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 그 연구의 역사
한국고대사, 유라시아를 품다

인삼으로 이어진 고대의 한국과 유라시아 | 연구소


I. 인삼의 기원은 중국인가 고조선인가.
 
인삼이라는 이름이 중국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처방전에서 들어가는 시점은 후한대로 고조선의 멸망이후 만주 일대의 특산품들이 본격적으로 중국에 소개되는 이후이다. 인삼의 기원에 대해서는 중국 북방의 태행산맥의 上黨지역이라는 설과 한반도 만주 일대라는 설로 나뉜다. 전자는 일본학자 이마무라 토모가 일제강점기에 출판한 [인삼사]에서 주장한 것으로, 문헌에 등장하는 蔘을 곧 현재의 인삼으로 간주한 경우다. 하지만 그의 주장에 대해서 한국학자(양정필, 여인석) 등은 이른 기록의 애매함을 지적하고, 사실상 인삼은 한국과 만주일대라고 밝힌 바 있다. 나역시 후자에 동의하는 바이다. 설사 인삼의 존재가 그 이전에 중국 북방 일대에서 생육했다고해도 약초로서 이용된 것은 서기 1세기 이후이다. 게다가 엄청난 효능으로 만병통치약처럼 사용되는 후대의 인삼과 달리, 이 시기 중국에서의 인삼은 사용 예가 무척 적으며, 한자만으로는 실제 인삼인지도 불분명한 경우가 많다. 이러한 정황은 사실상 인삼이 중국 자생이 아니라 중국 동북지역 어딘가에서 수입되어오기 시작했고, 그 양이 아직은 제한적이어서 약재로 널리 사용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중국에서 이 인삼이 등장하는 시기는 고조선이 한나라에 의해 멸망하고 낙랑군이 세워지는 시점과 부합한다. 지난 연구에서 나는 고조선은 전국시대~한나라때에 백두산 일대의 모피를 중국에 되파는 중계무역의 거점으로 활동했음을 주장한 바 있다(고조선의 모피무역과 명도전). 그러한 원거리 중계무역이 모피만을 대상으로 하지는 않았을 것이며, 백두산 일대의 다양한 특산물들을 거래했을 것이다. 백두산 일대는 모피뿐 아니라 인삼의 산출지로 유명한 바, 중계무역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던 고조선이나 동북지역 여러 집단들에게 인삼은 매력적인 특산물이었을 것이다. [의사학] 13권 1호에 실린 양정필과 여인석의 논문 “조선인삼의 기원에 대하여”에서 인삼의 효능이 중국에서 널리 알려져있지만, 그것을 구하기 어렵기 때문에 중국 본토내에서 비슷한 인삼을 찾아 대용하면서 인삼이 중국의 본초학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했다고 주장한 것은 이러한 정황과 관련하여 상당히 설득력이 있는 듯 하다. 고조선이 만들어놓은 교역로에서 발단한 인삼은 고구려와 백제 등의 나라가 중국에 선물하는 진상품으로 조금씩 등장한다. 고구려와 백제의 인삼이 유명하다는 기록이 6세기경부터 등장하며, 신라는 7세기경부터 등장한다. 인삼은 8세기에 본격적으로 신라와 당나라의 교역품으로 등장한다. 삼국사기에는 통일신라시대 시기에 당나라에 선물을 보낸 6건의 인삼관련기사가 등장한다. 고조선멸망직후 상당한 기간 동안 인삼이 사서에서 사라지는데, 이는 두가지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아마도 인삼을 제대로 건조하여서 장기간 보존하는 방법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끔 상한 것이 있을수도 있다.(누르하치가 여진의 인삼을 건조하는 법을 개발하여 명나라와의 교역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한 것이 그 예임) 심지어는 당나라에서 인삼을 받지 않았다는 기사가 있다. 두 번째로는 인삼의 주요산지가 되는 백두산 고원지대에 말갈세력이 득세하거나 지배력이 약화되었기 때문일 수 있다.
 

