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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학술동향] 중성리비 발견 이후 신라사 연구 동향과 전망 | 연구소


[탁본을 씌운 포항 중성리 신라비]

 

                          중성리비 발견 이후 신라사 연구 동향과 전망

 

                                                                                                                                이성호(대림대학교 강사)

 

  1988년 울진 봉평리 신라비(이하 봉평비)가 발견되면서 신라사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였다. 그리고 1년 후 다시 포항 냉수리 신라비(이하 냉수리비)가 추가로 발견됨에 따라 신라사 연구는 한층 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 두 비의 발견으로 인하여 신라사 연구는 다양한 방면으로 확장되었고 커다란 성과를 가져왔다. 여기서는 두 비의 발견 이후로 전개된 신라사 연구 동향에 대해 오늘날 신라사 연구의 핵심 주제라 할 수 있는 6부(部)·관등제·법제(율령) 세 주제를 중심으로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2009년 포항 중성리 신라비(이하 중성리비)의 발견을 계기로 나타난 연구 방향의 전환과 향후 연구 전망에 대해서도 함께 언급해보고자 한다.

 

1988년 울진 봉평리 신라비와 1889년 포항 냉수리 신라비의 발견

  1988년 울진에서 봉평비(520, 법흥왕11)가 발견되고 다음 해에 포항에서 냉수리비(503, 지증마립간4)가 발견되면서 신라사에 대한 이해는 획기적으로 진전되었다. 먼저 봉평비의 내용을 통해 신라 국왕은 6부 중 훼부(喙部) 소속이며 갈문왕은 사훼부(沙喙部) 소속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다른 4부의 수장은 “간지(干支)”라는 이전 시기의 칭호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간지는 지방민에게 사용되는 외위(外位)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에 특별히 그들을 더 우대하는 모습을 보인 것은 아니었다.

[울진 봉평리 신라비]

  이렇듯 봉평비를 통해 당시 신라에서는 훼부와 사훼부 중심으로 국정이 운영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와 함께 당시 신라왕이 훼부 소속임을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왕의 권한이 강해지고는 있으나, 부의 대표자로서 성격을 완전히 탈피하지 못한 상황으로 이해되었다. 즉 당시까지 신라는 아직 6부 체제를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국왕이 부를 벗어나 독보적 권한을 가지고 국가를 대표하는 단계에는 도달하지 못하였다고 본 것이다.

  한편, 훼부와 사훼부 출신 인물들은 경위를 관칭하고 있으나 다른 부 출신 인물들에게는 경위가 확인되지 않아 당시 신라는 훼부와 사훼부를 중심으로 국가가 운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불어 이 비석을 통해 법흥왕 시대 신라에 17관등이 성립하였음도 확인하게 되었다. 또 복수의 인명을 표기할 때에는 출신지인 6부보다 관등의 고하에 따라 순서대로 나열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되었다.

  반면, 비에서는 외위를 가진 지방 출신 인물도 보이는데, 이지파(異知巴)가 하간지(下干支, 외위 7)라는 간(干) 계열 외위를 소지한 것으로 보아 촌주(村主)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촌주 예하 외위를 가진 인물로 이모리(尼牟利) 일벌(一伐, 외위 8), 신일지(辛日智) 일척(一尺, 외위 9)·이의지(尒宜智) 파단(波旦, 외위 10)·탄지사리(䋎只斯利) 일금지(一金智) 등이 보이는데, 이 중 ‘일금지’는 외위에 없는 관등이기에 인명으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봉평비의 발견을 통해 524년 무렵 신라에서는 이미 법령을 통하여 국가를 운영하고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는 점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법흥왕 7년(520)에 율령이 반포되었다는 기록이 보이지만, 당대 율령의 구체적 모습에 대해서는 자료의 부족으로 알기 어려웠다. 그런데 봉평비에서 “대교법(大敎法)”·“별교령(別敎令)”·“장백(杖百)” 등의 용어가 확인되면서, 당시 신라 법령의 구체적인 모습과 그 운영 양상에 대해 추적할 수 있는 실마리를 확보할수 있게 되었다.

  한편, 냉수리비는 신라 진이마촌(珍而麻村)에 사는 절거리(節居利)의 “재물(財物)”에 관한 분쟁과 그 상속을 판결한 내용이 새겨져 있는 비이다. 특히 이 비에서는 “교(敎)”라는 법제 용어가 보여 연구자들의 시선을 끌었는데, 교는 중국에서 제후왕(諸侯王)이 내리는 명령을 말하는 것이다. 냉수리비에서는 교가 3번 쓰이는데, 문제가 되는 것은 7인의 유력자가 공동으로 내린 교이다. 바로 “차칠왕등공론교(此七王等共論敎)”라는 부분인데, 이 구절의 해석에 따라 당시 신라에서는 7명의 왕이 존재하였닥 보아 이 시기 6부의 위상이 대등했다는 학설이 나오기도 하였다. 또한 공론(共論)이 중요한 의사결정 수단이었음도 확인할 수 있었다.

