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 그 연구의 역사
한국고대사, 유라시아를 품다

근풍의, 비파형동검의 연구를 개척하고 홀연히 사라진 연구자 | 연구소
 한국에서 청동기를 연구하는 학자라면 한번쯤은 근풍의라는 이름을 들어봤을 것이다. 80년대후반~90년대중반 한국고고학계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었던 중국고고학자였던 근풍의(靳枫毅)는 비파형동검연구를 본격적인 궤도로 올려놓은 사람이다. 그는 1944년에 대련에서 태어났고, 이후 북경대학 역사학과 고고전업에 1963년에 입학했다. 1968년에 졸업과 동시에 문화혁명의 광풍이 중국을 휩쓸었을 때에 그는 요서지방의 중심인 조양(朝陽)시 박물관으로 하방되어서 근무했다. 문화혁명이 끝난 직후인 1978년에 곧바로 사회과학원에서 동북지역 고고학의 창시자인 동주신(佟柱臣)의 지도로 석사과정에 입학해서 1981년에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실제로 중국고고학계(비단 그뿐 아니라 전반적인 학문에도 마찬가지이겠지만) 78학번은 참 많은 의미를 지닌다. 10여 년간의 문화혁명 광풍이 끝나고 처음으로 정식 과정이 개설된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제때에 학위를 시작한 사람부터 10년이나 늦게 들어온 사람들이 섞여있었지만, 바로 그들은 이후 등소평의 개혁개방을 주도하고 현재의 중국경제 발전을 이끈 주역들이다. 현재 78학번들은 50대중반~60대후반의 나이로 중국고고학의 핵심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또 역설적으로 머지않아 이들의 세대교체가 필요한 시점이기도 하다. 하여튼, 이러한 시기적인 상황에서 새로운 고고학을 보여준 근풍의의 역할은 굉장했다. 




 그가 1981년에 사회과학원에 제출한 그 석사논문은 중국동북지방의 비파형동검문화에 대한 것이었다. 그의 석사논문은 곧바로 [论中国东北地区含曲刃青铜短剑的文化遗存】이라는 제목으로 고고학보 1982년4기, 1983년 1기에 상하로 나뉘어 실렸다. 중국의 고고학을 대표하는 잡지인 [고고학보] 60년 역사에 논문이 상하로 실린 적도 거의 없던 것으로 기억한다. ( 1940~50년대에 고고학보 초기에 상나라 고고학을 정리했을 때의 몇 논문에서 얼핏 본 기억이 있다.) 더욱이 근풍의의 논문은 석사논문이었다. 근풍의 논문의 수준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였다. 곧바로 그의 논문은 일본어로 번역되어 九州古文化硏究會가 발간하는 [고문화담총]에 소개되었다. 실제로 동북아시아 고고학에 끼친 영향은 실로 지대하다. 나도 짧은 중국어논문으로 석사과정 때 그의 논문과 林澐선생의 논문은 성경 읽듯이 끼고 살면서 비파형동검 연구를 시작했다. 아마 우리 나이 때 비파형동검을 연구하는 수많은 연구자들은 '근풍의 kids'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적어도 나에게 그러한 호칭이 붙여진다면 난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하겠다). 그는 드물게 문혁이라는 어두운 시기의 '下放'을 적절하게 자기의 공부로 승화시킨 예이다.
 
 난 북경대에서 그의 논문을 찾아보고 싶었다. 그의 석사논문에는 당시까지 조사된 모든 비파형동검에 대한 계측치가 보고되었다고했고, 이러한 기념비적인 논문을 직접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북경대가 아니라 사회과학원의 논문인 탓에 제대로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근풍의의 이후의 학문적인 여정은 썩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의 비파형동검에 대한 논문이 나오기 2년 전에 이미 길림대의 임운이 [동북계동검초론]이라는 제목으로 비파형동검의 요동기원설을 주장한 상황이었다. (반면에 근풍의는 요서지역 기원설을 주장했다.) 1980년대는 소병기의 구계유형론이 각 지역으로 확산되었고, 특히 길림대를 중심으로 연구인력이 급증하고 연구도 팽창하는 시점이었다. 반면에 근풍의는 북경을 거점으로 하는 학자였고, 그를 지원해주는 연구자들도 없었다. (내가 북경대 도서관을 들어가서 보니 지난 30여년 사이에 북경대를 졸업한 석박사 논문 중에서 요령, 길림, 흑룡강 지역에 대한 연구는 전무했다. 기껏해야 요동반도와 산동반도의 관계, 또는 내몽고 동남부지역이 전부였다).

 이후 그는 연구주제를 북경의 延慶지역 군도산 산맥 일대의 유목문화유적인 옥황묘문화를 발굴로 바뀌었다. 1985~1992년간에 350여개의 무덤을 파고, 그 주변 일대를 조사한 그의 업적은 비파형동검문화에서 한단계 나아가는 것이었다. 이 무덤자료는 장기간의 정리과정을 거쳐서 2007년에야 비로서 보고되었는데, 전면적인 발굴보고서라는 점에서 그의 꼼꼼한 보고서작성습관을 다시 한 번 보여준다.
 
