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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인들은 어떤 글자를 썼을까 | 연구소

초원에서 대제국을 이룬 흉노를 비롯한 유목민들은 전통적으로 글자를 쓰지 않고 중요한 약속은 구두로 전했다고 한다. 중요한 조약이나 맹세를 할 경우는 조약문서 대신에 백마를 희생에 바치며 제사를 지내는 의식을 지내는 것으로 갈음했다. [염철론]에는 뼈로 각목을 한다고 되어있고 [후한서] [남흉노열전]에서는 죄인의 경우 선우에게 구두로 보고할 뿐 따로 장부를 남기지 않는다고 되어 있다(主斷獄聽訟當決輕重口白單于無文書簿領焉).

애매한 역사기록을 실증하는 것은 고고학자의 몫이니, 실제 유물에 나타나는 그들의 흔적을 보자. 나무에 각목을 한 예는 아직 발견된 바가 없으며, 암각화에도 의심되는 부호들은 그들이 간간히 보이지만 그들이 흉노 시기인지도 불분명하고, 확실하지 않다. 대신에 한문자료를 비교적 풍부한 편이어서 사방에서 많이 출토되었다. 흉노유적에서 출토된 한문관련 자료는 이미 학술논문으로 발표했으니, 여기에선 생략하겠다(한국상고사학보 75, 20122).

먼저, 글자라는 것의 정의를 생각해보자. 글이라는 것은 상징적인 기호를 말하기도 하며, 또 일정한 글자들이 문법체계를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 사인처럼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니기도 하고, 일정한 규칙을 이루어 글을 이루는 경우가 존재한다. 고고학적 유물로는 주로 전자의 것이 출토된다. 토기나 건축물에 장인또는 사용자를 표시하는 기호를 남긴다. 이를 중앙아시아에서는 탐가라고 한다. 이렇게 문법이 아니라 하나의 상징적인 기호로 사용되는 탐가는 흉노는 물론 고대 유목사회에서 널리 보인다.

하지만, 단순한 기호가 아니라 몇 자의 글자가 문장을 이루어서 문법을 이루는 글자의 예가 기원전 7~3세기 중앙아시아와 몽골의 스키타이시대에서 보인다 

몽골 서부 스키타이시대(기원전 6~3세기)대의 고분인 울란곰(또는 찬드만)고분 23호에서 출토된 토기에서도 발견되었다. 이 글자를 건강을 위해 마셔라로 번역한 바 있다. 즉 이 토기에 성스러운 술 또는 우유를 담았던 그릇으로 해석한 바 있다. (노브고르도바, 고대의 몽골 1989 284) 알타이의 파지릭 문화에서도 무덤에 부장된 토기 안에서 우유 성분과 그것을 휘젓는 스트로도 출토된 바 있다(폴로스막 2001 우코크의 기마인). 전통적으로 유목민은 우유를 생명의 원천으로 해석했으니, 이러한 번역은 제법 맞는 듯 하다.

또 다른 예는 카자흐스탄 이식고분에서 출토된 은제기명의 바닥에 새겨진 것이다. 이 글자는 외견상 고 투르크문자와 유사한 글자가 2줄에 걸쳐서 26자나 쓰여져있다. 이 정도 글자가 쓰여진 것은  단순한 기호가 아니라 문법체계를 이룬 문장임을 의미한다. 이식고분은 중앙아시아의 이란계민족인 사키인들이 남긴 것이다. 고언어학자들은 올혼-예니세이의 투르크어와 비교하는 경우가 많은데, 중앙아시아에 비슷한 문자들이 제법 발견된다고 한다.


카자흐스탄 이식고분 출토의 그릇 바닥에 새겨진 글자. 단순한 기호가 아니라 체계적인 문자체계를 이룬 증거.


흉노 왕족의 고분인 골-모드 2호의 뼈주사위. 아마 점복의 도구였던 듯 하다.

노용울(노인울라) 20호분의 흉노 왕의 기호

약 기원전 20~15세기 경의 ​하가점하층문화 성터유적인 삼좌점에서 발견된 삼족기에 새겨진 부호.

