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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 역사와 신화, 그리고 민족 (1부) | 연구소


단군: 역사와 신화, 그리고 민족 (1부)

 

이승호(동국대 강사)

 

만들어진 전통, 개천절

 

단군왕검이 하늘에서 내려와 고조선을 건국한 기원전 2333년 음력 103, 이 날을 개천절이라 처음 명명한 단체는 대종교였다. 대종교에서 개천절을 처음 기념한 것은 19091115(음력 103)이었다. 이후로 개천절 행사는 대종교만의 행사가 아닌 국민적 행사로 여겨지고 치러졌다. 일제가 한국을 강점한 1910년 이후로도 대종교의 기념일로 계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상해임시정부에서도 개천절은 공식 기념일이었다. 그리고 해방 이후 지금까지도 날짜만 음력에서 양력으로 바뀌었을 뿐 여전히 국경일로 기념하고 있다.

그런데 기원전 2333년에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했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게 된 것일까. 단군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삼국유사』제왕운기』에 실려 있다. 󰡔삼국유사』1281(충렬왕 7)에 승려 일연에 의해 편찬되었고, 제왕운기』는 이승휴가 1287(충렬왕 13)에 지은 서사시이다.

 

삼국유사』제왕운기』 단군 관련 기록 비교

 

내용

『삼국유사』

제왕운기』

전사

前史

2, 기이 상, 고조선 / 고기(古記)』 인용:

전조선(前朝鮮紀) / 본기(本紀)』 인용:

상제 환인의 서자 웅()이 하늘로부터 세 개의 천부인을 받고 삼천 무리를 거느리고 태백산 신단수 아래로 강림하였는데, 이 사람이 단웅천왕(檀雄天王).

천신 환인의 서자 환웅은 환인에게서 세 개의 천부인을 받고 삼천 무리를 거느리고 태백산 신단수 아래로 강림하여 신시를 건설하고 풍백우사운사를 거느리고 세상을 다스림.

출생

2, 기이 상, 고조선 / 고기(古記)』 인용:

전조선기(前朝鮮紀) / 본기(本紀)』 인용:

곰과 호랑이가 인간이 되게 해달라고 기원했고, 환웅의 지시를 충실히 따른 곰이 인간 여자로 변하여 환웅과 혼인, 단군왕검을 낳음.

손녀에게 약을 먹여 인간의 몸으로 만들고 단수신(檀樹神)과 혼인시키니, 여기서 단군이 탄생함.

건국

2, 기이 상, 고조선 / 고기(古記)』 인용:

전조선기(前朝鮮紀) / 본기(本紀)』 인용:

단군왕검은 중국 요 임금 50년 경인년 평양성에 도읍하고 조선이라 하였으며, 또 백악산 아사달로 도읍을 옮김.

 

 

중국의 요 임금 원년인 무진년에 조선 지역에서 왕이 됨.

신라기(新羅紀) /

단군 원년에서 고려 태조 18(935)까지는 3288년이 됨.

최후

2, 기이 상, 고조선 / 고기(古記)』 인용:

전조선기(前朝鮮紀) / 본기(本紀)』 인용:

단군은 1500년 간 나라를 다스렸는데, 주 무왕 원년 기묘년에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자 곧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뒤에 아사달로 돌아와 산신이 됨. 이때 나이가 1908.

 

1038년 뒤인 은나라 무정(武丁) 8년에 아사달에 들어가 신이 됨.

후조선기(後朝鮮紀) /

주 무왕 원년 기묘년에 기자가 와서 후조선을 세움.

후손

2, 기이 상, 고구려 /

단군기(壇君記)인용 세주:

한사군 및 열국기(漢四郡及列國紀) /

단군본기(檀君本紀)』 인용:

단군은 서하(西河) 하백의 딸과 혼인하여 부루를 낳음.

비서갑(非西岬) 하백의 딸과 혼인하여 부루를 낳음.

기타

2, 기이 상, 고조선 /

위서(魏書)』 인용:

전조선기(前朝鮮紀) / 본기(本紀)』 인용:

시라(尸羅)고례(高禮)남옥저북옥저동부여북부여예맥비류국은 모두 단군의 후예임.

 

 

2000년 전 단군왕검이 아사달에 도읍하여 조선을 건국하니 시기는 요 임금과 같은 때임.

1, 왕력

주몽은 단군의 아들.

 

위의 표는 삼국유사󰡕제왕운기󰡕에 실린 단군 관련 기록을 요약 제시한 것이다. 표에서도 알 수 있듯이 두 문헌은 몇몇 부분에서 내용상 차이를 보이지만 고려 이전 시대의 역사를 통틀어 고조선(전조선)이 최초의 국가였다는 점, 단군은 범인과는 다른 신이한 출생담을 가진 고조선(전조선)의 건국 시조라는 점, 그는 중국 요 임금 시절에 나라를 세우고 일천 년 넘게 다스렸다는 점, 최후로 아사달에 들어가 산신이 되었다는 점 등에서는 같거나 유사한 내용을 전하고 있다.

