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 그 연구의 역사
한국고대사, 유라시아를 품다

잊혀진 소련의 고조선 연구자 - 유엠 부찐 | 연구소

 

  내가 대학교 2학년 때인 1990년에 831일에 러시아 학자 부찐의 [고조선: 역사-고고학적 개요]가 출판되었다. 나는 그 전부터 이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지라 난 출판되자 마자 곧바로 샀던 것 같다. 내가 가지고 있는 그의 책 속표지에는 1990922일 녹두거리의 서점 그날이 오면에서 구입한 것으로 적혀있다. 멀게만 느껴지던 러시아 사람의 책에는 한국의 고조선연구가 상세히 정리되어 있어서 참 놀라웠던 기억이 난다. 사실 이 책은 1987년도에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내부자료로(당시 소련은 적성국가이니, 이는 열람이 제한됨)밖에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내 기대와 달리 1990년에 출판된 이 책은 중국 지명과 인명을 모두 현지 발음으로 쓴 바람에(진시황은 친스황, 황하는 후앙허..하는 식이었고, 심지어는 고조선의 위만도 웨이만으로 기록될 정도였다. ) 가독성이 너무 떨어져서 읽기가 쉽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반면에 국사편찬위원회의 번역은 한글발음으로 한자들을 표기해서 읽기는 쉬었지만, 도면이며 참고자료가 전혀 없는 것이어서 그 내용이 선뜻 이해되지 않았었다.

  그리고 1996년에 석사논문을 쓰고 러시아과학원 시베리아분소의 고고민족학연구소로 가서 얼마있다가 놀라운 소식을 접했다. 바로 부찐이 내가 유학한 그 고고민족학연구소에서 근무했었고, 한국(주로 북한)과 관련된 자료들을 주로 번역했었다는 점이다. 그의 이름을 들은 것은 19965월 말 경으로 기억한다. 당시 말갈고고학 전공자인 이브게니야 데레비얀코 선생님이 한국의 국립문화재연구소의 학술대회에 초청되었고, 그 발표원고를 번역하게 되었다. (러시아어를 배운지 3개월만의 첫 번역이라 이래저래 기억이 남는다). 그 와중에서 데레비얀코 선생님은 가끔씩 연구소 앞의 당신 집으로 불러서 점심을 배불리 먹여주시곤 했다. 당시는 노어가 짧아서 거의 알아 들을 수 없었지만, 주로 한국관련 연구가 대화의 주제였고 자꾸 부찐’ ‘부찐하는 이름이 나와서 혹시 유엠부찐이냐고 물어보니 맞다는 것이다. (부찐은 성이요 이름은 유리 미하일로비치이니, 유엠은 바로 이름의 약호인 Yu.M.을 말하는 것이다. 러시아어를 몰랐을 때이니 막연하게 이름이 유엠부찐인줄 알았었다!!!) 더욱더 놀라운 것은 그가 고조선을 출판한지 2년 뒤인 1984년에 [한국-고조선에서 삼국시대까지]라는 책도 발간했음을 알게 되었다. 바로 데레비얀코 선생님으로부터 책을 빌렸지만 안 그래도 복잡한 노어인데 도면은 한 장도 없었다. 그러니 1페이지 넘기는데 거의 1시간 이상 소요되는 수면제같은 책이었다. (그림 한 장 없는 어려운 책인 [고조선]의 러시아어로 음차된 지명들을 다시 원문으로 맞추어주신 번역자들에게 무한한 존경을 표시 안할 수 없었다.)

  어쨌든 부찐이라는 사람에 흥미를 느껴서 연구소의 인사부에 연락을 해보니 한국과 관련된 책을 2권이나 낸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시베리아과학원 고고민족학연구소에서 그의 발자취를 거의 찾을 수 없었다. 그는 고고학전공자가 아니라 한국어를 아는 이유로 번역에 참여했던 비상임의 직위였기 때문이다.

  부찐이 어떻게 한국어, 나아가서 한문 및 일본어를 공부하고 한국학자들도 복잡하게 생각하는 고조선의 위치와 경계 등에 대한 그와같은 자세한 책을 쓸 수 있었을까 참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지금까지 그와 관련된 자료들을 정리해보고 그의 일생을 복원해보자.