이렇게 하나의 문장으로 이어지는 글자와 달리 흉노의 글자는 문장을 이루기보다는 상징적인 부호(탐가)로 나타난다.  흉노제국의 안에도 투르크계는 있지만, 선우를 비롯한 왕족들은 몽골인 계통이기 때문에 흉노의 귀족고분에서는 투르크 룬문자 계통이 출토되지 않는다. 흉노의 글자는 문법을 이루는 글이 아니라 자신의 권위를 상징하는 독특한 부호를 선우와 귀족들의 그릇에 새겼다. 그 좋은 예가 흉노 선우의 무덤인 노용-울 제 20호 고분에서 발견된 한나라의 왕실에서 들여온 황실용 칠이배(손잡이가 있는 칠그릇)가 있다. 이 칠이배의 바닥에는 철필로 자잘하게 이 칠기를 만든 중국 장인들의 이름과 날짜가 새겨져 있다. 혹여 불량품이 나오기라도 한다면 책임을 묻는 용도였을 것이다. 매해 정초에 흉노의 사신이 중국을 방문하면 때에 맞추어서 중국 황실은 엄청난 양의 재화를 주었고, 이 칠이배도 그 안에 포함된 것이다. 왕실끼리 주고받은 이 소중한 칠이배의 바닥에는 마치 한문 를 갈겨쓴 듯한 또 다른 기호가 새겨져있다. 중국 장인들의 글자는 거의 보이지 않게 굽에 썼다면, 이 글자는 누구나 보란 듯이 칠이배의 바닥에 큼지막히 적혀있다. , 왕이 쓰는 어용이라는 사인을 한 셈이다. 같은 고분에서는 또 다른 칠기에서 비슷한 기호의 사인이 새겨졌는데, 약간 형태만 다를 뿐 거의 같다. ''자 같은 기호는 또 다른 흉노 왕족고분인 골모드-2호에서도 발견되었다. 이미 도굴이 되어서 유물이 많이 없긴 하지만, 다행히 지골(손가락뼈)로 만든 뼈 주사위 30여점이 발견되었는데, 여기에서도 이 왕의 기호가 발견되었다. [염철론]에 기록된 뼈에 각목을 해서 글씨를 새긴다는 기록이 고고학적으로 증명된 것이다. 이런 몇 예를 종합하면 이 기호는 흉노의 왕족을 나타내는 것인 것 같다. 마치 태양이 떠오르는 듯한 형태처럼 사람의 모습을 표현했으니, 왕을 하늘의 아들로 표현했던 흉노인들의 텡그리’가 기호로 표현된 것이다. 왕과 태양을 동일시하며 글자화 하는 것은 고대 수메르어(딩기르), 한자 등 대부분의 고대 기호에서 보이는 공통점이다. 사실 왕이나 조직의 우두머리를 태양으로 표시하는 풍습은 기원전 2천년기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에 널리 퍼져있었던 전차의 문화인 안드로노보문화에서 태양을 상징하는 자를 사용했던 것과도 이어진다. (히틀러 나치들의 상징인 스와스티커역시 이 기호에서 따온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기호는 멀리는 신석기시대의 유럽과 근동지역의 토기에서도 보이니, 그 문양의 기원은 의외로 광범위하다. 그러고보니 이렇게 자신의 신분을 기호로 표시하는 전통은 이후 고구려와 발해에서도 보인다. ‘자의 표시가 고구려와 그 영향을 받은 주변 지역에서 널리 퍼져있음에 기인한 최인호의 소설은 이 고구려의 기호에 기인한 것이다. 하늘 또는 하늘의 아들(천자)의 기호로 태양을 나타내는 기호를 쓰는 전통을 바로 흉노에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하늘의 기호가 하가점하층문화의 석성유적인 삼좌점 출토의 토기편에도 발견된 바 있다. 하긴, 중국 산동성 대문구문화 출토의 토기편에도 태양을 의미하는 기호가 발견되었다. 아마 서로 혈연적 관계가 있다기보다는 태양, 하늘, 달 같은 것을 기호화 하는 과정에서 비슷하게 나오는 것일 수 있다.

흉노 이후로는 이 기호는 멀리 동유럽 다키아 지방의 사브로마트 지역에서 발견된 탐가에서도 발견된다. 바로 초원을 통한 인적, 물적 교류뿐 아니라 이데올로기의 공유가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 이다.

