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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학술동향] 고고학이 밝혀내는 흉노의 용성과 선우정 | 연구소


[사진 1] 2020년 출토된 흉노 궁성의 막새기와

 

            고고학이 밝혀내는 흉노의 용성과 선우정

 

Ⅰ. 올혼강변에서 발견된 흉노의 막새기와

  『사기』 흉노열전에는 선우가 살면서 서로 모여서 회합을 가지던 장소로 세 군데가 크게 언급된다. 즉, 정월에 모이는 궁전인 선우정(單于庭), 5월에 큰 회합을 가지는 용성(龍城 또는 籠城), 그리고 말이 살찌는 가을에 큰 대회를 여는 대림(蹛林) 등이 있다. 선우정은 겨울에 각 부족의 우두머리가 모이는 작은 모임을 여는 곳이다. 반면에 용성은 선우의 주 거주처이며 5월에 큰 대회를 열고 그들의 조상, 하늘과 땅, 귀신들에게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그리고 가을에 열리는 대림의 경우는 그 이름으로 볼 때 건물이나 성이 아니라 회합을 가지는 숲 속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올해 2020년 7월에 몽골에서 용성이 발굴되었다는 소식이 세계 각국의 고고학 관련 포털에 보도되어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아직 자세한 발굴상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알려진 정보에 근거해서 그 의의를 한번 살펴보자. 이 용성이라고 규정한 유적은 울란바토르에서 서쪽으로 약 470km 떨어진 아르항가이 아이막 올지트(Ulziit)솜 하르가나트(Харганат) 성터이다.


[사진 2] 유적의 지도상 위치

  울란바토르대학교 고고학과의  이데르항가이(Iderkhangai Tumur-Ochir)이 2017년에 처음 발견했고 2020년에 조사를 했다. 이 성터는 격자형태의 성으로 외벽이 550 x 550m, 내벽은 가로세로 각각 250x210m이다. 이 내성의 중심부에 양쪽으로 궁궐지가 위치한다.


[사진 3] 올지트솜 하르가나트 성지 전경(출처: https://news.mn/en/793449)

  그리고 전체 성의 남서쪽에는 대형 인공연못지도 확인되었다. 자세한 발굴성과는 아직 공개되지 않았지만 보도된 사진으로 보면 명문이 새겨진 막새기와가 대량으로 발굴되었다(위의 [사진 1] 및 아래의 [사진 4] 참조).


[사진 4] 한나라 궁전 감천궁 출토의 ‘여천무극’ 와당

  이 막새기와들의 명문은 모두 동일하며 선진시기의 서체로 '天子單于 與天毋極 千萬歲'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명문의 판독은 공개된 사진자료를 보고 필자가 예비적으로 판단한 것이다.
. ‘하늘의 아들 선우, 하늘과 함께 그 (영광이) 끝이 없으니 영원할지어다’ 정도로 해석된다. 막새기와에 하늘의 아들 선우라는 이름이 새겨졌으니, 이 건물과 유적이 선우의 처소와 관계된 것임은 분명한 듯하다.

  사실 흉노 유적에서 선우의 이름이 새겨진 막새기와가 출토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제까지는 주로 남흉노에서만 알려졌다. 예컨대 내몽골 파오터우시의 짜오완무덤(內蒙古 包頭 召灣漢墓)에서 ‘單于天降’ ‘四夷盡服’ ‘單于和親’ 등이 출토된 것이 널리 알려져 있다.


[사진 5] 2020년 출토된 흉노 궁성의 막새기와와 평기와

  그런데 내몽골의 남흉노 출토품은 중국에 투항한 선우(또는 선우를 자청하는 투항자)임을 강조하는 명문들로 이미 중국화가 완벽히 진행된 한나라 무덤에서 출토되었다. 즉, 중국이 자신들의 치적을 강조하기 위하여 만든 것으로 온전히 흉노의 것이라 보기는 어렵다. 반면에 올지트솜 출토품은 그러한 투항한 흉노가 아닌, 선우가 자신의 위엄을 드러낸 와당이라는 최초의 막새기와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매우 크다.


Ⅱ. 이 유적의 연대는?