  지난 2009년에 [고조선사 연구 100]에 그를 소개할 때는 1990년에 출판된 [고조선]을 따라서 그가 구 소련에 속한 타지기스탄에서 출생하였다고 적었다. 다행히도 그가 죽기 직전까지 활동했던 이르쿠츠크 지역의 향토사인명사전(Иркутск. Историко-краеведческий словарь, 2011년 간행)에 그의 항목이 상세하게 나왔다. 이에 따르면 그는 실제로는 바이칼지역 출신이었다. 그는 19311117일 치타주 자바이칼군의 집단농장(솝호즈) ‘크라스니 벨리칸 «Красный великан» 출생으로 되어있고, 20021115일 이르쿠츠크에서 사망했다. 어려서 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으로 중앙아시아로 이주했고, 그 사이에 같이 강제 이주를 당했던 많은 한국인들과 많은 접촉을 했고, 그의 한국어는 처음 습득된 것이다. 이후 1952년에 칸스크 사관학교(Канское военное училище)의 동방어 번역학과를 졸업하고 4년간 군 통역가로 근무했다고 한다. 자료를 찾아보니 실제로 칸스크 군사학교는 칸스크 보병군사학교가 맞으며 1951년말에 해체가 되었다고 되어있다. , 이 학교는 2차대전의 대비책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부찐은 그 마지막 졸업생이 된다.

  군사학교 졸업 후 4년간 군대에 있으면서 한국에서도 근무했었다고 한다. 군 제대후 타지기스탄 대학의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러시아과학원 시베리아분소 시베리아-극동 지질학연구소(Института географии Сибири и Дальнего востока СО АН СССР)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고, 1969년에 박사학위(칸디다트)를 획득했다. 이후 카자흐스탄의 알마티에 위치한 카자흐스탄 과학원 위그르연구소(Институт уйгуроведения АН Казахской ССР) 이르쿠츠크의 민중경제연구소(Институте народного хозяйства,), 이르쿠츠크 기술대학(Иркутский 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технический университет)의 교수로 근무했으며, 법률,경제, 관리 시베리아연구소(Сибирский институт права, экономики и управления)의 동방언어 학과장으로 근무했다. 그의 이러한 다양한 경력에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시기는 바로 1970년대 중반~1980년대 초반까지 러시아과학원 시베리아분소 고고민족학연구소에서 몇 년간 근무한 때이다. 이 때에 그는 V.E.라리체프, A.P.오클라드니코프와 같은 학자들을 위하여 한국과 관련한 고대사와 고고학관계 문헌들을 번역하는 전문 번역가로 활동했다. (http://www.vsp.ru/show_article.php?id=6306)

  1986년에는 고조선과 한국 고대사에 관련한 그간의 작업들을 모아서 레닌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그)에서 국가박사학위를 수여받았다. 학위를 받은 후 그는 고대사-고고학계를 완전히 떠나서 다시 경제학자로서의 역할로 돌아가서 여생을 보냈다.

  그의 책에서 보여준 탁월한 언어능력은 익히 알려져있다. 그는 한국어, 일본어, 중국어 및 고대 한어에 대해 거의 완벽한 구사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외에도 타지크어, 몽골어, 불어 등에도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 좋은 예가 그의 논문중에 한국-몽골어와 프랑스-타지크언어의 유사성을 비교하는 연구도있다.
http://www.irkutsk.iriss.ru/pub/sib_kor/1.htm) 그 내용이야 어떻든 이러한 다중 언어에 대한 지식이 뒷받침 되어야 가능할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부찐이 시베리아 과학원 고고민족학연구소를 그만 둔 이후로 이 방면에 대한 그에 필적할 연구는 거의 나오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 자신은 러시아학계에서도 거의 잊혀진 사람이 되었다. 아마 그가 노보시비르스크 고고민족학연구소를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번역가로 남기에는 자신의 능력이 너무 뛰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러시아 유학시절에 전해들은 이야기로는 부찐은 [고조선]의 출판이후 고고민족학연구소와 사이가 좋지 않아졌다고 한다. 부찐의 딸은 노보시비르스크 국립대학교의 동방학부에도 입학했었지만, 중도에 그만두고 아버지를 따라 이르쿠츠크를 갔다는 ‘~카더라통신만 주어들었다

