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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학술동향]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와 옥저(2부) | 연구소


[단결-크로우노프카 주요 유적]
①나진 초도 ②회령 오동 ③범의구석 ④新安閭 ⑤安田 ⑥呀嘎 ⑦塼瓦厂 ⑧龍城 ⑨一松庭 ⑩大成子 ⑪團結 ⑫크로우노프카     ⑬올레니 ⑭말라야 포두쉐치카 ⑮불로치카 ⑯키에프카 ⑰페트로바 섬 ⑱노보고르데예프스코예 ⑲세미퍄트나야

 

               [연구소학술동향]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와 옥저 (2부)

                                                                                                            이종록(고려대학교 박사과정)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의 주인은 옥저인인가

  한중일 학계 중 가장 먼저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의 고고자료를 옥저에 비정한 것은 역시 지리적인 접근이 용이하였던 중국 학계였다. 중국에서는 연변 일대의 단결 문화를 사료상의 ‘옥저’와 동일시하는 관점이 학계에서 전통적으로 이어져 왔다. 과거에는 연구자에 따라 북옥저의 영역을 왕칭 현(汪淸縣) 일대로 한정하거나, 두만강유역의 일부 단결문화 유적만을 북옥저 문화로 보기도 했다. 또 광유(匡瑜)는 단결 문화의 분포권을 북쪽은 흥개호, 남으로는 두만강유역, 그리고 서쪽은 장광재령 동부로 비정하며 이를 북옥저와 등치시키는 등 해당 문화권과 옥저와의 상관관계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1985년 린윈(林澐)이 두만강 남쪽의 단결-크로우노브카 유적을 북옥저로, 그 이남 지역의 단결-크로우노브카 유적인 무산 호곡동과 오동 유적을 남옥저로 각각 비정하여 해당 문화를 ‘옥저’의 문화로 정의한 이래, 이 관점이 지금까지 중국 학계에서 여러 연구자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곧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를 옥저 그 자체로 본 결과인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러시아 학계에서도 이어지며, 곧 단결 크로우노프카 문화의 주체가 옥저인들이거나 적어도 그 일부를 옥저로 볼 수 있다는 관점이 지배적이 되었다.

  그런데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를 옥저로 보기 위해서는 여전히 해명이 필요한 문제가 많다. 이 문제들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기인하는데, 첫 번째로 옥저 혹은 남옥저가 함흥에 위치했다고 보는 문헌사학계의 통설을 함께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두 번째는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 자체의 편년 문제와 사료상의 옥저의 존속 기간의 차이점이다.

  먼저 첫 번째의 문제에 대해 살펴보자. 기존 학계, 특히 남한 학계에서는 ‘남옥저’의 위치를 함경남도 함흥으로 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문헌을 중심으로 옥저의 실체에 접근한 연구들은 전통적으로 옥저가 낙랑군의 영동 7현중 하나인 부조현(夫租縣)에서 기원하였으며, 부조현의 위치는 함흥으로 비정해 왔다. 곧 옥저 중 ‘남옥저’는 함흥이었으며, 두만강 유역의 ‘북옥저’와 함께 동옥저, 혹은 옥저를 이루고 있었다고 보았던 것이다. 함흥과, 같은 영동 7현의 화려현(華麗縣) 혹은 불이현(不而縣)이 위치했던 것으로 여겨지는 원산만 일대는 위만조선의 영향력이 간취되는 세형동검 등이 출토되고 있다. 이 지역에서는 이후 귀틀무덤과 같은 낙랑계 유적이 출토되어, 중국 군현의 영향력 또한 확인되고 있다. 이는 사료상에서 옥저가 고조선에 복속되었다가 이후 중국 군현으로 편입되었다는 기록과 일치하고 있다. 반면 현재까지의 조사로서는 함흥 일대에서는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의 흔적을 확인할 결정적인 고고학적 자료가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의 분포 범위만을 옥저와 동일시할 경우 함흥은 배제되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연구자에 따라서는 함흥=남옥저로 보는 통설과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를 절충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남옥저와 북옥저가 서로 다른 기층 문화를 가지고 있다고 보기도 한다. 곧 ‘옥저’가 남옥저, 북옥저라는 다른 명칭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양 자가 서로 별개의 문화를 가진 집단으로 이후 고구려와 같은 지배집단에 의해 옥저로 통칭되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이 관점은 과연 서로 별개의 문화를 가진 이질적인 종족집단을 굳이 ‘옥저’라는 단일 명칭으로 묶일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함흥에서 발견되는 유적, 유물군들에서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의 요소가 확인될 수 있다고 보거나, 본래 연변-연해주 등에 분포한 이들 문화집단이 한반도로 남하하는 과정에서 단서를 찾기도 하였다. 이들은 기원을 전후한 시기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는 연해주에서 폴체 문화로 인해 소멸한 반면, 해당 문화를 보유한 주민집단이 남하, 혹은 문화가 전파되어 이후 한반도 중도식 무문토기 문화의 기원이 되었다고 보았다. 그 결과 두만강 유역에서부터 함흥 일대의 주민들이 동일한 문화를 공유하였다고 보며, 곧 이들이 이 지역의 주민집단을 ‘옥저’라는 이름으로 통칭되는 배경이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도 함흥 지역에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가 전파되었는지의 여부가 분명하지 않다는 점, 그리고 옥저라는 이름이 왜 두만강 유역까지 포함한 집단 전체에 적용되었는지의 여부도 명료하게 설명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아직은 더 검토가 필요하다.