  사마천의 『사기』 흉노열전에는 한 고조의 백등산 전투(白登山, 기원전 204~203년경으로 추정) 이후 모둔 선우와 화친하여 서로 서신을 주고받은 기록이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또한 모둔 선우의 아들로 그를 이어 선우가 된 노상계육선우(老上稽粥單于, 기원전 174~161) 시절에 흉노에 귀순한 한나라의 환관 출신 중항열(中行說)의 이야기를 통하여 흉노에서 발달된 고도의 문자 생활을 전하고 있다. 즉, 흉노는 적어도 3세기 후반~2세기 초반에 흉노의 상층부는 한자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구체적으로 올지트솜의 연대는 막새기와에 새겨진 '天子單于 與天毋極 千萬歲'이라는 명문과 서체로 추정할 수 있다. ‘하늘의 아들’은 『한서』 흉노전에 나오는 선우의 원래 명칭인 “탱리고도선우(撑犂孤塗單于)”에 대응한다. 탱리는 하늘을 뜻하는 텡그리, 고도는 아들이라는 뜻이니 바로 ‘천자선우’는 이 ‘탱리고도선우’의 한문 번역에 해당한다. 그 뒤에 나오는 ‘하늘과 함께 그 끝이 없이 영원하리라’는 진·한대의 와당에서 흔히 등장하는 어귀이다. 그중에서도 서한 시대에 해당하는 감천궁(甘泉宮) 출토의 와당에 새겨진 ‘여천무극’을 보면 올지트솜의 출토품보다 훨씬 정련되어 한대의 서체에 가깝다.


[사진 6] 기존에 알려졌던 남흉노의 선우 관련 막새기와(內蒙古 包頭 召灣漢墓 출토)
                                                        *좌측부터單于天降 四夷盡服 單于和親 등으로 해석된다.

  즉 올지트 출토의 와당은 서한 시대 초기, 나아가서 전국시대 말기로도 시대를 추정해볼 수 있다. 실제로 흉노의 동인(銅印) 중에 상해박물관 소장 “흉노상방(匈(凶)奴相邦)” 인장은 전국시대의 조나라 서체로 만들어져서 전국시대 말기로 편년된다. 또한, 기원전 4~3세대로 편년되는 내몽골 시고우빤(西溝畔) 1호묘에서는 진나라 시기의 전서체가 흉노의 황금 장식에 새겨진 바가 있다.

  따라서 이 유적은 기원전 2세기 전반기에 중국과 본격적으로 접촉을 하던 흉노 전성기에 해당하는 유적일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중국식 건물과 중국의 고풍스러운 서체로 선우의 위엄을 과시하였음은 바로 흉노 내부 결속용이 아니라 외부의 사람들, 즉 중국에서 온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선우의 위엄을 과시한다는 점에서 국가 간의 사절을 맞이하는 건물일 가능성이 크다.


Ⅲ. 흉노의 용성인가, 아니면 선우정인가

  이 올지트 솜의 성터에서 공개된 문자명 막새기와와 그 건축 구조만으로도 충분히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발굴자 이데르항가이는 '하늘의 아들 선우'라는 명칭과 고급스러운 건축물 구조라는 점에 근거하여 이 유적을 용성으로 비정한 듯하다. 하지만 공개된 자료를 볼 때 이 흉노의 건축유적은 매우 독특하며 최상위의 것임은 분명하지만 용성으로 비정할 수 있는 결정적인 근거는 부족하다.

  흉노의 전통적인 선우정, 용성, 대림 등은 모두 유목 생활을 하는 흉노 상층부가 모이는 전통적인 모임 장소이다. 특히 용성의 경우 흉노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흉노를 비롯한 유목민들의 제사 장소는 남부 시베리아의 볼쇼이 보야르 암각화에 잘 묘사되어 있다. 그들은 커다란 동복(구리솥)을 걸고 초원에서 모였다. 흉노가 완전히 중국화되지 않은 몽골의 중심에 연못이 있는 중국식 건물을 세우고 여기에서 제사를 지내고 모였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이 건물의 용도는 무엇일까. 그 단서는 이 건물과 기와의 특징에 있다. 이 건물은 중국식으로 지어졌고 중국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한자로 선우의 영광을 장식한 명문 기와가 발견되었다는 점에 주목해보자. 이 건물은 중국에서 흉노를 방문하는 사신을 맞기 위한 일종의 접대소 같은 역할을 했다면 쉽게 해석이 될 수 있다. 한나라는 실제로 한 무제의 백등산 전투 이후 매년 정월에 엄청난 양의 조공을 바쳐야했다. 백등산 전투 이후 기세가 오른 모둔선우와 흉노에게 한 고조는 명주, 견, 술, 곡물들과 종실의 딸을 주어서 선우의 연지로 삼게 했다.