  솔직히, 부찐은 한국학계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북한학자들의 연구를 정리한 내용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굳이 그의 연구를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는 생각이 깔려있다. 하지만 이 정도의 연구를 영어권의 서양학자가 출판했다면 부찐은 정말 유명한(?) 한국학자가 되어있었을 것이다. 80년대 초반에 이정도로 한국학계를 파악할 수 있었던 그의 연구능력은 소비에트 시절 동방학의 수준이기도 했을 것이다. 부찐이 고고학이나 고대사의 교육을 체계적으로 받지 않고 고고학연구소에서 근무하면서 번역하는 과정에서 얻어진 연구를 정리한 것이란 것을 감안한다면 그의 정확한 비정과 연구결과에 대한 소개는 놀라운 수준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소련에서 한국학은 북한과 같은 위성국가의 지역학이라는 차원에서 국가적으로 지원이 이루어졌었다. 하지만 소련 붕괴이후 이러한 북한에 기반했던 한국학의 전통은 완전히 위축되었고, 최근에는 고대사보다는 현대문화에 집중하는 남한의 한국학이 조금씩 커지고 있다.

  아무리 봐도 부찐은 시대를 잘 못 만난 듯하다. 소련 시절 북한을 대표되는 한국학은 동방학에서도 일본이나 중국에 밀려서 찬 밥이었고, 남한에서도 국제적인 한국학자를 제대로 평가할 수 없었던 90년대 초반에 소개된 탓에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얼마 전에 노보시비르스크의 원로 동방학자 라리체프 선생님이 한국관련 책을 내신 것으로 연락하면서 다시 부찐에 대한 자료를 부탁했다. 그를 좀 더 자세하게 소개할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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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여기에 한 5년 전에 국제신문에 썼던 부찐에 대한 칼럼도 같이 올리겠다. 2008~2009년에 국제신문에 연재물은 이후 [춤추는 발해인]으로 출판되었지만, 부찐에 대한 내용은 전체 내용에서 많이 비껴나가는 것이라 빠졌기 때문이다. 나 자신도 이 칼럼을 썼다는 사실조차도 잊었다가 우연히 발견해서 여기에 같이 올려둔다.

[고조선에 미친 러시아사람]

  1970년대 남한에서는 고조선의 실체에 회의를 품는 사람도 많았고, 변변한 전공자 하나 없었다. 고조선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일본학계의 영향을 받은 강단사학과 민족주의에 경도되어 구체적인 증거없이 고조선의 실체를 주장하려는 재야사학계가 소모적인 논쟁만을 되풀이 하고 있었다.

  이때에 고조선에 미쳐서 북한, 중국의 고고학자료와 역사자료를 두루 섭렵한 러시아인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유리 미하일로비치 부찐이다. 그는 동방학하면 중국이나 일본을 생각하던 당시에 놀랍게도 한국의 고대사를 전공했고, 그 중에서도 고조선에 미친 사람이었다.

  부찐이 한국사를 접하게 된 것은 그의 출생배경과도 관련이 있다. 중앙아시아에서 살던 그는 당시 그 지역으로 이주한 고려인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렸고, 그 과정에서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 그리고 한문을 습득할 수 있었다. 거기에다가 학교에서 배운 불어마저도 능통했다고 한다.

  그는 원래 경제학 전공이었는데, 그의 탁월한 언어적 능력을 알게 된 고고민족학 연구소의 오클라드니코프 소장이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여러 나라의 고고학 자료를 여러 언어의 번역을 부탁했고, 점차 고조선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되었다. 당시 한국에 대한 인식이라고 해봤자 현재는 북쪽은 소련의, 남쪽은 미국의 위성국가이며 그 문화도 대략 중국과 일본의 중간 정도일거라는 생각이었다. 이런 상황이니 기원전 7~2세기에 중국과는 별도의 문화와 국가가 만주~한반도에 존재했었다는 그의 연구가 돋보일 수 밖에 없었다.

  부틴의 연구는 지금보아도 놀랍다. 고고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의 설이나 독창적인 내용은 많지 않다. 하지만 고조선의 국경, 수도의 위치 등 한국사람이 읽어도 잘 이해가 안 갈 법한 내용들에 대한 거의 완벽한 이해를 하고 있었다. 그는 1982년에 [고조선], 그리고 1985년에 [삼국시대]라는 책을 내고는 아쉽게도 고고학계에서 사라졌다. 80년대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의 고고학을 하는 것만으로는 한계를 느낀 모양이다. 이후 그는 이르쿠츠크로 이사해서 본업인 경제학을 다시 전공해서 대학의 경제학부장까지 맡는 등 경제학자로 성공했다.

