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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학술동향] 가셴둥[嘎仙洞] 석실과 선비(鮮卑)의 기원 (2부) | 연구소


[후룬호와 베이얼호의 위치]

                          가셴둥[嘎仙洞] 석실과 선비(鮮卑)의 기원 (2부)

                                                                                                   이승호(한국고대사·고고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


기원전 3~2세기 북방 정세와 선비(鮮卑)의 출현

  기원전 3세기 동아시아 북방 지역에서는 흉노(匈奴)와 동호(東胡), 월지(月氏)가 서로 각축전을 벌이며 대립하고 있었다. 이때 흉노는 오르도스와 인산[陰山] 산맥 및 네이멍구[內蒙古] 고원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으며, 월지는 서쪽의 서북 몽골고원으로부터 황하 상류 및 톈산[千山] 산맥 일대를 터전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동호는 몽골고원 동부로부터 다싱안링[大興安嶺] 일대를 지나 요서(遼西) 지역에 걸쳐 거주지를 옮겨가며 수렵과 목축 그리고 원시 농경으로 삶을 영위해 나갔다. 그리고 기원전 209년, 이러한 북방 정세에 급격한 변동이 발생하게 된다.

  冒頓이 즉위하니(B.C.209), 이때 東胡가 강성하여 …(중략)… 冒頓이 말에 올라, 나라 안에 (자신보다) 뒤처지는 자가 있으면 참하겠다고 명령하고, 마침내 동으로 東胡를 습격했다(B.C.206). 東胡는 처음에 冒頓을 가벼이 보고, 방비를 갖추지 않았다. 冒頓이 병사를 이끌고 이르러 東胡의 왕을 크게 깨뜨려 멸하고, 그 백성들과 가축, 산물을 노획하였다.  (『漢書』 卷94上, 匈奴傳 64上)
  (冒頓既立, 時東胡强 …(中略)… 冒頓上馬, 令國中有後者斬, 遂東襲擊東胡. 東胡初輕冒頓, 不爲備. 及冒頓以兵至, 大破滅東胡王, 虜其民衆畜產.)

  烏桓은 본래 東胡이다. 漢 초에 匈奴의 冒頓이 그 나라를 멸하였다. 남은 무리는 烏桓山(으로 피하여 세력을) 保全하였으니, 이로 인하여 (烏桓이라) 불리었다. …(중략)… 鮮卑는 역시 東胡의 한 갈래인데, 따로 鮮卑山에 의지하였으므로 (鮮卑라) 불리었다. 그 언어와 습속은 烏桓과 같다.  (『後漢書』 卷90, 烏桓鮮卑列傳 89, 烏桓)
  (烏桓者, 本東胡也. 漢初, 匈奴冒頓滅其國. 餘類保烏桓山, 因以爲號焉. …(中略)…鮮卑者, 亦東胡之支也, 別依鮮卑山, 故因號焉. 其言語習俗與烏桓同.)

  위의 기록을 보면, 기원전 3세기 말에 흉노는 묵특선우(冒頓單于) 시대를 맞이하여 북방 초원의 강자로 부상하며 동쪽으로 동호를 격파하고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그리고 그와 같은 흉노의 세력 확장에 밀려난 동호 세력도 동쪽을 향해 연쇄적으로 큰 대이동을 감행하였는데, 그 한 갈래는 선비산(鮮卑山)으로, 다른 한 갈래는 오환산(烏桓山)으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각각은 자신들이 거처한 산명을 따라 오환(烏桓)과 선비(鮮卑)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오환과 선비의 출현이다.


오환산(烏桓山)과 선비산(鮮卑山), 그리고 가셴둥 대선비산(大鮮卑山)

  이처럼 당시 동호 세력이 분지하면서 오환과 선비가 출현하게 되었다고 하지만, 이들이 새로 정착한 거점이자 종족명의 연원이 되었던 오환산과 선비산의 구체적인 위치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의견이 분분하다.
  대체로 오환산의 경우는 네이멍구[內蒙古] 자치구 아루커얼친기[阿魯科爾沁旗] 북쪽, 즉 다싱안링 산맥 중부 한산(罕山) 일대로 보는 의견이 많으며, 일부에서는 넌강[嫩江]의 지류인 타오얼허[洮爾河] 상류 일대, 즉 지금의 네이멍구 자치구 싱안멍[興安盟] 구이리우허[歸流河] 유역으로 비정하는 의견도 있다.
  한편, 선비산에 대해서는 다싱안링 산맥 남단, 즉 네이멍구 자치구 퉁랴오시[通遼市] 커얼친죄익후기[科尔沁左翼中旗] 서쪽 일대로 보아왔던 전통적인 견해가 지지를 받는 가운데, 북위 탁발선비의 석굴이 발견되면서 다싱안링 산맥 북단, 즉 후룬베이얼[呼倫貝爾市] 오로촌 자치기[鄂倫春自治旗] 아리허진[阿裏河鎭] 북쪽 가셴둥[嘎仙洞] 일대로 보는 의견도 일부에서 제기되고 있다.

