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 그 연구의 역사
한국고대사, 유라시아를 품다

발해에도 기독교가 전파되었을까 | 연구소

약 50년전에 러시아 연해주의 발해절터인 아브리코스 유적에서 자그마한 진흙제 십자가형 유물이 발견되었다. 러시아 학계는 이 유물을 네스토리우스교(경교)의 것으로 규정했고, 이를 근거로  서기 9~10세기 대에 극동에 위치한 발해제국에 경교(, 기독교)가 존재했음이 러시아 고고학계에서 정설로 통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발해에 기독교인이 있었다는 뜻일까?



중국 북방지역에서 발견된 네스토리우스 십자가 몽골제국시기로 추정됨

아브리코스의 절터를 발굴한 사람은 발해고고학의 기초를 세운 샤프쿠노프 박사이다. 그는 1930년생으로 세계 2차대전 직후에 레닌그라드 대학을 졸업하고 시베리아 고고학의 아버지인 A.P.오클라드니코프의 밑에서 박사과정을 다니면서 연해주 고고학에 전념하기 위하여 블라디보스톡으로 파견되었다. 아브리코스 유적을 발굴할 때에 샤프쿠노프는 갓 30살로 바로 몇 년 전에 러시아 경내에서는 거의 최초의 불교사원 유적인 발해의 절터인 코프이토 유적을 발굴한 직후여서 발해의 불교에 대한 관심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1960년 여름에 연해주 크로우노프카강(당시는 차피고우강이라고 불리웠다)에서 발해의 절터인 아브리코스 유적을 조사했다. 그리 크지 않은 이 절터(그래서 그는 이 유적을 사원이라는 뜻의 흐람이라고 적지 않고 그보다 작은 장소인 쿠미르라고 불렀다.)에서는 예상대로 여러 불상들과 기와들이 출토되었기 때문에, 발해의 절터로 추정한 그의 예상은 잘 들어맞았다. 그런데 발굴 중에 흙덩이 속에서 자칫 그냥 지나칠만할 정도로 작고 네모난 진흙제 유물이 눈에 띄었다. 흙을 털어내자 그 위에 십자가 모습이 새겨진 것이 드러났다(샤프쿠노프 1968 [발해국의 역사와 문화]). 샤프쿠노프는 십자가의 끝이 넓어진 형태에 주목해서 동시리아식의 네스토리우스교 십자가로 규정했다. 어쩌면 꽃 삽으로 퍼낸 흙 속에서 자취도 없이 사라질 뻔한 이 진흙제 십자가 덕택에  러시아 학계에서는 실크로드의 교류를 대표하는 경교의 흔적이 발해에서도 존재했음이 정설화되었다.













그림설명 : 아브리코스 절터의 토제 십자가와 발굴평면도

1. 대진경교유행비(大秦景敎流行碑) : 서양학계가 네스토리우스교에 주목한 이유

실크로드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은 반드시 들어보는 종교가 네스토리우스교이다. 네스토리우스교는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였던 네스토리우스(368~450)이 주장한 양성설(dyophysitism)을 따르는 종파들을 말한다 삼위일체를 주장하던 서양의 기독교와 달리 예수의 신성과 인성이 분리되어서 존재했다고 생각했던 그의 사상은 431년 제 1차 에베소 공의회와 451년 칼케톤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그 후  네스토리우스교의 신도들은 동양으로 널리 퍼졌다. 특히 페르시아의 니시비스(지금의 nusaybin)를 중심으로 니시비스종파를 이루어서 페르시아를 기점으로 동방으로 널리 확산되기 시작했다. 당시 페르시아는 비잔틴의 기독교와 결별하고, 페르시아의 대세를 이루던 조로아스터교와 겨루던 시기였기 때문에 네스토리우스교가 유입되기에 유리한 조건이었다. 이후 네스토리우스교가 다시 유럽으로 유입되지는 못하고, 종교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동방으로는 인도를 거쳐서 당나라 대에는 중국에도 유입되었다.

서양에서는 완전히 무시되었던 네스토리우스교는 그 특유의 끝이 넓게 펼쳐진 독특한 모습의 십자가(일명 동 시리아의 십자가라고도 불리움) 석관으로 만든 네스토리우스교의 선교사와 신도들의 무덤이 중앙아시아, 심지어는 중국에서도 발견되면서 근대 이후 실크로드의 숨은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네스토리우스교의 동방전파를 결정적으로 증명한 것은 청나라 시기에 중국에서 포교를 하던 선교사들에 의해서 서양에 소개된 네스토리우스교의 비석이었다. 이 비는 섬서성 西安시의 大秦寺에서 세워졌던 대진경교전래비로 당나라 시기인 781년에 페르시아인 Yazdhozid(중국명 景淨)이 경교 사원인 대진사(네스토리스 교회를 일컫는 명칭)를 건립하면서 세운 비이다. 높이는 279cm, 넓이는 상부는 92.5cm, 하부는 102cm로 밑이 약간 넓게 되어 있다. 모두 1780자의 한자가 시문되었고, 시리아문자도 일부 들어가있따고 한다. 현재는 서안시의 碑林博物館에 소장되어 있다.