 하지만 여기에서 근풍의는 한 가지 오류를 범하는데, 그는 옥황묘문화를 ‘산융’으로 보고, 그에 따라 하가점상층문화를 ‘동호’로 본 것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의 견해에 극렬히 반대했고, (나 역시 반대하는 입장) 하가점상층문화를 산융으로 본다. 어쨌든, 그는 1987년에 고고학보에 실린 [하가점상층문화의 족속문제]와 1988년에 발표된 대릉하유역의 비파형동검에 대한 연구를 기점으로 비파형동검 연구를 중단했다. 즉, 1987~1995년은 그의 연구세계에서 두번째 단계인 옥황묘문화 연구시기이다. 이때 근풍의의 연구는 하나의 연구를 반복적으로 다른 잡지들에 수록하는 등, 퇴보의 경향이 분명해졌다. 물론, 50세 가까운 나이도 무시할 수 없겠지만, 1985년에 그가 사회과학원을 그만두고 북경시문물고고연구소로 옮긴 것이 결정적인 계기였다고 생각한다. 학술기관에서 행정적인 성격이 강한 시 산하 연구소로 옮기면서 그의 연구는 좀 더 행정적인 것에 가깝게 되었다. 1990년대 중반에 본격적으로 한국과 중국이 교류가 시작되면서 한국의 학자들은 근풍의를 찾았다. 하지만 그는 이미 공부를 그만두고 컴퓨터사업을 한다는 소문이 돌았었다. 실제 컴퓨터사업인지는 몰라도, 1990년대에 그가 고고학에 집중적으로 종사하지 않은 것은 분명한 듯 하다. 1994년도에 문화재연구소 국제학술대회를 위한 인선작업중에 최몽룡 선생님이 근풍의를 찾았고, 난 옆에서 사무를 보다가 “근풍의 공부 그만두고 다른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고 한마디 거들었었다. (그때 이미 비파형동검연구 한다고 이런저런 귀동냥이 많았던 시절이었다). 선생님은 무슨 황당한 소리냐고 못 믿으시던 분위기였고, 며칠 뒤에 여러 사람들로부터 같은 말을 듣자 결국 그의 초청을 포기했던 기억이 난다. 




 세번째 그의 연구여정은 2000년에서 은퇴하는 2004년까지이다. 북경대 뒤에 있는 원명원의 정비 및 발굴을 맡았다. 북경시로 본다면 중요한 사업일수 있었겠지만, 1980년대 그렇게 큰 연구를 진행했던 근풍의가 이런 발굴을 했다는 것은 선뜻 어울리는 부분이 아니었다. 어쨌든, 근풍의의 명성을 여전히 알고 있었던 한국에 초청된 2003년도에 문화재연구소에서 그가 발표한 주제는 원명원의 새로운 발굴에 대한 것이었다. 원명원의 복원은 북경시 문화재로 보면 많은 호평을 받는 가장 성공작중 하나이다. 당연히 그의 업적중 하나로 꼽아야 되겠지만, 여전히 아쉬운 부분은 많다.
 
 그리고 2004년에 은퇴한 이후에 그의 이름을 찾기는 그리 쉽지 않다. 작년에 91세를 일기로 그의 선생님인 동주신이 세상을 뜨자 제자를 대표해서 추도문을 쓴 것 이외에는 별다른 연구는 없다. 가끔 옥황묘문화에 대한 논문이 보이지만 그전의 연구를 보완한 것에 불과하다. 정년을 기점으로 논문집이나 기념논총도 나오지 않았다. 대신에 가끔 요즘 중국경제의 발달과 함께 유행하는 골동품의 감정사이트에 이름이 보이는데, 실제로 일을 관여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와의 첫 만남은 2008년도에 오르도스에서 열린 오르도스청동기학술대회였다. 그와의 첫 만남이 나에게는 무척 강렬했었다. 하지만 수많은 학자들 속에서 그의 위치는 그리 크지 않아보이는 듯 했다. 오히려 한국이나 일본의 학자들만 그를 알고 반가운 척을 했던 것 같다.




 근풍의의 연구는 발표된 지 30년이 지난 지금 보아도 여전히 매력적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게 큰 연구를 발표했기 때문에 그의 향후 연구역정에 일정정도 장애가 되었던 것이 아닌가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그의 설에는 반대하지만, 그가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었던 데에는 많은 환경적인 장애도 무시할 수 없었다. 문화혁명, 그리고 80년대 이후 길림대학 고고학과의 발흥 등... 어쨌든 그가 꾸준히 사회과학원에서 일을 하면서 제자들을 양성했다면 동북지방 청동기시대에 대한 연구는 한단계 올라갔을 것으로 생각해본다. 근풍의 이후로 1990년대에 비파형동검에 대한 연구는 침체기에 접어든 듯 하다. 한국에서는 그 연구가 엄청나게 팽배해졌지만, 역설적으로 중국에서의 연구는 별다른 논문도 없고 신자료도 그리 많지 않다. 한국, 북한과의 미묘한 관계때문일수도 있다(이 부분은 나중에 다시 쓸 일이 있을 듯 하다).
 
필진 : 강인욱 | 등록일 : 2015-08-25 19:57:08 | 조회 : 6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