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 그 연구의 역사
한국고대사, 유라시아를 품다

한국 고대 불교의학 | 연구소

한국 고대 불교의학1)

 

이현숙(연세대 의학사연구소)

 

1. 불교 의학과 한국 내의 연구

동아시아의 불교의학은 종교를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중세 유럽의 기독교 의학과 유사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인간이 심성적으로 가장 나약해진 시기 중의 하나가 질병으로 고통을 받고 목숨이 경각에 달렸을 때라고 할 수 있으므로, 일찍부터 종교에서는 인간의 질병과 치료에 관심을 기울여 왔다. 세계적인 종교로 자리매김한 불교와 기독교의 경우 역시, 그 발전 과정에서 종교가 가지고 있는 질병 치유력은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였다.

서양의 경우, 기독교에 입각한 치료는 기독교적 사랑을 전파하는 중요한 일부분으로서 전문적인 의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교회의 틀 안에서 무료로 제공되는 신성한 재주로 여겨졌다. 이러한 종교적 색채에 따라, 기독교인들은 죄고백과 기도, 안수와 귀신축사, 기적을 통해 치료하였으며, 주로 성인들이나 교부들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한다.2) 이에 비해, 불교의학은 단순히 주술이나 기도에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고대 인도의학을 기반으로 하여 비교적 과학적 색채를 지닌 의학이었다.

승단 생활에 규율을 중시한 율장인 사분율』 『십송율등과 금광명최승왕경, 불의경에서 불교 의학의 기본적 이론을 알 수 있다. 불교 경전에는 의사가 지켜야할 의계와 간호인이 지켜야 할 간호계, 병자가 지켜야할 병인계 등이 있으며, 3자의 조화 속에 질병이 치료된다.3) 일본 초창기 의사의 대부분이 승려 출신으로서, 7세기 무렵까지 일본에서 의술을 베풀던 사람들은 대부분 백제승려였다. 예컨대 602년 백제승 관륵(觀勒)은 역서와 천문지리서, 둔갑 방술서 등을 가지고 서생 3,4인에게 가르쳤다고 하는데, 방술에는 의술도 있었다.4) 이로 미루어 보건대, 한국 고대사회에서 의사로 활약하였던 상당수는 승려였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학사라는 시각에서 불교의학을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기독교가 교세 확장 수단으로 서양 의학을 사용한 것에 비해 불교는 그렇지 않았다고 파악하였다. 즉 불교의학은 삼원질론(三原質論)과 지수화풍에 의해 사대론(四大論)을 의학 이론의 기본으로 삼았는데, 임상적인 영향보다는 한의학적인 철학과 사상이 형성되는데 영향을 끼쳤다고 파악하였다.5) 그러나 이는 기록이 부족한 탓일 뿐 임상에서 의승들의 활약을 무시해서는 안될 것이다.

고구려의 경우, 고구려 승려 승랑(承郞)이 삼론학(三論學)의 대가였으므로 삼론에 관한 저술을 하였던 용수(龍樹)의 대표적인 의서라고 할 수 있는 대지도론(大智度論)등이 수입되어 불교의학에 영향을 받았다고 추정하였다. 백제와 신라도 율학의 발달하였으므로, 불교의학의 영향 하에 있었다는 점을 논증하고자 하였다.6) 또한 불교 의학의 내용을 많이 담고 있는 금광명최승왕경에 대한 원효의 주석으로 볼 때, 신라인의 불교 의학에 대한 인식에는 이미 중국 의학적 시각이 첨가되어 있었다.7)

이와 같은 불교 의학에 대한 연구는 한국 고대사회를 연구하는데 있어 그 외연을 넓혀줄 뿐만 아니라 한국 고대의학에 내재된 종교와의 관련성을 구체적으로 밝힐 수 있다.

