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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학술동향]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와 옥저(1부) | 연구소


[크로우노프카 문화 불로치카 유적 출토 발류토기]
(국립문화재연구소 편, 2006 『한·러 공동발굴특별전 - 아무르·연해주의 신비』 수록)

              

              [연구소학술동향]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와 옥저 (1부)

                                                                                                            이종록(고려대학교 박사과정)

 

사료에서 나타나는 ‘옥저’

  옥저(沃沮)로 칭해지는 집단이 사료에서 처음 등장하는 기록은 『삼국지(三國志)』 동이전(東夷傳)이다. 여기에서 이들은 ‘동옥저(東沃沮)’라는 제목 하에 중국인들이 접한 동이(東夷)의 일원중 하나로서 입전되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옥저는 기원전 2세기 위만(衛滿)이 고조선의 왕권을 차지한 후 그가 정벌한 대상으로서 최초로 나타난다. 이후 이들은 한나라 군현의 일부로 편제되었는데 처음에는 현도군(玄菟郡)의 소속이었으나 곧 낙랑군(樂浪郡)의 소속으로 변경되었다. 그리고 옥저는 기원후 1세기 무렵 고구려에게 복속되며, 『삼국지』가 작성된 기원후 3세기 시점까지도 여전히 고구려의 지배를 받은 것으로 나타난다.

  이 시기 옥저는 남쪽의 함흥 일대를 중심으로 하는 ‘남옥저(혹은 동옥저)’와 두만강 유역의 ‘북옥저’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리고 기원후 3세기 말 모용씨(慕容氏)의 침략으로 인해 부여 국왕의 자제들이 옥저로 피난했다는 『진서(晉書)』의 기록을 마지막으로 사료상에서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그 외의 관련 사료는 『북사(北史)』 신라열전에 옥저에 남아 있던 고구려인들이 신라를 세웠다는 전승과 같은 간접적인 언급과, 기존 사료를 인용한 정보에 불과하다.

  이처럼 옥저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를 담은 사서는 사실상 『삼국지』 동이전과 이를 거의 그대로 옮긴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 동옥저조가 전부이며, 현재까지 관련 연구도 대부분 이들 기록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 옥저는 사서에서 등장하는 기간이 비교적 짧을 뿐만 아니라 『삼국지』의 “나라가 작아 큰 나라 사이에서 핍박받았다(國小迫于大國之間)”라는 기록처럼 주변 세력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소한 집단이었다. 때문에 옥저는 사료만으로 한정해서는 그 구체적인 실상을 추적하는 데에 한계가 많다.

  이런 이유로 인해 옥저에 대한 연구는 2000년대 초 이전까지 사료를 토대로 한 위치 비정 및 강역의 범위에 대한 검토에 머물거나, 이들을 지배한 집단의 연구에서 간접적으로 다뤄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는 조선 후기 정약용(丁若鏞)과 한치윤(韓致奫)과 같은 학자들에 의한 위치 비정의 전통에서 이어진다고 할 수 있는데, 정약용은 자신의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에서 동옥저에 관한 사료상의 자취를 추적하면서 그 연혁에서부터 구체적인 범위를 분석하였다. 또 한치윤은 자신의 『해동역사(海東繹史)』에서 『삼국지』부터 『통전』에 이르는 옥저 관련 사료들을 일괄적으로 검토하면서, 편목 마지막에서 옥저의 위치 비정을 시도하였다. 이 비정은 오늘날 국내 학계의 관점과 대체로 일치하고 있다.

  이처럼 관련 사료의 한계로 인해 옥저에 관한 연구는 주로 위치 비정, 혹은 남옥저, 동옥저, 북옥저 등의 용어 문제와 같은 기본적인 사항의 검토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사료의 한계가 많은 한국 고대사의 여러 분야가 그러한 것처럼, 옥저의 연구에서 고고학 자료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이러한 맥락에서 근대 이후 연구자들, 특히 2000년대 이후 연구에서 주목했던 대상은 러시아 연해주, 중국 연변 및 북한 함경도에 분포했던 단결(團結, 투안지에)-크로우노프카(Krounovska) 문화이다.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는 잘 알려진 대로 중국에서 조사한 단결 문화와, 러시아의 크로우노프카 문화가 통합된 용어이다. 본래 이들은 중국과 러시아에서 개별적으로 조사되어 서로 별개의 문화집단으로 추정되고 있었으나, 관련 자료와 연구의 증대로 인해 같은 문화로 비정되어 이와 같은 용어로 정착되었다. 이 문화에 대해 국내 학계의 관심은 접근성의 제한 문제로 비교적 최근에 형성되었으며, 2000년대 초에는 주로 한반도 중부 지역 중도식 토기문화와의 관련성을 중심으로 다루어져 왔다. 그리나 이후 자료의 접근성 증대와 중국, 러시아 등의 선행 연구에 대한 검토가 이루어진 이래 국내 연구에서도 옥저와의 관계성을 논하는 경우가 많아지게 된다.

  오늘날 학계에서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를 옥저, 혹은 그 일부로 여겨지는 북옥저와 연결시키는 것이 보편적인 시각이다. 그러나 이 문화에 관해서는 존속 시기나 그 뒤를 이어 등장한 폴체 문화와의 관계, 문화의 소멸과정과 같은 거대한 담론에서부터 지역별 유적의 편년에 이르기까지 합의되지 않은 사항이 많다. 이는 유물, 유적군 자체에 논란의 요소가 많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관련 유적의 조사 자체가 어렵다는 점도 그 원인 중 하나이다.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는 중국과 러시아, 북한 3국의 국경선에 걸친 지역에서 분포하고 있다. 이로 인해 유적마다 3국의 개별적인 조사 자료에 의존해야 하는 실정인데다, 각국 학계의 편년 기준 차이로 인해 그 성격을 정의하는 데에 합일점을 찾기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이 문화의 기본적인 성격에 대한 서술조차 쉽지 않은 형편이기에 여기에서는 가능한 관련 연구자들이 대체로 합의한 사항과, 옥저와 관련된 논의만을 간단히 요약하도록 한다.