II. 발해로 이어진 인삼의 채취

한국의 인삼은 발해가 성립되면서 새롭게 인정받는다. 
 발해는 바로 시호테-알린 산맥과 백두산 일대를 장악했기 때문에 인삼의 채취 및 가공에 매우 유리하며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라의 인삼에 대한 기사가 8세기 말 이후에는 사라지고 다른 공물로 대체되는데, 바로 이때가 발해가 본격적으로 인삼의 주요한 거래자로 등장하는 시점이다. 그리고 발해의 인삼은 일본으로도 전파되었다. 일본이 8세기 초부터 인삼의 효능을 알고 구했지만, 그들이 구한 인삼이 진짜가 아닌 것을 알고 발해 문왕이 739년에 일본에게 인삼 30근을 선물한 것이 일본 최초의 인삼이다. 고조선 이래 발해에 이르기까지 인삼은 한국과 만주를 대표하는 최고의 약재였던 것은 분명하지만, 다만 기록으로만 보일 뿐 그 실체를 증명하기는 쉽지 않다. 인삼같은 귀한 약재가 하지만 하나의 단서가 있으니, 바로 인삼을 채취하는 도구이다. 귀한 약초이니 뿌리가 다치지 않게 주변을 살살 긁어서 파낼 수밖에 없으니 인삼을 캐는 도구는 거의 변화가 없다. 지금도 연해주 일대에서 인삼을 파는 도구는 양쪽으로 날이 있는 갈쿠리같은 도구이다. 지난 2014년 2월에 블라디보스톡에 유물을 조사하러 갔을 때에 평소 잘 알고 지내던 니나 레센코 박사가 조사하는 연해주의 발해성터인 니콜라예프카-1유적의 유물과 사진을 보다가 이상하게 꺾인 갈고리 같은 유물의 사진을 보았다. 책장을 넘기다 날이 양쪽으로 나있는 갈고리가 보였다. 바로 인삼을 캐는 도구가 출토된 것이다. 물론, 주변에 인삼의 흔적이 나온 것은 없고, 그 형태로만 인삼캐는 도구라고 본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보는 것이 무리도 아닌 것이, 현재 한국에서도 심마니들은 V자형 갈쿠리를 쓰기 대문이다. 어차피 손작업으로 캐는 것이니 크게 개량할 이유도 없다. 이로써 발해에서 인삼이 출토된 유적은 두 군데가 되었다. 지난 1995년에 마리야노프카 성터에서도 뼈로 만든 것이 출토된 바가 있다. 이는 한국과의 공동발굴로 “연해주에 남아있는 발해”라는 보고서로 출판된 바도 있다. 발해시기라면 굳이 뼈가 아니라 질좋고 튼튼한 철제 갈고리도 많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도 인삼을 채취할 때 삼 종류는 쇠와 상극이기 때문에 나무나 골제 갈고리 파야한다.(한국인삼사, 2002, 206페이지) 발해 출토의 갈고리가 인삼채취와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마리야노프카와 니콜라예프카-1유적 모두 발해유적치고는 북쪽에 있으며, 시호테-알린 산맥으로 이어지는 산자락에 위치한다. 즉, 농사만 짓고 살기에는 힘들었을 것이고, 모피동물이나 인삼같은 특산품을 주로 채취하고 교역하기 위해 만들었던 것 같다.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일상적이고 친숙한 건강식품이지만, 삼국시대 이래로 인삼의 소문을 들은 사방의 여러 나라에서 이것을 구하고자 했다. 발해의 인삼은 바로 발해가 주변의 여러나라와 교역할 때에 가장 선호하던 물건 중 하나였다. 발해가 추운 극동의 변방지역에서도 계속 북쪽을 성지를 만들며 확장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이렇듯 경제가치가 높은 물품들(인삼, 모피)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III. 인삼이 바꾸어놓은 중국사
 
이 인삼은 극동 주민들이 가장 애용하는 약초였던 동시에 이 지역 사람들이 중국과 교역하는 주요한 산물이 되었다. 17세기 이후 급격히 성장하던 여진 세력이 급격히 성장할 수 있었던 기반이 바로 인삼과 모피였다. 인삼은 중국에서도 널리 쓰이는 가장 인기있는 약재였기 때문에 중국에서도 인기였다. 여진의 누르하치가 생인삼을 말려서 오랫동안 보관시키는 방법을 개발해서 여진인들의 수익이 획기적으로 증대되었다고 한다(주간조선 3월24일 김시덕 교수의 글 참조). 여기에 조선에는 모피를 팔고 그 댓가로 철제 농기구를 받아서 척박한 연해주 땅에서 직접 농사를 지으며 자급경제의 기반을 다지기 시작했다. 당시 조선 정부는 이러한 철제 농기구의 판매를 금지시켰지만 결국 호랑이 새끼를 키운 꼴이 되어서 여진은 결국 중원을 제패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누르하치는 수시로 월경하여 조선의 땅에까지 침범하여 인삼을 캐는 등 인삼으로 부를 축적했고, 결국 중원을 제패하는 원동력이 되었다(김선민, 2008 인삼과 강역, ). 그리고 그때까지 경제나 영토관념이 희미했었던 여진족들은 자신들이 인삼을 독자적으로 채취하기 위하여 영토를 유지할려고 했고, 중국 및 조선과의 교역을 통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하는 등 급격히 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후 이들이 전 중국을 제패하는 청나라로 발전했으니, 인삼이 동아시아 역사를 바꾸는 원동력이었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IV. 인삼, 시베리아를 건너 유럽으로

