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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학술동향] 1~3세기 중국 동북지역에서 전개된 담비가죽 교역 | 연구소


[동북지역 검은담비 주요 서식지와 고대 담비가죽 생산국] ⓒ이승호 논문

  본 연구는 1~3세기 중국 동북지역의 정세 변화를 주시하면서 해당 지역 모피 교역의 전개 양상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 것이다. 특히 당시 음루 담비[挹婁貂]로 상징되는 고대 동북지역 담비가죽 생산과 유통ㆍ교역에 주목함으로써 당시 동북지역 교역체계의 일단을 해명하고자 하였다. 본고에서 담비가죽을 주요 분석 대상으로 선정한 이유는 고대 동아시아 사회에서 담비가죽이 여러 모피 제품들 가운데서도 가장 최고급 재료로서 취급되었기 때문이다

  『삼국지』 동이전에는 부여의 지배층이 국외로 나갈 때 비단옷을 차려입고 그 위에 여우나 살쾡이 혹은 담비가죽[貂皮]으로 만든 옷을 덧입었으며, 금ㆍ은으로 모자를 장식하여 자신의 신분과 위세를 드러내었다고 전한다.

“나라를 나갈 때는 비단옷ㆍ수놓은 옷ㆍ모직 옷(繒繡錦罽)을 숭상하고, 大人은 여우ㆍ살쾡이ㆍ원숭이ㆍ희고 검은담비로 만든 가죽옷(狐狸狖白黑貂之裘)을 더하며, 금ㆍ은으로 모자를 장식하였다.” (『삼국지』 권30, 위서 30, 동이전 부여)

  여기서 부여 지배층이 입었다는 가죽옷, 즉 모피로 제작된 의복은 고대 동아시아 사회에서 지배층의 권위를 상징하는 사치품이자 위세품으로 애용되었다. 특히 부여와 고구려가 위치하였던 중국 동북지역을 둘러싼 유목지대와 삼림지대는 모피의 주요 생산처로서 이곳에서 생산된 모피는 중원 지역으로 유통ㆍ소비되기도 하였다. 비단 부여뿐만 아니라 고조선으로부터 발해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만주’ 지역 일대에서 번성하였던 세력은 모두 고대 동북아시아 모피 교역의 한 축을 담당해왔다. 고조선은 ‘문피(文皮)’ 교역을 통해 중원 세력과 교류를 이어나갔고, 발해가 당나라 및 일본과 교류를 할 때 ‘담비가죽’은 핵심 교역품 중 하나였다.

  연구에 따르면 이처럼 고대 동북지역에서 생산된 담비가죽은 담비 분포로 볼 때 검은단비(Sable, Martes zibellina)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이 검은담비는 유라시아대륙 아한대 지역에 널리 분포하는데, 추운 겨울에 적응하여 촘촘하고 부드러우며 광택 있는 가죽을 가지고 있어 주요한 모피 자원으로 활용되었다. 오늘날 중국 동북지역 검은담비 주요 서식지는 다싱안링(大興安嶺)과 샤오싱안링(小興安嶺) 산맥 및 백두산 일대이며, 한반도의 양강도ㆍ함경도 일대에도 서식하는데 이 지역이 검은담비 분포의 남방 한계가 된다.

[검은 담비] ⓒ위키백과

  기록을 통해 1~3세기 고대 동북지역에서 담비가죽을 생산하거나 혹은 중원 국가에 제공한 사실이 확인되는 세력은 크게 세 집단으로 구분된다. 첫째, 오환(烏桓)ㆍ선비(鮮卑) 등 동북방 유목세력이다. 둘째, 읍루로 대변되는 동북방 삼림수렵세력이다. 셋째, 정주세력으로서 부여와 고구려 및 요동(遼東) 공손씨(公孫氏) 세력 또한 동북지역 담비가죽의 생산과 유통에 관계하고 있었다.

  부여의 경우 담비가죽이 특산품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으며, 고구려 및 공손씨의 경우는 모두 담비가죽을 조공품으로 활용한 사실이 확인된다. 부여나 고구려, 공손씨의 경우는 이를 자체적으로 획득하였다기 보다는 주변 유목ㆍ수렵 세력으로부터 담비가죽을 확보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부여는 1~3세기 초까지 읍루를 신속(臣屬)시키고 이들이 생산한 담비가죽[挹婁貂]을 중원 지역으로 유통하는 중계교역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이와 같은 부여의 교역방식은 황초(黃初) 연간(220~226)을 기점으로 쇠퇴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 주된 요인은 고구려의 성장과 읍루의 이탈ㆍ자립이었다.

[부여의 담비가죽 중계교역] ⓒ이승호 논문

  2세기 초 고구려가 두만강 하류 유역을 확보하고 북옥저 방면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가면서 해당 지역에서 부여의 영향력을 일소해나갔고, 자체적으로 정치적 결집을 이루어 나가던 읍루 또한 3세기 초에 부여의 세력권으로부터 이탈하면서 당시까지 부여가 장악하고 있던 담비가죽 교역망은 쇠퇴하게 되었다. 이후 동북지역의 담비가죽 유통망과 교역의 주도권은 부여를 대신하여 고구려가 차지하였다.

  고구려는 233년에 손오(孫吳)와 교섭 과정에서 고구려는 1천 매에 달하는 담비가죽을 보내기도 하였는데, 이는 당시 고구려가 장악하고 있던 담비가죽 유통망의 규모를 짐작케 한다. 이때 고구려는 - 아마도 연해주 읍루係 집단으로 추정되는 - ‘숙신’ 세력을 부용시키고 이들의 대외교섭을 간섭ㆍ통제하였는데, 이러한 ‘숙신’과 고구려의 관계는 4~5세기에 걸쳐 지속되었음이 기록을 통해 확인된다. 이러한 양자의 관계를 바탕으로 고구려는 3세기 초까지 부여가 수행하였던 ‘읍루 담비[挹婁貂]’의 중계교역을 대신할 수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 글은 본 연구소의 이승호 연구원(학술연구교수)이 2019년 12월에 발표한 아래의 논문을 바탕으로 작성된 것임. 자세한 내용은 아래의 논문을 참고 바람.

출처: 이승호 「1~3세기 중국 동북지역 정세 변화와 貂皮 교역」 (『동국사학』 67집)

 
필진 : 관리자 | 등록일 : 2020-04-03 17:38:05 | 조회 : 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