당나라 이후 중국 내에서 경교의 인기가 급격히 소멸되면서 대진사도 불교 사원으로 바뀌고, 이 비석의 존재 자체가 잊혀졌다. 명대인 1623년에 다시 발견되었다. 이후 청나라로 왕조가 바뀌고 중국에 체재하던 서양 선교사들 사이에도 이 비석의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다. 기독교의 흔적이 자신들 이전 1천년 전부터 이미 중국에 있었다는 사실에 고무된 선교사들은 이 비문을 판독하고 서양에 소개하게 되었다. 이후 20세기에 들어서 실크로드에 대한 관심이 서양에서도 일어나고, 고고학적 유물로도 경교의 흔적이 중앙아시아 각지에서 확인되면서 경교는 실크로드를 건너 동양으로 유입된 기독교의 상징이 되었다.





그림설명 : 대진경교중국유행비의 탁본

2. 실크로드의 잊혀진 탐험가 판투소프가 발견한 경교의 유적

19세기에 중앙아시아에서 경교의 흔적을 고고학적으로 재발견한 사람은 N.N.판투소프이다. 그는 실크로드의 개척자로 유명한 스벤 헤딘이나 오렐 스테인보다 이른 1880년대부터 러시아령 투르케스탄(현재 카자흐스탄)의 남부에서 고고학적 활동을 벌였다.판투소프가 제정러시아 시기인 20세기 초반까지 카자흐스탄~신강성 일대에서 이룬 업적 중에 특히 주목되는 부분은 투르케스탄 쿨자(현재의 신강성 이리시 일대)에서 발견한 네스토리우스와 관련한 무덤 유적이다. 판투소프는 1885년에 추이강 유역 알라메딘(Аламедин, 또는 피시페크)에서 시리아어(판투소프는 몽골어라고 보았음)와 십자가가 새겨진 석관을 발견했다. 판투소프가 헤아린 무덤만 3천여개였다고 하니 대형 공동묘지였던 듯 하다. 판투소프는 1885년에 2, 1886년에는 86기의 무덤을 발굴했다. 판투소프는 이 무덤의 외형과 출토유물들을 자세히 기록하여 보고했고, 이로서 최초의 네스토리우스 관련 무덤이 고고학적으로 조사가 이루어졌다. 중국에 전래된 네스토리우스교가 실크로드를 사 연구의 중요한 업적중 하나로 평가된다. 그렇지만, 다른 실크로드 연구와 마찬가지로, 서양 중심의 실크로드 연구에서 판투소프의 이름은 다른 러시아 학자들의 이름과 함께 거의 잊혀졌다. 다행히 그가 카자흐스탄 남부의 탐갈리 암각화와 고분을 조사할 당시의 사진들과 자료들에 최근에 공개되어서 판투소프의 재조명 움직임이 일어나고는 있지만, 그의 업적은 여전히 가리워져있다. 사실 샤프쿠노프가 십자가를 보고 네스토리우스교의 흔적을 추정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일본학계에서도 1930년대에 江上波夫(에가미 나미오)가 내몽고일대에서 수집한 경교계의 십자가가 소개되면서 본격적으로 논의가 되는 정도였다. 동양 고고학계에 네스토리우스교의 존재가 본격적으로 소개된 것은 1930년대에 중국 내몽고 일대를 답사하고 청동기를 수집했던 에가미 나미오의 책 [내몽고 장성지대]이다(江上波夫 水野淸一 1935 158). 에가미 나미오는 여기에서 이 십자가 형태의 청동기들을 자세하게 소개하면서 십자가 속의 자는 불교의 요소가 결합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 안에서도 있는 문양임을 강조해서 서양의 문물이 북중국에 유입되었다는 것을 강조했다. 서양에서는 판투소프를 비롯한 러시아계 학자들의 이름은 대체로 무시되었고, 소련시절 러시아에서는 제정러시아의 왕당파들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으니, 판투소프의 이름이 잊혀질 수 밖에 없었다.




그림설명 : 판투소프의 조사사진

3.경교는 극동지역까지 유입되었을까?