그런데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한 시점에 대해 일연은 고기(古記)를 인용하여 요 임금이 즉위한 지 50년인 경인년이라 썼던 반면, 이승휴는 본기(本紀)에 근거하여 요 임금 원년인 무진년이라 쓰고 있다. 한편 일연은 세주를 달아 요 임금의 즉위년은 정사년이라 하며 고기의 기록에 의심을 품기도 했다. 아무튼 두 문헌은 서로 연대의 차이를 보이면서도 대체로 중국의 요 임금 시대에 고조선이 건국되었다는 데에는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특히 이승휴는 단군 원년에서 고려 태조 18(935)까지 3288년의 세월이 흘렀다고 하였는데, 이렇게 볼 경우 고조선의 건국 연대는 기원전 2353년이 된다. 하지만 고조선이 건국되었다는 기원전 2333년이란 시점은 어디서도 확인되지 않는다.

일단 고조선이 중국 요 임금 시대에 건국되었다는 점에서 두 문헌이 일치하는 만큼 요 임금의 즉위 연대를 알 수만 있다면 문제는 간단히 풀릴 것 같다. 그러나 요 임금은 중국 역사상 초기 임금으로 전설상의 인물이다. 때문에 그가 왕위에 오른 연대는커녕 그가 실제인물인지 조차 확신할 수 없다. 그런데 허무하게도 기원전 2333년이란 단기의 시작점은 바로 여기에 근거하고 있다. 단기 연대를 기원전 2333년으로 못 밖은 것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동국통감』을 편찬할 때의 일이었다. 동국통감』 편찬 시 서거정은 단군이 요와 더불어 무진년에 함께 즉위하였다고 전하는 고기(古紀)』의 기록에 의심을 품으며, 요 임금이 즉위한 것은 상원(上元) 갑자인 갑진년이니 단군 즉위는 그 25년 뒤인 무진년이었을 것이라 추정하였다. 결국 이 의견이 받아들여지면서 단기의 시작이 기원전 2333년으로 결정되게 된 것으로, 실상 여기에는 어떠한 역사적 사실성도 담겨있지 않다.

‘103이란 날짜 또한 마찬가지이다. 단군에 관한 가장 오래된 문헌인 삼국유사󰡕제왕운기』 뿐만 아니라 동국통감』을 비롯한 조선시대 역사서에서도 ‘103과 관련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결국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했다는 기원전 2333년 음력 103이란 날짜는 상상의 시간에 지나지 않으며, 이를 기념하는 개천절 또한 근대에 만들어진 전통(Invented Tration)’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주몽은 되지만 단군은 안 된다?

 

우리가 잘 아는 고대 한국의 건국신화는 모두 신비한 이야기로 가득 차있다. 알에서 태어났다는 주몽과 박혁거세, 6가야 왕들의 탄생담부터 부여군의 추격을 피해 달아나던 주몽을 위해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강을 건널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는 등의 전승이 그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모두 기이하면서도 환상적인 창업주의 개국 영웅담, 즉 건국신화의 한 요소로 자리하고 있다. 즉 세계 여러 지역의 역사 시작이 그러하듯이 한국에서도 고대국가의 성립과정은 신화의 형식을 통해 전승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첫 머리를 장식한 것은 바로 한국 역사상 첫 번째 국가라 할 수 있는 고조선의 건국신화, 곧 단군신화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 단군신화라는 말을 입에서 꺼내는 순간 식민사관에 빠져있다는 말을 듣기 십상이다. 이른바 강단사학이라 불리는 학계의 연구자는 단군신화라는 용어 하나로 식민사학자로 몰리기도 한다. 서점에 진열된 고조선 혹은 한국고대사 관련 대중서를 몇 권 들추어 보면 금세 단군신화라는 표현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책들을 여러 권 볼 수 있다. ‘단군신화라는 용어를 일제강점기 식민사학자들이 만들어낸 표현으로 여기고 이것에 대해 강한 거부 반응을 보이는 현상은 우리 사회 일각에 분명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거부감은 사실 그 나름의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韓國古代史學會(회장 安浩相)二十五國定國史교과서가 檀君開國을 완전히 神話로 규정, 韓國史上限을 대폭 위축시킴으로써 日帝植民地史觀을 그대로 도습한 역사교육을 강요하고 있다는 내용의 聲明書를 발표한 뒤를 이어 二十六일에는 재건국민운동 중앙본부에서 國史敎科書評價會를 열어 檀君神話論에 대한 공개비판을 가졌다.