  옛적에 黃帝는 25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 중 어떤 자는 內地 中原(諸華) 땅에 분봉하고, 어떤 자는 外地 변방(荒服)에 분봉하였다. 昌意는 그 少子로서 북쪽 땅에 봉해졌는데, 境內에 大鮮卑山이 있어서 ‘鮮卑’를 국호로 삼았다. 그 후 대대로 君長이 되어 幽都의 북쪽 땅을 통할하였다. 廣漠한 들판에서 옮겨 다니며 放牧하였고, 수렵을 生業으로 삼았다. (『魏書』 卷1, 序紀 1)
  (昔黃帝有子二十五人, 或內列諸華, 或外分荒服, 昌意少子, 受封北土, 國有大鮮卑山, 因以爲號. 其後, 世爲君長, 統幽都之北, 廣漠之野, 畜牧遷徙, 射獵爲業.)

  위의 기록에서 보듯 북위를 건국한 탁발선비 황실은 그들 종족명의 연원을 초창기거주지 부근에 있던 ‘대선비산’에서 찾고 있다. 그렇다면 탁발선비의 발상지 부근에 ‘대선비산’이 존재하였다는 것인데, 1980년에 가셴둥 선비 석실의 발견되면서 이 ‘대선비산’의 위치에 대해서는 대략적인 위치가 밝혀지게 되었다. 때문에 처음 가셴둥 석실이 발견되면서 가셴둥 일대, 즉 다싱안링 산맥 북단 어딘가에 선비산이 있을 것이라는 의견도 제기된 바 있다. 그러나 현재는 『위서』 서기에 나오는 ‘대선비산’은 다만 탁발씨(拓跋氏)의 발흥지일뿐 ‘선비산’과는 별개의 산이라는 의견이 학계의 다수를 점하고 있다. 즉 가셴둥 일대와 가까운 지역에 있을 것이라는 ‘대선비산’은 선비 세력이 처음 동호로부터 분지하여 정착한 ‘선비산’과는 다른 곳이라는 의견이다.


탁발선비(拓跋鮮卑)가 ‘선비’가 되기까지: 탁발선비의 남하

  앞서의 사료에서 “광막(廣漠)한 들판에서 옮겨 다니며 방목(放牧)하였고, 수렵을 생업으로 삼았다.”고 하였듯 탁발선비의 선조들은 다싱안링 북단의 원시 밀림에서 유목과 수렵을 중심 생업으로 하였다. 특히 그들의 발흥지인 가셴둥 일대의 자연환경은 침엽수림 지대를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렵생활을 주된 경제로 할 수 있는 충분한 여건을 가지고 있었다. 이로 미루어 초창기 탁발씨 집단은 가셴둥 일대에서 소규모의 가축 사육과 함께 수렵경제를 중심으로 이동 생활을 영위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67代가 지난 후, 成皇帝 托跋毛가 즉위하였다. 그는 (타고난 자질이) 聰明하고 武略을 소유하여, 遠近의 사람들에게 추대를 받아 36國과 99개 大姓을 統領하였고, 위세를 北方에 떨쳐 복종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魏書』 卷1, 序紀 1)
  (積六十七世, 至成皇帝諱毛立. 聰明武略, 遠近所推, 統國三十六, 大姓九十九, 威振北方, 莫不率服.)

  위의 기록에서처럼 가셴둥 일대에서 점차 세력을 결집시켜 나가기 시작한 탁발선비 세력은 탁발모(托跋毛) 시대에 이르러 여러 부락을 아우르는 연맹체 단계로 진입하였다. 즉 이 무렵 탁발선비는 다싱안링 북부 일대의 여러 부락을 규합하고 이를 주도하는 세력으로 성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宣皇帝인 (托跋)推寅이 즉위하였다. 남쪽으로 옮겨 大澤에 이르렀는데, 사방 천여 里에 달하였고, 그 땅은 운무가 많이 끼고 低濕하였다. 재차 남쪽으로 옮겨 가려했으나, 실행하지 못하고 逝去하였다.  (『魏書』 卷1, 序紀 1)
  (宣皇帝諱推寅立. 南遷大澤, 方千餘里, 厥土昏冥沮洳. 謀更南徙, 未行而崩.)