 

 

2. 선교 의학으로서의 불교의학과 의승

불교는 스스로를, 그 자체로 ''이라 할 수 있는 인간의 번뇌에서 비롯된 를 떨쳐 버릴 수 있게 해주는 '의학'에 비유하고 있다. 불교의 이런 측면은 필연적으로 정신요법으로 연결되어, 현실 속에서 나타나는 의학적 의미에서의 심신 질환이나 고뇌를 제거하는 데 도움을 주게 된다고 한다. 이후 불교 승단은 승가(僧伽) 즉 출가 집단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한 위생학 체계를 발달시켜 나가며, 보살행이나 자비를 베푸는 행위로 대중에게 의료행위를 베푸는 이른바 의승(醫僧) 집단으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신체 의학적 병인론이나 치료학을 포함하는 의학적 병리학 및 약리학, 외과 정신의학 등의 체계를 포함하게 되었다고 한다.8) 즉 불교의학은 불교를 포교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도 이용되었다.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된 것은 6세기 초 법흥왕대의 일이다. 그러나 모든 종교가 다 그러하듯, 국가적인 공인을 받기 이전 불교는 신라사회에 이미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종교의 급속한 확산에는 그 종교가 가지고 있는 질병 치유의 능력도 큰 몫을 하게 마련이다. 신라는 삼국 가운데 불교의 수용이 가장 늦었고, 이차돈의 순교 설화에서 보듯이 기성세력의 반발 또한 심하였다. 중고기 신라사회에서도 불교 포교를 위해 승려들의 질병 치유 능력 즉 선교의료가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였다는 것을 묵호자 또는 아도화상의 눌지왕녀인 성국공주의 치병설화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3. 불교 국가의 의료체제 내의 불교 의학

 

불교는 곧 신라의 국교가 되어 선덕여왕의 아버지 진평왕(579 - 631)은 자신과 왕비를 각기 석가모니의 부모 이름을 따서 백정(白淨)과 마야부인이라고 지을 정도였다. 선덕여왕 시기에 이르면, 불교국가에서 역대 군왕들이 치병을 위하여 의례적으로 행하는 전형적인 의식 중의 하나인 인왕경독경이 하나의 儀禮로 정착되었다.9) 삼국사기에 따르면, 선덕여왕의 치병을 위해 행하였던 각종 조치는 치료 - 기도 - 황룡사 백고좌 설치 - 승려 100인 출가 등 구체적인 행위를 일목요연하게 서술하고 있다.10) 불교의학의 치료는 불경의 암송을 우선적으로 하였다.11) 무의를 대체하여 상류층의 질병을 전담하였던 의승들 사이에도 치유력이 다른 것으로 표현되었는데,12) 여타의 종교와 마찬가지로 밀교 역시 치병을 하나의 선교 수단으로 이용하였다.

불교 의학은 중대에 이르러 왕가의 치병 뿐 아니라 일반민들의 치병에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삼국유사의 김현감호 설화에 따르면, 호환을 당한 사람들에게 흥륜사의 된장과 나발 소리가 치료제였다.13) 이는 국가 사찰이 일반민들의 치료를 담당하였던 역사적 기억이 투영된 설화라고 할 수 있다.

8-9세기 동아시아 율령 국가의 전범을 이끌었던 당 제도에 따르면, 悲田院은 당초에 장안과 낙양 두 곳의 사찰 내에 설치되어 빈민과 무의탁 노인들을 돌보도록 하였던 제도이다. 당 현종 개원25(735)에 이를 병방(病坊)이라고 칭하여, 비전양병방(悲田养病坊)이라고 불리웠다.14) 무종의 폐불로 인해 승려들이 모두 환속하게 되면서, 비전원 운영이 큰 문제로 등장하여 예외 조항을 둘 수밖에 없었다.15) 이에 점차 사찰 내에서 운영하던 방식을 국가 기관으로 변경해 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의 경우, 쇼토쿠 태자의 주도로 시약원이 처음 설치되었다.16) 730년 교묘(光明)왕비의 주관 하에 사찰 내 비전원(悲田院)과 시약원(施藥院)을 설치하고 약을 나누어주기도 하였다.17) 일본 나라 시대 교묘 황후는 헤이조경의 황후궁직에 고아와 병자를 수용하는 비전원과 병자 치료를 위한 시약원을 설치하였는데, 그 운영은 역시 사찰이 담당하였다. 825년에 그 직제를 확정하였는데, 使-判官-主典-医师 1명씩 두었다. 비록 현전하는 자료는 없지만, 신라에서도 이와 같은 제도를 실시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8세기 율령 국가체제 하에 실시된 일본 제도의 상당 부분이 신라의 영향을 받았던 것을 상기하면, 무리한 추론은 아닐 것이다.