  두 번째로 ‘옥저’의 존속 기간의 문제이다.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는 기본적으로 편년 자체에 편차가 크지만, 옥저 문제와 관련해서 무엇보다도 문제가 되는 사항은 편년의 하한이다. 왜냐하면 논란이 되는 기간이 바로 사료상에서 옥저가 등장하는 시기에 걸쳐있기 때문이다. 『삼국지』 동이전에서 옥저, 북옥저의 존재가 명시된 시점은 기원후 3세기 중반이며, 『삼국지』의 기록에 따르면 위만조선의 시기에도 그 존재가 나타난다. 또 『삼국사기』에서는 기원전 1세기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대에 고구려가 북옥저를 정벌했다는 기록이나, 기원후 1세기 고구려 태조왕(太祖王)이 동옥저를 정벌했다는 기록 등이 있다. 이들을 모두 사실로 인정한다면 사료상 옥저의 존속 시기는 기원전 2세기 말부터 기원후 3세기가 된다.

  그런데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의 주요 유적은 대부분 기원을 전후한 시점에 소멸된 것으로 나타나, 편년이 일치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북한의 대표적인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 유적인 나진 초도, 회령 오동의 유적은 그 존속 시기가 기원전 3세기 이전으로 비정된다. 또 러시아 연해주 지역의 주요 크로우노프카 유적들은 비록 편년의 공백이 있긴 하지만 대부분 기원전 3세기 이전에 소멸되고 폴체 문화, 혹은 올가 문화로 대체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를 옥저 혹은 북옥저 어느 쪽으로 보더라도 사료상의 주요 존속 시기와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북한 학계에서는 가장 늦은 시기의 유적인 호곡 6기를 기원전 1세기 무렵까지 하한을 잡아, 중국의 오수전(五銖錢)이 출토되었다는 점과 더불어 북옥저와의 관계를 논한다. 또 연구자에 따라서는 크로우노프카 문화가 綏芬河 유역-두만강 유역에 기원후 2세기까지도 존속했다고 보며 사료상의 북옥저와 부합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실제 이 문화의 유적 중에서는 기원후 1세기 이후에도 존속했던 것으로 비정되는 유적도 있기 때문에, 사료상의 옥저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타 유적들의 편년이 대부분 기원 이전의 시기에 집중되어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3세기 무렵의 옥저와 이들 유적을 무리 없이 대입시키기에는 어려운 것이다.

