선생도 이제 영남대로 적을 옮겼다. 바쁘게 2시간 남짓 요령성박물관 돌아보며 나름 치열하게 살았던 지난 7년간의 중국 답사들을 뒤돌아보며 정리했다.

 이제 중국의 고고학은 빠르게 변하고 있고, 새로운 연구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과거 막연하게 자료만을 공급하던 수동적 자세에서 빠르게 벗어나고 있다. 그와는 반대로 한국의 고고학은 짧은 구제발굴의 성황기를 10여년 남짓 보내고 급격히 침체하고 있다. 외국학자들이 중국고고학을 제대로 follow-up하며 그들과는 다른 새로운 시각에서 연구를 내놓을려면 학부때부터 전문적인 교육을 받으며 자신들만의 방법론을 개발해야할 것이다. 하지만 문화교류와 거시적인 시각에 대한 말잔치만 많을 뿐 정작 차분하게 각 지역의 전문가들이 설 땅은 좁아지고, 능력있는 젊은 학자들의 양성은 힘들어지고 있다. 수없이 다녀봤던 심양-인천 간의 비행기의 짧은 비행시간에 너무나 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길림시 박물관의 미송리형토기와 서단산문화유물들>


<용담산성의 조형물, 스키타이계의 영향을 받은 촉각식 동검이  부여의 상징으로 되고 있었다.>


 
필진 : 강인욱 | 등록일 : 2017-01-20 16:43:00 | 조회 : 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