  이 당시에 수많은 중국의 장수와 군인들이 흉노로 투항했다. 먼저 한왕신(韓王信)이 흉노로 갔고, 이후 연왕 노관과 그의 무리 수천 명이 흉노에 투항했다(『사기』 흉노열전). 이러한 대량의 이민은 흉노 안에서 중국과의 관계를 담당하는 중국계 이주민으로서 역할을 했다. 흉노는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기존의 유목 생활을 하는 유목국가의 구조와 중국계 이주민들이 중심이 된 정착민들이 공존하는 이중적인 국가체계가 수립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전통은 흉노가 멸망할 때까지 이어졌으니 노용-울과 골모드와 같은 흉노 후반기의 무덤에서 발견된 다양한 중국제 유물이 그를 증명한다.

  올지트솜의 명문 기와는 이 건물이 중국의 사신에게 자신들의 영광을 드러내는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중국의 기록에는 사신을 맞는 일종의 영빈관 또는 접대소와 같은 곳에 대한 기록은 없다.

  따라서 사서의 기록과 비교한다면 선우정이 사신의 접대소와 같은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선우정은 여러모로 전통적인 유목민들의 습속과 맞지 않는다. 『사기』에 따르면 정월에 여러 장수(諸長)이 모여서 작은 모임을 가진다고 한다. 이러한 전통적인 선우들의 회합을 추정할 수 있는 자료로 차람 고분군에서 출토된 자작나무 상자는 가운데 커다란 건물(또는 유르트)를 두고 깃발을 꽂은 다른 유르트와 마차들이 모여있다.


[사진 7] 러시아 부리야트 자치공화국 차람 고분군 출토 자작나무 껍질 상자에 새겨진 그림

  가운데의 큰 건물은 간략하게 묘사되었지만 지붕 위의 기와와 치미, 문의 형태 등 기와집일 가능성이 크다. 이 차람 고분의 연대는 흉노의 말기로 기원전후 한 시기이다. 아마 선우정을 묘사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유목사회에서 정월은 가장 추운 지역으로 지역 간의 이동이 거의 불가능하다. 물론 부족 단위로 모여서 사냥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선우가 소집하는 장수들의 회의를 정월에 한다는 것은 여러모로 쉽지 않다. 그런데 중국에 흉노의 사신은 주로 정월에 와서 다양한 조공품과 공녀들을 데리고 흉노의 지역으로 돌아갔다. 『후한서』 남흉노열전에는 연말에 흉노의 사신이 중국에 오고 또 중국의 사신도 선우정에 교대로 파견시켰다고 한다. 아울러 흉노에게 보낸 엄청난 양의 선물도 기록되어 있다. 그 일면을 보면 비단 4단, 금 10근, 태관어식같은 물건은 물론 오렌지, 귤, 용안, 여지같은 흉노인이 구하기 어려운 기호품들도 대량으로 보냈다.
 
  흉노의 장수들이 몸을 움직이기 어려운 겨울에 모이는 것은 바로 이렇게 중국의 사신을 맞이하고 또 그 선물들을 나누어 받기 위함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주변 국가를 정벌하여 그 전리품을 재분배하는 방식으로 통치와 지배를 확립했던 흉노에게 중국은 노력하지 않고 쉽게 전리품을 공급했다. 그 결과 유목민은 여름과 겨울의 목초지로 옮기는 봄과 가을에 회합을 하던 그들의 풍습을 바꾸었고 지속적인 전쟁과 전리품의 재분배라는 기존이 유목사회 구조에서 회합을 정례화하고 중국계의 위신재 및 풍습이 도입되면서 그들의 회합 성격이 바뀌게 되었다. 이러한 지속적인 중국의 개입으로 흉노는 그들의 원래 가지고 있었던 풍습을 점차 잃고 국가의 결속도 와해되었다.

  실제로 역사 기록을 보아도 한서를 거쳐 후한서에서는 흉노의 전통적인 회합 장소인 ‘용성’에 대한 기록은 사라진다. 대신에 선우정이 남흉노와 북흉노를 대표하는 선우의 회합 장소로 자주 등장한다. 올지트솜의 유적은 이렇게 흉노가 중국과의 오랜 접촉으로 그 유목국가의 성격이 변하기 전에 중국의 사신을 맞이하는 공간으로 선우의 위엄을 드높이며 나아가서 흉노의 장수들이 모였던 곳으로 기능했던 초기의 건물일 가능성이 크다.


[참고문헌]
강인욱 2012 「흉노의 명문자료에 대하여」 『한국상고사학보』75
https://unuudur.mn의 2020년 9월 14일 뉴스
https://news.mail.ru/society/42643358/
『사기』 흉노열전
『한서』 흉노전
『후한서』 남흉노열전

 
필진 : 관리자 | 등록일 : 2020-11-17 02:27:59 | 조회 : 5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