  때문에 근래의 연구에서는 북옥저의 기층문화에 대해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보다는 기원후 1세기에 출현한 연해주의 폴체 문화, 혹은 올가(Olga) 문화에 주목하기도 한다. 이들은 폴체 문화에서 남하한 집단 중 연해주 일대의 크로우노프카 문화의 요소를 흡수하여 형성된 집단으로, 아무르 강 유역에 분포했던 폴체 문화와는 구별되었던 것으로 비정된다.  이 문화의 형성은 기원후 1세기 이후로 편년되며, 그 후 기원후 3~4세기까지 존속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 주장은 기존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에 매몰되었던 관점에서 벗어나, 사료상 옥저의 존속 시기에 대한 해명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다만 현재 학계에서는 폴체 문화를 이후 말갈로 이어지는 읍루, 숙신의 문화로 비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점이나, 함흥 일대의 옥저(남옥저)와 문화적으로의 연결성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지가 과제로 남는다.


연구는 이제 시작 단계

  지금까지 살펴본 관련 논의는 간략한 개설에 불과하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단지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와 옥저의 관계에 대해 결론을 내리기까지 신중할 필요가 있다는 점만을 말하고 싶다. 사실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가 아니더라도 현재까지 고고학 자료로 분류된 문화집단 중 사료상의 옥저와 완전한 정합성을 가진 집단은 찾을 수 없다. 또 옥저의 주 무대로 여겨지는 지역이 북한 영내이기 때문에, 자료 조사의 한계가 많은 점도 감안해야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상기한 문제점을 해결할 어떤 획기적인 고고학 자료의 등장을 기다리기 전에 오히려 기존 사료에 대한 접근 방식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다음 세 가지 문제를 감안하여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첫 번째로, 문헌을 중심으로 한 연구에서 ‘옥저’와 같은 사료상의 명칭에 대해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와 같은 특정 문화집단을 단선적으로 대입하지 않았는지 여부이다. 특히 중국의 일부 연구에서는 일단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를 옥저로 단정한 후, 관련 유물, 유적군에 대해 사료상의 ‘옥저’에 관한 정의에 맞춰 역으로 그 해석을 대입하는 경우도 있어 문제가 된다. 이러한 경향은 이론의 정당화를 위한 고고학 자료의 자의적인 해석 내지는 왜곡에 빠질 위험이 있는 것이다.

  두 번째로 옥저와 같이 자체적인 역사 기록은 물론이고 능동적인 활동조차 거의 나타나지 않는 집단에 관한 기록을 그대로 수용하여, 통일된 민족 집단으로 상정하는 것이 옳은 관점일지의 문제이다. 옥저에 관련된 모든 기록은 그 시작부터 이들이 중국 군현 혹은 고구려에 종속된 시점에서 서술된 것이기 때문에, 그 기록이 지배자로서 피지배자를 바라보는 주관이 강하게 개입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곧 ‘옥저’라는 명칭 자체가 이 지역 주민들이 스스로 칭한 이름인지의 여부조차 불분명한 것이다.

  세 번째로, 설령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가 옥저의 기층문화라고 해도 그것이 최소 3세기 가량 존속했을 ‘옥저’라는 명칭을 가진 집단이 일관되게 공유한 문화였을지의 문제이다. 기원을 전후한 약 3백 년에 걸친 이 기간은 사료상에서 위만조선의 멸망-군현 설치-고구려의 정벌 등 여러 가지 역동적인 사건이 발생하던 기간이었다. 곧 특정 시기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 혹은 다른 문화를 기저로 형성되었다고 해도, 옥저라고 칭해진 주민들 또한 다양한 문화 변동을 경험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여러 논란이 있지만, 그럼에도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에 관한 근래까지의 성과는 옥저뿐만이 아니라 여러 한국 고대사의 문화집단들에 대한 다양한 담론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특히 이들의 주 무대는 학계의 관심에서도 변방에 속해있었다는 점에서, 그간 연구가 결여되었던 집단의 실체를 밝히는 데에 많은 단서를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문헌을 중심으로 연구하는 입장에서도 향후 관련 연구의 성과가 기대되는 동시에, 그 자료를 취신하여 사용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재고해볼 필요성을 느끼는 이유이다.

 

 
필진 : 관리자 | 등록일 : 2020-04-28 21:55:42 | 조회 :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