  먼저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는 시기적으로 초기 철기시대에 해당했던 문화이며, 중국 흥개호(興凱湖, 한카 호) 유역과 연변 일대에서부터 러시아의 국경지대를 가로질러 남쪽으로 흐르는 수분하(綏芬河, 라즈돌나야 강)에서 러시아 연해주 아무르 만 연안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고 비정된다. 이 중 수분하 일대는 단결-크로우노프카 유적의 최대 분포지로서 2000년대 초반까지 약 110개소의 유적지가 확인되었다. 일부 해안 유적(러시아 페트로바 섬 등)과 연해주의 일부 유적을 제외하면 크로우노프카 유적은 주로 강가를 따라 존재했던 것이 특징이며, 특히 강의 입구에 위치한 하안 충적대지의 비탈 및 정상부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다.

  이 문화의 주민들은 대체로 농경활동에 용이한 곳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고 여겨지지만 연해주 남동부 해안가의 어업 관련 유물들처럼 지역에 따라 수렵·채집 및 어업의 흔적도 나타나고 있다. 농경은 취락지에서 조, 수수, 보리, 소밀 등이 출토되었으며 지역에 따라서는 양귀비 씨가 나오기도 하여(불로치카 유적) 이들도 재배했을 것으로 보인다. 주거 문화는 장방형의 수혈 주거지에서 생활하였는데, 가장 특징적인 요소는 벽을 따라 판석 혹은 점토와 혼합하여 만들어진 온돌이다. 이 온돌은 주거지 보온 외에도 제철 시설로도 사용되었다. 토기는 주로 무문의 갈색 토기로 마연된 그루터기형 손잡이가 달린 발과 외반구연호를 특징으로 하고 있다.

  이 문화집단이 번성하였던 시기인 기원전 1세기 이전에는 연해주 일대에서부터 중국 연변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걸쳐 분포하였다. 이후 이들은 북쪽에서 남하하던 폴체 문화와 접촉하게 되는데, 이들에게 축출 혹은 흡수되어 문화의 중심지는 점차 남쪽으로 이동하는 현상을 보인다. 그 결과 기원전 1세기 이후 呀嘎河-두만강 유역에서부터 연해주 남단이라는 지역에 동서로 넓게 분포되게 된다. 이들 주민집단은 연해주 남단의 해안가에도 거주하며 어업, 수렵 등의 새로운 생계경제를 영위하였으며, 일부는 폴체 문화를 흡수하기도 하여 새로운 문화집단(올가 문화)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크로우노프카 문화 불로치카 유적 출토 두형토기]
(국립문화재연구소 편, 2006 『한·러 공동발굴특별전 - 아무르·연해주의 신비』 수록)

  이와 같은 문화의 전반적인 성격과 변천은 연구자들이 대체로 동의하는 사항이다. 그러나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의 정확한 범주를 설정하는 문제는 각 연구간의 관점 차이가 크다. 보편적으로 이 문화의 권역은 북쪽은 흥개호, 남쪽은 두만강 남안을 넘어 함경북도 마천령산맥을 한계선으로 보는 경우가 많지만, 동쪽과 서쪽의 한계선에는 해당 지역의 유적군 비정에 따라 논란이 된다. 예를 들어 목단강 중류에 분포하는 동강(東康) 유형을 포함시키는가의 여부에 따라 그 범위가 크게 달라진다. 중국 학계에서는 동강 유형을 포함하여 장광재령(張廣才嶺) 이서지역까지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로 보는 경우도 있으나, 출토되는 토기의 상이성을 들어 부정하는 경우도 있다. 또 연구자에 따라서는 흥개호 부근 크로우노프카 문화 유적인 세미파트나야, 드보랸카3 유적 등을 크로우노프카 문화권으로 포함할 수 없다고 하여, 대부분의 논자가 이 지역을 해당 문화권의 시발점으로 보는 인식과 달리하고 있다.

  편년의 문제도 논란이 많다.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는 각 유적별 자료 조사의 상황이 상이할 뿐만 아니라 편년 또한 범위가 매우 넓다. 먼저 상한인 문화의 등장 시기는 연구자에 따라 차이가 극단적으로 큰 편으로, 유적의 절대연대를 근거로 기원전 9~8세기를 개시연대로 보는 연구가 있는가 하면, 중국계 출토 유물만을 근거로 하여 기원전 2세기로 편년하기도 한다. 뒤에서 이야기하겠지만 하한 또한 연구자들 간의 논란이 많기 때문에, 유적의 정확한 존속 시기를 설명하기는 어려운 문제가 있다.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그 지리적인 분포 상황이 대체로 두만강 유역-연해주 남단 등으로 비정된다는 점, 그 편년이 대개 기원전 4~1세기에 집중된다는 점을 감안하여 많은 연구자들은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와 옥저와의 관련성을 다루어 왔다. 나아가 연구자에 따라서는 이 문화 자체를 옥저로 등치시키기도 하여, 오늘날 옥저 문제를 다룰 경우 그 고고학 자료는 대부분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에서 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면 과연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의 주인은 사료에 등장하던 옥저의 주민들이었을까? 혹은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 그 자체를 ‘옥저’로 칭할 수 있을까?

 
필진 : 관리자 | 등록일 : 2020-04-28 21:45:34 | 조회 :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