[포항 냉수리 신라비]

  물론 이와 함께 신라 왕경에 존재하는 6부 가운에 훼부와 사훼부가 다른 부보다 우월한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는 점도 지적되었다. 특히 지도로갈문왕(至都盧葛文王)이 훼부 소속이 아닌 사훼부 소속으로 나오고 있어 왕이 소속된 훼부와 갈문왕이 소속된 사훼부가 같은 성씨라는 점도 확인되었다. 이에 따라 이것을 훼부가 사훼부를 장악한 증거로 보는 의견도 제출되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서는 신라 지증왕이 즉위한 시기를 500년으로 전하는 반면, 냉수리비에서는 그가 503년 당시까지 갈문왕의 지위에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어 연구자들을 혼란에 빠뜨리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연구자들 간에는 갈문왕의 성격에 대한 논의와 함께 다양한 토론이 전개되었는데, 갈문왕의 왕위계승권 유무에 따라 이를 정상적인 즉위로 보는 견해도 있는 반면, 비정상적인 즉위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그리고 냉수리비에서도 훼부와 사훼부에서는 아간지, 일간지, 거벌간지 등 다수의 경위가 보이지만 다른 4부의 수장은 간지의 칭호를 사용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지방 출신 인물 중에는 촌주(村主)인 유지(臾支) 간지(干支)와 수지(須支) 일금지(壹今智)가 보이는데, 이 중 수지 일금지의 경우는 ‘일금지’라는 관등이 기록에서 보이지 않는 관등이기에 봉평비와 마찬가지로 인명으로 보아 수지와 일금지라는 2인으로 보는 견해도 나타났다.

 

2009년 포항 중성리 신라비의 발견과 연구 전망

  2009년에 발견된 중성리비는 새겨진 글자가 비교적 선명하여 판독상에 큰 어려움이나 이견은 없는 편이지만, 비문에서 구사된 문장의 구조가 명확하지 않고 명사·동사·주어·서술어 등의 구분이 어려워 해석과 내용 파악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대체로 냉수리비나 봉평비와 내용 구성 면에서 유사할 것이라고 보고 있으나, 그 세부적인 해석에서는 연구자들마다 이견이 많은 편이다.

  대체로 당시 이 지역에서 어떤 분쟁이 벌어졌고, 그것을 신라왕을 포함한 6부의 핵심 지배층들이 함께 의논하여 그 처리를 결정하고 판결을 내렸으며, 그 결과 이 지역에 명령(교)을 내리기 위해 비석을 세웠다는 정도의 이해는 많은 연구자가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분쟁의 구체적 내용은 무엇인지, 당사자들은 누구인지, 그리고 최종판결의 내용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연구자들마다 견해가 엇갈리고 있으며, 그와 함게 비석에 보이는 인명과 지명, 부명의 구분도 명확하게 이루어지고 있지 못한 상황이다.

  한편, 비석의 건립 시기도 441년 설(눌지마립간25)과 501년 설(지증마립간2)로 나뉘고 있는데, 어느 시기로 보는지에 따라 이 비문의 해석 방향도 달라진다는 점에서 중성리비는 앞으로도 연구의 진전과 치열한 논쟁을 예고하고 있는 비석이다.

[포항 중성리 신라비]

  중성리비를 둘러싼 쟁점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면, 먼저 6부의 명칭과 표기법에 대해서도 연구자마다 의견을 달리하고 있다. 비문에서 분쟁의 중심에 서 있는 “모단벌(牟旦伐)”에 대해 많은 연구자가 모단벌훼(牟旦伐喙)로 읽고 이를 신라 6부 중 하나인 모량부(牟梁部)로 보고 있다. 그러나 다른 일군의 연구자들은 모단벌을 인명으로 보기도 한다. 모단벌에 대한 이러한 해석의 차이는 분쟁의 당사자를 개인으로 보아야 할지 아니면 부라는 공동체로 보아야 할지에 대한 논쟁이기도 한데, 이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비석 전체에 대한 해석의 향방을 가른다. 또 “쟁인”과 관련한 구절 가운데 보이는 “금평(金平)”의 경우도 한기부(漢岐部)로 보는 견해와 습비부(習比部)로 보는 견해가 있으며, 혹은 별도의 지명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이와 달리 금평(金平)을 인명으로 보고 본피부(本彼部)에 있었던 복수의 간지 중 1인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이처럼 중성리비에 보이는 난해한 구절들은 오히려 연구자들의 다양한 해석을 불러일으켰고, 이를 통해 6부의 성립 시기나 성격·명칭과 그 표기법에 관한 문제·6부 사이의 역학관계와 국가발전단계에서의 6부의 존재 양태 등에 대한 다양한 토론이 이루어지고 있다. 더욱이 이 비석에 새겨진 내용이 441년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인지 아니면 501년의 그것인지에 따라 신라의 국가발전단계나 국가 운영 양상 등 신라 국가체제와 사회구조 전반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할 수 있는 여지가 마련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한편, 중성리비 단계에서도 앞서의 냉수리비·봉평비와 마찬가지로 훼부·사훼부를 중심으로 국정이 운영되고 있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는데, 만약 이 비석의 건립 시기가 441년일 경우 6부 발전단계 설정에 대한 기왕의 견해가 크게 흔들릴 수도 있다. 일단 이 비석이 441년에 건립된 것이라면 신라 6부의 상호 관계에 대한 기왕의 이해 방식은 재검토되어야만 한다. 나아가 6부제와 신라의 발전단계에 대한 새로운 논의가 이루어질 필요성이 제기될 것이다. 이렇듯 중성리비의 발견으로 신라의 국가발전단계와 6부에 관한 전면적인 재검토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던져졌다.