  이후 기원후 1세기 전반(A.D.22~55) 무렵이 되면 탁발씨는 위의 기록에서처럼 탁발추인(托跋推寅) 시기에 이르러 거주지를 한 차례 남쪽으로 옮겼음을 전한다. 이때 탁발선비가 남하하여 정착한 지역을 ‘대택(大澤)’이라고 하였는데, 이 대택은 곧 오늘날 후룬호[呼倫湖]로 비정되고 있다. 후룬호는 중국 네이멍구 자치구 북부의 후룬베이얼[呼倫具爾] 평원에 있는 거대한 호수로서 호수 면적은 2,315㎢로 제주도보다도 약 500㎢ 정도 큰 네이멍구 일대 제일의 호수이며 중국 5대 담수호 중 하나이다. 후론호 주변 지역은 유목경제가 성립하기에 이상적인 자연조건을 갖추고 있었고, 때문에 이 무렵부터 탁발부의 경제적 기반도 유목경제로 바뀌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가셴둥 선비 석실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일본학계를 중심으로 『위서』 서기의 기록이 허구라는 의견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가셴둥 선비 석실의 발견과 함께 그 일대에서 발견된 토기와 후룬베이얼 초원의 ‘완공(完工) 선비 무덤’(呼倫貝爾市 陳巴爾虎旗 完工鎭 達蘭鄂羅木河 東岸) 및 자라이누얼[紮賚諾爾] 선비 무덤군(呼倫貝爾市 紮賚諾爾區)에서 출토된 토기가 형태상 동일 계통의 것임이 확인되면서 『위서』 서기의 기록에 보이는 탁발부의 이동 경로를 증명하고 있다.

  獻皇帝인 (托跋)鄰이 즉위하였다. 당시 어떤 神人이 나라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 땅은 황량하고 (문명의 땅으로부터) 遙遠하여 都邑을 세우기에 부족하니, 마땅히 다시금 거처를 옮겨야 한다.”고 하였다. 이 때 皇帝는 年老하여 (기력이) 衰하였기 때문에 帝位를 아들에게 傳授하였다.  (『魏書』 卷1, 序紀 1)
  (獻皇帝諱鄰立. 時有神人言於國曰, “此土荒遐, 未足以建都邑, 宜復徙居.” 帝時年衰老, 乃以位授子.)

  聖武皇帝의 이름은 (托跋)詰汾이다. 獻帝가 (그에게) 남쪽으로 옮겨가도록 명하였다. 산이 높고 골짜기가 깊어 9가지 難艱과 8가지 장애물을 만났다. (武皇帝는) 그곳에 머물고자 하였다. (그 때) 神獸가 나타났는데, 그 형체는 말과 같고 그 소리는 소와 같았다. 그것이 앞서 행하며 인도하여서, 1년 후 겨우 (山谷을) 빠져나왔다. (그 후) 비로소 匈奴의 옛 땅에 거하게 되었다.  (『魏書』 卷1, 序紀 1)
  (聖武皇帝諱詰汾. 獻帝命南移, 山谷高深, 九難八阻, 於是欲止. 有神獸, 其形似馬, 其聲類牛, 先行導引, 歷年乃出. 始居匈奴之故地.)

  후룬베이얼 초원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대해 나가던 탁발씨는 이후 3세기 초에 다시 서남 방면으로 이동하여 흉노 세력이 없어진 인산산맥[陰山山脈] 및 오르도스 부근까지 남하하였다. 옛 흉노제국의 중심지를 장악한 탁발선비는 곧 흉노를 비롯한 여러 유목세력들을 규합해나가며 강력한 유목군사국가로 변모하기 시작한다.