이러한 이해를 토대로 한국 고대 불교의학의 구체적인 처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고려노사방고려변사방

삼국 가운데 고구려가 불교를 가장 먼저 수용하였으며, 이에 따라 불교 의학의 영향도 컸다. 당나라 의학서외대비요에 인용되어 있는 고려노사방과 수나라 승려 천태가 서술한 마하지관고려변사방에서 고구려 불교의학의 편린을 살펴볼 수 있다. 고려노사방은 오수유와 모과 두 가지만으로 각기충심 증상을 치료하였는데, 이 치료법은 중국에서 청목행과 서각을 첨가되면서 소공방과 서왕방으로 발전하였다.18)고려변사방은 천태 지의가 제자들에게 가상에 관해 설명하면서 고구려 승려 변사가 최면이나 정신요법을 사용하여 질병을 낫게 했다는 사례소개를 통해 알려졌다. 즉 고구려의 변사가 목의 혹을 치료하는데, 자신의 혹을 혹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벌집에서 새끼벌이 다 날아가서 구멍투성이가 된 집이라고 가상하라고 지시하고 환자는 고름이 흘러 내려서 혹이 빈 벌집 같이 된 상황을 상상해서 치료하였다는 이야기이다.19) 위의 두 자료는 고구려 불교 의학이 중국 의학에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로서, 고구려 불교의학은 백제와 신라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2) 신라법사방신라법사비밀방

984년 일본의 단바 야스요리(丹波康賴, 911-995)가 편찬한 의학서 의심방내에 3수가 전해지고 있다.20) 의심방은 민멸되어 버린 고대 중국의학서를 많이 인용하고 있기 때문에, 고대 중국 의학을 논의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학서이기도 하다. 신라법사방은 언제 만들어진 방서인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대개 경덕왕(재위 742-764) 무렵의 8세기 중반으로 추정되고 있다.21) 비록 8세기 무렵에 이루어진 방서라 하더라도, 여기에는 신라 전래의 오래된 비방들이 채록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의심방에서 약을 먹을 때 외우는 주문 복약송은신라법사방에서 인용한 것이 유일하다. 복약송에는 오장육부와 경맥을 언급하여 중국 의학이 가미되어 있음을 잘 보여준다. 즉 신라에 수용된 불교의학은 인도에서 중국과 고구려를 거쳐 신라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동안 다양한 문화와 공간을 섭렵하였으므로 복합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인도와 중국, 고구려의 의학이 혼재되어 있는 상태에서 신라 고유의 민간 경험방까지 더해졌던 것이다. 말린 말벌 집을 옹기 안에 넣고 흰 재가 되도록 달여 그 반을 따뜻한 술에 타서 마시고, 반은 침으로 개어 남성 생식기에 반복해서 바름으로써 정력을 강하게 하는 노봉방의 사용법은 신라법사방에서 유일하게 발견된다. 요컨대 신라법사방은 밀교 승의에 의해 8세기 이후 어느 시기에 편찬되었다. 여기에는 불가 전래의 치료법뿐만이 아니라 신라 고유의 처방들도 다수 정리되어 있었는데, 신라에서 승려들이 귀족이나 일반 민을 대상으로 의료 활동을 하는데 길잡이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또한 일본에까지 전해져 일본 의학 발전에도 일정한 영향을 주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불교의학의 역할