  중성리비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관칭하는 관등은 냉수리비에 나오는 양상과 대체로 유사하다고 간주해 왔다. 그런데 중성리비에서는 그간 외위(外位)로 이해되었던 일벌(壹伐)이 훼부와 사훼부를 제외한 4부의 지배층이 소지하고 있어 기왕의 시각과는 다른 해석의 가능성이 마련되었다. 결국 신라 경위·외위의 성립과정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가 필요한 실정이다.

  즉 앞으로의 신라 관등제 연구는 중성리비에 대한 면밀한 분석을 바탕으로 경위의 성립과정을 재검토하고 이와 함께 경위·외위의 상호 관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마련하는 방향으로 진행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미 학계에서는 관련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데, 신라 중앙에서 ‘간지’ 위호의 성격 문제 등 아직 명확히 해명되지 못한 부분이 많아 향후 연구와 논쟁의 주무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한편, 지방의 촌에 두어졌던 간지 아래 ‘일금지’라는 관등이 새롭게 확인됨에 따라 냉수리비와 봉평비에 등장하는 일금지도 인명이 아닌 관등일 가능성이 커졌다. 이로 인하여 외위의 성립과정과 시기에 대해서도 새로운 견해가 제시될 것으로 전망한다. 즉 이와 같은 위호의 수여가 지방에서 자체적으로 이루어진 것인지 아니면 중앙에서 수여한 것인지에 대한 문제, 훼부·사훼부와 나머지 4부의 관등체제의 구조는 어떠하였고 양자는 어떤 차이가 있었는지에 대한 문제, 지방 관등체제가 중앙 권력에 의해 일괄적으로 시행된 제도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 등 중성리비 발견으로 연구자들에게 새롭게 해명되어야 할 많은 의문이 던져지고 있다.

  앞서의 두 비석과 마찬가지로 중성리비에서도 ‘교(敎)’를 통해 문제에 대한 판결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교’의 최고 결정권자에 대한 부분은 판독이 불분명한 상황이라 이 부분 역시 쟁점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중성리비에서 분쟁의 대상 혹은 당사자로 여겨지는 “일부지궁(日夫智宮)”과 “두지사간지궁(豆智沙干支宮)”의 성격과 실체 역시 핵심 쟁점 중 하나이다. 궁(宮)을 재화 혹은 유력자의 집으로 간주하는 견해가 제시된 바 있으나, 명확한 논거를 확보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끝으로 비석 뒷부분에 등장하는 “작민(作民)”과 관련하여서도 농장으로 보는 견해, 수조권으로 보는 입장 등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비문 상에서 다루어지는 분쟁의 대상, 분쟁 당사자 등에 대한 부분 또한 해명되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는 상황이다.

  이처럼 중성리비는 가장 오래된 신라 석비로 인정되고 있으나 그 건립 시기에 대한 비정조차 불분명한 상황이다. 6부의 명칭이나 지배층에게 주어진 관등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해명되지 않은 부분이 많다. 더구나 비석의 건립 시기를 441년과 501년 중 어느 시기로 볼지에 따라 앞으로의 신라사 연구 방향과 신라의 국가발전단계 양상에 대한 관점이 크게 바뀔 수도 있다. 중성리비를 둘러싸고 제기되고 있는 여러 쟁점 속에 도사리고 있는 문제들이 만만치 않음을 느끼게 한다. 중성리비의 연구 향방에 따라서 신라 6부의 성립과정과 신라의 국가발전단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펼쳐질 가능성이 크다.

  중성리비 연구는 역시 그에 앞서 발견된 냉수리비·봉평비와의 면밀한 비교를 통하여 관찰되는 신라 사회의 변화상을 차분하게 검토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여야 한다. 중성리비 연구가 가져다 주는 연구의 결과물은 4~5세기 신라의 정치·경제·사회 전반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는 한편, 국가체제의 변화상과 경제·사회의 발전 양상을 새롭게 가늠하는 귀중한 계기가 될 것이다. 중성리비를 중심으로 펼쳐질 신라사 연구가 다방면에 걸쳐 활발하게 진행되기를 기대해 본다.

 
필진 : 관리자 | 등록일 : 2020-05-21 15:20:00 | 조회 : 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