중앙아시아의 에프탈(white huns)역시 조로아스터교가 주요한 종교였지만, 경교의 흔적이 발견되고, 라틴어 문헌 중에는 네스토리우스교 티모시 I(728~823)에게 어떤 투르크의 칸이 교회를 세워달라고 요청했다는 구절이 있는 바, 투르크제국에서도 경교가 명백히 유입된 것 같다(Tha cambridge history of Early Inner Asia 1991). 이렇듯 비록 주류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네스토리우스교는 중앙아시아 일대에 널리 확산되었고, 그 일파가 당나라에도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네스토리우스교는 요나라를 거쳐 몽골제국시기에도 널리 유행했었다. 특히 몽골제국에서 경교를 믿는 사람들은 옹구트족(Ongud, 汪古部 또는 翁牛特族)이라고 불리웠는데, 지금 홍산문화로 유명한 지역인 翁牛特旗가 바로 여기에서 기원했다.

주변 국가의 상황이 이러하니 중앙아시아와도 교류한 발해에도 경교가 유입되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다. 문제는 경교의 유입을 기정사실화하지만 진흙제 십자가만으로 경교가 유입되었다고 단정지을 근거는 너무나 박약하다는 것이다. 실제 네스토리우스교가 유입되었고, 신도들이 있었다면 그보다는 조금 더 구체적인 증거가 있어야한다. 현재 내몽고박물원에 소장되어 있는 원나라 시기 내몽고 동남부 적봉지역에서 출토된 네스토리우스교 신도의 무덤을 보자. 무덤 앞쪽은 전형적인 네스토리우스교의 십자가형태가 뚜렷하게 새겨져있고, 시리아문자도 새겨져있다. 또한, 다른 네스토리우스교의 유물을 보면 청동으로 만든 다양한 형태의 십자가와 기타 종교적 예물을 볼 수 있다. 발해도 거대한 제국이었는데, 유독 발해에 유입된 네스토리우스교 신도만 거친 진흙제 십자가를 만들리 없다. 게다가 이것이 발견된 지점은 불교 사원이 아닌가.

그러한 상황은 경교가 유입되었다고 여러 개설서에 나와있는 통일신라도 비슷한 상황이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기독교사에서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것은 바로 불국사 출토의 경교십자가와 성모마리아상으로 주장되는 불상이다. 그런데, 둘 다 정식발굴유물이 아닐 뿐 더러, 경교의 유물이라고 보기에도 아주 애매하다. 물론, 나는 발해나 통일신라에 경교가 전래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높다고 본다. 발해는 고구려에 이어서 중앙아시아지역과의 빈번한 교류를 했으며, 고고학적으로도 증명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고학이 소수의 종교를 증명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사람의 종교적 심성은 유물에는 잘 반영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원과 같은 특정 종교의 건축물이나 십자가, 불상과 같은 성물이 널리 출토되는 경우는 종교가 국가적으로 공인되고 집단이 힘을 합쳐서 거대한 기념물을 만들 때이다. 소수의 사람들이 믿는 종교는 쉽게 유물로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발해에서 출토된 경교 십자가는 어떻게 해석해야할까? 이와 비슷한 예가 아무르강 유역의 여진무덤에서도 발견된 바 있다. 그리고 더 주의할 점은 1~2점의 종교적 예물이 나온다고 곧바로 종교의 전래로 간주할 수는 없다. 원래 사용맥락을 잃어버리고 제 3자에게 다른 용도로 사용되는 경우도 흔하기 때문이다. 러시아 아무르강 유역의 서기 7~11세기 코르사코프 유적에서는 수백기의 여진계통 주민들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그 중에 여성 샤먼을 묻은 무덤에서는 흥미로운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었다. 그녀의 허리띠에는 다양한 장식들이 달려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고구려계통의 금동불상이었다. 자신의 신력을 많이 얻기 위해서 불상을 매단 것이다. 지금도 무당집에 가면 자신이 믿는 신 이외에 불상, 기독교의 성화를 가져다 놓은 경우가 많은데, 같은 맥락일 것이다.

4. 왜 사람들은 네스토리우스교에 주목을 할까?