승려에게는 관상이나 점, 또는 간단한 질병 치료 등의 부수적인 능력이 있어야 托鉢이 용이하다는 속설이 불가에 있다. 이러한 능력은 탁발승을 길 가는 낯선 나그네에서 친근한 인생 상담자 또는 스승으로까지 격상시켜준다는 것을 역사적 사실이나 각종 설화를 통해 알 수 있다. 승려는 각종 경전을 읽고 암송하는 과정에서 불교경전 내에 소재한 의학 관련 문구로 인해 자연스럽게 불교의학에 대한 이해를 가지게 되었다. 이 가운데 의료에 관심을 가지고 활약하였던 이들은 의승이 되었다. 이들은 의료를 전업으로 하지 않았지만,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일반 민이 접근하기 용이한 부류였다. 초기에는 승의는 상류층의 의료를 전담하였던 것처럼 묘사되었다. 의료를 전업으로 하는 관료 의사가 나타나자, 이들은 일반 민들이 질병에 걸렸을 때 치료를 해 줄 수 있는 의료인의 역할을 하였다. 불교 포교를 위해 선교 의료를 하였던 초기 승의들은 고대 불교 의학을 발전시키는 한 축이 되었다. 비록 현전하는 고려노사방신라법사방3수에서 사용된 약물은 민간 경험방 수준이라고 폄하할 수 있겠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자료의 한계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오수유와 모과를 사용한 고려노사방과 속수자, 노봉방 등을 이용한 신라법사방은 모두 한두 가지 약재를 사용한 단방류에 속한다. 이는 역으로 한국고대 사회에서 활약한 고대 의승들이 향토에서 구하기 쉬운 약재 중심으로 민간의료를 발달시킨 주역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각주