    

다키아 지방의 여러 탐가들, 흉노의 것과 상당히 유사하다.

정리하면, 스키타이~흉노 시대 북방 초원지역에서는 적어도 2계통의 글자체계가 존재했었다. 이란어족 및 투르크어 계통은 일정한 문법체계를 갖춘 글자를 사용했으며, 몽골계통인 흉노는 문법체계를 갖춘 글자가 아니라 자신의 신분을 나타내는 기호를 선호했었다. 이렇게 놓고 보면 흉노가 글자를 쓰지 않았다는 중국의 기록도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흉노의 글자는 의사소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분을 나타내는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돌궐계와 몽골계가 혼재한 흉노제국에서는 한자를 포함하여 여러 문자 체계가 존재했었다. 그리고 흉노는 필요한 때에 적절하게 한자라는 문자체계를 아주 적절하게 중국과의 외교관계에서 활용했다. 중국계 망명인이 대신 써준 것이라 할지라도 (예컨대, 환관 중항열의 역할이 대표적임) 선우는 중국과 고급 중국어를 주고받았다. 선우 자신이 직접 한문을 쓸 수 있었는지는 모른다고 해도 적어도 선우 자신이 글자의 중요성과 그 의미는 알았음이 분명하다.

흉노는 글자를 모른 것이 아니라, 알고 있지만 쓰지 않았던 셈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운영하는 초원제국의 시스템에서 그리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글자는 훌륭한 정보의 보고이지만, 그 정보를 체계적으로 관리하려면 많은 인원과 공간이 필요하다. 실크로드를 예로 들어보자, 한나라 시기 이 지역에 진출한 많은 둔병들은 바로 이 기록과 그 보관에 너무나 많은 시간과 인력을 소모했다. 하루하루 공급된 물의 양과 같은 시시콜콜한 일들을 기록해야했고, 기록과 어긋나는 일이 있으면 그 일의 경중에 따라 엄벌에 처했다. 실크로드의 사막지역에서 초소를 한번 옮기려면 병기들을 옮기기도 벅찬 대 몇 수레 분량의 목간을 실어 날라야했을 정도였다. (중국 중앙정부로서는 이렇게 귀찮은 문자체계를 유지함으로써 자신들의 실질적인 지배가 닿지 않는 변방지역으로 파견한 사람들이 다른 마음을 품지 않고 일에만 집중하게 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반면에, 흉노와 같이 지속적으로 이동하는 사람들이 광활한 지역을 제국으로 만든 경우 문자로 그 영역을 관리한다는 것은 비효율적일 수 밖에 없었다. 복잡한 문자 체계 대신에 그들은 명령을 지극히 간단화해서 구두로 했고, 각 조직을 십부장-백부장과 같은 십진법에 기반을 둔 체계로 단순화 시켰다. 대신에 글자는 행정적 통치를 위한 도구가 아니라 제례와 신분을 상징하는 상징의 도구로 계속 활용되었다. 왕이 쓰는 물건, 암각화, 심지어는 그들이 키우는 가축에 기호를 넣음으로써 글자는 그 역할을 계속했던 것이다.

흉노가 고도의 문자체계를 도입하지 않은 것은 초원민족들의 오랜 실용적인 적응력과 사회체계를 만들었던 경험에서 나온 것 이다. 흉노는 발달된 문자에 기반한 행정조직과 관료제를 버렸기에 빠른 속도로 초원의 제국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자신의 기록을 직접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수천년이 지난 지금도 그들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지우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그들을 변호해주는 기록은 고고학이니, 유물이 말해주는 또 다른 텍스트로 우리는 흉노의 재평가를 계속하고 있다. 세종대왕의 한글은 놀라운 발명품이긴해도, 그 이전의 초원국가들은 간편한 표음문자 체계의 글자를 만들어 써왔음을 상기해야할 것이다. 동아시아에서 중국 이외에는 전혀 글자가 없다는 식의 선입견은 재고되어야 한다. 넓게 본다면 한글은 지금 남아있는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남은 표음문자이고, 그 원류는 초원제국에서 찾을 수 있다. 흉노의 글자 체계를 한글날에 생각해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필진 : 강인욱 | 등록일 : 2017-01-20 16:31:03 | 조회 : 2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