경교 이외에도 마니교, 조로아스터교 등 실크로드에서 동북아시아로 유입된 종교들이 많은데 뚜렷한 증거도 없는 경교의 전래를 왜 선교사나 한국 기독교사에서는 강조를 했을까? 아마도 선교를 역사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좋은 자료가 되었을 것이라는 설명이 가능할지 모르겠다. 네스토리우스교는 비록 그 교리는 이단이 아니라고 후에 판명되어서 그 누명이 풀렸지만, 상당기간 동안 서방 중심의 카톨릭교에서 완전히 분리한 동방교회로 이후 조선시대 한국으로 유입된 카톨릭교와 개신교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단으로 낙인찍힌 종교이다. 과연 우리가 아는 기독교가 이단파가 사방으로 전파되어간다고 좋아하던 적이 있던가? 사실 경교에 대한 지나친 관심은 청나라 시기 중국으로 온 기독교 선교사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경쟁적으로 탁본을 하고, 심지어는 본국으로 이 비석을 옮기려는 시도를 했었다. 기독교를 중국에 전파할 수 있는 역사적 명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고, 만약 그러한 움직임이 더 구체적으로 되었다면 서양이 중국을 식민지화 하기 위한 또 다른 명분을 제공할 수 있지 않았을까? 미국의 경우에도 Mound builder 논쟁이나 몰몬경의 내용으로 보듯이 아메리카 대륙의 원 주인공은 아메리카 원주민이 아니라 이 원래는 서양인들이라고 생각하여 자신들의 침략을 정당화했던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또한 기독교의 동방전파와 함께 네스토리우스교와 연관된 또 다른 키워드는 '실크로드'이다. 실크로드는 각국이 경쟁적으로 유물을 조사(또는 약탈)하면서 '내가 하면 연구, 남이 하면 약탈'이라는 식으로 다른 나라(특히, 중국이나 러시아)의 연구를 평가절하하며 경쟁했다. 서구 열강의 자기 중심적인 연구가 특히나 심했던 실크로드였으니 자신들이 좋아하는 분야만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20세기의 서구 중심 '실크로드'연구라는 서양 기독교 문화권 중심의 문화교류와 제국주의라는 불편한 진실을 배경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으니 경교에 대한 지나친 관심도 결국 같은 맥락이 아니었을까.

21세기에 들어서 새로운 패자로 등장한 중국도 실크로드라는 키워드를 자신들의 세력확장에 이용하고 문화사업을 벌리고 있는데, 여기에서도 경교 관련 유물은 주요한 소재로 등장한다. 나는 지난 20148~9월에 내몽고의 주도 呼和浩特에 소재한 내몽고박물원에서 거행된 "초원실크로드전"에서 전시된 네스토리우스 유물을 실견할 수 있었다. 특히 적봉출토의 원나라시대 네스토리우스교인을 묻었던 십자가가 새겨진 석관과 여러 청동유물이 인상적이었는데, 공교롭게도 이슬람교도의 석관 바로 옆에 전시되어 있어서 종교에 관대하며 국제적이었던 모습이 상징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전시회의 설명패널에는 중국 시진핑 주석이 중앙아시아 외교이후 실크로드의 중요성을 담화한 이래 그의 뜻을 따라서 이 전시회를 열었다고 그 취지를 밝히고 있었다. 한마디로 중앙아시아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데에 역사적인 명분을 얻기 위하여 실크로드를 동원한 것이다. 내몽고박물관 이외에 주요 박물관은 경쟁적으로 실크로드 특별전을 개최하고 있고, 2015년에는 북경의 국가박물관에서도 실크로드특별전이 개막한다고 들었다. 모르긴해도 여기에도 경교의 유물은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할 것 같다.

역설적으로 이단으로 지목되어 박해받은 경교가 소수의 선교사들의 힘으로 중앙아시아와 중국에 널리 퍼질 수 있었던 배경은 적극적으로 현지의 문화와 결합했기 때문이었다. 현재의 카톨릭이나 개신교처럼 강력한 정치, 경제적인 기반을 등에 업고 선교가 이루어진 것과는 대조적이다. 몽골시대에 경교의 십자가는 경교도가 아닌 다른 종교의 몽골인들도 신력이 있는 부적처럼 널리 쓰였다. 경교관련 유물이 널리 퍼질 수 있었던 데에는 서양 선교사(?) 들의 열성적인 순교와 자기 신 이외에는 절대 인정하지 않는 유일신 사상때문이 아니라 다양한 문물의 교류가 이루어지던 시기 타자에게 개방적이며 공존을 인정했었던 초원의 열린 모습 때문이었다. 발해와 통일신라의 경교관련으로 추정되는 유물들이 모두 불교 유적에서 발견되었다는 것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 이러한 경교의 본래 의미는 퇴색되고 실질적인 연구는 결여된 채 오로지 기독교의 전파에만 집중하는 태도는 결국 각자의 입맛에 따라 이용되는 실크로드에 대한 연구와 비슷해 보인다.








그림설명 : 몽골제국시기 네스토리우스 관련 유물유적 - 2014년 실크로드 특별전에서

 
필진 : 강인욱 | 등록일 : 2015-09-13 21:17:49 | 조회 : 14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