1) 이 글은 이현숙, 질병, 치료, 종교: 한국 고대 불교의학, 『한국사상과 문화, 48, 2009, pp.141-180을 편집 보완한 것이다.
2) Vivian Nutton, "Medicine in Late Antiquity and Early Middle Age", The Western Medicinal Tradition, New York: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5, pp.74-76.
3) 服部民郞 著, 이경훈 역, 『佛敎醫學』, 경서원, 1987, p. 54.
4) 富山川游, 『日本醫學士』, 東京:裳華房, 1904, p.67.
5) 방인욱, 佛敎醫學形成韓醫學에 미친 影響, 동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8.
6) 손홍렬, 삼국시대의 佛敎의학, 『가산 이지관스님 화갑기념논총』, 1992.
7) 여인석, 삼국시대의 불교교학과 治病活動의 관계, 『의사학』 52, 1996 ; 여인석, 우리나라 고대 불교의학의 한 단면:원효의 경우, 『의사학』 42, 1996 ; 여인석, 불교의학, 『高麗時代以前 韓醫藥學에 관한 연구』, 한국한의학연구소, 1996.
8) 小田晉 김은주 역, 동양의 광기를 찾아서, 르네상스, p.78.
9) 이현숙, 신라의 민간 의료인, 신라사학보4, 2005, p.114.
10) 동일한 사건을 삼국유사는 일반 민들에게 유전되던 설화 형태로서 표현하였다. 즉 흥륜사의 법척이 먼저 치료에 임하였지만 효험이 없었기에, 당시 명망이 높았던 밀본법사를 모셔왔다. 여왕의 침소 밖에서 밀본법사가 약사경을 외우면서 지니고 있던 지팡이 육환장을 던져 침소 안에 있던 여우와 법척을 바깥에 있는 뜰 아래로 내쳤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화는 여우가 여왕의 病根이며 법척 역시 이에 해당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5세기 초 巫醫와 대결하였던 아도 법사와 달리, 6세기 후반에 이르면 기존의 興輪寺의 의승과 새로이 등장한 密敎 醫僧密本法師 간의 대결이 이루어졌던 것을 알 수 있다.
11)續日本記21, 天平寶字 2(758) 8월 정사일 조, “‘듣건대, 마하반야바라밀다는 여러 부처님의 어머니시다. 사구게 등을 수지(受指)해 독송하면 복을 얻고 덕이 모이는 것을 헤아리기 어렵다고 한다. 이런 까닭에 천자가 염송하면 전염병 나병과 귀신이 집 안에 들어가지 않는다. 약을 끊고 상서로움을 얻는 것이 이보다 나은 것이 없다. 천하제국에 알려 남녀노소를 논하지 말고 서 있거나 앉아 있거나 걸을 때, 입이 한가하면 모두 다 마하반야바라밀을 염송하라. 문무백관은 조정으로 향하거나 관사로 나아가는 길에 매일 항상 염송해, 가거나 올 때 헛되게 하지 말라. 바라건대, 바람과 비가 때를 따르도록 해서 장마나 가뭄의 재앙을 모두 없애고 차고 따뜻한 기운을 고르게 해서 모두 역병의 재앙을 면하게 하고자 한다. 널리 먼 곳과 가까운 곳에 고해 짐의 뜻을 알게 하라.‘ 라고 하였다.” (이근우 역, 속일본기3, 지식을 만드는 사람들, p.24) 이는 염불이 가진 주술성을 국가권력이 어떻게 이용하고자 하였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신라승 32인과 여승 2인 남 19, 21인 등이 귀화하여 신라군을 설치하였다는 기사에서 신라의 불교문화의 영향이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앞 책, 25)
12) 여인석, 불교의학, 1996, pp.111-112.
13)三國遺事5, 感通7, 金現感虎, “次日果有猛虎入城中 剽甚無敢當 元聖王聞之 申令曰 戡虎者爵二級 現詣闕奏曰 小臣能之 乃先賜爵以激之 現持短兵 入林中 虎變爲娘子 熙怡而笑曰 昨夜共郎君繾綣之事 惟君無忽 今日被爪傷者 皆塗興輪寺醬 聆其寺之螺鉢聲則可治 乃取現所佩刀 自頸而仆 乃虎也 現出林而託曰 今玆虎易搏矣 匿其由不洩 但依諭而治之 其瘡皆效 今俗亦用其方
14)舊唐書9, 玄宗本紀 下.
15)舊唐書18 , 武宗本紀.
16) 이는 像法决疑经4가지 福田, 敬田,施药,疗病,悲田 思想의 영향으로 建立四院 가운데 하나로서 쇼토큐 채자는 사천왕사 안에 이를 설치하여 불교 승려들이 이를 주관하도록 하였다.
17)續日本記20, 天平寶字 元年 12월 신해 조, “하기를, ‘널리 병들고 가난한 무리를 구해 기르기 위해서 越前國墾田 100을 영원히 山階寺 施藥院施主하라. 善業으로 인해 짐이 중생과 함께 三檀福田을 영원토록 다하고 十身藥樹는 세상에 그늘을 만들며 영원히 病苦의 근심을 없애고 함께 長壽의 즐거움을 누리고 마침내 眞妙의 깊은 이치에 합치해 스스로 원만한 妙身을 증명하고자 한다.’고 하였다.” (앞 책 2, p.481)
18)外臺秘要752년 당의 왕도가 편찬한 것인데, 그 가운데 脚氣衝心方고려노사방이 인용되어 있다.
19)摩訶止觀8 次引人明治, “如高麗辨師 治癭病法 假想此癭 如露蜂窠 蜂子在窠 須庾蜂子 穿窠而出 膿潰膏流 蜂子俱去 衆孔婁婁 如空蜂窠 想心成己 癭病消差
 20) 『醫心方』은 본초 및 用藥1, 兪血 鍼灸요법 1內科 9 外科 및 피부병 6五官科 1婦産科 4小兒科 1服石 2養生 3食料 2권 등을 포함하고 있다. 또한 중국 이전에 편찬된 典籍 204종을 인용하였는데, 의서가 150 여 종류로서 총 7000여 조목이라고 한다. 610년 편찬된 隋代 의학서 諸病源候論을 서두에 두고 해당 질병을 총론한 뒤, 각 방서 중에서 처방들을 채록하였다. 인용 서목 가운데 7세기 당의학자 孫思邈천금요방의 것이 가장 많이 인용되었다. 馬伯英 外 著, 鄭遇悅 譯, 中外醫學文化交流史, 1997, pp.82-83.
 21) 金斗鍾, 앞 책, 1966, 74; 한국한의학연구소 편, 앞 책, 1996, p.35.

 


 

 
필진 : 관리자 | 등록일 : 2017-05-15 14:45:53 | 조회 : 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