  처음 聖武帝는 일찍이 騎兵 수만을 이끌고 山·澤에서 사냥하다가, 홀연히 수레(輜輧)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수레가) 땅에 닿자, 아름다운 부인 (한명을) 보았는데, 그녀를 侍衛하는 것이 심히 성대하였다. 聖武帝가 기이하여 그녀에게 물으니, 대답하여 말하기를 “소녀는 天女이온데, 당신의 배필이 되라는 命을 받았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同寢하였다. 날이 새자, 돌아가기를 청하며 말하기를 “1년 후 내년에 이곳에서 다시 만나 뵙지요.”라고 하였다. 말이 끝나자 떠났는데, 바람이나 비와 같이 사라졌다. 1년이 지난 후, 황제는 전에 사냥하였던 곳으로 갔는데, 과연 (그 天女를) 다시 만났다. 天女가 자신이 낳은 남자아이를 황제에게 주며 말하기를, “이 아이는 당신의 아들이니, 잘 키우십시오. (그러면) 子孫 서로 계승하며 대대로 帝王의 자리를 누릴 것입니다.”라 하였는데, 말을 마친 후 떠나버렸다. 이 아이가 바로 (魏의) 始祖이다. 이 때문에 당시 사람들의 風說에 말하기를, “詰汾皇帝는 妻家(婦家)가 없고, 力微皇帝는 외가(舅家)가 없다.”고 하였다.  (『魏書』 卷1, 序紀 1)
  (初, 聖武帝嘗率數萬騎田於山澤, 欻見輜軿自天而下. 旣至, 見美婦人, 侍衛甚盛. 帝異而問之, 對曰, 我, 天女也, 受命相偶. 遂同寢宿. 旦, 請還曰, 明年周時, 復會此處. 言終而別, 去如風雨. 及期, 帝至先所田處, 果復相見. 天女以所生男授帝曰, 此君之子也, 善養視之. 子孫相承, 當世爲帝王. 語訖而去. 子卽始祖也. 故時人諺曰, 詰汾皇帝無婦家, 力微皇帝無舅家.)

  위에 보이는 것처럼 흉노 고지인 인산산맥 근방으로 이동한 탁발부의 수령 힐분과 천녀의 결합 이야기는 탁발부가 그 일대 흉노의 남은 무리를 흡수했다는 역사적 사실의 표현으로 이해된다. 또한 흔히 탁발부의 연원을 선비와 흉노의 결합에서 찾는 것도 이상의 사실과 연관된 것이다. 기원후 85년 선비ㆍ정령(丁零)ㆍ남흉노ㆍ서역 각국이 북흉노를 사방에서 공격함으로써 89~91년 사이 북흉노는 몽골고원에서 종적을 감추게 되었고, 당시 10여 만의 잔여 부락은 스스로 선비를 자처했다고 한다. 이들 세력과 이후 동북쪽으로부터 남하해 온 탁발부 사이의 결합이 이런 전설을 낳게 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결국 탁발부가 처음부터 선비에 속했던 것은 아닐 가능성이 높다. 다싱안링 남단으로부터 요서 일대에 걸쳐 거주하였던 이른바 ‘동부 선비’와 다싱안링 북쪽에서부터 남하해 온 탁발선비 간의 문화 차이는 극명하게 나타난다. 탁발선비의 발흥지라 할 수 있는 가셴둥 선비 석실이 발견되었음에도 이를 문헌기록의 ‘선비산’과 연결 짓고자 하는 견해가 좀처럼 힘을 얻지 못한 것도 바로 이러한 사정 때문이다. 결국 탁발부는 남하하는 과정에서 인근에 거주하는 무수한 선비 부락을 흡수ㆍ통합하였고, 그 과정에서 ‘선비’라는 명칭을 획득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 탁발힐분(拓跋詰汾)의 아들 탁발역미(拓跋力微, 220~277)의 시대로 내려오면 탁발씨의 수장이 각 부 대인(大人)을 호령하고 불복한 자는 바로 처단할 정도로 권력이 강고해진다. 즉 탁발부의 수장이 예하 부락들을 연맹적 관계가 아닌 종속적인 관계로 위치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재위 39년에 역미는 성락(盛樂, 네이멍구 자치구 후허하오터 부근)으로 거점을 옮기고 제천(祭天)을 거행하는 등 군주권을 강화시켜 나간다. 이처럼 역미 시대에 이르러 군주권을 확고히 다지는 한편, 나름의 지배체제를 갖추어나감으로써 국가 단계에 진입한 탁발선비는 이후로 백여 년 뒤 중원으로 진출하여 북중국을 통일하는 북위 왕조를 성립시키게 된다.

 
필진 : 관리자 | 등록일 : 2020-05-13 17:20:51 | 조회 : 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