각계인사 七十六명이 서명한 二十五일의 古代史學會聲明書檀君朝鮮一千四十八, 箕子朝鮮九百二十八, 扶餘朝鮮 一百六十四년 등 二千一百四十년간의 역사를 새교과서가 神話로 돌림으로써 우리 歷史의 출발을 衛滿으로 잡은 것은 檀君開國事實을 부정하고 韓國史四千三百年으로부터 二千년으로 줄였으며 우리를 始祖 없는 民族으로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하략)

(神話事實이냐 - 치열해진 檀君開國論爭 -, 동아일보』 1974. 7. 27, 5.)

 

위의 자료에서 볼 수 있듯이 단군을 신화로 볼 것인지, 사실로 볼 것인지에 대한 논쟁은 가깝게는 1970년대 국정 국사교과서 파동에서부터 확인된다. 당시 안호상(安浩相)이 회장으로 있었던 한국고대사학회(韓國古代史學會)의 주장을 요약하면 곧 새 교과서는 단군의 개국 사실을 신화로 치부해버림으로써 일제식민지사관을 그대로 도습한 역사교육을 강요하고 있으며, 한국사를 사천삼백 년으로부터 이천 년으로 줄여서 우리를 시조도 없는 민족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논쟁과 갈등이 이후 어떤 양상으로 전개되었는지까지 여기서 설명할 여유는 없지만 어쨌든 이로 인해 촉발된 논란은 1980년대 말까지 상당히 오랜 기간 큰 이슈로 회자되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1970년대의 주장이 오늘날에도 우리 사회 일각에서 강하게 주장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기원전 24세기에 건국한 단군조선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사실은 교과서에서는 철저하게 부인된다. 고조선은 아무리 빨라야 기원전 15세기 이전에 건국될 수 없으며, 실제 역사상에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기원전 3세기부터이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단군조선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기자조선의 실재는 부인하니까 사실상 위만조선만 실재했다고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이 경우 우리 역사의 시작은 연나라에서 망명한 위만으로부터 시작하게 된다.

(이덕일,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역사의 아침, 2006, 24)

 

핵심 이유는 뭐냐면 어떤 누구의 프레임으로 역사를 보는가라는 게 가장 중요한 건데요. 단군을 갖다가 뭐 신화다.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라고 주장하기 시작한 것은 일제 식민사학자들입니다. 그런데 일제시대에는 이게 별로 성공을 못 거두었어요. 워낙 일본사람들이 역사를 왜곡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런데 해방 이후에도 일제 식민사학의 후예들이 계속 역사권력을 장악하면서 이 사람들이 소위 자기들은 신민족주의 사학자다라고 하면서 단군 사실을 갖다가, 사화를 계속 신화로 몰아붙이니까 일반국민들이 우리 역사학자가 주장하는 거니까 근거가 있지 않겠느냐라고 생각해서 해방 이후에 오히려 신화라는 인식이 더 퍼져나갔는데요.

MBC 라디오 <손석희 시선집중> 이덕일 소장 인터뷰에서(2012.10.01)

 

위의 주장은 1970년대 국사교과서 파동이 촉발되던 당시 한국고대사학회(회장: 안호상) 성명서의 논리와 매우 닮아 있다. 이쯤 되면 단군신화라는 말이 일제식민사학의 잔재로서 단군과 이천년 고조선의 역사를 배제한 용어라는 저들의 주장을 일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단군신화라는 표현은 단군을 역사상의 인물이 아닌 신화 속 인물로 치부하는 말로서 이는 기원전 24세기 무렵에 건국된 단군조선의 역사를 부정하는 일제식민사관을 추종하는 것과 같다는 논리이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의 타당성을 가리기 이전에 한 가지 확인해야할 사항이 존재한다. 단군신화라는 용어는 정말 일제강점기 식민사관 속에서 만들어진 것인가 하는 점이다. 문제는 일제강점기에 단군신화라는 표현을 사용한 일본인 역사학자는 찾아보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이는 지난 20151217일 동북아역사재단 주최로 열린 상고사 학술회의에서 서영대 교수의 단군, 신화인가? 역사인가?발표를 통해서 명확히 확인된 바 있다. 1890년대부터 일본인들이 단군 문제를 본격적으로 거론하기 시작하였는데, 그들은 신화란 표현 대신 전설혹은 설화란 말을 썼다. 오히려 단군신화라는 표현은 당시의 한국 학자들 글에서 찾아볼 수 있는 용어였다. 따라서 단군신화란 말이 식민사관과 연결되어 있다는 주장은 성립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한국역사의 여명을 알리는 신화의 시대에 대한 당시 한국학자들의 인식을 살펴보는 데에 있어 1908년 단재 신채호가 발표한 독사신론에서의 다음과 같은 언급에 주의를 기울여볼 필요가 있다.

