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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814_한겨레21_[진짜고대사]가짜가 내세우는 '가짜'프레임
ㆍ글쓴이 : 관리자   ㆍ조회 : 913  
ㆍ등록일 : 2017-08-16 20:07:58  ㆍIP : 27.115.169.226

한겨레21_2017년 08월 14일 기사

[진짜고대사] 가짜가 내세우는 '가짜'프레임

2600기 무덤, 1만5천여 점 유물 등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물증을
무조건 가짜이고 조작이라 말하는 사이비역사가들의 망상

북한은 평양 ‘단군릉’에서 출토된 사람 뼈에 대해 역사 유물 연대 측정에 일반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전자 상자성 공명법’이라는 방식을 적용해 기원전 3000년께 조성된 단군의 무덤이 확실하다고 발표했다. 평양은 갑자기 ‘고대 문명의 발상지’가 됐다. 사이비역사가들이 필요에 따라 이용하는 북한의 연구 성과라는 것은 이처럼 보편적 학문의 틀에서 벗어난 상태이다. 사진은 단군릉 전경. 한겨레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이 지금의 평양이며, 고조선 멸망 뒤 세워진 낙랑군의 위치 역시 평양 일대라는 것은 아직 낙랑군이 존속하던 3세기에 저술된 중국 역사서 <삼국지>와 약간 뒷시기에 저술된 <후한서> 등의 기록(제1174호 진짜고대사 ③ ‘낙랑군은 평양에 있었다’ 참조)을 통해 명확히 확인된다. 여기에 오랜 기간 쌓인 고고학계의 연구 성과까지 더해지면, 낙랑군 위치를 평양 일대로 비정하는 일은 학술적으로 사실상 논란의 여지가 없다. 평양 일대에서 무수히 출토되는 낙랑군의 유적과 유물은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결정적 증거, 즉 ‘스모킹건’이다.

 

고분이 중국 포로들 거라고?

하지만 사이비역사가들은 물증이랄 수 있는 고고학 유물의 존재를 왜곡 또는 무시하면서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정설을 무조건 ‘식민사학’ ‘매국사학’으로 매도한다. ‘진짜고대사 ④’에서는 일제강점기뿐만 아니라 해방 이후에도 평양 일대에서 지속적으로 발굴되는 낙랑군의 유적과 유물을 살피고, 더불어 사이비역사가들이 고고학 자료를 대하는 비상식적이고 억지스러운 태도도 짚어보려 한다.

평양 지역에서 출토된 낙랑 유물 중에 문자가 적힌 것이 적지 않다. 예컨대 ‘낙랑예관’(樂浪禮官), ‘낙랑부귀’(樂琅富貴) 같이 ‘대놓고’ 자기 소속을 밝힌 막새기와가 있다. 막새기와는 기와 건물의 지붕 끝에 설치하는 마감용 기와다. 장식적 기능이 있어 다양한 문양이나 글자를 새겨놓곤 했다. 또 낙랑군에 속하는 25개 현 중 23개 현의 이름이 확인되는 봉니((封泥)도 수백 개 발견됐다. 봉니는 문서나 귀중품을 상지에 넣고 끈으로 묶은 다음 매듭에 진흙을 붙인 뒤 도장을 눌러 봉한 것을 말한다. 봉니에 대해서는 일제강점기부터 위조설 시비가 일었지만 이후 연구를 통하여 일부를 제외한 대다수의 봉니는 진품으로 볼 수 있음이 확인됐다.

낙랑군의 위치가 평양임을 입증하는 무덤 유적은 더욱 압도적이다. 북한 학계는 1990년대 도시 개발 과정에서 평양시 낙랑구역(구역은 서울의 ‘구’ 개념으로, 평양시 18구역 가운데 한 곳이 ‘낙랑구역’이다) 안에서만 2600여 기에 달하는 무덤을 발굴했고, 유물 1만5천여 점을 수습했다. 무덤 유형은 주로 덧널무덤(목곽묘·북한에서는 이를 형태에 따라 나무곽무덤과 귀틀무덤으로 다시 분류하기도 한다)과 벽돌무덤으로, 비슷한 시기 중국에서도 같은 양식의 무덤이 만들어졌다. 이들 무덤 안에서는 ‘중국제’ 유물이 쏟아져나왔다. 대표적 유물로 칠기(漆器)가 있다. 칠기는 나무에 옻을 칠한 물건이다. 칠기는 한나라에서 중요한 신분인 이들의 무덤에 묻히던 부장품 중 하나였다. 칠기 1점 가격이 청동 술잔 10개의 값어치에 해당할 정도로 고가품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산더미처럼 쌓인 ‘물증’이 있는데도 ‘낙랑군은 평양에 없었다’고 주장하는 사이비역사가들의 용기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바로 ‘가짜’와 ‘조작’이라는 프레임이다. 사이비역사가들은 이 유적·유물이 낙랑군과 상관없다고 애써 우기거나 조작된 가짜에 불과하다고 몰아붙인다. 예컨대 사이비역사에 경도된 역사저술가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은 평양 지역에 존재하는 거대한 낙랑 고분군에 대해 고구려에서 잡아온 중국계 포로들의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이덕일 소장의 주장에 대해 팩트체크를 해보자. 평양 지역 덧널무덤에서 출토된 칠기 중 제작 연대가 적힌 것만 수십 점에 달한다. 이를 통해 무덤이 조성된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있다. 칠기 중 제작 시기가 이른 것은 낙랑군이 설치된 기원전 108년으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기원전 85년의 것이며, 다른 것들도 대개 기원 전후 시기가 적혀 있다. 기원전 85년은 <삼국사기>에 따른 고구려 건국(기원전 37년) 연도보다 50여 년 전이다. 이덕일 소장의 주장을 그대로 따르자면 아직 건국조차 하지 않은 고구려가 이 시기에 이미 평양 일대까지 영역화했고, 수만 명의 중국인 포로를 잡아다 정착시킨 셈이다.

 

기사의 전문은 아래의 링크를 통해 확인해주십시오.


[출처 : 한겨레21에서 제공하는 기사입니다.]

링크 :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402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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