  우리는 외국 사람이 우리 역사를 한다면 뭐 얼마나 알겠는가 하고 얕보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필자가 한 10여년 전에 한 한국학학술대회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당시 훈민정음을 연구하던 러시아의 노학자의 발표에 대해서 한 한국인 교수가 토론을 하는 것을 보고 기겁한 적이 있었다. 그 한국인 교수는 왜 음양(陰陽)’인양으로 하는가, 한문을 제대로 모르면서 한국학을 할 수 있는가 따지듯이 묻는 게 아닌가. 척박한 러시아에서 한국학을 심으려고 평생을 노력한 그 러시아 교수님은 기가막혀서 떠듬떠듬 한국말로 답변을 했지만 제대로 전달은 안되었다. ‘음양인양으로 한 것은 러시아어 표준어가 인양이기 때문이었다. ‘풍수도 러시아어 표준어로는 펀슈이가 되는 것 처럼 말이다. 학술대회 내내 러시아학자들을 아랫사람이나 대학원생 대하듯 한국학자들을 보면서 마음이 많이 아팠었다. 외국에서 한국학 전공자가 너무 적은 이유 중 하나가 외국학자의 연구를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리의 풍토에도 있는 것 같다. 우리나라의 서양사 학회에 유럽사람이 와서 유럽을 알고나 하시는 소리입니까 하던 적이 있던가? 한국학이 얼마나 우물안 개구리 식이었나를 보여주는 예였다. 특히 소비에트 시절 한국같은 약소국을 연구하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다. 사람들은 평생 자기 나라에서 대접 제대로 못 받고 한국에서도 지원이 거의 없으니 학문에 대한 열정으로만 연구한다. 요즘 한국 정부의 지원이 많아졌다고 하지만 주로 미국에만 집중되고 한국학에 대한 역사가 유럽에서 제일 깊은 러시아에 대해서는 거의 손을 놓고 있는 상황이다.

  필자가 대학교 때에 부틴의 [고조선]을 감명깊게 읽었던 터라, 꼭 뵙고 싶었다. 하지만 필자가 유학한 노보시비르스크의 고고학연구소에서도 그가 옛날에 연구소를 그만두어서 별로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다. 뒤늦게 그가 이르쿠츠크에 산다는 것을 알아냈지만, 쉽게 갈 기회는 없었고 결국 그는 2002년에 세상을 떴다. 통탄할 일이다. 2007년 겨울에 필자는 한 연구회에서 부틴의 고조선에 대해 발표하면서 다시 그의 연구를 되새겨 볼 수 있었다. 부찐은 북한 뿐 아니라 남한의 연구에 대한 관심도 높았고, 무엇보다도 고조선은 확고하게 한국의 역사로 보았다는 점을 높이 사고 싶다. 그는 사서에서 중국에 대항하는 위만조선의 모습을 자세하게 묘사했다. 그의 책은 러시아를 비롯한 동구권의 한국고대사를 대표하는 저작이 되었고, 고조선은 한국의 역사라는 것을 러시아사람들은 전혀 의심하지 않는 것도 결국 부틴의 저작 덕분이다 

[부기]

부찐의 저작 중에서 고조선관련 논문도 있는데, 1978년에 출판된 [고대 조선의 물질문화]이다.

(Бутин Ю.М. Материальная культура Древнего Чосона // Сибирь, Центральная и Восточная Азия в древности. Неолит и эпоха металла. – Новосибирск: Наука, 1978. – С. 119-154.) 이 논문은 이후 단행본 [고조선]3장을 이루었다.

그리고 단행본으로 고조선(Древний Чосон. — Новосибирск, 1982.)

조선에서 삼국까지의 한국(Корея: от Чосона к Трем государствам. — Новосибирск, 1984.)

동아시아경제사(Экономическая история Восточной Азии. —Иркутск, 1994.) 등이 있다.

 

 
필진 : 강인욱 | 등록일 : 2015-08-28 17:18:17 | 조회 : 1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