이렇듯 동아시아를 제패한 인삼은 17세기가 되면서 그 명성이 유럽으로까지 알려지게 된다. 17세기후반에 네델란드 암스텔담의 시장을 지내기도 했던 지리학자이며 지도학자인 니콜라스 위트센이 편찬하여 1692년에 출판된 위트센의 ‘북동타타르지’에도 꽤 자세하게 언급되었다. 니시(Nisi)라고 땅 속에서 자라고 있는 인삼(그림 1)과 이미 채취한 인삼(2)의 세밀화가 소개되었는데, 그 그림을 보면 잔뿌리까지도 잘 남아있어서 장인정신(?)으로 채취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위트센의 기록에 인삼은 아주 험한 산골에서 자라는 약초였던듯 하다. “1653년에 한국에 포로로 잡혀간 외과의사 마테우스 에이보켄에 따르면 한국에서 타타리아(즉, 시베리아와 북중국)로 갈려면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매우 험한 산을 넘어야 한다. 여기에는 눈이 사시사철 쌓여있으며 호랑이도 많지만 니시의 뿌리, 즉 ‘진생’이 자라고 있다. 그래서 모든 위험을 무릎쓰고 이 인삼을 한국으로, 나아가서 일본과 중국과 교역한다.” 위트센이 ‘니시’라고 한 것은 인삼을 일본어로 표기한 것이고, 그 밖에 중국어인 진생도 표기했지만, 정작 ‘인삼’이라는 말은 쓰지 않은 것으로 보아 한국사람과 직접 접촉한 것 같지는 않다. 실제로 이후 인삼의 약효에 대해 그가 적은 정보는 중국인 의사로부터 들은 것이다. 북동 타타르지에 소개된 인삼, 사람처럼 생긴 모습을 강조해서 묘사했다.
 

V. 인삼, 시공을 초월하여 극동과 유라시아를 잇다.

 고조선에서 시작된 인삼의 채취와 거래는 이후 발해로 이어지고, 이후 중원을 제패하는 여진이 주요한 산물이었다. 바로 척박한 극동의 산악지대가 동아시아를 제패하는 비옥한 원천이 되는 데에는 인삼이 숨어있었다. 발해로 부터 본격화된 인삼채취는 다시 여진으로 이어졌고, 결국 그들이 중원을 제패하는 데에도 일조했다. 가히 시대를 관통하여 동아시아 사람들에게 널리 인삼이 아닐 수 없다. 인삼의 기원에 대해 동아시아 각국은 서로 의견을 달리한다. 근대 이후 조선을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서양의 책자였던 위트센의 [북동타타르지]에서도 인삼은 한국을 대표하는 약재로 소개되었으니, 가히 인삼은 수 천년간 한국을 세계와 이어주는 특산품이었던 셈이다. 인삼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고 실제로 야생의 인삼은 세계 각지에 퍼져있었다 할지라도 백두산 근처의 인삼이 제일 약효가 좋았고 한국사람들이 인삼을 주도적으로 가공했음은 분명하다. 가히 모피와 함께 동아시아의 교역을 잇는 핵심적인 아이템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최근 연해주 니콜라예프카 성터에서 발해의 인삼 관련 유물이 출토되었으니, 이 인삼이 발해의 주요한 경제원천이었음을 증명하는 고고학적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니콜라스 위트젠의 저서 [북동 타타르지]에 소개된 조선의 인삼. 이미 17세기에 서양에 조선의 인삼이 유명했음을 알 수 있다.
 
필진 : 강인욱 | 등록일 : 2017-01-20 16:21:07 | 조회 : 10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