 

夫 三國以前에는 我 東國民族尙且 神視時代. 當時 英哲皆 神話하여 人民誘合하였는데, 麗羅駕 二國酷同神話甚多하니 高朱蒙에서 하였다 하며, 赫居世·金首露에서 하였다 하며, 昔脫解에서 하였다 하고, 高朱蒙松讓奇術함에 爲鷹·爲鷲·작이라 하였다 하였는데, 昔脫解首露王奇術함에도 爲鷹··작이라 하였고, 解慕漱天帝自稱하였는데, 駕洛國 神政天神한 바라 하였으니, 同地同種한 바 아니면 神話가 어찌 如此酷同하리오. 此其 ()이오.”

(신채호, 讀史新論: 扶餘族 大發達 時代, 大韓每日申報』, 1908.11.1)

 

즉 신채호는 삼국시대 이전의 역사에 대해 신시시대(神視時代)’라 하여 신화에 의해 인민이 결집되는 시대, 신화의 시대로 인식하고 있었다. 한편 최남선은 1926년에 쓴 단군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시방까지의 檀君傳하는 그대로 볼 양이면, 아무리 두둔하여 말하여도 그것이 一神話一傳說이오 歷史的 信文(믿을 만한 글)이 아님이 毋論이다. 神怪話意를 가져다가 史實하고 史蹟으로 함은 아무래도 생각할 일이 아닐 것이다. (중략)시방 사람으로 보아서 믿지 못하겠다 할 것이기 때문에 古人의 믿던 것임이 도리어 밝아도 지고 古人의 믿던 것이기 때문에 그 가운데서 種類歷史的 遺珠, 그렇지 못하여도 人類學的 民族學的 新光期待되는 것이다. 혹시라도 이것이 한낱 一神話 古代一民衆詩 一原始哲學임에 그치지 아니하고 確實事實的 背景을 가져서 얼마만큼이라도 歷史的暗黑을 쓸어 헤치는 도움이 된다 하면 이것은 도리어 望外所得이라고도 할 것이다.”

(최남선, 檀君論(), 東亞日報』, 1926.3.5)

 

일제강점기 당시 단군 연구의 최전선에 서있었던 최남선 또한 단군을 신화로 인정하면서도 오히려 그와 같은 시각 속에서 단군신화를 인류학역사학적으로 검토할 필요성을 인식하였다. 즉 당시 한국 학자들에게 있어 단군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는 존재할 지라도 단군의 시대는 곧 신화의 시대이며, 그들에게 단군신화라는 말은 그 시기를 규정하는 어찌 보면 당연한 표현이었다.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은 우리가 잘 아는 주몽신화의 주인공, 즉 알에서 태어나 신비한 능력을 바탕으로 고구려를 건국했다는 주몽의 업적에 대해 이를 신화로 명명한다고 하여 식민사관에 빠져있다는 비판을 듣는 경우는 없다는 점이다. ‘과거 광활한 영토를 영유했던 고대 한국의 역사를 상상하는 이들에게 있어 고구려는 어쩌면 정신적 고향과도 같을 것이다. 그런데도 주몽신화라는 표현은 일반적으로 어떤 거부감도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물론 알에서 태어났다는 박혁거세수로왕의 신화도 마찬가지이다. 이들 또한 일반 상식으로는 믿을 수 없는 많은 일화들을 내포한 신화 속의 인물들이다. 그러나 이를 신화로 지칭하였다고 하여 식민사학자라는 비판을 들었다는 얘기는 아직 듣지 못했다. 그렇다면 왜 주몽은 되고 단군은 안 된다는 것일까.

추측컨대 이것은 신화는 비과학적이고 실재하지 않은 환상 속의 이야기이기에 단군을 신화 속 인물로 간주할 경우 곧 우리 민족의 시조 단군의 역사는 허구가 되고 말 것이라는 우려가 만들어낸 현상이 아닐까 한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이것은 너무나도 단순한 논리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신화 또한 역사적 사건 혹은 인물에 대한 집단의 기억 보존 방식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특히 문자가 없는 시대, 사회일 경우 신화는 집단의 역사 기억을 보존하고 전승하는 핵심 통로였다. 때문에 현재 한국 학계에서 주몽이나 박혁거세를 아무런 역사적 실체가 없는 오로지 신화 속의 인물로만 치부하는 연구자는 없으며, 마찬가지로 단군신화라는 용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단군이 허구의 인물이 되는 것도 아니다. 단군신화를 역사적인 시각에서 이해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비롯한다.

 
필진 : 관리자 | 등록일 : 2016-10-14 13:42:33 | 조회 : 1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